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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과거 친일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 (성명서 2005년발표) 東學天道 2009/02/28 12:07 http://blog.naver.com/yamu1023/110043424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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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과거 친일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
포덕 146(2005)년 8월 29일
(사)동학민족통일회/천도교 여성회본부/천도교 청년회중앙본부
오늘 우리 천도교인들은 미완의 광복을 완성하고 통일의 민족사를 밝게 열기 위해 일제시대 말기에 천도교단과 일부 천도교인들의 친일행위를 민족 앞에 참회한다. 일제말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제의 강압 속에 최린, 이종린 등 일부 천도교인들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과 침략정책에 동원되고, 나아가 협력하며 민족사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그 잘못을 참회하는 것은 오늘 우리 천도교인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하면서,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달게 받으려 한다.
천도교는 1860년 창도된 이래 후천개벽을 이루어 보국안민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큰 뜻을 실현하고자 신명을 다해왔다. 1894년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의 깃발 아래 전개된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혁명은 근대 민족운동의 시원이 되었다. 이후 천도교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위한 갑진혁신운동, 민족계몽을 위한 근대식 교육운동, 일제 무단통치에 저항한 3·1독립운동, 민족문화 창달을 통한 자주독립운동, 멸왜기도운동 등으로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과정에서 30여 만 명의 교인이 희생되는 등 천도교단이 당한 수난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컸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도교인으로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의암 손병희 선생 이하 수백 명의 독립투사는 오히려 빙산의 일각이며, 이제 곧 공식적인 명예회복이 될 수십만 동학군과 아직 제자리에 모시지 못한 수만 명의 천도교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는 것은 우리 교단만의 과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이 높고 빛날수록, 일제 말기에 교단의 일부 지도자들이 저지른 친일행적은 비록 그것이 일제의 강압이라는 불가항력적 요인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보국안민을 이념으로 하는 교단의 본질과는 배치되는 것이며, 이를 순도 순국 선열들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 말 이후 천도교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그들이 전시체제의 총력지원을 위해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같은 친일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에 물자를 동원하고, 민족의 젊은 동량을 전쟁터로 보내는 일에 앞장선 교역자도 있었다. 그 자신의 과거 항일독립운동의 경력마저도 무위로 돌리며 친일의 굴레를 뒤집어썼다. 그 기간 동안 천도교의 기관지는 대다수 천도교인들의 민족의식과 항일투쟁을 외면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발행되던 모든 국내 정기간행물이 예외 없이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 법정에서 최린은 “나를 광화문 네 거리에서 처형해 매국의 교훈으로 삼아달라”며 민족 앞에 고백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그 심정이 바로 오늘 천도교인의 심정이다. 지난날 역사의 바른길을 오판하여 저지른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천도교는 민족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왜곡된 민족사의 광정과 올바른 민족정기의 확립이라는 오늘날의 전민족적 과업에 우리는 능동적으로 협력하고 동참하여 후천개벽의 천도교 전통을 다시금 확립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지난 과오를 용서받고 빛나는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재삼재사 노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의 참회는 오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민족이 계승하고 자랑해야 할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 또한 동학 천도교 역사에 기록하여 다시는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정기와 천도교 본연의 이념을 지켜나갈 것이다.
오늘 우리의 반성을 한울님과 스승님, 그리고 순도 순국 선열들의 성령에 고하면서, 민족 성원 모두의 용서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포덕 146(2005)년 8월 29일
천도교동학민족통일회/천도교여성회본부 / 천도교 청년회중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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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9일 동학민족통일회와 여성회본부, 청년회중앙본부는 합동으로 ‘친일인명사전수록예정자명부’ 발표에 즈음하여 “천도교의 과거 친일 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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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이트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명단 위키백과사전
===================아래서 자료보완 2011. 2.2 ======================
2009년 최종 25명으로 / 최종명단보기 링크 http://bluecabin.com.ne.kr/split99/chinilpa_name1.htm
09.종교 | 09-3.천도교 | 김동수 | 金東洙 | |
09.종교 | 09-3.천도교 | 김병제 | 金秉濟 | |
09.종교 | 09-3.천도교 | 김종현 | 金宗炫 | |
09.종교 | 09-3.천도교 | 남증석 | 南曾石 | |
09.종교 | 09-3.천도교 | 박석홍 | 朴錫洪 | |
09.종교 | 09-3.천도교 | 박완 | 朴浣 | 친일단체 |
09.종교 | 09-3.천도교 | 백중빈 | 白重彬 | |
09.종교 | 09-3.천도교 | 손재기 | 孫在基 | |
09.종교 | 09-3.천도교 | 안상덕 | 安商悳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군오 | 李君五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근섭 | 李根燮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단 | 李團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돈화 | 李敦化 | 친일단체 |
09.종교 | 09-3.천도교 | 이우영 | 李宇榮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인숙 | 李仁淑 | |
09.종교 | 09-3.천도교 | 이종린 | 李鍾麟 | 전쟁협력친일단체 |
09.종교 | 09-3.천도교 | 이종식 | 李宗植 | |
09.종교 | 09-3.천도교 | 임문호 | 林文虎 | |
09.종교 | 09-3.천도교 | 전의찬 | 全義贊 | |
09.종교 | 09-3.천도교 | 정광조 | 鄭廣朝 | 전쟁협력 |
09.종교 | 09-3.천도교 | 정용증 | 鄭用增 | |
09.종교 | 09-3.천도교 | 조기간 | 趙基栞 | 전쟁협력 |
09.종교 | 09-3.천도교 | 최린 | 崔麟 | 중추원언론, 친일단체, 전쟁협력 |
09.종교 | 09-3.천도교 | 최안국 | 崔安國 | |
09.종교 | 09-3.천도교 | 하상태 | 河相台 | |
소계 | 25 |
-------------참고자료-----------------
아래는 오암동학사상연구소에서 펀글 들
[김용천 ] 친일은 신파만 했나
수 년 전부터 천도교 홈 자유게시판과 천도교와 관련된 여러 게시판에, 현 천도교 중앙 총부가 친일파 후예들과 추종자들이 운영하는 한심한 집단이고 꼭 없어져야 하는 집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친일은 신파만 했고, 구파에선 친일 행위를 한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항일 투쟁만 하였다는 것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신, 구파의 기록인 각종 교단사 어디를 봐도 일제시대의 40여 년 동안 신파가 교단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신, 구 갈등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분립(分立)과 합동(合同)으로 얼룩져 있음은 인정하지만, 신파가 친일행각을 해서 교단을 붕괴시켰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단의 발전이 지체되고 어렵게된 것은, 어느 한편의 전적(全的)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 구 양쪽이 다 책임을 져야 할 몫이 있습니다. 이번에 발표된 친일 행위자 중 7명(정광조 원로는 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역자이지만 제외함.)이 구파의 원로 교역자들로서 일제시대의 일정기간 교단을 책임지고 이끌고 온 거목(巨木)들입니다. 그들도 친일을 앞장 서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시한 교사기록들을 보면 신, 구파 어느 한 쪽이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엔 신, 구파 지도자의 상당수가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적어도 친일로 인하여 교단에 깊은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은 신, 구 갈등만 아니었다면, 신, 구파를 막론하고 교인들 가슴속 깊이 숭앙(崇仰)해야 할 교단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누어 평가할 일도 아니며, 우리가 비난하고 배척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게 살다간 비운의 희생자들입니다. 해방이후 신, 구파가 통합되었어도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으나 포덕 103년 이후에는 신, 구 계열에 소속되어 있는 다수의 교역자들이 뒤섞여 교단을 책임지고 운영해 왔고, 지금도 엄격히 분류하면 구파의 지도자들의 후손들 여러 명이 교단운영에 중책을 맡아 참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현 천도교 중앙 총부는 신파의 친일행위자 후손들과 그 추종자들만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나 신, 구파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신, 구파와는 어느 쪽 연원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친일행위자와는 만난 적도 없기 때문에, 신, 구파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교단운영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하나(無派, 無淵源으로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로 중앙 교단에서 10여 년의 고락를 같이 했었습니다.
아래의 교사는 <동학. 천도교 약사.-천도교사 포덕 103(1962)년 판의 개, 수정본(1990년. 구파기록)> pp.120-152.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을, 김 완수(金 洙) 편저(1993년 9월 간행; 구파기록). <동학 천도교사.>pp. 501-542.의 내용과 <동학, 천도교 약사.-김 완수 편저.>(2003년 7월 간행; 구파기록) pp. 192-349.의 내용과 천도교 정통 연원회에서 편찬한 <천도교 정통 연원 약사-1992년 8월 간행; 구파기록.>pp. 179-243.의 내용을 대조하였습니다.
<천도교사-부 총서.(1962년. 구파 기록)>는 다른 기록의 하나인 구파에서 집필된, 천도교사(天道敎史 附 叢書)는 1930년경에 최 준모(崔俊模) 정 광조(鄭廣朝) 이 종린(李鍾隣)등이 중심이 되여, 이 돈화(李敦化) 이 인교(李仁敎-이인숙의 잘못인 듯.) 기타 여러 사람들의 자료 제공으로 편찬된 것이나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희귀(稀貴)해져, 1962년에 그 당시 신, 구파 통합을 위한 수습위원장이셨던 해암(海菴) 이 종해(李鍾海)원로께서 다시 편찬 간행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필경(등사)본 총 276페이지로 되었습니다. 이 교사는 1930년 이후의 역사를 첨가했는데 한 순회(韓順會)장로의 자료 제공으로 1961년까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책 또한 귀해져서 1990년에, 현재 수원교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용담연원 이름으로 동학 천도교 약사 부 총서(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라는 활자 인쇄본이 간행되었습니다. 이 책의 단점은, 개, 수정의 원본자료를 밝히지 않아 신빙성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포덕 66(1925)년 8월 19일 교회의 분열상태를 조정하기 위하여 구파의 모임인 통일기성회 조직위원으로 이종린(李鍾麟), 최준모(崔俊模), 손재기(孫在基) 등 100여명이 모여 이종린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포덕 68(1927)년 12월 22일에 제 1회 정기 총회에서 이종린, 최준모는 상무 종법사의 일원으로 선임했다.
포덕 69(1928)년 10월에 박래홍이 피살되자 천도교 총동맹 대표대리에 박 완이 선임됐다.
포덕 71(1930)년 12월 23일 신, 구 합동대회에서, 대령에 정광조(鄭廣朝), 부대령에 최준모가 선임됐고, 천도교 청년 총동맹과 천도교 청년단이 합동하여 천도교 청우당으로 발족하고 손재기를 당 대표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포덕 73(1932)년 4월 2일 정기총회에서 4세 법통을 인정하지 않아 종문을 문란케 하였다 하여 이종린이 대회 부의장의 자격으로, 의장을 대리하여 대령 정광조를 출교처분 결의를 했다. 또 이 대회에서 대령에 권동진(權東鎭), 부대령에 최준모(성도관장 겸임), 경도관장에 이 종린(지도관장 겸임.)으로 선임했다.
포덕 73(1932)년 4월 3일에 신, 구파가 재 분열되었습니다. <신파>란 포덕 73년 4월 2일 정기총회에서 4세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권동진외 187명이 이탈하여 최 린을 추대한, 최 린파를 지칭하고, 춘암상사를 4세 법통으로 인정하는 법통파를 <구파>라고 합니다.
포덕 77(1936)년 10월 5일에 박 완은 현기원 종무원으로 선임됐다.
포덕 81(1940)년 4월 4일 신 구파 분열된 지 8년 만에 합동대회를 하여 교령에 이종린, 부교령에 최안국(崔安國), 교화관장에 조기간(趙基 ), 교무관장에 박석홍(朴錫洪), 경리관장에 전의찬(全義贊), 감사원장에 손재기. 상임선도사에, 최준모, 정광조. 이돈화(李敦化)를 선임했다.
포덕 83(1942)년 4월 3일 중앙 대교당에서 총회를 열어 교령에 정광조, 부교령에 최준모로 개편되고, 교화관장에 조기간, 교무관장에 박석홍, 경리관장에 전의찬, 감사원장에 손재기. 상임선도사에, 이인숙(李仁淑), 이종린 이돈화를 선임했다.
포덕 85(1944)년 4월 3일 중앙 대교당에서 정기총회를 열어 교령에 이종린, 부교령에 조기간로 개편되고, 교화관장에 조기간 겸임, 교무관장에 박석홍-정통연원사엔 박성홍으로 잘못 기록됨, 경리관장에 전의명(全義明-전의찬의 잘못.), 감사원장에 손재기. 신인간 사장엔 박 완, 상임선도사에, 최준모, 정광조 , 이돈화를 선임했다.
포덕 86(1945)년 10월 25일에 천도교 전국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최 린을 출교 처분하고 3원 1관제(3 院 1 觀制)를 채택하고 교화원장에 백세명(白世明), 교무원장에 이 단(李團). 경리원장에 홍순의(洪淳義), 감사관장에 안상덕(安商悳)을 선임했다.
포덕 87(1946)년 5월 23일 오전 10시 30분에 구파 대표 최준모와 신파대표 이군오의 합의하에, 신구파가 분립(分立)하기로 하고, 양측에서 3인씩 대표를 내기로 합의했다. 24일에 구파인 천도교 총부는 한순회(韓順會), 손재기, 이종식(李宗植)을 대표로 내고, 신파는 천도교 본부라고 하고 전의찬, 임문호(林文虎) 이우영(李宇英)을 대표로 했다. 26일에 각 파 대표들이 모여 재정과 집기를 반분하여 교문을 달리하여 한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이 걸리게 되었다. 동년 7월엔 구파는 보국당을 창당하여 손재기를 당수로 선임하였다.
포덕 88(1947)년 4월 2일에 정기대회를 열어 교화원장에 정환석(鄭煥奭), 교무원장에 이 단, 경리원장에 홍순의, 감사에 안상덕, 장로에 오세창(吳世昌), 나인협(羅仁協), 최준모, 정광조, 이종린, 상임 선도사에 한순회. 민석현(閔奭鉉)을 선임했다.
포덕 89(1948)년 4월 4일 에 신, 구파가 무조건 합동을 요청하여 합동대회를 개최하여 교화원장에 정환석, 교무원장에 계연집(桂淵集), 경리원장에 황생주(黃生周), 감사관장에 이동락(李東洛)이 선임되었다.
포덕 95(1954)년까지는 구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이종린, 최준모 원로와 신파의 정광조 원로 등 세 분이 환원하시고, 최 린은 1950년 7월 14일에 북괴에 의해 북으로 피랍(被拉)되어 가셨기 때문에 신, 구의 갈등이 해소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천도교 교단의 신, 구파 친일문제의 논쟁에 대한 선택은, 천도를 꿰뚫어 보는 넓은 안목을 가지신 여러분의 냉철한 양심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올바른 결정을 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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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역사]친일행적 참회와 사과
1.
어제, 26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중앙총부 회의실에서, 천도교 과거 친일 행적에 관한 참회와 반성 성명서 발표 (주관 : 동학민족통일회, 청년회 중앙본부, 여성회본부)와 관련하여
교령을 비롯한 중앙총부의 주요 교역자와 종법사 등 원로 그리고 서울과 인근 지역의 주요 교역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천도교는 결코 친일한 적이 없다”는 ‘극우적(?)인 발언에서부터 “지금 참회하지 않으면, 천도교는 없다”는 ‘극좌적(?)’인 발언까지가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참석자들의 구성상, ‘반대’가 우세했지만 그 자리에서 결론은 “천도교의 친일 행적 부분을 참회 반성하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분들이 이해하는 ‘어감’은 각각일 겁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과 그에 관한 구체적인 '정세분석'은 차차 싣기로 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데 대한 제 생각은 간단하게,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돌아가자'가 아니지요.
2.
그게 ‘콤플렉스’의 일종이 아닌가 하여 인터넷을 뒤져봤는데 안 나오네요. 예전에 어디서 본 내용인데, 남자의 경우 성장 과정에서 처음에는 아버지를 ‘완전한 인간’ 내지는 ‘가장 훌륭한 성인’으로 본다고 합니다. 저 어렸을 적에는 그러했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자의 경우는 ‘어머니’를 그렇게 보는지, 아니면 여자도 ‘아버지’를 그렇게 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면, 아, 아버지도 한 사람의 인간이구나 혹은 아, 아버지도 잘못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깨달음, 경험)을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아버지와 다투게 되거나(이것이 ‘생각 변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거나(이건 기대와 존경이 부서진 것에 대한 보상심리겠지요.) 그 충격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게 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일탈’ 행위를 저지르게 된답니다. 그러다가, (일반화시킨 구분이지만) 자기가 아버지가 되고 나면 비로소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불완전한 모습)’을 이해하게 되고 다시금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루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자의 경우,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게 되고서야 ‘어머니’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대화합’을 하곤 한다는 얘기도 본 것 같은데)
3.
그렇게 볼 때, 천도교는 지금 아버지(천도교)의 인간적인 모습(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을 직시하는 시점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날 간담회 자리에서 대다수 원로님들은
“천도교는 친일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천도교는 어쩔 수 없이 친일했다.”(변명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죠.)
“천도교는 ‘항일한 것’이 더 많다.”(그렇다고 친일행적이 사라지지는 않죠.) 는 식으로,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10배 쯤 긴 그분들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 겁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그것이야말로 참된 이신환성입니다.)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로분들 중 대다수는 천도교가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했다거나 천도교 교령 이하 중요 교역자들이 ‘학도병’ 모집 강연이나, ‘성전(聖戰-일제의 만주침략전쟁, 태평양전쟁)’을 “총후(銃後, 아마 ‘후방’)에서 지원하자”며 성금 납부를 독려하던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알면서도, 변명의 논리를 제시하는 분도 계셨지요.)
어떤 분은 "하필 왜 지금 친일문제를 들먹이느냐."며 '노무현 정권'의 음모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지금에 와서 왜 다시 들먹이느냐."며 울화통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게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 정리' 문제는 시간이 지난다고 결코 '없어지지' 않지요. (예컨대, 오늘, '불멸의 이순신'이 끝났습니다. 그거, 400년 전 이야기입니다.)
4.
천도교는 그동안 동학혁명이나 3.1운동, <개벽>지 발행이나 어린이 운동 같은 ‘자랑’만을 늘어놓고,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천도교의 업적을 몰라준다고 투정하기 급급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인들은 귀멀고 눈멀어 천도교의 참모습 전체에서 겨우 50% 정도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깨끔발로 뛰어서는 결코 멀리 갈 수도 빠르게 갈 수도 없다는 것이
지난 60년 동안 천도교 역사가 증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천도교 역사는 ‘아버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대립’하는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아마 ‘친일 행적’ 발표와 관련하여 ‘나는 앞으로 교회 안 나오겠다’고 하는 어른들도 있을 겁니다.) 이 단계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비로소 ‘천도교의 나신=본모습’을 대면하고 그리하여 참으로 ‘천도교’를 이해하고(교리든, 철학이든, 역사든, 사상이든) 그리하여 화해(수련, 공부, 실천)할 수 있을 때 천도교는 ‘성인(成人)’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사실, 친일행적 같은 것은 감추고, 변명하려 들때는 두고두고(후천 오만년 내내) 천도교의 발목을 잡지만 털어 버리고, 풀어 버리면 '역사란 이미 흘러간 것'일 뿐인데 거기에 얽매일 이유가 없는 겁니다. 현명하게 바라보고 용기있게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정세분석-역사]친일행적 참회와 사과 동학뉴스닷컴- 한이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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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반성, 천도교의 공식입장을 촉구한다
이희관-2005(포덕146년)/8/31(수)
사단법인 동학 민족 통일회(이하 동민회)는 지난 29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명단 발표에 발맞추어 천도교의 과거 친일행적을 반성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천도교 여성회 본부와 천도교 청년회 중앙본부가 함께 서명한 성명서는 '오늘 우리 천도교인들은 미완의 광복을 완성하고 통일의 민족사를 밝게 열기 위하여 일제시대 말기에 천도교단과 일부 천도교인들의 친일행위를 민족앞에 참회한다'고 말하고 일부 천도교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민족사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성명서는 또 '우리의 참회는 오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와 아울러 민족이 계승하고 자랑해야할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 또한 역사에 기록하여 민족의 정기와 천도교 본연의 이념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우리는 누구나 성명서에도 지적했듯이 1930년대 말 천도교의 일부 지도자들이 비록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라지만 그들이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정신총동원 천도교연맹' '국민총력 천도교연맹'과 같은 친일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과오를 저지른데 대하여 어떤 형식으로든지 딛고 일어서야 할 우리의 과제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있다. 그러나 천도교사의 큰 획을 긋는 이러한 중차대한 일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전체 천도교인의 의사를 묻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 추진되었어야 했으며 일부 단체의 몇몇 집행부의 판단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엄중히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좋은일이므로 모두가 동의하여야한다는 일방주의 방식으로 모처럼 마련된 기회를 살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내부 분열을 유발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되었다는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특정신문이나 특정정당과 대립각이나 세우고있는 등 그 동안의 지독한 정치적인 행적으로 보아 정적 몇 명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하여 정치적인 잣대로 친일명단을 꿰어 맞춘 것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독립군을 고문하고 살해하는데 앞장섰던 여당의 일부의원들의 선친을 명단에서 제외시켜 그들의 명백한 친일행위에 면죄부를 주어 매국노 이완용이 웃고 갈 명단이었다는 악평까지 나오고 있다.
어찌하여 주도적으로도 하지 못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명단을 발표하는 그 자리에서 화답하는 자해 형식으로 발표하였는지 그리고 동민회와 청년회, 여성회는 각각 어떤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 대외적으로 발표하도록 결의되었는지 기밀사항이 아니라면 모두 공개하기 바란다. 아울러 천도교중앙총부의 공식적인 입장도 이와 같은지, 그렇다면 왜 명단에서 빠졌는지 밝혀주기 바라며, 반대로 다르다면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당당히 밝혀주기 바란다.
5230 과거사반성, 천도교의 공식입장을 촉구한다 이희관- 천도교 홈 2005/08/31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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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반성, '개인의견'으로 밝혀져
이희관-천도교 홈 2005(포덕146년)/9/1(목)
지난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명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천도교의 과거 친일행적을 참회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동학민족통일회를 비롯한 천도교의 일부 부문단체는 내부 의사결정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부문단체를 사유화시켰다는 지적과 함께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1일 천도교 고위관계자에 의하면 동학민족통일회는 물론 여성회본부나 청년회본부 어느 곳도 아무런 내부 의사결정과정이나 교단내 기관장회의 등 어느 곳에서도 동의를 받지 않은 것으로써 결국 시류에 영합한 소영웅주의자들의 정치색 짙은 개인의견일 뿐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교단의 공식의견인지 묻는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아무런 회의를 열지 않았으므로 공식여부를 말할 수 있는 요건 조차 성립되지 않는다고 확인해 주었다며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우리가 진정으로 반성해야할 부분은 주권을 잃은 상황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정신을 지켜냈던 선조들이 아니라 수백만 신도의 막강한 교단을 바닥으로 추락시킨 바로 우리들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참회하지 않고 선조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다른 종단에서 과거사를 참회했다는 얘기를 아직 듣지 못했다며 대부분 종단의 눈부신 발전을 보더라도 과거사 참회와 종단의 발전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교령이 성명서에 서명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함으로써 또 다른 파장도 예상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앙총부에는 지방교구에서의 빗발치는 항의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감사원에 제소하는 방안과 관련 부문단체에 항의 방문단을 파견하는 문제까지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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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단의 과거사 반성에 대하여
김호성 (hwarm@chollian.net) -천도교 홈 2005(포덕146년)/9/2(금)
천도교단의 과거사 반성에 대하여는 대외 선전용이 아닌 대내적인 진정한 참회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행한 기자회견은 조금 성급한 처신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참회가 아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참회의 장을 마련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60년 동안이나 그냥 침묵해 오던 문제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를 한다고 하니까 그들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참회문을 발표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굴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요.
천도교단의 선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3.1운동을 일으키셨지만 살아 남은 사람들 중에서 많은 수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나중에 일본의 막강한 국력앞에 저절로 머리를 숙이고 독립의 의지를 포기하고 내선일체의 친일운동에 앞장섰던 일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자랑스런 선열들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이 분들 역시 우리의 선배요 조상들인 만큼 누워서 침 뱉는 비판은 삼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거울삼아서 다시는 이러한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는 참회의 장을 기획하여 천도교단 내에서 거교적으로 개최한다면 이는 쇠운이 지극한 천도교단을 혁신하여 교회를 새롭게 중흥시키는 역사적인 모멘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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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발표장을 다녀와서
임순화 (dlatnsghk@hanmail.net) -천도교 홈. 2005(포덕146년)/9/2(금)
* 이 글은 주간 종교신문의 청으로 써 보낸 원고입니다.
4338년 8월29일 민족문제 연구소 주관 친일 인명사전편찬에 따른 1차 명단 발표 가있었다. 이날 우리 천도교도 과거 우리의 선배님들께서 행하신 친일협력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하였다. 천도교인의 한사람으로서 또한 친일인사에 포함된 아버님의 딸로서 동시에 국권침탈기로부터 광복이 되기까지 45년 간 우리민족이 어떻게 무너져갔으며, 또한 애국지사라 이름하는 이들이 어떻게 변절되어갔나를 낱낱이 밝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반평생을 바치다 그 일에 지쳐 작고하신 임 종국 씨의 동생으로서 본인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였다.
오늘 나의 소회는 왜 그때 아버님을 비롯한 천도교의 선배님들이 차라리 죽음으로서 지조를 지키지 못하시고, 소극적이나마 일제에 협력하여 오늘 이 수치를 당하며, 그 어느 종단보다 가장 극렬하게 항일하였던 천도교의 보국안민의 역사에 汚點을 남기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친일청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으며 자신의 아버지까지도 친일파 명단에 수록할 수 있었던, 그 正 筆의 힘은 역시 천도교인이셨던 아버님의 피와 정신을 이어받은 천도교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자부하며 본인은 이 사실을 謙虛하게 받아드린다.
그 당시 아버님을 비롯한 일부 천도교인들이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그 苦惱를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3.1운동이후 천도교는 포 덕 77년 [1936년] 8월14일지일 기념일을 기해 4세 교주이신 박 인 호 춘 암 상사 님의 지도 하에 개 같은 왜 적 놈을 일 야간에 멸하여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기도를 전 교인이 하였으니 이를 戊寅 滅 倭 기도 라하며, 이것이 발각되어 천도교는 더욱 핍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경제적 자립과 배움만이 나라를 구 할 수 있다는 一念 하에 농촌계몽운동과 출판 문화운동에 전념하며, 그래도 교단이 滅 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선배님들의 臥薪嘗膽의 쓰라린 마음을 이제 그 누가 증명해 줄 것이며 그 누가 믿어 줄 것인가? 다만 그 당시 비록 교단의문을 닫고 모든 지도부가 순도 순국했다면 하는 회한만이 가슴을 칠뿐이다. 그러나 아버님은 광복 후 고향에서 국회의원 출마권유를 받고도 이를 거절하셨다.
천도교의 간부로서 일제에 협력한데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또한 오빠가 친일 행적을 조사하다 아버님의 함자를 발견하고 어찌하오리까? 고민할 때 "너" "네 아비 이름 빼려면 그 글을 쓰지 말라" 시며 아들에게 정 필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다. 이제 와서 천도교의 항일 공로를 이유로 인명사전에 수록됨을 항의하지 않는다.
광복이후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친일잔재 청산이 오히려 친일파의 농간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들이 광복된 조국에서 애국자로 변신하여 국정을 壟斷해 오며 권력 유지를 위해 관제 빨갱이를 양산해내고 분단상태를 악용하여 민족정기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뒤늦은 감이 있으나 이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적 과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오빠께서도 말씀하신 바 있지만 자신의 부귀 영달을 위한 적극적 친일파와 苦肉之計의 심정으로 어쩔 수없이 일제에 협력한 분들에 대한 玉石은 가려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것을 가려내는 것 또한 용이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란 정직한 것, 오늘 비록 다소 억울하게 친일파 명단에 올라있는 분이 계시다 하드라도 그분들에 대한 공과는 반드시 가려질 날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또다시 민족반역자를 가려내야 하는 민족적 비극이 재현되는 일이 없도록 참회와 용서, 이해와 포용의 국민적 화합으로 이 일이 매듭지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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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어떻게 할 것인가?
동학뉴스닷컴- 한이 2005-09-05 14:00:48,
천도교 친일행적 참회 이후, "그 사람들"의 총 반격이 거세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이 점을 다시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천도교 친일 행적 참회는 잘한 일이다.
이 일의 잘못을 거론하는 그분들은 우선 '절차상'의 하자를 거론하고, 그 내용의 잘못에 대해 직접 얘기하기를 꺼려 한다. 물론, 내용의 정당성이 절차상의 잘못을 가려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절차상의 잘못에 대해 징계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달게 받으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분들의 궁극 목적은 (절차상의 하자를 빌미로 한) 그러한 징계를 통해서 "내용의 정당성"마저 오손시키고 친도교의 친일 행적 자체를 다시금 은폐, 호도하려는 데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들은 돌멩이를 던지면서 '공권력'에 저항했다. '돌질'은 현행법을 위반한 일일 뿐 아니라, '국민정서법'에도 위배되었고, 나아가 수많은 '동료(전경)'들의 숱한 '부상'과 심지어 '사망'까지를 자아내게 했다. '돌질'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 잘못된 '돌질'을 빌미로, '잘못된 권력'에 대한 저항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또하 나의 과제는 "천도교단과 일부 천도교인들"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알려 나가는 일이다. 내용은 모른 채 "변명과 호도"부터 접하는 교인들이 99%인 상황에서, 자칫, 이 문제가 악용될 소지가 많은 것이 현 실정이다.
다음 문제는 그분들은 '왜 그렇게 하는가' 하는 문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목을 걸고, 과거 친일 행적과 친일 소행을 감추고 호도하려 드는가? 그들이 소위 '선생'으로 부르는 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 문제야말로 "그렇다, 아니다"의 문제다.
'그렇다'는 점은 그렇다 치고, 무엇이 아닌가?
친일을 감추고 호도함으로써" 그분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나아가 지난 60년 동안의 온갖 파행과 거짓의 개인사(예컨대 가짜도정 따위의)를 감추고 나아가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들의 내면에 도사린,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정치적인' 사안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개입되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 원리다.
그러한 교직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마저 반대하는 것은? 그것은 '경상도 지역의 서민'들이 '민노당' 대신에 '한나라당'을 죽자사자 찍어 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분들은 '진실' 대신에 '믿고 싶은 것'에 길들여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거의 친일 행적을 대충 알면서도) 대놓고 "천도교는 친일한 적이 없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것은 '역사'를 보는 '기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둘 일이고...(상대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우므로...)
나아가,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친일행적' 조사와 '친일인명사전 제작'을 '좌익 세력'이 하는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위험한' 자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의 와해가 소위 '빨갱이' 때려잡기를 통해서였다. 아직도 그런 잣대로 이 일을 호도하려는 자에게, 나는 구역질이 난다.(어제 저녁부터 굶었다. 진짜로 밥맛이 떨어졌다.) 이에 대한 '논리적' 대응이 필요한지는 차차 생각해 볼 일이다.(이런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돌아가시도록 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청년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앞서 얘기했듯이, '바르고 정당한 것'을 '대다수 교인들'에게 제대로 알려 나가는 일이다.
둘째, 스스로의 각오를 다시금 다져야 한다. 이것은 누구를 벌하자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겠다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고개를 정정당당하게 넘지 못하면, 앞으로 천도교와 청년회는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한다. 통일이든, 환경이든, 어린이든, 여성이든, 인권이든, 정의구현이든.... 내 똥밑도 씻지 못하는 자가 도대체 무슨 일에 대해서, '바른 것'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말하고, '새 세상'을 말하겠는가? 그것은 코미디도 아니다.
셋째, 청년회에 우리의 꿈을 심는 일이다.
종무원장이 "청년들이 100명 늘어나면 늙은이들이 다 물러나겠다. 나이로 얘기하지 말고 실력으로 얘기하자."는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 반대다. '늙은이'들이 다 물러나야 청년들이 100명으로 늘어난다.(말장난 아님 ^^ 이러니까 말장난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힘으로 몰아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약속(?)도 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정당한 방법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늙은이'들이 없는 땅에 새로운 집을 쌓아 올려야 한다. 지금, '빈 터'로 화한, '청년회'가 대안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이 문제에 이렇게 아득바득 달려 들어서 골치를 썩여야 하는가? 그래야 우리가 신앙(교리와 교사와 수련)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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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벽종소리(10타)친일행적 참회관련 편파적 비판은 부당함
천덕산 (korea_o_un@naver.com) -2005(포덕146년)/9/5(월)
**친일 성명서 발표 책임논란관련 여성회 본부(회장) 감싸기와 청년회(장)에 대한 편파적 비판은 부당하다**
8.29 민족연구소 주관 친일행적인사 발표행사에서 우리교단의 2개 부문단체(여성회 본부, 청년회)와 사단법인 동학민족회가 참석, 천도교의 일부지도자들의 친일행적을 사죄 참회하는 성명서 발표관련 아래 참고 게시판에 지적한데로 교단 내 공식의견 수렴과 합의 없이 부문단체에서 사적 행동한 것에 대한 책임 문제가 대두고 있는 시점에서
종무원장을 비롯한 일부 교직자들이 이번사건에 대해 여성회 본부(회장:고윤지)에 대해서는 책임추궁과 비판을 기피하면서 유독 청년회(회장:고시형) 대해서는 잘못을 추궁하고 있음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이러한 편파적 행동은 여성회(장)에 대한 봐 주기식 행위 또는 고의적 기피증세 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편파적 행동들은 교단의 미래발전에 중대한 장애물이다
(종무원장의 청년회 창립 기념식 축사 내용과 대교당 마당에서 몇몇 교직자들이 청년회장에 대한 집중추궁)
동 문제관련 교단 내 청년회원(회장)은 나이로 보아 젊은 새싹들이라고한다면 여성회 본부 (회장)은 전체교인의 50%을 차지하고 있고 더구나 지금시대는 여성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되어 버린점을 감안하면 여성회원 대부분이 남편이 있어 실제로는 우리 전체 교인수의 대부분을 장악할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것으로 본다면 실제 여성회 본부(회장) 활동의 중요성을 보아도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문제에 있어 교단의 어느 기관보다 여성회본부(회장)에 대한 난법난동한것에 대한 책임추궁과 질책과 비판을 가하여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 겠는가 ?
이것은 청년회(회장) 행동을 비호하고 여성회(회장)만을 비판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라. 성격상 그런 유치한 행위는 하지 않는다. 오로지 교단내 사람이나 여타 교직자들이 상식적이며 사실적 근거에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상황판단에 있어 객관성과 형평성이 강조되어야한다는 것을 청년회에 대해서만 책임추궁하는 이상한 사람들과 향후 교단의 발전을 위해 현재 교단의 동향을 자세히 모르는 순진한 전체교인들에게 전달하는 한편 21' 개벽종소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종무원(장)과 여성본부(회장) 중심으로 중앙단위 교직자들의 정책과오와 난법난도 행위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바른소리(비판)와 교령과 종무원(장)여성본부(홰ㅣ장)등에서 요청이 있을시 우리 종단발전을 위한 각분야의 대안을 지원협조하는 몫을 조금이나마 수행하고자 한다
우리교단의 중앙교직자들이나 여타 어른들이 여성회에 대해 바른소리를 기피하는 이유를 관찰한바 교령선거 등등 감투경쟁에서 청년회 보다는 여성회 본부(회장등 간부)가 크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또한 오랜 기간 이래저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성회 본부(회장)과 감투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상부상조한 협력관계가 지속되어 있어 감히 바른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이다. 분명 이러한 처사는 부당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한사례로 현재 여성본부 간부들중 그동안 교령선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교령선선출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2명의 전임 교령의 직계 혈통관계자가 두명이 있으며 여타간부는 종무원소속 관장급과 극히 가까운 친인척관계에 있거나 특정지역만의 사람들로 오래동안 연계되어 왔음은 공지된 사실이다
이번 친일행적 발표 사건발생관련 진정한 종단 발전을 위해 교인들은 물론 종법사등에서까지 종무원이나 감사원등 교단차원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고 총부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21‘개벽종소리의 쓴소리 또는 바른소리(비판)의 대상은 출발 당시부터 대학생단과 청년회와 교구(지역차원)에 대해서는 제외하여 왔다. 그 이유는 우리교단에서는 이들이 새싹과 같은 젊은 연령대로 어른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며 일부 교직자들이 난법난도 행위를 함부로 하는 등 모범적 행동을 보이지못하는 주제에 그들에 대해서는 격려와 칭찬 이외 공개적으로는 여하한 쓴소리를 하지 않는다것과 젊은이들의 육성발전문제에 가장 비중을 두고 있음이 기본 방침이며
또한 교구(전국적 교직자)를 제외한것은 천도교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와 같이 총부중심이 아닌 교구중심으로 교회 활동이 유도 되어야 교인간 반목과 갈등을 많이 배제할수 있고 나아가 교구발전의 활성화를 기할수 있다는 판단를 하여 교구에 대한 여하한 비판은 금지한다는 원칙을 지금까지 준수하여 왔다
따라서 이번 사건발생관련 21'개벽종소리에서는 동민회 경우 사단법인(통일부 등록)으로 교단의 법적 독립기구로 가타부타할 수 없는 것이며 (청년회는 위 참조) 여성본부(회장)의 이번의 독단적 행위(아래 게시판 내용 참고)는 지난시기 전체 회원들의 의견수렴이 없이 호주제 폐지활동에 대한 사과와 원상회복을 하지않는 상태에서 또다시 난법난도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것은 도조히 이해할수 없는 비상식적 비도덕적, 반천도교인적 행위로 규정하고 해 강력대응할 것이다
(극히 일부에서 21'개벽종소리와 여성회장간 사이가 좋지않다는등 감정이 있는것으로 오해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의 모략이며 공사(公私)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우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여성회장이 사적인 문제에서 여하한 교류와 협조를 해온다면 적극 환영할 것이다)
*이와관련 종무원장은 여성회본부 회장의 독단적 행위로 이상한 사회단체와 공조하여 호주제 폐지활동에 이어 또다시 외부단체와 천도교인 친일행적 참회 성명서 발표한것에 대해 공개 비호하지 말며 조속한 시일내 월보, 여성회보에 공개사과하토록하고 그간 교단의 명예손상과 일부 교인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원상회복 토록 조치하라 .
* 그간의 직무 태만과 여성회본부 회장에 대해 유독 편파적으로 비호하는 종무원장은 위의사항을 준수한뒤 양심적인 판단아래 스스로 퇴진할수 없는가 !
(동 내용을 수정 보완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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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부문단체의 친일행적 참회 성명서 발표관련 내용)
이희관: 2005(포덕146년)/8/31(수) 과거사반성, 천도교의 공식입장을 촉구한다
이희관 2005(포덕146년)/9/1(목) 과거사반성, '개인의견'으로 밝혀져
이희관 2005(포덕146년)/9/1(목) 친일청산에 대한 소고
김호성 2005(포덕146년)/9/2(금) 천도교단의 과거사 반성에 대하여
김관희(종학대학원장) 9.4(일) 대교당 설교에서 보국안민 제하 천도교 부문단체에서 친일행적 관련 일개 사회단체의 하나이며 좌파적 성향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하는 행사에 참가하여 천도교 부문단체(사단법인 동민회. 천도교 여성회 본부, 천도교 청년회)가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친일행적 참회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라는 내용의 요지로 언급
-시일 마친후 설교를 들은 일부 교인과 교직자(도훈?)들은 부문단체들의 천도교인의 친일행적 성명서 발표 행위에 반발, 교령등 종무원장에게 강력 조치할것을 요구하였음
*21'개벽종소리에 대해 이메일로 많은 지원과 협조로 참여 바랍니다. 젊은이들 그리고 어르신 여러분 교단이 부끄러울 정도로 침체와 퇴보를 하고 있음은 여러 대내외적 원인이 있겠으나 그중 가장 장애 요소라 한다면 감투욕심에 가득찬 난법난도자들이 수년간 수십년기간 버젓이 교직활동을 허용하여 소위 가짜 사이비 교자들이 종단의 모든권한을 장기간 장악하왔으며 이에 일부사람들이 이들과 부화뇌동 하여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슴뜨겁게 인식하여야 하겠습니다.가만히 앉아서 얻어지는것은 없습니다. 기회적 처신은 교단과 나라를 망하게하는 가장 치명적 독약입니다
지금까지 천도교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누군가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수 있는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을 발휘할수 있는 교인이 나와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공부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다 자아완성을 하지못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남의일에 간섭할수 있는야 등 보신적 행동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되지 맙시다 초등학생 수준이라도
판단할수 있는 난법난도 행위를 하지말라는 것인데 더 이상 무슨 공부가 필요하단 말인가?
Re..그렇다면 동민회가 더 문제
이희관-2005(포덕146년)/9/5(월)
천덕산님께서는 '동민회 경우 사단법인(통일부 등록)으로 교단의 법적 독립기구로 가타부타할 수 없는 것이며.....'라고 주장하셨는데 님의 관점을 존중합니다만, 그렇다면 오히려 동민회가 더 큰 문제를 떠안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독립기구인 동민회가 무슨 자격으로 천도교를 대표하는듯한 행동을 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더불어 독립기구인 동민회가 무슨 근거로 여성회와 청년회를 참여시켰는지 설명해야 하며, 여성회와 청년회의 지도감독기관인 교화관은 또 무엇을 했는지도 설명해야 합니다.
세상 이치란 그리 편리한것만은 아니어서, 피박 면하려다 날벼락 맞는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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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측 친일인사명단은 누가 조정했나?
김호성 (hwarm@chollian.net) -천도교 홈 2005(포덕146년)/9/5(월)
이번에 발표된 천도교측 친일인사명단이 당초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초안을 천도교측과 협의하여 수정이 되어서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그 협의과정에 천도교측에서는 누가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자신들이 조사해서 발표하면 그만이지 사전에 천도교측에 사실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해서 천도교측에서 발표자 명단을 조정하는데 관여했다면 이는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스스로 자술서를 작성해서 주고는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당초에 명단에 들어 있던 분 중에서 몇 분은 빠진 것 같은데 그 기준은 무엇인지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공평한 것이 아닌가. 사적인 인연으로 인해서 정실이 개입되었다면 이는 8월29일의 참회문 발표가 위선적인 행위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의 참회문 발표가 지난번 북한에 다녀올 때 북측 대표들과 약속한 것이어서 미룰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또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가. 북측대표들과 무슨 권한으로 이와 같은 약속을 할 수가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만일 그러한 약속을 하고 왔다면 대교인보고회 때 이러한 내용도 같이 보고하고 그에 대한 사전 준비과정이 있어야 했는데 내가 알기로는 전혀 없었다.
천도교단이 일부 인사들의 개인적인 생각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현실에 대해서 참으로 걱정되는 바가 크다. 교중에서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서 논의되고 합의되는 풍토가 아쉽다. 언제부터 우리 천도교단이 이렇게 물렁 물렁해 졌는지 알 수가 없다. 교인들의 보다 적극적인 주인의식과 참여정신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냥 방심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까 심히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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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단의 친일문제에 대하여
김호성 (hwarm@chollian.net) -천도교 홈-2005(포덕146년)/11/5(토)
최근에 남해에 계신 도인들로부터 편지 두통을 받았습니다. 한분은 교구장님이시고 또 한분은 종의원님이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지난번 세종문화회관에서 동민회장이 발표한 성명서에 대해서 규탄하는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그냥 조용히 넘어갈 상황은 아닌 것 같고, 이참에 이 문제에 대한 천도교인들의 의견수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제 소견을 피력해 보고자 합니다.어떤 사람이 행한 행위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는 보통 나타난 행위의 결과만을 보고그 행위와 더불어 그 행위를 한 사람까지도 함께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속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살펴보지도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서 사실은 그게 아닌데 억울하게 남으로부터 괜한 오해를 받고 불명예스럽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의암성사께서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명월관 기생들과 주색잡기에 빠져서 지내실 때에 일본총독부 관리는 물론이고 천도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의암성사를 마치 천도교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사이비교주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의암성사께서 3.1 독립만세운동을 성사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의암성사의 진면목을 깨닫고 의암성사를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치하에서 사시던 우리의 선조들은 마치 전쟁터에서 항복을 하고 목숨을 부지한 전쟁포로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신의 동지들과 싸우기 위한 진지를 구축하라고 해서 그 명에 따라서 진지를 잘 구축해서 그로 인해서 자신의 동료들이 많이 죽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그 전쟁포로들을 나중에 적군에게 협조한 배신자들이라고 비방하고 모욕을 한다면 이는 정당한 행동이라고 저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일제 말기에 일본군부가 힘에 부치는 싸움을 벌여 놓고 최후의 발악을 하는 상황에서우리 민족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자신들의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대중연설을 하게 했고,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는 신문사설을 쓰게 했고,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는 전쟁물자를 헌납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약점을 잡아서 온갖 협박을 다 감행했던 것을 우리 동포들은 이미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일본을 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협조하라고 연설을 하고, 글을 쓰고, 전쟁무기를 헌납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백성들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아마도 별로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의 제자들은 지금도 자신들은 독립운동가의후예라는 생각에 추호도 의심이 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해방후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사회를 혼란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분열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 친일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 밖의 다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이 약점을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단내에서 이 문제를 주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구파측에 속해 있는 분들인데 그 분들은 최린선생을 따르던 소위 신파측 사람들이 춘암상사님의 법통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 분들의 명분을 죽이기 위해서 최린선생과 그 제자들을 친일파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야측에서는 주로 친북성향이 강한 인사들이 최린선생을 친일파로 몰고가는 데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최린선생이 해방이후에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이를 당시 북한에 막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던 천도교 청우당 조직을 이용해서 무너뜨리고 천도교단이 중심이된 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기도했던 3.1 재현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큰 이유가 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그리고 친일을 했다는 분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동족과 천도교단을 배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도교측 친일인사로 거론된 분들의가정을 살펴보면 최린선생을 제외하고는 참으로 사는게 정말로 어려웠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돈화선생 같은 분도 생활비를 적게 가져온다고 사모님의 성화에 하루도가정이 편할 날이 없었다는 말을 바로 옆집에 살았던 방전환선생의 친자 되시는 분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종린선생 같은 분도 비록 천도교 교령을 지내셨지만 생활이 어려우셔서 사모님이 삼선교 시장에 나가서 콩나물을 팔아서 겨우 연명하셨다고 그 친손자 되시는 분이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천도교 신파측의 두목들 중에서 그 자손들이 물려 받은 재산이 있어서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 분은 한분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에 의암성사께서 3.1운동을 성공시키지 못하시고 사전에 발각되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면 지금쯤 의암성사는 사이비 교주로 전락했을 것이고, 천도교단도 역시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한 때 번성했다가 사라진 역사의 한 사건으로만 기록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최린선생의 계획대로 3.1 재현운동이 성공할 수만 있었다면 지금쯤 최린선생과 그 제자들이 친일파로 몰려서 수모를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인물 평가할 때에는 나타난 결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고 그 사람의 진심은 어떠했는가도 함께 평가하는 것이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도교 구파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항상 들고 나오는 무인멸외 기도사건도 알고 보면 치명적인 약점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천도교단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일본 총독부에서 분개하고 천도교단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했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 천도교지도자들은 일제치하에서 어떻게든 독립을 쟁취하려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천도교인들 만큼은 인정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인멸외기도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날 때에도 거의 대부분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는 독립운동을 생각하지도 않겠다는 각서를 써 놓고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저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 각서만을 가지고 그 분들이 독립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고 판단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일본 경찰은 물론이고 우리 천도교인들도 아무도 그 각서의 내용에 대해서 액면 그대로 믿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남겨진 자료만을 가지고 그 분들의 행적을 평가하고자 달려드는 데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천도교인들이 모두 자랑스런 독립운동가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선배들이 한 번도 우리들에게 독립정신을 포기하라고 직접 가르치신 적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천도교인들은 천도교 선열들에 대해서 누워서 침뱉는 식의 모욕적인 언사를 함부로 내뱉는 경솔한 행동은 앞으로는 절대로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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