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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넷: 다시 복현동, 그리고 플라타너스 길>
놈도 제대를 했다. 1978년 10월 말이었다. 나오고 나니 좀 싱거웠다. 뭐 그리 섭섭할 것도 없었다. 복학을 하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제대 말년보다도 더 무료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몇 줄씩 읽기도 했지만, 참 심심했다. 마침, 마을 앞에 취로 사업이 있어서, 철들고 처음으로 마을 청장년들과 어울리면서 일을 했다. 아예 막걸리 통을 가져다놓고, 김치 쪼가리를 안주로 몇 잔씩 마셔 가며 길을 닦았다. 모닥불에 손을 호호 불어 가며, 이빨이 시린 막걸리를 마셔본 사람들은 그 맛을 알리라. 저녁에는 그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기도 했지만, 뭔가 허전했다.
그 무렵, 조기 졸업제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놈은 복학 자체를 망설였던 적이 있다. 달리 무슨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학 생활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철 이른 봄비가 오는 1979년 2월 어느 날, 놈은 집에서 가까운 절간을 기웃거린 일이 있다. 마음을 좀 다잡아 볼 요량이었는데,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림 고수들의 활극을 뜻밖에 거기에서 구경하게 되었다. 무슨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땡초들의 초식은 현란했다. 놈은 쓸쓸히 돌아섰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봄 학기에 복학을 했다. 조기 졸업제를 믿고 2학년 1학기에 등록을 한 것이었다. 마지막 학기라고 믿었던 7학기에 가서야 안 일이지만, 우리 학번은 대상이 아니었고, 교양 과목 한둘을 시험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놈은 조기 졸업제를 철석같이 믿고, 제법 열심히 학점을 따 나갔다. 술이 깨지도 않은 새벽에, 두 번도 보기 싫은 교직 과목까지 신경을 쓰곤 했다. 학점은 7학기 만에 다 딸 수 있었지만, 마지막 두 학기를 여유 있게 나누어 수강 신청을 했다.
다시 돌아온 복현동, 3년 세월에 많이 변해 있었다. 목이 말라 남학생들이 더러 수업을 빠지면 여학생들이 노트를 해서 남학생에게 전해 준다는 예의 관념이 아예 없었다. '졸업 정원제'라는 것이 녀석들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지만, 서로의 노트도 보여 주지 않았다. 살벌했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그런 말은 그들의 용어가 아니었다. 작년에 졸업한 선배 누구는 학교가 아니라 무슨 기업체에 갔느니 하는 것이 그들의 화제였다.
놈은 다시 답답했다. 그러던 중, 76학번 장모라는 학생이 경대 학보에다 '겨울 화단'이라는 시를 발표한 것을 보았다. 참 잘 다듬어진 시였다. 2학년이 되어서야 학과를 선택하게 되어 있던 시절이라, 놈은 신입생 환영회라는 것을 복학 후에 또 한 셈이었다. 그래저래 얼굴을 알고 있던 학생이었다.
놈은 물어 보았다. 한 편에 원고료는 얼마를 주느냐고. 놈은 늘 목이 말랐고 목이 마른 그만큼 주머니가 허전했으므로, 자기 글이 실릴 가능성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물어 본 것이었다. 3000원, 요즈음으로 치면 '0'이 하나쯤 더 달리는 것이었으리라.
어찌했든, 그 동안 끌쩍거려 두었던 것을 한 편 손질하여 학보사에 제출했다. 일주일 뒤 뜻밖에 놈의 글이 활자화되어 나왔다. 그 전에 어떤 일로 놈은 본의 아니게 후배들에게 반쯤 영웅이 되어 있던 터였다. '그런 형이 시까지 한다.' 녀석들이 신기한 눈으로 놈을 대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시를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먼저 복학하는 바람에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린 것은 놈이 했지만, 거름을 주고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은 나중에 복학한 耳木의 도움이 컸다.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시를 읽고 토론하고 하면서 그럭저럭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무렵, 솔울이 어떤 모임을 소개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거기에도 고개를 내밀었는데, 참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자주 만나자면 같이 있어야 한다며 솔울이 제안한 것이었는데, 자기가 우정 식당 같은 데로 와 주면 좋으련만, 예나 지금이나 술을 안 하니 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놈이 순순히 동의한 것은, 거기에도 2차엔 술이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거기에서 참 너무나 많은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배가 아프지만, 횡설수설 마구 지껄여댔다. 아직 총각이었던 놈에게 결혼 문제로 상담을 해 오는 후배가 있을 정도였으니, 놈의 장광설이 어떠했는지 짐작하시리라. 그러는 동안 놈의 바람은 잠복기에 들어간 셈이었는데, 솔울이 입영을 하고 놈은 그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다시 허전했다. 시무룩해서 플라타너스 길을 걸어 귀가하던 도중, 느닷없이 하나의 구절이 놈의 뇌리를 스쳤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고등 학생 시절에 누구나 한 번씩은 읽었을 구절이지만, 놈은 갑자기 그 구절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사실, 놈은 茶兄의 작품 중에 "가을은 차 끓이기에 좋은 계절" 비슷한 구절이 들어 있는 짤막한 시를 더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구절이 궁금해진 것이다. '플라타너스가 사람과 같이 길을 걷는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백문이 불여일견, 계속 그 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플라타너스는 놈을 따라오지 않았다. 일청담 양지바른 쪽에 팔베개를 하고 비스듬히 누워서 한참 하늘을 쳐다본 뒤에 길을 걸어 보아도, 플라타너스는 '묵중한 수도승'처럼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 존재란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 절감하고 있는데, 플라타너스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석 달쯤 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가 물구나무선 여자의 허벅지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 시절 놈이 관심을 갖고 있던 persona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처용이었다.('사탑' 편집을 맡은 후배 녀석이 졸라대는 바람에 놈은 '처용의 귀가'라는 희곡을 한 편 써 준 적이 있다. 공주 식당을 배경으로 한 현대판 술꾼이야기인데, 급하게 노트에 써 주는 바람에 원고를 잃어버렸고, 결정적인 대목의 긍정문이 부정문으로 바뀌어 인쇄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잡처용(雜處容)'이란 제목으로 한 편을 끌쩍인 적이 있는데, 그 마지막 연은 "물구나무선 / 플라타너스의 가랭이 너머 / 막걸리빛 하늘이 젖어 있다."였다.
숙제가 풀리지 않는 날은, 정문 쪽에 카아바이트불을 켜 놓고 포장마차를 하던 춘천댁에 들렀다. 그 분의 택호가 춘천댁인지는 모르지만, 닭갈비나 막소주 같은 것이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라, 놈이 속으로만 하나의 상징 체계로 그렇게 부르기로 했던 것이었다.
반 년 정도를 놈은 '플라타너스와 인간의 동행 가능성'을 탐구했지만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 해 겨울에는 구관 연습실을 혼자 점령하고 하이데거의 어떤 저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기억도 난다. 그 과정에서 제법 많은 분량의 연습장을 채웠는데, 놈의 노트는 茶兄의 시에서 만난 '플라타너스 길'과 未堂의 시에서 만난 '팔 할이 바람'이 overlap되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까발리기로 한 이상, 몇 편 구경하고 가자. 그리고 진짜 시인의 시도 좀 구경하자고 하자.
바람 1
雨水가 가까운
플라타너스 길에서 만난 바람이
손을 내밀고 있다.
熱病으로 겨울을 났다는
바람의 손바닥엔
못 자국 대신에
플라타너스의 葉脈 같은
실핏줄이 돋아나 있다.
바람 3
해가 질 때면 돌아오는 길, 발목을 잡고 늘어지던 바람이 포장마차의 긴 의자 옆자리에 쭈그리고 앉는다. 한 盞의 술이 비워질 때마다 柯枝에선 또 하나 젖은 言語가 지고 있을까. 차가운 병 목덜미를 맴돌다가 바닥에 잦아들면 어둠이 되는 바람, 쌓이는 어둠의 무게만큼 하나하나 빈 술병의 레테르들이 하얗게 충혈되고 있다. 어디선가 두 눈만 퀭한 사내가 내 헛지랄을 훔쳐보고 있다.
바람 6
가을이 깊어 가면, 바람은 서걱이며, 관절이 부러진 갈대들을 버릇처럼 일으켜 세운다. 바람은 가을의 어느 구석이나 쓸고 가는 것. 늦은 저녁, 그저 비워지는 술잔 언저리를 맴돌다가, 포장마차의 카아바이트 불꽃도 흔들다가, 그 어려운 골목골목을 돌아, 내 방에 먼저 돌아와 있을 바람은, 한숨에 섞여 까닭 모르게 떨어지던 한 방울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서먹서먹하던 저녁의 길모퉁이를, 개들이 짖어대는 어두운 골목의 끝을, 바람은 충혈된 눈으로 아직도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바람 3과 바람 6의 이미지가 겹쳐지듯이, 놈은 몇 년 간 비슷한 바람 타령에 매달렸다. 얼마 전 '말과 여백'의 카페에 들어가 보았더니, "지금도 그 때만큼 어떤 일에든지 진지해질 수 있을까요? 형님, 여전히 바람이 부는데 말입니다."라고 어떤 후배가 경구를 남겨 놓았다. 아이고, 이 후배야. 그 땐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없었던 일로 하자.
후배 그 놈도 장가이다. 김지하의 시를 타이프라이터로 쳐서, "목숨이 걸린 것이니, 형 잘 보관해야 된 데이."하고 당부하던 놈이다. 그러고 보니 장가는 바람둥이인가 보다. 아니, 바람잡이인가? 사실 확인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불란서 장가 중에도 바람잡이가 있다고 했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 또 살아 보아야겠다." 뭐 이런 종류의 경구를 날린 장가가 있다는 얘기를 그 시절 다른 후배에게 들은 일이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무늬만 좋아 그 시절 그 신발을 좋아했다는 분에게 물어 봐야겠지만, 후배 그 녀석이 좀 미덥지 못한 데가 있어서 안심이 안 된다. 사실이라면 불란서 장가는 확실히 고수다. 단 두 줄로 결론을 내리고 말다니. 결국, 꾸역꾸역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일 테니까 말이다. 또다른 불란서 장가는 "무엇은 무엇에 앞선다."라고 더 짧은 경구를 날렸다는 후문인데, 큰놈의 버전으로 말하면 "바람은 밥벌이에 앞선다."가 되는지 모르겠다. 기장이 짤막한 불란서 장가 한 놈은 철가방을 들고 다니다가 배우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종친회에 가 봐야 알 수 있겠다. 사실이라면 "장's family is 장's family!" 이건, 불란서 장가를 위한 큰놈의 배려이다. 큰놈이 불어를 모르니 영어 흉내를 좀 내자, 불란서 장가들이 '장'을 제대로 읽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놈이 플라타너스 길 탐구를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들이 속속 복학했다. 그 중 놈은 이모라는 친구와 거의 매일 어울렸다. 언젠가는 일요일도 없이 연달아 53일을 마신 적이 있었다. 길 탐구 대신 술에 탐닉한 셈이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귀가하는 도중 일청담 양지바른 곳에 누워 간혹 몇몇 '계집애'들의 이름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항용 플라타너스 길을 택했었고, 돌멩이가 있었다면 몇 개는 또 발로 찼으리라. 먼저 밥집에 가 있던 이모라는 친구를 만나면, 그 날 저녁은 또 행복했다.
그러나 세월은 놈의 자유를 무한정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1981년 봄, 그러니까 놈이 3학년 일학기 수강을 하고 있을 무렵, 선거를 하러 오라는 놈의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고향에 갔다가, 엉겁결에 선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40여일 만에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이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냥 참아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 놈의 소망이다.
이제 연애도 좀 해 봐야겠다 하고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을 무렵에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놈은 이제 플라타너스 길로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술도 줄여야 했다. 일년 뒤에 살림이라고 날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고향에 가 봐야 했다. 아쉬웠지만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놈의 바람은 잦아드는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첫댓글 1979년 2월.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하는 시점에서,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학교를 떠난다는 허탈함과 서러움에 목말랐던 시절입니다. 누군 결혼하고,누군 어떤 남자랑 연애하고 등의 바람결의 소문이나 염탐하며 지내던 시절, 짱은 복학을 하고 제2의 바람을 시작하고 있었군요. 멋있는 남자는 꿈도 꾸지 못하고
남들의 화려한 인생출발을 지켜보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때 전화 했으면 미친듯이 뛰어나가 술마셨을텐데,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그때 꺼 찾아 먹읍시다.
'플라타너스가 사람과 같이 길을 걷는다.'... 전 그걸 믿어요. 까마득한 날, 허랑한 바람결에 휩싸여 과수원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사과나무와 교감하던 날들이 있어.../ 작품 마당에다 '바람1, 바람3, 바람6, 열병1'도 올려 주셨으면...
위에 두 분의 격려 고맙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좋게 봐 주셔서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술은 아직도 있으니, 목마른 분들은 언제 한 잔 합시다.
도망치듯이 훌쩍 군대를 가고, 재대를 해서 바로 복학하면서 다시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두려웠는데, 큰샘이랑 몇몇 동기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반갑던지. 큰샘과 함께 후문앞 다방을 빌려 시낭송회를 하고, 일청담 호숫가 잔디밭에 앉아 시를 토론하고, 끝나면 후문 어디쯤에서 막걸리를 퍼마셨던 그 시절
지나놓고 보니 참 좋은 시절이었던 같네요. 저 위에 '바람1'은 이제 다시 보니 기억이 나네. 플라타너스 잎을 '바람의 손'으로, 그 손금처럼 생긴 잎맥은 바로 바람의 흔적.. 아직 그 길에는 그 때 그 바람의 흔적들이 남아있겠지. 푸른 잎을 달고, 혹은 길가 여기저기 떨어진 채 바람에 흔들리며...
불란서 장가라니? 정가지. 장은 짧은 소리고, 정은 긴 소리다. 정다르크. 정폴베르몽, 정발잔, 정꼭도... 정-(한국)>쟌-(불란서)>존-(영국)>욘, 요한(독일)
남자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 또 든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구속하면서 살아와 놓고. 다양한 경험, 거기에서 잉태된 시구들. 바람, 바람, 스쳐간 바람들 부럽습니다요. 그저 착한(?) 딸의 틀에서 벗어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살아온 단순한 나의 삶들.
남자들 하나도 안 부러워요. 골치 아픈 일이 여자들보다 더 많은 것 같아서, 난 골치 아픈 것은 체질적으로 못 참아하거든요. 포기하든지 아님 빨리 처리를 하든지... 난 단순한게 좋은데. 이러니 발전이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