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8:1-15
찬송가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드디어 임한 하나님의 말씀(1-2)
엘리야가 아합 앞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이 언급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에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 뒤에 많은 날이 지났습니다. 본문 1절은 2년이 지나 3년째가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지난 시간 동안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숨어 지내며 먹을 것을 공급하고, 아들을 고쳐준 일 외에는 성경에 기록된 일이 없습니다. 시돈 땅 가까운 사르밧에서 머물면서, 조국이 가뭄으로 신음하는 모양을 지켜보면서도 하나님의 별다른 말씀이 없어 기다리는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무료하지만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그들이 물을 주관한다고 믿었던 바알에게 얼마나 많은 제사를 드리며, 많은 제물을 갖다 바쳤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더라면, 바알이 신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로서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가뭄의 때를 언제 끝내시려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언제 다음 스텝의 말씀을 주시려는가에 대해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 시간을 우리는 잘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을 잘 감당하지 못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은 성급하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했기 때문에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믿음 없음이, 잠자코 머물며 하나님의 때를 가늠하고 기다리는 일을 잘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나온 모든 시간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가장 정확하게 우리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인도해오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서 보냈던 이 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첫 해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연히 안 오겠지라고 생각했겠으나 2년이 지나면서, 3년이 다 차가면서 “하나님 언제입니까? 이제는 비를 내려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발을 굴렀을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작정하신 때가 내일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의 오늘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 우리를 떠나지 않음을 믿는다면,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손길 가운데 우리가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앞날도 그 손에 맡겨드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6장 3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그때가 도래하기까지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믿음을 갖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이 지경으로, 파탄으로 몰고 간 주범이 아합입니다. 그 아합 앞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한편 아합은 오바댜를 부릅니다.
아합과 오바댜(3-5)
(3-5)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오바댜가 왕궁 맡은 자였다고 합니다. 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왕을 보좌하는 핵심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오바댜를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잡아 목숨을 빼앗을 때, 선지가 100명을 50명씩 나눠 굴에 숨기고 먹을 것을 공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 여호와를 믿는다,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가 살아온 행적 가운데 맺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요한일서 4장 20절 하반절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마태복음 7장 20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바댜가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살리기 위해 애쓴 삶의 행적 때문입니다.
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쁘기는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왕을 보좌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촌음을 쪼개어 쓰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감당할 일을 외면치 않고 해냅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왕 옆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그 증거로 무엇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 증거로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하루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아합은 여로보암과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본위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면, 아합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고, 아예 바알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이스라엘로 음란하게 섬기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2계명을 어긴 것으로 수렴된다면, 아합은 1계명부터 어긴 셈입니다. 그것도 자신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같은 죄를 범하도록 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아합 옆에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오바댜가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어려웠을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당장에라도 관직을 내던지고,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그들의 불신앙을 두고 보면서 내적 갈등에 휩싸여 얼마나 많은 분노를 혼자서 삼켜야 했을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모멸감과 그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는 자괴감에 몸부림 쳤을 것입니다. 이런 오바댜가 실제로는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아무렇지 않게 악을 저지르는 세상 한 복판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과 오바댜가 겹쳐집니다. 오바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궁 맡은 자로서 지금까지 붙어 있는 것은 단지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기 위함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100명의 선지자를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그 자리에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역기능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 욕망 가득한 채로 흘러가는 곳이라고 해도 그곳에 나를 두신 까닭이 있음을 기억하여 참고 인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회사가 나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기도해봐도 형편 없는 곳이라는 결론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작정 사직서를 내고 이직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바댜의 경우를 통해서 본다면 말입니다.
이 아합이 정말 악한데, 이렇게 물이 없어 기갈하던 절체절명의 시기에도 자기가 돌보아야 할 백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재산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바댜에게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냇가로 가자고 말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가면 풀이 있고, 그 물과 풀로 자기 말과 노새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어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짐승 먹일 물과 풀을 찾으려고 하는 이 아합이 왕다운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소유인 가축은 돌보면서도 정작 자신이 섬기고 잘 다스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과 권력을 오남용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이처럼 비정하고 타락한 모양으로 사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합니다.
물 근원을 찾기 위해 둘은 전 국토의 반을 나눠서 물 근원을 찾아 떠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아합에게 오바댜가 순종합니다.
오바댜와 엘리야(6-15)
(6-8)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6절에는 아합이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갑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서로 다른 공간으로 간 것을 표현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둘의 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합의 길이라 함은 우상을 통해 내가 욕망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빌고, 추구하는 길이며, 오바댜의 길이라 함은 하나님의 경외하여, 하나님의 손발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오바댜는 길 위에서 엘리야를 만납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내 주”라고 부릅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이 네 주”라고 합니다. 요는 자신이 아합을 만나겠다는 말인데, 오바댜가 중간에서 자신의 입장의 난처함을 말합니다.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진 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엘리야를 향한 오바댜의 당혹감이 느껴집니다. 엘리야가 가뭄에 대해 이야기한 뒤에 아합은 엘리야를 잡기 위해 이스라엘 내부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까리 샅샅이 수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야를 잡으려면, 누구를 타겟으로 삼겠습니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11-12a)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엘리야가 예전처럼 아합에게 나타나려고 말하지만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홀연히 다른 곳으로 인도해버린다는 말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또 홀연히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을 지키지 않으면, 엘리야의 말을 전한 오바댜 자신만 어려움 당하고 죽임 당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보적인 태도로 엘리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오바댜에게 엘리야가 거듭 자신이 아합 앞에 나타날 것임을 말합니다.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주저하는 오바댜 앞에서 엘리야가 만군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엘리야의 이 말은, 만군의 여호와, 어느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한낱 보잘것없는 인간 왕 아합 앞에서 숨는 일 따위는 없다는 의미가 포함된 맹세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오바댜였다고 해도, 엘리야가 갑자기 왜 사라졌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보이는 피상적인 겉모습만 가지고서 판단하지 말고, 그 판단을 유보하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형편을 살피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가뭄을 선포하고 숨을 때가 있었으면, 이제 드러내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줄 때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오바댜 또한 그 부르심의 때에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숨기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길 가운데 정진하는 복된 하루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어진 하루를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감당하되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부르심 가운데 힘쓰는 삶을 이어가게 해주시옵소서. 아합이 왕으로 있는 것처럼 나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악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나를 그곳에 두신 까닭과 계획이 있음을 신뢰하며 그곳에서 다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게 해주시옵소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마음에 새겨,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우리 또한 그 때를 충실히 따라 살아가는 지혜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많은 날이 지나는 동안 여호와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은 엘리야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9-12)
2. 오바댜의 직책과 신앙을 파악하고, 아합을 보필하던 때의 내면을 그려보세요.
3. 아합에게 나타나겠다는 엘리야의 요청에 오바댜가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4.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를 언급하는 엘리야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작성: 이창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