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어린이대공원
- 강 문 석 -
시월 마지막 주말의 오후, 하늘은 드높고 청명했다. 이제 곧 꼬리를 감추게 될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린이공원이었지만 탐방객은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찾은 이들로부터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도 무리로 보였다. 중증을 앓는 환자가 재활을 위해 걷는 이도 눈에 띄고 아기는 짐짝처럼 등에다 업고 강아지를 품에 안은 젊은 아빠는 혼돈의 세태를 보여주는 듯하다.
공원에서는 슈트차림에 트렌치코트까지 걸친 복장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까운 위치의 동래정씨회관 행사에 참석하느라 꾸민 복장인지라 신발마저도 불편했다. 난 오래 전 이 공원 가까운 곳에 살았다. 그래서 이곳은 나만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공원은 세 개의 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공해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때깔이 고운 단풍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국토의 남단이다 보니 일교차가 크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수목의 종에 따라선 아직도 한여름의 푸르던 잎을 그대로 간직한 것도 보인다. 공평하지 못한 인간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공원에서 불과 삼백여 미터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바지에다 스물다섯 평짜리 슬래브 집을 앉혔던 1970년대 초반. 야산을 밀어 신흥주택가를 만든 작은 동네에서 만난 이웃들은 금세 친해졌다. 당시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중반의 젊음들이었는데도 체력단련으로 공원을 지나 백양산 중턱까지 야간산행을 고집한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부부가 캄캄한 밤에 무모하게 단체로 산을 오른 기억도 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그땐 공원의 명칭이 성지곡유원지였다. 조선시대의 유명한 풍수가인 '성지'지관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 주유하던 중 경상도에서 가장 빼어난 골짜기를 발견하여 철장을 꽂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상수도용 수원지로 만들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대로 현존하는 제방은 높이가 27미터에 길이는 112미터인 철근콘크리트 중력댐이다.
댐을 착공할 당시의 부산 인구는 사만 명도 채 안 되었지만, 삼십만 명까지 늘어날 것을 대비해서 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설 후 서면을 거쳐 수정동까지 수돗물을 공급하다가 1972년 낙동강 상수도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1985년부터 용수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딸아이 이 년 뒤 태어난 아들놈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1975년에 유원지는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찾는 횟수가 뜸해졌다. 그로부터 삼 년 뒤엔 명칭도 지금의 어린이대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대통령 부인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어린이회관도 그 무렵 공원 안에다 문을 열었다.
비록 영부인은 비명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어린이 사랑은 연차적으로 수영장과 운동장, 과학실험실 등 설비를 확충할 수 있게 하였다. 오늘 따라 수원지에 가둔 물이 진한 녹색을 띤다. 수원지는 강이나 바다와는 크게 다른 경사도를 가진다. 산과 산 사이를 막아서 만든 댐이니 그 경사도는 바다에서 솟은 땅 울릉도와 별반 다르지 않게 급하다. 사망사고가 난 그날도 아마 공휴일이었지 싶다. 애인을 동반하고 공원을 찾았던 청년은 제복차림의 군인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몰랐는데 그 육군중위는 취기도 약간 있었다고 한다. 아가씨의 모자가 바람에 날려 물에 빠지자 물속 깊이를 알지 못하는 그는 모자를 건지겠다고 들어섰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댐의 물을 다 빼지 않고는 시신마저도 찾을 방법이 없어서 훗날까지 유족들이 애를 태웠다. 제방 위로 난 통로의 한복판쯤에 건설 당시의 기술인력 명단을 영문자로 새겨 놓았는데 '나카마' 등 네 명의 일본인 이름이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공원에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심어주고자 설치한 조형물들이 여러 점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 부산경찰서장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지 않고 단식으로 순국한 무장항일독립단체 박재혁 의사의 동상을 비롯, 6.25사변 때 부산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인 1661명 제7기 헌병학교 학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와 1605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삼천여 명의 동포를 구출해낸 사명대사의 동상과 비각도 서 있다.
작품 속에서 나라 사랑을 아낌없이 보여준 요산 김정한의 문학비에선 '사람답게 살아가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이 갈 길은 아니다'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부산항일학생기념탑과 2001년 1월, 일본의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 위에 떨어진 일본인 남자를 구하려고 용감히 뛰어들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의사자 이수현을 추모하는 비석도 만날 수 있다. 이 중에서 두세 점은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다.
나는 1970년대 중반 아파트 붐에 편승하여 주택을 떠나 백여 미터 떨어진 평지 쪽 아파트로 옮겼다. 그런데 당시 수원지 둑이 터지면 그 아파트는 끝난다는 기분 나쁜 루머가 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주한 아파트 7개 동 전체 건물이 앉은 방향은 그렇게 물살을 온몸으로 받는 구조였다. 수원지는 1907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했으니 한일병합조약 직전에 준공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36년간 일제의 수탈과 잔학상을 지켜본 산 증인이 아닐 수 없겠다.
이제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도 엄청 늘어나 공원에서도 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재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나 외지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불편은 교통편이 아닐 수 없다. 과문하지만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어린이대공원을 경유하여 서면의 시민공원과 연계하는 도시철도망을 구성한다면 사업비 회수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고도 가능할 것 같다. 나라의 새싹인 어린 꿈나무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공원을 이용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욕심일까.


















첫댓글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새롭네요~~
감상 잘했습니다~~^
아-그 옛날 이곳에 사셨군요. 초읍이라는 이름도 도시에선 참 정겨운 이름입니다. 저도 가끔 이곳엘 들립니다. 시민공원에서 성지곡까지 그 길을 걸으면 시골동네의 읍내같은 그러한 느낌이 좋은 곳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