작성일 : 2016. 1. 26. 20:00
▲오세창이 3. 1운동 때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을 한 이유로 옥고를
치른 직후 중국 고대 상나라 때 청동기 전서글씨를 임서한 것임.
오세창은 1921년 11월 가출옥 이후 그는 더욱 서화의 세계에 빠졌다. 나이는 어느덧 육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직접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보다는 서화협회 활동과 저술 작업, 고증학에 입각한 작품 제작에 전념하는 한편 예술후원 활동에 전념했다.
스스로를 조충(雕蟲;새김벌레)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전각(나무 돌 등에 인장을 새기는 일)에도 몰두했다.
활발한 서화수집 활동은 신문에도 소개가 될 정도였다.
“근래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 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여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씨는 10여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음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네. 그중 11125점은 글씨요, 105점은 그림이다.”
(1915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
오세창의 서화 수장활동은 일제하에 수탈되는 우리문화재를 지켜내야 하겠다는 보존의식의 발로였던 것이다.
당시 몽매한 국민들은 몇 푼 이익을 보고 귀한 서책이며 도자기 등, 옛 유물을 넘겨버리던 시절이었다.
대한매일신보(1909년 9월 1일자)가 이 같은 행위를 지탄하면서 나라 팔아먹는 놈이나 마찬가지라고 꾸짖기도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