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를 오독誤讀한 존 머레이 목사님이 벌이신 코미디???:
존 머레이 <확정성화의 독특성: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우리>
다음은 ‘존 머레이 {성경과 기독교 윤리} 김남식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0)’ 247쪽~252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깁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밑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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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진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신자들에게만 실재하는 ‘죄에 대한 죽음’과 ‘의 안에서 사는 생명’이다.
…(중략)…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죽고 소생하셨을 때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참으로 갈보리와 삼 일만의 부활이라는 단회 사건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자는 신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은 아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이 그들을 사실상 신자로 만든 것이 아니란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를 효과 있는 은혜의 작동 전에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해야만 하는 다른 측면들이 있다.
…(중략)…
바울이 특히 강조하고 있는 바는 사람이 복음의 유효한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와 죄의 세력과 단번으로 결정적 단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발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사셨을 때 발생한 일과 비슷하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번 죽고 오직 한 번 다시 살아나셨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실현의 영역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다. 이 경우 죽고 소생하는 것은 주님 경우와 한가지로 결정적이고 최후적인 것이다. 이 사실을 모호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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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라는 단어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요?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다고요? 정말로 코미디네요! 하하하!!!” 하며 웃을 천재, 존 머레이 목사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천재 신학자는 있겠습니다.
다음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305쪽~306쪽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깁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밑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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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죄와 동일시돼 죽으셨다. 그리고 바로 오직 그 까닭 때문에 그분은 저주받은 나무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죽으신 것은 바로 그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죄에 대해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권능을 멸하셨으며 죄에 대해 심판을 집행하셨으며 의와 생명의 주로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영역을 설정해 놓으셨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서 승리하고 심판을 집행하셨을 때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또한 하나님의 구상, 지혜, 계산, 은혜의 경이로움을 나타내는 기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은 것으로 인식돼야 한다. 기본과 중심은 바로 이 사실이다. 그것의 기이성奇異性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서 그 실재성, 그리스도와 그분 백성과 연합 안에서 하나님에 의한 실제적 작정 속에서 그 실재성을 손상하거나 약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나셨을 때 우리가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화된 것은 오직 과거의 완료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이고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죄와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정적이고 확정적이라는 사실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취소하거나 반복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까닭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신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살 수 없다는 교리에 관해 어떤 양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죄는 더 이상 신자를 주관하지 못한다. 여기서 모호한 태도를 갖는 것은 그리스도 죽으심의 확정성을 공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신자에게서 새 생명으로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진입은 그리스도 부활이 결정적이고 확정적이라는 사실에 따라 요구된다. 부활의 취소나 반복을 용인할 수 없듯이 우리는 모든 신자가 새사람이며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의 몸은 멸해졌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 새사람으로서 그들은 성령의 거소와 성전이 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리에는 어떠한 양보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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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나셨을 때 우리가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화된 것”이라는 구절을 두고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가 존재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화됐다고요?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고백한 의義의 직접 전가론을 부정하는 동일화 실재론으로, 정말로 코미디네요! 하하하!!!” 하며 비웃을 천재는 있겠습니다. 물론, 미국 정통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주님을 섬기셨던 존 머레이 목사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천재 신학자입니다. 우리나라 장로교회 개혁신학의 거목이신 죽산 박형룡 목사님보다 자신을 더 뛰어난 신학자로 여기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이철 같은 천재 신학자입니다.
“값진 생명의 씨”와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임에도, “수태(초기중생) 시 값진 생명의 씨를 주시고”, “출산(완전중생) 시 새로운 본성 주신다.”며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했던 불후의 듣보잡 피터 마스터스 목사처럼 20세기 개혁신학의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을 대적하는 것은 좋은데, 신학박사 학위가 없는 Wolf이철과 같이 신학박사 학위가 없는 이 천재 신학자가 에베소서 1장 4절 상반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를 두고 “창세 전에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택하셨다고요? 정말로 코미디네요! 하하하하하!!!” 하며 바울 사도를 대적할까, 걱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영생, 그 값진 생명의 씨를 받아 본성이 의롭고 거룩해진 중생자는 점진성화의 길을 걷는 이생에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씨”(요일 3:9)인 그 거룩한 값진 생명의 씨는 영화榮化까지 이어지는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완전한 생명(요 10:28)입니다. 그런데 신학박사 학위는 없지만 자타공인 조나단 에드워즈 저격수로서 이 천재 신학자가 신학박사이신 유창형, 이윤석, 이상웅, 정부홍, 김병훈 교수님을 천재 신학자 자신을 대적하는 교만한 삯꾼으로 모는 것도 좋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이단시해도 좋고, 신대원에서 공부하지 않은 저를 상대하지 않은 것까지는 좋은데, 에베소서 2장 5절~6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를 두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귀해 높이 되셨을 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고요? 에효,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는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나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팩트 아닌가요? 우리 나이가 2022살이 넘었나요? 특히, 지금 우리가 실제로 이 지상에 있지, 하늘에 있나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코미디에요! 하하하!!! 크크크!!!” 하며 바울 사도를 대적할까, 걱정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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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지웅 <코메디???>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FEtO/3321
아래 그림은 edwardsian 박사 유창형의 [에드워즈 전가교리에 대한 연구]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첫사람 아담과 우리는 동일체로서 공존하며, 아담의 선악과 범죄에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이 유창혁 박사의 논문 로직을 따르면,
1. 우리도 그 범죄에 동일체로서 공존하며,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하니까, 선악과 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열매의 맛은 어떤지,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2. 우리 모두 아담안에 동일체적(실재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면, 우리 모두 나이가 최소 6천살은 넘었고, 모든 사람의 생일은 아담의 창조일이겠네요?
3. 우리는 창세기 시대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 팩트 아닌가요? 에드워즈는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유전설의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만든다는 설입니다. 동일체설에 의하면, 우리는 첫사람 아담안에서 실재적으로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워즈의 동일체설과 유전설 사이에 자체모순이 생기지 않나요?
4. 에드워즈는 우리도 선악과 범죄를 실재적으로 저질렀다고 주장하니, 이 죄도 회개해야겠네요? 혹시 회개하신 분이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전 이런 회개를 한 바가 없어서요.
에드워즈의 동일체성 전가를 실제로 응용해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정말 코메디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이 이상한 교리를 성경적인 전가원리로 수납을 하라구요?
에효.... 정말 이 동일체성 전가의 교리가 말이나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