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유족을 생각한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처장 채 내 희
1. 안중근의사 외손녀의 고국 방문
지난 10월 17일부터 11월 1일 사이 미국에 거주하는 안중근의사 외손녀 황은실(黃恩實)여사가 고국을 방문하셨다.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주관하는 103주년 ‘안중근의사의거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 미국에서 오신 것이다. 여사님의 어머니가 바로 안중근의사의 딸이며, 외할머니가 안중근의사의 부인 김아려(金亞麗)님이다. 황은실여사는 14살 때까지 안의사의 부인인 외할머니와 같이 사신 분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안중근의사는 언제나 까마득한 신화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과 14년이나 같이 산 외손녀가 이렇게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다니. 역사는 의외로 가깝게 존재하고 있었다.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황여사님은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정을 보내셨다. 의거 기념식에 참석한 이외에 대구 카톨릭대학교 초청으로 대구지역를 방문하고 제3기「안중근아카데미」수강생들과 함께 4박5일 동안 안의사 유적지인 하얼빈과 여순을 다녀왔으며, 이기웅(李起雄)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열화당 대표)의 초청으로 파주 출판문화단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황여사님은 가는 곳마다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대구에서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를 방문하고, 대학생들과 간담회를 가졌으며, 중국지역 사적지 순방시에는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비롯한 많은 방문기관의 책임자들이 직접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고 차를 대접하는 등 환영을 해주었다. 파주 출판단지에서는 이기웅이사장의 정중한 안내로 단지 내 각종 시설을 둘러보고 국내 저명한 출판인들과 오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기웅이사장은 1980년대 파주 출판단지 건설을 총괄하면서 안중근의사 흉상을 회관 로비에 모셔놓고 안의사님을 정신적 감리(監理)로 삼아 그 광대한 건설사업을 추진할 정도로 안의사를 숭모하는 분이다.
안의사님의 외손녀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정중한 예우는 안의사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분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직계유족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2. 의거 이후 가족들의 삶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이후 1910년 10월 경 그의 어머니와 처, 자녀, 형제(정근,공근)들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처음 꼬르지포의 조선인마을에서 조그만 농장을 경영하던 가족들은 1914년 니콜리스크로 이전하여 본격적으로 상업활동과 농장운영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점차 일본의 영향력이 그곳까지 확대되어 오자 1920년경 상해로 거처를 옮겨 각기 역할에 맞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돕다가 1927년 7월 상해에서 사망하였고, 부인 김아려여사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오는 망명인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활동을 해 오다가 1946년 사망하였다. 정근과 공근 두 동생도 상해 임시정부 요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정근은 1949년 지병으로 사망하고, 공근은 1939년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황해도 지역의 양반이며 부호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던 가족들은 안중근의사의 의거로 인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아주 험하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아들 안준생씨에 관한 일이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상해가 일본에 점령되자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대피했지만 안중근의사의 부인 등 가족들은 일제 치하에 그대로 남게 된다. 김구주석은 ‘집안에 불이 나면 신주단지부터 챙기는 게 양반의 도리인데 민족의 영웅인 안의사의 가족을 모셔오지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통탄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김구선생의 가족은 임정과 함께 중경으로 안전하게 피난하였고 안중근의사의 가족은 적지에 고스란히 남겨진 것이다.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의 치하에서 어린 아들 준생이 그들의 협박과 회유를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상되는 일이다. 1939년 10월 일제의 손에 이끌려 남산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한 준생씨는 상해로 돌아가 조국이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은둔에 가까운 세월을 보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안중근의사의 유족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광복은 살아남은 자들의 축제였다. 부인 김아려여사는 일반 교민들에 섞여 귀국선의 차례를 기다리다가 1946년 상해에서 사망하였고, 아들 준생씨는 상해와 홍콩을 오가며 겉돌다가 1952년 부산의 한 외국군 병원선에서 절명한다.
안중근의사의 손자 안웅호(安雄浩), 증손자 안도용(安度勇), 외손녀인 황은주(黃恩珠), 황은실(黃恩實) 등 안의사의 직계 손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투사 안중근의사의 자손들은 이렇게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진 채 국민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영웅인 조부와 본의 아니게 일제에 이용당한 아버지 사이에서 그 자손들이 겪어야 했던 정신적 갈등과 자괴감은 얼마나 컸을까?
감히 단언컨대 그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안중근의사를 보는 잣대로 그 자손들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안중근의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영웅의 가족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그 상처와 아픔도 우리 모두 따뜻이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3. 우리의 과제
20대 초반 독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평생을 살다 80을 넘긴 고령으로 고국을 찾은 황여사님의 방한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광복 이후 행하여 왔던 많은 안중근의사 기념사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외손녀 황은실여사의 고국방문을 계기로 다음 두가지 과제를 생각해 본다.
그 하나는 안중근의사의 유족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80을 넘기신 고령임에도 황여사님은 어머니 안현생에 관해서는 물론 외할머니(김아려여사)와 외삼촌(준생씨)를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다. 같이 미국에 거주하는 언니 황은주 여사는 외할머니와 더 많은 세월을 살았으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안의사의 아들인 준생씨에 대해서도 손자인 안웅호 선생만큼 잘 아는 분은 없을 것이다. 안중근의사 연구에 있어 이분들이야 말로 보물과 같으신 분들이며, 더 늦기 전에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련학자들을 선정하여 질문 항목을 만들고 유족들의 증언을 녹취 정리하여 기념관에 비치함으로써 향후 안중근의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게 자료로 제공하여야 한다.
또 하나는 안중근의사이 후손들을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개인의 삶의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어 조심스러운 문제이기는 하나 안중근의사에 대한 국민적 애정과 괌심을 감안할 때 후손들도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공인(公人)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온 국민의 따뜻한 환영속에 의사님의 후손들이 한국에 영주귀국해서 이웃과 함께 웃으며 살 때 안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 우리 국민들이 안중근의사의 희생과 위업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