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디 맑아서 짙푸른 바다와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진 개나리며 진달래, 탐스럽게 피어오른 붉은 매화와 소나무 숲 속 수줍게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꽃들로 이 봄 강원도 삼척의 영은사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은 꿈길인 양 싶다.
이맘 때의 동해와 삼척은 분명 강릉과 설악의 가을 단풍에 결코 뒤지지 않을 풍광임이 분명하다. 눈부신 절경을 사시사철 토해내는 우리 땅의 근골 백두대간. 그 산자락의 절들이 품고 있을 옛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발걸음이 동해안을 마주보며 태백으로 내달은 백두대간의 큰 걸음처럼 태백산 영은사(靈隱寺,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 4리 924, 033-574-9300)로 달려간다.
“하아, 이쁘다!” 비명 같은 감탄을 연발하다 보니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니 삼척 시내를 꽤 지나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 노보살님께 길을 여쭙는다. ‘궁촌(宮村)’을 여쭙고 혹시 영은사를 아시느냐고 하자 금세 환한 미소가 되돌아온다. 영은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참이시란다. 반갑고 소중한 것이 인연인지 작은 차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마을 안에서 새롭게 옮겨온 궁촌초등학교를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는 영은사의 마을들은 한결같이 깨끗하고 정갈하다. 하기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한 냇물을 마을 앞에 두고 세세생생 살아온 마음들이 어디 그와 그리 다를 리 있겠는가.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산들의 살풍경한 모습은 눈물겹도록 안타깝다. 울창했을 소나무 숲은 온데 간데 없고 화마가 지나간 산들이 아픈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 영은사는 어떠했을까, 행여 산불에 화는 입지 않았을까, 발걸음이 빨라진다. 영은사는 삼척 태백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천년고찰이다.
사굴산문의 범일(梵日, 810~889) 국사가 진성여왕 5년(891)에 궁방산 밑 마전평(麻田坪)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궁방사(宮房寺)가 그 옛이름. 한달 전 대관령 옛길 보현사에 이어 이곳 영은사에서 다시 국사를 만나고 보니 영동 땅 곳곳에 서려 있는 국사의 자취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한 가지 모를 일은 국사의 생존 연대와 궁방사 창건 연대의 차이인데 이는 국사가 궁방사 터에 주석했던 시기와 창건 완료 시점의 차이쯤으로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더불어 『삼화사고금사적』 등에서 보이는 영은사와 삼화사의 약사삼불(藥師三佛) 창건설화를 통해서도 궁방사(영은사)의 옛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옛날 삼척의 정라진 포구에 석주(石舟) 한 척이 도착했다. 배가 멈추자 잘 생긴 육척 장신의 대장부 세 사람이 내렸는데 금빛 얼굴에 몸에는 가사를 두르고 있었다. 각각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는데 큰형(伯)으로 보이는 이는 손에 검은 연꽃을, 둘째(仲)는 푸른 연꽃을, 셋째(季)는 금색 연꽃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서역에서 온 약사불 이었다.
삼형제는 곧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큰형 약사불이 삼화촌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임을 확인하고 터를 잡았다.
그리고 둘째는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에, 셋째는 그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삼형제는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삼았다. 제자들은 각각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삼화사), 둘째는 청련대(지상사), 셋째는 금련대(영은사)라 했다. 삼화사는 현재 창건 연대를 자장 율사와 관련해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보고 있으니 이 설화에 비추어본다면 영은사 창건 또한 최소한 현재보다 2세기는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후 궁방사의 자취
는 찾을 길이 없고 조선 명종 22년(1567)에 사명 대사가 머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고 이름을 운망사(雲望寺)라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버린 절을 인조 19년(1641) 벽봉(碧峰) 스님이 중건하고 이름을 영은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영은사는 그 품이 상당히 넓고 당당하다. 부처님의 가피로 다행히 절은 산불에도 큰 화는 입지 않았나 보다. 옥류를 건너는 해탈교를 따라 들어가니 그림 같은 노송에 먼저 눈길이 머문다. 이윽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 있는 향나무와 백일홍 사이, 2단의 석축 위에 자리잡은 탑과 대웅보전이 합장한 참배객을 맞는다.
손수 전정가위를 들고 향나무를 다듬는 스님과 그 옆 샘터에서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보살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솔깃한데 봄맞이가 한창인 절풍경인지라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스님의 손길 또한 예사 솜씨는 아닌 듯 들머리부터 도량 곳곳이 봄햇살이 눈부실 만큼 환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어 시간 넘게 도량을 돌보던 스님이 주지 행담 스님이시다. 해지기 전 사진을 마무리하느라 도량 이곳 저곳을 누비는 사진기자를 뒤로 하고 대웅보전 부처님을 찾아뵌다. 설화와는 달리 비로자나 부처님이 가운데 앉아 계신 삼존불이시다. 세 분 모두 큰 얼굴이 인상적인데, 한낮 불을 켜는 것이 송구스러워 법당 문을 열어놓은 채로 올리는 108배에 봄바람과 새소리도 따라 들어와 부처님을 배알한다.
향긋한 봄내음에 세 친구 같은 부처님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숨기시느라 슬몃 보이시는 미소가 너그럽고 포근하다. 그래서 근동에는 소원 하나쯤 꼭 들어주시는 부처님으로 소문이 자자한 모양이다.
현재는 ‘ㄱ’자 모양을 하고 있는 영은사 심검당은 원래 ‘ㅁ’자 모양이었다고 한다. 각 측면 3,4칸으로 지금 규모만으로도 상당한 대중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건립 연대가 고종 1년(1864)이라고 하는데 이웃한 신흥사에 남아 있는 ‘ㅁ’자형 심검당(1771년)과 ‘ㄴ’자형 설선당(1674)과닮아 있다.
월파당선사부도(月波堂禪師浮屠) 등 한적한 부도전 참배를 마치고 절마당으로 돌아오자 영은사 곳곳을 들여다 보던 사진기자는 대웅보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의 측면 분할과 비례감이 특히나 아름답다며 사진기 속을 들여다보고 또 본다.
그러고 보니 창방 위에 드러나 있는 평방도 독특하고 연꽃 봉우리로 장엄된 전면 살미와 구름모양의 후면 공포에서도 정성 스런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팔상전(강원도유형문화재 제77호)의 그것은 만개한 연꽃으로 장엄하였으니 전각마다 각기 다른 공력을 들인 손길이 더욱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