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단국대학교 #대종교
'국민 대학교'는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 건학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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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에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발족 되었다. 임시정부의 정신을 잇는 인재 육성이 건학 이념이라 당연히 임시정부 요인들과 대종교인이 주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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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에는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 였으나 대종교 원로 '범정 장형'이 학교 설립에 실질적인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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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로 국민대 교가는 대종교 원로이자 한글 학자로써 시조의 대가인 '가람 이병기'가 작사했다. 국민대 연혁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조희재 여사'의 토지 기부(5만평)가 초기 재단 구성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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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각별하였던 '장형'은 '신익희'가 임시정부를 떠나 '이승만' 측에 가담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신익희'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여겼고, 국민대학은 더 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형'은 '국민대학'과 결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의 설립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단국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명은 백범이 지었다. 바로 '단군의 나라'라는 뜻은 '단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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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동 집에 해공(신익희) 선생이 오셨어요. 우리 집에서는 손님이 오면 여자가 안 들어가요. 저나 아버지, 비서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아, 범정 왜 이러십니까"하고 야단이 났어요. 우리 아버지(범정)가 "해공, 어찌 백범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이요”하면서, 해공 선생을 막 때리세요. 그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니까, 따라온 사람들이 들어가서 말렸죠. 그때 이제 결별하게 된 거에요. - 장충식 이사장 증언(2007년 3월 17일, 자택에서 한시준·이성규 교수 청취, 출처: 『단국대학교 7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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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단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대학은 '홍익대학'이다. 학교의 설립 목표는 "민족정체성의 기본인 국학분야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심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기른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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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학이념은 교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연히 '홍익인간'이다.(사진1)
재단은 바뀌었지만 대종교 원로원장이자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겠다는 취지에서 설립한 '신흥대학'이 '경희대학교'로 바뀐것과는 다르게 교명은 변경하지 않았다.
학교의 상징에는 홍익인간이 명시되어 있다(사진2) 홍익대학의 '교화' 또한 당연히 '무궁화'이다.(사진3) '무궁화'는 '대종교'의 '교화'이고 '임시정부'의 '국화'였다.
광복후 '대한민국'의 '국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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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것은 교가이다.
재단이 바뀌기 전과 후의 교가를 보자.
홍익대학의 초대 학장인 대종교 원로인 독립투쟁가 정열모 선생이 작사한 당시 교가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 앞뒤뜰에 퍼진 겨레는/ 오천년 뿌리박은 깨끗한 핏줄/ 빚어낸 불함문화 아름다우니/ 이상은 홍익인간 그 아니큰가/ 여명의 대한 땅에 샛별과 같이/ 숙명적 홍익대학 나타났도다"
재단이 바뀐 후 교가는 (사진 4)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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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의 창학정신은 '구국', '자주' '자립'이다. 대종교 원로 범정 장형 선생이 조희재 여사의 토지 기부를 기반으로 민족의 동질성을 잇는 뜻에서 교명을 단국으로 하고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창학 이념에 이러한 뜻이 잘 나타나 있다. (사진 5)
학교의 상징물 또한 검은 곰이다. (사진 6)
교가에도 '단군'과 '범정 장형'을 기리는 가사가 잘 나타나 있다. 교가의 작사가는 대종교 삼일원주로써 독립투쟁가이자 국학자인 '산운 장도빈'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