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 위빳사나'를 검색어로 해서 초불카페에서 검색해본 결과
각묵 스님의 아래와 같은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참고하십시오.
* 위빳사나와 사띠(sati, 念, 마음챙김)는 같은가
- 각묵 스님 (출처: 간화선과 위빳사나 게시판 이전 글 모음. 2003.01.30.)
한편 남방의 몇몇 위빳사나 대가들은 위빳사나를 사띠(念, 마음챙김)와 같은 개념으로 보고 아무런 구분 없이 이 둘은 같은 것이라고 설하고 있고 특히 한국에서도 남방수행을 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발제자는 그런 관점은 남방 아비담마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방에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에서 기인한 듯하다.
초기경에서 마음챙김은 (大)念處經(마음챙김의 확립, D22; M10)과 念身經(몸에 대한 마음챙김, M119)과 出入息念經(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 M118)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념처경에는 마음챙김의 대상을 身(몸)․受(느낌)․心(마음)․法으로 정리하고 있고 염신경에서는 몸의 여러 현상에 마음챙기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출입식념경은 호흡하나에 마음챙기는 것을 설하고 있다. 특히 염처경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제목 하에서 몸 등을 隨觀(anupassanā)한다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수관은 다시 무상․고․무아로 수관하는 것을 위빳사나라 정의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띠→수관→위빳사나의 관계를 따라서 사띠를 위빳사나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염처경의 원문에서 사띠는 삼빠자노 사띠마(sampajano satimā,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가 되어)라는 구절 등으로 나타날 뿐 사띠를 아누빳사나(수관)와 위빠사나와 동의어로 사용된 출처는 발제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염처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과 염신경에서 설하는 몸의 수관은 같다. 그러나 염처경과 염신경의 중요한 차이는 염처경은 법념처로 인도하여 5가지 장애와 7각지와 4제를 수관하는 [위빳사나를 통해서] 해탈로 인도하고 있고 염신경은 몸에 대한 챙김을 개발하여 4선과 5신통을 개발하는 사마타(삼매)로 인도하고 마지막으로 번뇌를 멸하여(누진통) 해탈하는 것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입식념경은 첫 단계에서는 다분히 사마타로 인도하는 듯하지만 나중에는 사념처와 칠각지를 통해 [위빳사나로] 인도하여 해탈로 결론짓고 있다.
이처럼 이 세 가지 마음챙김에 대한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모두 다 통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사띠와 위빳사나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사띠는 사마타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에 의하면 마음챙김은 전적으로 유익한 마음부수법(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뜻하는 위빳사나에도 반드시 있게 되고 유익한 마음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에도 반드시 있어야하는 마음부수법이다. 이들 세 가지 경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음챙김은 사마타를 개발하든 위빳사나를 개발하든 반드시 제일먼저 개발되어야할 유익한 마음부수법이기 때문에 수행을 설한 세 경에서 제목을 마음챙김(염처, 염신, 출입식념)으로 한 것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지혜(반야)이며 그래서 모든 유익한 마음에는 항상 함께하는 마음챙김과는 다른 심리현상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와 사띠는 결코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물론 사띠와 위빳사나는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위빳사나에는 항상 사띠가 함께 하기 때문이며 사띠의 작용없이 위빳사나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띠는 위빳사나건 사마타건 유익한 마음작용에는 반드시 함께하는 심리현상이며 위빳사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이야기 하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개발하는 단계 그 자체는 사마타가 아니고 위빳사나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사마타는 4선-4처(욕계禪과 무색계禪)의 지고한 삼매의 경지이고 위빳사나는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열 가지 위빳사나의 지혜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 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는 사마타나 위빳사나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본다. 본격적인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개발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염처) 단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마음챙김이 확고하게 될 때 사마타도 위빳사나도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 수행 3경들에서도 사마타나 위빳사나 대신에 사띠를 경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지금 남방에서 수행되고 있는 사마타 기법이나 위빳사나 기법은 사마타라 불러서도 위빳사나라 불러서도 안된다. 정확하게 붙이자면 ‘사마타나 위빳사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띠(정념, 마음챙김)을 개발하는 수행’이라 불러야한다. 그러므로 남방수행법은 통틀어 ‘정념수행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처님 원음과 일맥상통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