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균 100만명의 내외국인이 찾는다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1300여년의 찬란한 불교유적과 국보 보물 수천여점을 소장한, 한국을 대표하는 국지종찰(國之宗刹)은 요즘 통도사 인근 초산유원지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용한 가운데서 나를 찾고 분주한 일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편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수는 없는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영축산에 들어섰다.
본사 첫 도서관佛事…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
일요가족법회 준비…사찰도 서비스정신 필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통도사는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한국의 3대 사찰. 구하스님 경봉스님 등 수많은 고승이 주석하며 수행가풍을 일으켰으며 성파스님, 수완스님 등이 머물며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수행과 문화의 대가람이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잘날 없듯이 큰 절일 수록 자칫 불화가 잦기 쉬운 법. 하지만 통도사는 방장 월하스님의 법력으로 총림다운 면모를 갖추면서도 위계를 뚜렷이 세워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가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 주지 현문스님은 어릴적부터 구하스님을 시봉한데 이어 은사인 월하스님을 모시며 대중살림을 몸으로 체득, 그 어렵다는 총림의 살림을 맡아 원만하게 꾸려가고 있다.
불보종찰다운 면모갖춰
현문스님은 통도사를 수행도량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포교와 가람불사 문화도량으로는 한국최고의 가람으로 꼽히지만 몇 년전부터 종단과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수행가풍을 조성하는데는 손이 미치지 못했다. 종단과의 관계도 모두 마무리되고 평온을 되찾은 통도사는 선원 강원 율원을 활성화 시키면서 불보종찰 다운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현문스님은 “60여년간 통도사에 머무시는 어른(방장 월하스님)이 해오시던 연속선상에서 일을 추진해왔다. 그 결과 이제 통도사는 해인사 송광사 못지않은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집 한채 짓는 것 보다 수행도량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더 중히 여기고 일을 해오고 있다.”
스님은 이어서 말했다. “보광선원은 전국 선원의 수좌들이 방부 들이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강원은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가고 있다. 신라 때부터 계율 근본도량이었던 전통을 살려 율원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수행도량의 가풍을 살려가는 한편 포교에도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불사가 본사 최초의 도서관 건립. 87년 문을 연 국내 사찰 중 최고를 자랑하는 통도사 박물관 앞에 연건평 400평 2층 규모의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건립비용 27억원은 확보한 상태며, 장서도 모두 준비되어있다. 도서관이 완공되면 박물관과 도서관이 어우러진 명실상부한 문화도량이 될 것이다” 산문부터 죽 이어지는 하천도 자연석으로 재조성 할 계획이란다.
부산 울산 대구 마산 창원 등 대도시를 한시간내에 두고 있는 통도사는 산중 사찰이면서도 도시와 가까워 천혜의 포교조건을 갖추고 있다. “주5일 근무제에 맞춰 토요일 저녁 철야 참선법회를 하고 다음날 가족들이 함께 일요법회를 열도록 준비하고 있다. 그 뿐아니라 통도사는 최선을 다해서 신도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관람객들에게도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스님의 포교계획은 끝이 없다. 실제로 이 모든 것은 하나둘 실현되고 있다. 통도사가 운영하는 복지법인 자비원은 통도사 근처에 대규모 요양원을 건립할 예정이며 울산 밀양 등지에 복지원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부산 마산 등 국내에 포교당만 14곳을 운영중이며, 독일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등 모두 12곳의 해외 포교당도 운영하고 있다.
구하스님·월하스님 시봉
모든 분야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통도사의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스님이 말하는 수행자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있다.
스님은 어릴적부터 통도사에서 대중과 함께 살아 늘 대중을 중심에 놓고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하심(下心)을 우선시한다. “대중과 살아보니 대중이 스승이다. 게을러지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다. 억지로라도 ‘중’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 대중살림이다. 그런면에서 신임 원장스님은 오랫동안 대중과 함께 살아온 분으로 기대가 크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수행자가 될려면 큰 절옆에서 대중들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대중과 함께 하며 대중이 모두 하나되어 오늘날의 통도사를 일궈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 바로 어른이다.
어려서 동진 출가한 현문스님은 6개월간 구하스님을 모셨다. 당시 93세였던 구하스님은 노환으로 몸이 몹시 불편했다. 스님은 대소변을 받아내며 정성껏 시봉했다. 큰스님 시봉하느라 하루종일 힘겹게 보내고 깊은 잠에 빠진 어린 동자승을 구하스님은 새벽예불에 참가하라고 억지로 깨웠다. 다리가 아파 제대로 걸을 수없어 무릎으로 밀치고 와서는 어린 현문을 기어이 깨워 보냈다. “그때는 참 야속했는데 어른 스님께 혹독하게 받은 힘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며 “나를 가르치기 위해 당신께서 없는 힘까지 내셨다는 것을 잘안다”고 스님은 말했다. 스님은 그 뒤로는 은사스님이며 현 통도사 방장인 월하스님을 오랫동안 모셨다.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연히 수행자의 품성이 몸에 밴 것이다.
현문스님은 어른을 모시고 통도사 살림살이 행정을 맡는 바람에 선방은 뒤늦게 들어갔다. 모두들 얼마나 견디는지 보자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스님은 5분먼저 들어가 5분먼저 나온다는 각오로 방부를 들였다. 나이들어 들어온 탓에 다른 대중스님들이 불편해 할까 싶어 늘 조심하고 하심했다. 선방에서의 정진은 “이 좋은 곳을 왜 이제야 왔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스님은 단지 가부좌 틀고 화두참선하면서 깨달음을 참구하지는 않았다. 마음을 열고 모든 것에 귀기울이고 내 속에 잠겨있는 욕망과 편견, 오랜 습을 버리면 말 그대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모든 생활이 선(禪) 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하판(下判, 선방에서 생활한지 얼마되지 않은 초심자) 한명이 오랜 시간 앉아있는 것을 참지못하고 자꾸만 뒤척거렸다. 화두 삼매에 빠져들려고 하면 부시럭 거리는 소리에 그만 깨고 했다. 처음에는 몹시 화가 났다. 주의를 줄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좋은 회상(會上)에 저 스님 마저 없었다면 좋다는 것을 느꼈을까. 저 스님이 바로 인욕보살(忍辱菩薩)이구나” 스님은 그 순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릴적부터 절에 들어와 오직 부처님과 스님만 모시고 살아온 스님답게 늘 만면에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현문스님은 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한다. 종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지를 맡았을 때 주변에서 잘해낼 수있을까 우려를 많이 했지만 주지로 부임한지 지난 2년간 통도사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 대중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르는 화합정신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어른과 대중을 부처님처럼 모시는 절집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대중생활은 그 자체가 수행일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힘들고 피곤하다고 생각하면 짜증만 난다. 한 생각 돌이키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 내마음이 편해지면 상대방에게도 편하게 대할 수 있어 자연히 대중 모두가 화합된다”는 것이 스님의 철학.
대중생활은 그 자체가 수행
늘 하심하고 겸손한 스님의 성격은 사찰운영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중일로 바쁜 가운데서도 외부에서 초빙한 법사스님들의 설법시간에는 반드시 가사 장삼을 갖추고 법문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하지만 정작 스님 스스로는 법상(法床)에 오르지 않는다. “법상에는 사자후(獅子吼)를 하는 분만이 오를 수있다. 의심덩어리가 단박에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 사자후요 진정한 법문이 아닌가. 사자가 울면 산천초목이 숨을 죽이듯 할 한방에 대중을 휘어잡는 분이 오르는 곳이 법상인데 나는 그런 자격 없어.”
스님은 주지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걱정이 많아졌다는 것. “총무 소임도 오래했지만 그 때는 계단의 먼지 같은 것은 눈에 안보였어. 근데 주지가 되고 나서는 불은 나지 않을까 상수도 물은 제대로 나오나 온갖 걱정이 다 들어. 아 이게 주인과 객의 차이구나 느끼지” 스님은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장과 종업원의 차이는 작은 것 하나에도 애정과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느냐에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을 할 때는 즐겁게 남의 일이 아니라 내일로 여기고 열심히 하면 일도 즐겁고 성취하는 것도 다는 것이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스님은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부처님의 말씀이나 역대조사의 어려운 설법 등은 단 한차례도 꺼내지 않았다. 평범하지만 결코 실천하기 쉽지않은 이야기들로 시종했다. ‘하심하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남을 탓하기보다 나의 부족한 점을 찾아라’ ‘늘 대중들 편에서 생각하며 대중의 이익 됨을 고려해라’ 그 어떤 어려운 법문보다 더 어려운 말이었다. 스님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어른을 모시며 대중과 함께 살면서 자연히 몸에 배고 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도 없고 대중도 안중에 없는 현대인들은 어디서 그 가르침을 배워야하나 |
첫댓글 통도사는 참 자주 가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불교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탓에 잘은 모르지만 통도사 제일은 금강계단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스님께 전해들은 말로는 금강계단에는 새똥이 없다고 합니다. 단순한 신비스럼 보다는 법지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자연의 복종이 아닐까 합니다. 가시는분들 한번쯤 참고하세요
주지 스님 께서 등장 하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