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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품경기특수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김우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특수교육적 접근
1. 들어가는 글
유시주의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았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 그 자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화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사회와 인간을 보는 다양한 접근과 폭넓은 시야를 보여준다. 처음에 내가 이 책을 대했을 때는 막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적당히 페러디하거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입문서 성격의 책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글 중에 나타난 작가의 관점과 사고방식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왔다.
이 책에서 나타난 고대 서구 신화속의 신들은 인간중심적이다. 즉 신들은 인간의 모습과 속성을 지닌 , 선악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일원론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현실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존엄과 자유로 유한하고 자연적인 우리 인간의 삶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만든 그리스 로마문화는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늘 모순과 갈등, 탐욕과 다툼으로 가득 차 있으나 자기들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세계를 ‘더러운 곳’으로 부정하지 않고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인 이 세계를 기꺼이 긍정하였다. 또한 그 속에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귀중히 여겨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았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을 현대적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상호 연관을 시도한 내용이 많다. 따라서 그 내용이 그다지 창의력이지는 않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리스 여신인 ‘가이아’와 살아있는 지구의 개념을 관련지어 설명한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야-생명체로서의 지구’라는 이론과 여신과 가부장제와의 관계를 칼 융의 원형이론으로 접근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여자를 ‘만악의 근원’으로 다루는 남성중심적 신화구조를 뒤집어 해석한 “판도라에게 찬사를”과 “잃어버린 남신을 찾아서”도 인상적이었다. 본문에서는 그중에서도 우리가 관심있게 지켜보는 특수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신화를 중심으로 특수교육과 서로 연관지어 해석해 보았다.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비록 서구신화를 통해서이나 그 함축된 의미를 통해 특수교사로서의 자기 성찰과 그 지평을 확대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의 문화와 철학적사유의 원천인 그리스 로마신화를 특수교육과 관련지어 본다.
2. 주제별 특수교육적 접근
그리스 신화 중 다음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특수교육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와 특수교사의 책무
* ‘가이아 이론’과 한 유기체로서의 장애학생
* 이성과 광기로 대표되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그리고 특수교육에 대한 카오스적 접근
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와 특수교사의 책무
신화속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하여 불을 훔친 후 매일 매일 독수리로부터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겪는다. 그는 인간과 인간성 확립을 위해 아름다운 반역을 꾀한다. 그 결과 그에게는 어떠한 장엄한 영광도 돌아오지 않고 큰 고통과 인고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인간도 그러하다. 우리들은 날마다 싸움의 와중에서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 사이에서,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서 매일을 사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간을 믿는다 함은 인간이 전적으로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라는 걸 믿는게 아니라 아름답고 진실되고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자신과 싸울 줄 아는 존재라는 걸 믿는 것인지 모른다.
인간을 믿어도 될 것인가. 코카서스 산정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들, 즉 지상의 프로메테우스에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릅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할 일이지요. 빛을 바라는 자, 거기다 세계를 걸고 스스로 빛이 되지요.”. 힘겨운 삶의 한복판, 거기 불멸의 빛이 있다고, 그러니 부디 쉬이 낙망하지 말라고 격려처럼 위안처럼, 그는 속삭인다.
우리들은 모두 이른바 장애학생들을 지도하는 특수교사들이다. 그런데 이들과 생활하면서 많은 좌절을 가진다. 처음에는 아름답고 순수한 사명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지도한다. 그러나 초기의 열심과 열정은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퇴색해 가고 편함과 안주라는 일상과 타협한다. 이럴 때 우리는 문득 자신을 뒤돌아보며 우리자신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우리가 이 정도 하는것이 어딘데? 그래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박봉에 근무조건도 열약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장애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가르켜도 그 발달과 성취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지도하는것도 잘하는 것이다.’ 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우리들에게 최소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삶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참다운 가치를 추구케 하고 , 존엄함을 존엄함으로 유지케 하는 최소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특수교육 현장에 종사하는 동역자들은 모두 자신이 담당할 정도의 최소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사고방식과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 의식이 있다함은 날마다 자신의 몸이 독수리에 의해 아프게 쪼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독수리는 우리아이들의 발전없는 답답한 학습능력이나 생활습관일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의 부정적인 인식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독수리는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는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고통은 계속된다. 그래도 여러분은 신화속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불을 가져다 줄 용기가 있는가?
나. ‘가이아 이론’과 한 유기체로서의 장애학생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신으로서 게(Ge)라고도 불린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으로 뭇 생명을 낳고 그것을 생장, 번성케 하며 자비롭고 너그럽다. 즉 가이아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생명과 풍요의 근원으로서 거룩한 모성의 원형이다. 제임스 러브록이라는 영국 과학자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획기적인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 이론은 “우주에서 가장 거창한 생명체”인 지구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이끌어 내었는바 그것은 곧 “지구는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것이었다. 러브록은 지난 30억 년 동안 지구 대기권의 원소 조성과 해양의 염분 농도가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생물이 지구상에 출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한 탄소, 질소, 인, 황, 규소 등의 주요 원소들이 대륙과 해양을 순환하며, 놀랍게도 순환의 매개자가 전적으로 생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생물들은 기후를 조절하고 때로는 해안선을 변화시키고 대륙을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구는 그 위의 생물체 뿐만 아니라 대기, 해양, 심지어 토양과 암석까지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진정 살아 있는 한 행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지구’는 이제껏 사람들이 써 온 단순한 ‘생물체들의 서식처로서의 지구’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리처드 도킨스를 위시한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일부 환경보호론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에 대해 러브록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집합체는 그 구성원 하나하나에서는 도저히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속성을 지닌다”는 일반론 위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실험으로 재 반박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의 데이지꽃과 그것을 먹고 사는 초식 동물로만 구성된 단순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 행성을 가상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결과에 따르면 이 가상의 세계는 태양으로부터 전해지는 복사열이 크게 많아지거나 적어지거나를 막론하고 항상 적당한 기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데이지꽃과 초식 동물이 미래를 예측하거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생물종들 사이의 무의식적인 성장과 경쟁이 진화의 원리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게 러브록의 주장이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가이아는 그 어떤 재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생물들의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러브록은 ‘가이아 이론‘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은 “우리들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한 한 인간의 견해”이며 자신의 견해가 “인간과 대지와의 유기적 관계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가 이야기한 ‘가이아 이론’은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행성 지구와 우리 자신, 그리고 모든 생명체들과 우리 인간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지구가 살아있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거대한 생명체인 가이아의 일부라고 생각해 보자. 늘 보는 하늘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왔다 가는 사계도, 비·눈·바람도, 무심히 꺾어드는 들꽃도 , 늘 들어서는 교정과 그 교정에서 뛰노는 우리 아이들도 달리 보이리라. 그것은 가이아가 치르는 장엄한 생명의식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 또한 그 의식에 동참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경건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그리스인들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체감한 것도 필경 그러한 경검한 속에서였을 것이다. 가이아의 숨결에 조용히 귀기울일 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생명 조직의 피와 살, 뼈대를 그토록 쉽사리 파헤치고 부수고 더럽히지는 못하리라.
현장을 돌아보자. 우리는 일상에서 장애학생들을 타성으로 대한다. 그들이 나름대로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유와 누려야 할 천부적인 존엄이 있는데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고 단순히 특수교육을 요하는 학습수요자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도 엄연히 우리와 함께 이 지구라는 가이아를 구성하는 엄연한 존재이다. 여러분은 혹시 자신이 만나서 코 닦아주고 손잡아주는 한 조그마한 아이가 여러분과 함께 이 지구라는 가이아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대지의 여신임을 알고 있는가? 그 작은 여신이 온전히 평화와 자비의 신만이 아님을 아는가? 우리가 함께 생활하는 조그만 가이아를 함부로 다룰 때 곧 그것은 여러분의 교육실패라는 결론과 직결된다.
그렇다. 우리는 특수교사로서의 우리 삶과 이 삶을 함께 꾸려가는 장애학생들을 한 유기체로서 파악하고 인정할때에야 대지는 우리에게 넓은 팔을 활짝 펼칠 것이다. 가이아로 파악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가이아를 비롯해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들은 생명을 관장하는 자비로운 속성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을 거두어들이고 파괴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다. 러브록의 다음과 같은 경고-사망과 붕괴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인 바, 그것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개인으로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작은 대가라는 말은 특수학교 교사로서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통열한 충고라고 볼 수 있다.
다. 이성과 광기로 대표되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그리고 특수교육에 대한 카오스적 접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다. 저마다 다른 역사, 다른 성격,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람은 하나의 작은 우주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주위의 수많은 ‘작은 주주들’을 살펴보면 똑같지는 않을지언정 비슷하게 닮은 꼴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기질과 개성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먼 옛날부터 있어 왔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네 가지 액체에 근거를 두고 사람의 성격을 다혈질, 까다로우면서 변덕이 심한 담즙질, 흑담즙질, 점액질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에리히 프롬은 사람의 성격을 크게 생산적 성격과 비생산적 성격으로 나누고 비생산적 성격을 다시 수용지향형, 착취지향형, 저장지향형, 시장지향형으로 세분하였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외향형과 내향형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이분법도 있다. 이외에 사람의 성격을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아폴론적’이라는 말은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로 균형·조화·질서·이성·절제·지식·평온함이 그 이미지이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폴론적인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용을 지킨다. 심지어 정열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동안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시민으로서의 명예를 잊지 않는” 유형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세계는 광기로 대표되는데 도취·극단성·무질서·본능·광란·환상·열광의 이미지가 강하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존재의 일상적인 범위와 한계를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존재의 가치를 추구한다.
아폴론의 이성에 이르지 못하는 적당한 이성,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광기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우리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광기와 이성이 같이 들어 앉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광기는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폴론적이든 디오니소스적이든, 다혈질이든 흑담즙적이든, 외향형이든 내향형이든 인간에 대한 모든 유형의 이론은 옳고 그름과 우월, 열등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심리학자 칼 융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에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음의 글로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내가, 당신과 똑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설령 내가 당신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나의 관점을 뜯어고치려 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져 보라. 같은 상황에서 내 감정이 당신보다 덜하거나 더하다 하더라도 나에게 당신보다 더 강하게 느끼라거나 더 약하게 느끼라고 각박하게 요구하지 말라. 또 내가 당신이 의도한 행동 계획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나는 당신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당장은 각박하게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나를 당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할 때에만 나는 그런 요청을 할 것이다.」
산업사회 교육의 지배 패러다임은 보편성과 규칙성을 전제로 한 중앙통제적 교육과정이었다. 그러나 탈산업사회의 교육 패러다임은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대안적 인식론을 제시한 구성주의로 21세기 탈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창의성과 유연성, 문제해결능력, 비판적사고력등을 지닌 학습자를 기르고 학습자들에게 보다 많은 자율성과 선택권을 주어 그들의 목소리와 요구, 흥미와 관심에 가치를 두자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학습자 개개인의 요구와 특성을 중시하고 학습자중심의 학습과 선택을 강조하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적인 변화는 특수교육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특수교육의 주류는 평균에서 치우친 장애학생을 대상으로 진단-처방적 교수프로그램인 치료적 접근과 간편하게 검사할 수 있는 검사측정의 결과치로서 나타난 능력에 초점을 두는 교육심리적 입장에 고착 편향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진단-처방적인 교수프로그램을 검사와 처치, 객관화, 제한, 분리의 관점에서 운영하며 그 지배적 담론을 고수해왔다.
그 결과 특수교육의 현장에서 교사는 학습활동의 중요한 제단계를 운영하면서 장애아동의 학습한 결과적 질과 양을 소위 「객관화」하는 작업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는 실정에 처해 있다. 특히 정신지체학생을 지도하는 교육활동상황에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돌발적이고 무의미하며 무책임해보이는 행동과 분위기를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각 행동과 사고방식간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일정한 패턴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수교육의 현장, 특히 정신지체학생을 지도하는 교육활동하에서 우리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장애학생들의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행위와 사고방식-돌발적인 감정의 표출, 무의미한 요구, 무책임한 행동등을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대개 들어난 행위에 대해 진단-처방적교수 프로그램으로 행동치료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각 행위나 행동간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어떤 질서, 즉 자기 유사성(Self similarity)이라는 상호의존적인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카오스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카오스현상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입장에서 보면 아폴론적인 인간유형과 사고방식,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인간유형과 사고방식이 서로 혼재되어 ‘차이’와 ‘다름’으로 나타나는 무질서현상인데 그러나 그 내면과 본질에는 일정한 조화와 규칙이 나타나는 눈에 보이지 않은 현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카오스 이론’은 특수교육현장에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데 이때 노련하고 숙련된 교사는 이러한 현상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그 원인을 규명하고 해석하여 상호의존적인 유사한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상황과의 상호연관과 유사성까지 주목하여 ‘차이’와 ‘다름’을 배려하고 고려하는 교육활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발력과 처치능력은 어느 특정교육이론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거의 교사로서 지닌 직관력과 통찰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통찰력이 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제적인 특수교육상황의 돌발적 현상은 과학적 중재로서 강조되는 아폴론적인 객관 보편 타당성과 쟁쟁한 학습이론을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제 무엇보다도 강조해야 할 것은 끝없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직관력일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내재한 생명력을 주의깊게 찾아내어 상응할 수 있는 접근과 이해는 특수교육 실천현장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애목적을 확립하려는 교사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특수학교 교사들은 아폴론의 머리로 알고 디오니소스의 가슴으로 특수교육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장애학생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카오스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접근은 특수교육 실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둠에 불과하다”.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한 인간’으로 생각하면서 우리 장애학생들과 그리스 로마인들의 사고를 최대한 우리것으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깨달은 것들에 기대어 이들 모두를 사랑하고 안고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