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안에서 비판자는 악역으로 손가락질 받는다. 비판을 하면 사람을 네거티브하게 낙인찍는다. 한국불교의 빗나간 상황을 비판하지 않으면 포교는커녕 불교를 만난 공덕도 얻지 못한다. 불교 안에 잘못된 요소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불자들의 의무이다.”
이제열 법사(재가결사 법림)는 지난 2일 서울 장충동 우리는선우 법당에서 ‘불교안의 비불교적 요소 해부’를 주제로 강연했다.
미디어붓다는 “이 법사는 40여 년을 재가법사로 정진해 왔다. 그러나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무엇이 한국불교가 갖고 있는 잘못된 점이고, 한국불교를 병들게 하는지 지적했다는 이유 그는 불교에 애정이 없는 사람, 심지어 데바닷타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고 보도했다.
“공덕을 말하는 것보다 지혜를 강조하고, 반야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자가 가야할 삶이라는 그의 주장을 사람들은 삐딱한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렸다”고도 했다.
| | | ▲ 적연 이제열 법사는 2일 우리는선우 열린토론에서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요소를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미디어붓다) |
“스님의 무당 짓 비판했더니 인신공격 받아”
이 법사는 “불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종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의 고귀성을 지키지 못했다. 특히 한국불교는 1600년 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다. 불교는 과거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잘못된 것을 척결하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점이 기독교와 불교가 다른 점”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에는 이단논쟁이 많다. 이단과 사이비를 가려내려는 시도로 기독교 교단 안에서 갈등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리가 정화되고 확고해진다는 설명이다.
이 법사는 “한국불교는 절에서 스님들이 무당 짓을 해도 아무런 말이 없다. 불교를 왜곡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악다구니처럼 덤벼들어 인신공격을 해댄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흐름 속에서 불자들의 사고는 부지불식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고, 사는 게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따위의, 즉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지혜가 흐려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한국불교, 섭수만 하고 절복하지 않아 문제”
이 법사는 비불교적 요소가 출현한 원인을 불교 정착과정에서 지역의 기존종교나 사상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경향에서 찾았다. 섭수와 절복, 즉 섭수는 나쁜 것을 포용하는 것으로 방편이고 절복은 나쁜 것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목표이다. 이 법사의 지적은 여기에서 혼선이 빚어졌다는 설명이다.
이 법사는 “한국불교는 섭수에 치중했지, 절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불교 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정작 불교가 뭔지 모른다. 개신교는 다르다. 이 사람들은 절복 중심이다. 처음에는 마찰도 있고 어렵지만 이 사람들은 그것을 고수했다. 그러다보니 순교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불교사에는 순교자가 없다. 고려불교가 망하고 조선에 들어와 탄압을 해도 순교자 하나가 없었다. 불교인들 자체가 이미 무엇을 척결하고 조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며 “비유컨대 뱀과 용이 섞여서 뭐가 뱀인지, 용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불교, 정법의 대중화엔 무관심해 문제”
이 법사는 한국불교에 비불교적 요소가 출현한 두 번째 원인을 한국불교가 정법의 대중화에 무관심한데서 찾았다.
이 법사는 “한국불교는 법을 믿지 않고 불상과 스님을 믿어왔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지만 한국불교 불자 다수는 법에 관심이 없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법사는 “불교역사에서 과연 대중을 위한 법회가 얼마나 있었는지 보라. 거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위한 법회가 열렸을 뿐이다. 때문에 일반불자에게 불교에 입각한 세계관·진리관이 형성되지 못했고, 그저 불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편 정도로 인식됐다”고 지적했다.
“한국불자들, 법 아닌 방편에 끌려 다니니 한심”
이제열 법사는 “부처님만이 발견한 진리가 있다. 이것이 법성이다. 그런데 한국 불자들은 법성은 뒷전이고 방편만 횡행한다. 그 방편은 절을 위한 방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한 이유는 절이 아닌 중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절을 짓거나 절 운영하려고 방편만 유행한다. 상당수의 멍청한 신도들이 이런 방편에만 끌려 다닌다. 기가 막힐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국불교, 삿된 것 골라내려는 의지가 없다”
이 법사는 비불교적 요소들이 출현하는 네 번째 이유로 ‘정사(正邪)를 판단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불교TV에서 말도 안 되는 설법이 방송될 때가 있다. 우려할 만한 내용이 1년 넘게 전파를 타는데도 이를 제어하거나 개선하려는 사람도 단체도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한국불교의 비불교적 요소가 뭐냐고?”
이 법사는 한국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출가승들의 청정성 타락 ▷비계율적 행위 ▷가승 , 잡승, 유랑승들의 활개 ▷사이비종단의 대거 출현 ▷절 안에서의 무속 행위 등으로 꼽았다.
예를 들어, 출가비구는 주례를 설 수 없는데도 서고 있고, 출가자는 세속인에게 돈을 줄 수 없는데도 수해 등이 나면 종단 대표가 방송에 출연해 돈을 내고 있다.
이 법사는 “이런 행위들은 율에 대한 무지이거나 알고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법당 안에는 절대로 귀신을 끌고 들어오면 안 되는데도 한국불교에서는 법당 안을 영가로 도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불교, 머리 깎은 무당들이 판친다”
이 법사는 “한국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보고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는 비불교를 불교인줄 알고 수용을 하는 것 같다. 한국불교의 상당부분에서 머리 깎은 무당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법사는 한국불교가 대처제도를 허용하는 것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처는 예전에는 독거사, 즉 머리 깎은 거사로 불렀을 뿐, 스님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법사의 주장이다.
이 법사는 “소위 정통 불교를 추구한다는 조계종이 대처승들과 함께 종단협의체를 만들어 함께 하고 있다. 큰일이다”라고 개탄했다.
“중생 어리석게 만드는 방편은 불교가 아니다”
이 법사는 “대처승들이 운영하는 사찰들은 대부분 사찰 운영을 정법에 의해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부처님 법성은 찾아볼 수 없다”며 “그 속에서 점을 보거나 귀신 푸닥거리를 하거나 재를 지내고 있으니, 한국불교에서 진정한 불자의 수는 많이 잡아야 5만 정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국불교에서는 토속신앙과의 결탁에 따른 정법 훼손, 칠성불공, 산신불공, 용왕불공, 신중불공 등 잡신들을 신성화한 미신적 신행행태가 자행되고 있다”며 “지혜와 연결되지 않은 방편은 악교 방편이다. 부처님의 방편은 선교방편이다. 중생을 어리석게 만드는 방편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시주? 감사의 뜻보다 귀신이 무서워 내는 경우 대부분”
이제열 법사는 “불교의 시주형태도 정법에 의지한 시주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정법을 만나 이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어 감사한다는 뜻으로 내는 시주는 사라지고, 귀신의 장난이 무서워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내는 재에 시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이 법사는 “혹여 정법불교를 하는 포교당이나 모임이 있어도 그곳을 찾는 불자들은 정법의 선양을 위한 희사가 아닌 회비 내는 불교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견 등지면 영원히 불성은 사라져”
이 법사는 “경전과 전통에 부합되지 않는 수행자들의 설법이 만연돼 있고, 수행의 상품화에 따른 법성의 둔화가 심각하다”며 “▷출가승 이미지 회복을 위한 노력 ▷비불교적 신행 행위 금지 ▷법성의 보호를 위한 호법기구 설립 ▷비불교적 요소 척결을 위한 사부대중 교육 등을 제안했다.
이 법사는 “계율을 깨뜨리면 혼자 악도에 떨어지지만 정견을 등지면 영원히 불성을 무너뜨리게 된다”며 <중아함경>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소개했다.
“고타마시여, 내 섬김이 믿음과 지혜를 혼탁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것을 그만 두겠습니다. 받들어 섬김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해 질 때에 비로소 그를 받들어 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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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이 법사는 “한국불교는 절에서 스님들이 무당 짓을 해도 아무런 말이 없다. 불교를 왜곡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악다구니처럼 덤벼들어 인신공격을 해댄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흐름 속에서 불자들의 사고는 부지불식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 선이고, 사는 게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따위의, 즉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지혜가 흐려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본문
1.1. 이 법사의 말처럼 행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본다.
무당 짓을 비판하면 악다구니처럼 공격하는 이유는 승려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며,
불자들의 지혜가 흐린 것은 교학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할 기회가 없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해결책은 출가나 재가나 근본교설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불자라면 근본교설을 알아야만 한다는 상식이 생기도록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한다.
2. 이 법사는 “한국불교는 섭수에 치중했지, 절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불교 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정작 불교가 뭔지 모른다. //
2.1. 섭수는 유전문 세계에서 일이요, 절복은 환멸문 세계 일이라 할 수 있다.
절복이 없다는 것은 환멸문에 대한 지혜 부족이 아닌가.
이어지는 문젯점은 모두 근본교설에 대한 지혜가 부족해 생기는 게 대부분이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있는데.. 그 말 속에 사람들은 바꾸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이대로는 안된다. 바뀌지 않으면 사라진다.
출가이든 재가이든 오늘만이 아닌 내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오늘 불교는 변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를리 없다.
바뀌어야 한다는 합의가 생기면 일단 바른 불교에 대한 이해가 생겨야만 한다.
12처와 12연기법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교설에 대한 담론과 설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야만 한다..()..
재미있는 말씀 하나 :
조계종 행정업무에도 관여하셨던 어느 보살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님들이 신도들에게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법화경을 사경하고, 지장경을 읽으라고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쉬쉬하면서 아함경을 읽더라."
다행히도 조계종 스님들의 강원과목에도 아함경이 포함되었고요.
(이것이 자승스님 치적중의 하나로 거론되더군요.ㅎㅎㅎㅎ)
요즘에는 초기경전에대한 세미나도 활발하게 개최합니다.()
3. 이 법사는 한국불교 안의 비불교적 요소를 ▷출가승들의 청정성 타락 ▷비계율적 행위 ▷가승 , 잡승, 유랑승들의 활개 ▷사이비종단의 대거 출현 ▷절 안에서의 무속 행위 등으로 꼽았다.//
3.1. 저런 상황은 새 결집을 해야할 시기라는 겁니다.
불교사에 나오는 걸집은 모두 이대로 두어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판단아래..
벌인 결사 운동입니다.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3.2. 역사에 나오는 결집은 모두 출가승단을 위한 결집임을 알 수 있는데..
이제는 재가자를 포함하는 4부대중이 참석하는 결집(=결사)이 있어야 할 때라고 봅니다..
4부대중이 참석하는 불교란..
일전에 남방 불교를 공부한 각묵스님 주해로 금강경 역해이 출판되었는데..
대승 정신에 입각한 설명을 보다가 남방 불교의 눈으로 보는 해설이 참신한 맛은 있지만..
기존의 해설이나 각묵스님 해설 모두 수행자를 위한 해설이란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대중이다. 그 말은 출가자가 중심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대중속으로 뛰어든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인도라는 계급 사회는 평등을 주창하는 불교가 가장 필요한 곳이었지만..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권력이 탐탁하게 여길리 없으니.. 사원 불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 대승불교가 중원에 들어왔지만.. 왕권 국가였던 중원이었기에 변형된 대승불교가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올바른 대승불교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비로서 실천될 수 있는 불교임을 알아야한다.
그런 대승불교의 <금강경>이라면 어떻게 해석되어야만 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중 입장에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그런 것을 수행 중심인 남방 불교의 눈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야 말릴 일이 아니지만..
그 해석이 과연 금강경을 바르게 본 게 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위에 올린 글의 판단의 잣대를 보면..
청정한 수행을 하는 출가자를 모델로 삼고 있다.
대승불교의 중심은 보살이다.
보살은 출가자가 될 수 있으며, 재가자가 될 수 있다.
그때 출가자는 수행만 하는(自利) 출가자가 아니다. 그러나 돈을 밝히는 출가자는 더욱 아니다.
보살 출가자 모습도 새삼 정립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