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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할리우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충무로가 있다. 한국 영화의 메카, 충무로는 정확히 어디를 말하나. 남북(南北) 방향으로는 명동 세종호텔과 중앙시네마 옆을 지나는 삼일고가도로에서부터 돈화문로(매일경제 구관 앞길)에 이르는 구간, 동서(東西) 방향으로는 퇴계로와 마른내길이 만나는 직사각형 구간을 영화인들은 충무로라 부른다. 건물을 중심으로 말하면 극동빌딩·쌍용빌딩·명보극장·매일경제신문사 네 개의 꼭지점이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성인 걸음으로 20분이면 한 바퀴를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영화의 메카 충무로 얘기를 할 때 빼놓아서는 안되는 길은 돈화문로와 수표다리4길이다. 청계천로에서 시작된 수표다리길은 남쪽으로 극동빌딩까지 이어지면서 양 옆으로 수표다리1~6길을 파생시킨다. 수표다리4길에는 1960~1970년대 수많은 영화사, 다방, 배우ㆍ가수 학원, 여관, 식당 등이 밀집해 있었다.
충무로 상징 건물인 극동빌딩 옆길은 ‘은막길’이다. 흰빛의 영사막을 뜻하는 은막(銀幕)…. 1960~1970년대 충무로를 주름잡았던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을 가리켜 사람들은 ‘은막의 여왕’이라 부르곤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은막의 여왕’하는 표현은 구식(舊式)이 되어버린 감이 있다. 필름대리점, 출력소, 현상소, 인쇄소, 슬라이드 대여점, 기획실 등이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몰려있는 것은 충무로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충무로에는 영화와 얽힌 유명한 다방이 몇 곳 있었다. 스타다방, 초원다방, 벤허다방(수표다리4길), 폭포수다방, 청맥다방(돈화문로) 등이 그것이다.
연기자들 집합장소였던 ‘스타다방’
1960년대 스타다방은 조연, 단역, 엑스트라 연기자들의 집합소이자 연락 사무소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로 돌아가보자. 조감독이 스타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는 담배연기로 자욱하다. 20개 테이블의 나무의자 여기저기에 최봉, 김칠성, 장혁, 양택조, 남포동 등의 얼굴이 하릴없이 다방에 죽치고 앉아있는 ‘죽돌이’ 무리 속에 보인다. 조감독이 들어오자 일제히 배우들의 시선이 조감독에게 모아진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거나 일어나 조감독에게 아는 체를 한다. 조감독은 다방 안을 쭉 훑어보면서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내뿜은 뒤 입을 열었다.
“어이, 거기 다섯 사람 내일 새벽 4시에 황소집 네거리로 나와!”
순간 배우들의 얼굴에 화색(和色)이 돈다.
1962년에 문을 연 폭포수다방에 들어가면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 출연한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 장동휘, 박노식, 장혁, 최승희 등 이른바 ‘이만희 사단’의 연락 사무소가 폭포수다방이었다. 이만희 사단이 이 다방을 자주 이용한 까닭은 이 감독이 소속돼 있던 대원영화사가 대한극장 건너편에 위치해 폭포수다방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청맥(靑麥)다방은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이 주로 모이는 장소였다. 작가 사무실이 있을 리 없던 시절, 시나리오 작가들은 근처 여관이나 청맥다방에서 원고를 썼다. 다방 마담은 영화사 사장이나 조감독의 전화 메모를 받아주고 약속 장소를 전해주는 등 사실상 비서 역할을 했다. 청맥다방은 원래 수표다리4길 스타다방 옆에 있다가 1986년 돈화문로로 옮긴 후 1993년 문을 닫았다. 그밖에 벤허다방은 영화감독, 초원다방은 제작자와 감독이 자주 이용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극동빌딩 지하 극동커피숍은 영화기획자들과 지방 극장주들의 약속 장소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1970년대 충무로에는 대원호텔(현 대원빌딩), 아스토리아호텔, 라이온스호텔(현 라이온스빌딩) 3개의 호텔이 있었다. 조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와 배우들이 주로다방을 이용했다면 유명 영화감독들은 주로 호텔 커피숍에서 제작자나 배우를 만났다. 라이온스호텔은 유현목 감독을 위시한 1세대 감독들이 주로 이용했다.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은 2세대 영화감독들의 명소였다. ‘겨울여자’의 김호선 감독은 영화 ‘애니깽’을 만들 때 아스토리아호텔 객실을 장기간 빌려 사용하기도 했다. 대원호텔은 대원오피스텔로 바뀌었는데 영화배우 신성일(현 국회의원)씨가 만든 영화사가 이 곳에 있었다.
‘동신여관’에서 만들어진 ‘천일야화’
충무로에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곳이 동신여관이었다. ‘동신여관에 투숙하지 않은 사람은 영화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신여관은 영화인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 여관에 방을 잡고 글을 썼으며 다음날 청맥다방으로 원고를 들고 나갔다. 시나리오 작가 윤석주·나대로씨가 이 동신여관에서 작업을 하다 과로로 숨졌다. 일부 유명 여자배우들은 은밀히 동신여관에서 감독을 만나고 새벽녘에 돌아가곤 했다. 밤마다 ‘천일야화(千日夜話)’가 만들어졌다.
특히 동신여관은 아침밥이 맛있기로 유명해서 군산상고와 경남고 야구팀이 전국대회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오면 반드시 묵었던 여관이다. 군산상고는 동신여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19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 부산상고를 극적으로 이겨 ‘역전의 명수’라는 신화(神話)를 창조했다. 동신여관은 중부소방서 충무로파출소 옆골목에 있었는데, 지금은 해봉빌딩으로 바뀌어 영화배급사들이 들어 있다.
1986년은 충무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우리나라는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면서 영화사법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다. 이렇게 되자 영화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20개이던 영화사가 1986년 한 해 130개로 늘었고, 이 중 100개 이상이 충무로에 몰려 있었다. 현재 등록된 영화사는 1000여개에 이른다. 충무로에는 수많은 영화사가 소리없이 등장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지곤 했다. 작은 영화사들은 사장, 경리직원, 제작부장, 운전기사 등 3~5명이 전부였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영화시장의 80% 이상을 외화가 장악했다. 영화사들은 외화 수입으로 돈을 벌고 여기서 번 돈으로 한국 영화를 제작하곤 했다. 영화사 사장은 영화 제작이 결정되면 충무로에 넘쳐나는 영화배우와 영화인들 사이에서 감독·주연배우 등을 물색, 각각 계약을 한 뒤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거액을 투자해 만든 영화가 며칠 만에 간판이 내려져 망하게 되면 야반도주하는 일도 흔했다. 그래서 충무로의 빌딩주들은 한때 영화사가 입주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곤 했다.
1990년대에 비교하면 많은 영화사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충무로를 떠났지만 2003년 현재 충무로는 여전히 충무로다. 충무로의 대형빌딩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영화사가 몇개씩은 들어 있다. 동화빌딩 혜성빌딩 영한빌딩 흥국빌딩 등에 크고 작은 영화사들이 들어있다. 충무로에 터잡고 있는 영화사들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곳이 강우석 감독의 씨네마 서비스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잡지 ‘필름 2.0’에 의해 충무로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씨네마 서비스는 영화인들 사이에 속칭 ‘코끼리빌딩’으로 불리는 흥국빌딩의 4~5층을 쓰고 있다. 흥국빌딩 내에는 씨네마 서비스 외에도 요즘 한창 뜨는 영화사들이 세들어 있다. 감독의 집(대표 김상진), 필름 매니아(대표 지미향), 씨네 2000(대표 이춘연), 한맥영화(대표 김형준), 좋은 영화(대표 김미희)가 그것이다. 감독의 집에서 2002년 하반기 최대 히트작 ‘광복절 특사’, 씨네 2000에서 ‘중독’, 좋은 영화에서 ‘신라의 달밤’을 각각 제작했다. 흥국빌딩 앞에는 ‘영화촬영’이라는 아크릴 안내판을 운전석 앞에 끼운 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극동빌딩 뒤편의 영한빌딩에는 ‘달마야 놀자’를 제작한 영화사 씨네월드(대표 이준익)가 있다.
영화홍보회사 올댓씨네마(All THAT CINEMA) 대표 채윤희씨는 여성 영화인의 대모(代母)로 불린다. 채윤희 대표는 1986년 라이온스 빌딩에 있던 양전흥업 기획실 직원으로 충무로에서 영화밥을 먹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충무로에는 채윤희씨와 같은 영상세대의 젊은 인재들이 대거 영화의 꿈을 좇아 뛰어들었다. 1990년대 초반 충무로에는 ‘영화사기획실모임’이라는 게 있었다. 이 모임에는 채윤희, 심재명, 이춘연, 노종윤, 지미향, 윤명오, 소병무, 안동규 등 젊은 기획실 직원 30여명이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매년 ‘올해의 기획자’를 선정하곤 했다. 채윤희 대표는 1991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올해의 기획자로 선정되었다. 이들은 삼겹살 집 삼우정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베어가든으로 2차를 가곤 했다. 베어가든은 젊은 기획자들에게 1990년대의 ‘스타다방’이었다. 당시 기획실 직원으로 다리가 붓도록 다리품을 팔며 갖은 고생을 했던 이들은 영화사, 영화홍보회사 등을 차리면서 한국 영화 르네상스시대를 열었다.
돈화문로 대원빌딩 맞은편 골목 안에는 한식당 황소집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보은집이 나온다. 1980년대 여름철 새벽마다 이 골목은 사람들로 왁자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보은집과 맞은편에 있던 장호집(현재 없어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벽밥을 먹고 부르릉거리는 영화 촬영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6시에 충무로를 출발한 영화 촬영 버스는 그 다음날 새벽 비슷한 시각에 파김치가 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부려놓곤 했다. 영화 촬영으로 인해 충무로의 식당, 다방, 여관은 24시간 영업을 했다. 몇몇 영화사들이 충무로를 떠난 요즘 이런 새벽 풍경을 흔히 볼 수 없게 됐다.
“한국 영화사를 대변하는 스카라극장”
영화연구가 정종화(鄭宗和ㆍ61)씨는 충무로의 ‘걸어다니는 영화 사전’으로 불린다. 정종화씨는 1962년 영화 잡지 기자로 충무로와 인연을 맺은 뒤 영화사, 잡지사 등을 거치며 40년 간 영화 관계 일을 해왔다. 그는 망한 영화사나 문을 닫는 극장을 찾아가 쓰레기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포스터·전단·극장표 등을 수집, 소장해왔다. 현재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는 2만여점. 정종화씨는 우리나라에서 영화 포스터, 극장표, 영화 전단, 영화 잡지 창간호 등을 가장 많이 보관하고 있어 그의 집은 영화박물관이나 다름없다.
그에게 한국 영화든 외국 영화든 영화 제목만 대면 그 영화와 관련된 사실들이 누에고치에서 실이 뽑혀져 나오듯 줄줄줄 나온다. 매주 화~목요일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스카라(scala)극장 맞은편의 파티레스토랑에 가면 정씨를 만날 수 있다. 정씨는 스카라극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올드 영화 매니아들과 영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정씨에 따르면 스카라극장은 1936년 처음 약초(若草)극장으로 문을 열었고 나중에 수도극장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재개관 작품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스카라극장 같은 영화관은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스카라는 극장사, 영화사, 충무로사를 대변하는 건축물입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고풍스러운 스카라극장을 보는 이유는 스카라극장만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극장 문은 닫더라도 영화박물관이나 고전 전문 영화관으로 전용(轉用)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충무로의 유명한 맛집은 전부 한식집이고 싸고 맛있는 게 특징이다. 충무로역 8번 출구에 자리하고 있는 대림정은 4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다. 돈화문로의 한식당 진고개(珍古介)도 충무로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해왔다. 앞서 소개한 보은집과 황소집은 촬영 떠나는 영화인들에게 따뜻한 새벽밥을 지어주던 곳이다. 보은집 여사장은 “과거보다는 줄었지만 영화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온다”고 말한다. 충무로 3가길에 있는 충무로돼지갈비는 일본인이 특히 많이 찾는다. 은막길은 충무로3가길과 교차하면서 5거리를 만드는데, 이곳에는 찌그러진 냄비에 칼국수를 끓여 내놓는 칠갑산칼국수가 있다. 강우석 감독 등이 즐겨 찾는다.
영화의 거리 충무로의 또다른 즐거움은 ‘한국의 집’과 ‘남산 한옥마을’이 이웃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무로역에서 한옥마을(옛 수도방위사령부)로 가는 길에 중앙대 부속병원이 있고 그 옆길로 조금 올라가면 ‘한국의 집’이 있다. 현재 ‘한국의 집’에서는 전통한식당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전통민속공연, 전통혼례 재연, 전통문화상품 전시 판매를 하고 있다. ‘한국의 집’에 들어가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로비격인 해린관(海館)과 그 안쪽에 있는 전통 한옥 환벽루와 마당이 조화가 되어 뿜어내는 분위기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서양 건축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정밀(靜謐)의 아름다움이다.
한국의 집은 조선시대 박팽년의 사저였다. 이 집 북쪽 모퉁이에 일제 중엽까지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옛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육신송(六臣松)이라 불렀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저항하다 처참하게 죽은 사육신(死六臣) 박팽년이 이 집에 살면서 손수 심었던 나무이기 때문이다. 박팽년의 집은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는 한때 영빈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70년대 배우 윤정희와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이곳에서 결혼했다. 한국의 집은 한옥마을과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퇴계로는 시원하게 변신 중이다. 대한극장은 초현대식 복합상영관으로 바뀌었고 매일경제신문사는 새사옥을 지었으며 샘표식품은 42년만에 충무로에 컴백해 본사를 매경 사옥에 두기로 했다.
1969년 현인이 불렀던 ‘서울야곡’에서는 충무로를 이렇게 노래한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쇼윈도 그라스에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 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샛별 같이
십자성 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내맘 같이
그대 맘 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 거리에/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 코트 깃을 올리며 오늘 밤도 울어야 하는/베가본드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글- 조성관- 주간조선
첫댓글 한편의 드라마같은 추억의 시나리오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