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서 노인은 사과부터 자신다.
6년이 넘는 동안 금식을 해야할 경우를 빼고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사과를 자시는 동안 나는 아침상을 차린다.
이 식사가 노인께서 제대로 들 수 있는 마지막 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차린다.
근자에는 쟁반에 차려서 침상으로 가져다주고 있다.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침대가 좁은 방만큼의 면적이 되니 둘이 앉아도 넉넉하다.
이것저것 골고루 반찬을 수저 위에 놓아주면 이건 밥이 아니라 꿀을 먹는 형국이다.
아침 약 까지 챙겨들면 9시가 된다. 수저를 놓자마자 바로 누워서 다시 잠을 잔디.
정오쯤 노인은 소변을 보러 침상에서 일어난다.
모든 신경을 침대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노인을 칙사 모시듯 점심 식탁으로 인도한다.
식탁에는 제철 과일이 한 접시 준비되어 있다. 과일을 자시는 동안 준비된 반찬을 점심상 위에 올려 놓는다.
보통 12시 반이 지난 시점이다. 아침보다는 식사량이 조금 적다.
약까지 먹으면 1시 15분경. 요양사가 1시 20분에 정확하게 도착한다.
이것이 91세 노환의 남편과 86세 되는, 그 역시 노인인 아내가 사는 집의 순조롭게 진행되는 오전 일과이다.
어제, 정확하게 9월8일 12시.
복숭아와 키위를 깎아 놓고, 노인이 화장실 가기 위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있는데 침대에서 꿈쩍을 하지 않는다.
“여보, 소변보실 시간이에요. 점심도 자셔야 하구요”
“밥 생각이 없어. 아침 먹은 게 과했나 봐”
“그러면 요양사 온 다음에 자시구려”
더러는 요양사가 출근하여 팔 다리를 주물러 주면 그제서야 일어나서 식탁으로 나오곤했다.
그날, 제 시간에 당도한 요양사가 노인을 깨우러 방문을 여니 양복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가시냐고 물으니 “충신동 가!”대답을 한다.
충신동, 1962년 4월 신혼여행 가방을 들고 들어가 1984년 8월까지 23년을 산 집이다.
2미터 골목길에 한옥이 나란히 지어져 있는 가운데 나의 신혼집은 22평 벽돌 양옥집이었다.
앞집은 큰 회사 사장님댁으로 대단한 규모의 저택이었다. 그 골목길에 세탁소가 있었는데 그 세탁소에 간다는 것이다.
며칠 전 그 세탁소 주인에게 값나가는 물건 3개를 맡겨 놓았는데 찾아와야한다고 막무가내다.
이럴 때는 항우장사가 따로 없다.
40 여 일 전에도 어머니가 시시던 집에 가서 영정 사진을 가져와야한다는 기상천외의 고집으로 함께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당신, 따라오지 마. 나 혼자 갈거야. 절대로 따라오지 말어. 당신이 따라오면 방해만 돼. 찾아 갈 수 있어,
바보 취급하지 마. 기분 나뻐” 완강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대문 밖에서는 방향도 모르는 온전치 않은 노인이거늘....살살 뒤따라가리라 마음먹는다.
우리 집에서 10미터를 걸어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3호선 신사역이 나오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7호선 논현역을 탈 수 있다. 노인이 왼쪽 길로 들어선다.
“충신동 가신다면서요? 3호선을 타야지요? 오른쪽 길로 갑시다” 듣지 않고 걷는다.
이럴 때는 성한 사람처럼 걷는다. 나는 팔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거침없이 큰길까지 왔다.
“택시 탑시다. 당신 점심도 안 들었어요. 여기 7호선 타고 가면 종로 5가 까지 갈 수가 없어요. 이 거 부천행 열차야.
중간에 갈아탄대도 너무 힘들고 많이 걸어야 해”
“귀찮게 하려면 따라오지 마. 당신하고는 의견이 맞았던 적이 없어. 늘 반대지. 원수하고 사는 것 같아.“
말을 하는데 그 눈에 증오가 가득차서 섬뜩하다. 오만정이 다 떨어지어 그대로 돌아설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길을 잃고 헤맬 것이 뻔하고 나중에 더 큰 화가 닥칠 것이니 꾹 참고, 할 수 없이 부천행 열차를 탔다.
어디서 내려서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게 그나마 수월한가? 내 머리가 복잡하다.
이때쯤 노인의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고 주저앉을 태세다. 일단 고속터미날에서 내려서 3호선 구파발행을 타기로 하고, 노인을 부축하고 터미널 역에서 내렸다. 3호선 갈아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미끄러질 것 같은 대리석 길이다. 바지 뒷 혁대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끌 듯이 열차에 올라탔다. 종로 3가 까지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막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가 청진동 근처이니 종로 3가 피카다리극장 앞에서 만나자고 할 요량이었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지금 회사 일 바쁘니?”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저, 지금 전라도 광주에요. 출장중이에요”
열차가 동대입구역을 지난다. 충무로에서 내리기로 마음먹는다. 4호선으로 갈아타고 동대문역으로 가서 이대부속병원을 끼고 버스 한정거장 반쯤 걸어가면 충신동이 나온다. 충무로역은 환승하기에도 종로3가역보다는 편하다.
동대문역까지 왔다. 몇 번 출구로 나와야 걸음 불편한 이 노인을 끌고 헤매지 않을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마침 충신동에서 살고 있다는 남자분을 만나서 이 분의 도움으로 승강기와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타며 밖으로 나왔다.
문제는 버스 한정거장 반을 걸어가야 하는 일이다. 내 신용카드에 택시 탈 수 있는 금액이 3만원이나 남아 있으니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속여도 나보고 혼자 택시 타고 가라고, 자기는 걸어 갈테니 세탁소 앞에서 만나자고 고집한다.
세탁소 앞에서 만나자고? 기가 막힐 일이다. 지하철 타는 일은 고사하고 정차 할 때마다.
“여기서 내리는 거지?” “어디로 가야 해?” 길도 방향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세탁소에서 만나자고?
끌다 시피 하면서 1시간을 걸어 충신동 옛 동네에 왔는데 도무지 내 살던 곳 골목길을 찾을 수가 없다.
부동산을 찾아가서 충신동 43번지를 물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여기가 한 시절 그래도 괜찮았다는 종로구 충신동인가?
골먹길은 2미터 그대이고, 양 옆으로 들어선 건물은 주차장도 없이 제멋대로 지어져서 어두컴컴하고
낡고, 시멘트는 벗겨지고 나무 한 그루 없고 슬럼화 되어 있었다.
43번지 내가 살던 집은 입구도 없이 철문 두 개가 닫혀 있고 유리창 하나 없이 벽돌담뿐으로
어떻게 건축 허가가 났을지 의문이 되게 흉물스러웠다. 세탁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여기 사시던 노인께서 36년전 세탁소 사장님을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말을 하니 그분은 십여년 전에 돌아가시고 그 동안 주인이 세 번 바뀌어
자기가 세탁소를 하고 있다고 설명을 한다. 노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도 전혀 수긍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며칠 전에 와서 만났는데 그리고 비싼 것 3개를 맡겼는데 무슨 소리냐고, 날보고 찾아보라고
장승처럼 서서 꿈쩍을 안한다. 사정을 짐작한 주인이 의자를 길가에 내어준다.
“어르신, 어르신을 내거 오늘 처음 뵙습니다. 그런데 뭘 저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어르신이 알고 계신 세탁소 사장님은 벌써 돌아가셨어요. 저는 72세인데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어요.” 애기 달래듯 이분이 말해도 전혀 수긍하지 않고
“ 저 사람이 속이고 있어” “이제 경찰이 와서 수사를 할거야” 한다.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전혀 없다. 아마도 다리가 너무 아파서 쉬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끝 갈데없는 ‘참담함’에 빠진다.
퇴락한 내 젊음이 거기서 증명되는 서글픔과 허망함이라고 할까?
비록 행복한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충신동이
마치 할램가처럼 낙후되어 잿빛 동네가 된 그 거리에, 특별히 출세는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성실했던 한 家長이
저렇게 정신을 놓친 폐인의 노인이 되어 절망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이 현실이 더할 수 없이 비감스러워
차오르는 비애와 슬픔을 목젖 아래로 눌렀다.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타기로 합의를 보았다. 노인도 더 이상은 걷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충신동 입구에서 동대문역으로 가는 길은 온갖 차량으로 거대한 주차장이었다. 러시아워이기도 했지만 워낙 복잡한 거리이다. 빈차라는 표시를 내건 택시도 두 늙은 이가 손을 들고 있는 앞을 그대로 지나가기 열대 이상이었다.
할 수 없이 걷고 앉고 하면서 동대문역까지 왔다. 충무로에서 갈아타고 신사역에서 내렸다.
신사역에서 우리집까지는 언덕길. 내 걸음으로도 12분이 걸리는 거리다.
여기서는 택시를 타기로 했는데 노인이 여기까지 왔는데 걸어서 간다고 우긴다,
집에 다 왔다는 안도인지, 걷는것이 한계에 닿았는지 주저앉으면서 기다 시피, 나는 물에 젖은 소금가마 끌다 시피 돌아왔다.
집을 나간 지 5시간 반 만이다. 소파에 쓰러진 노인에게 묻는다.
“비싼 것, 귀한 것을 맡겼다고 했는데 그게 도대체 뭐요?”
“골프채 3개야”
“골프채? 우리집에 골프채 없잖아? 당신도 애들도 골프 안치는데...?”
“3층 변호사가 줬어...”
집히는 것이 있다.
요즘 내가 ‘목욕탕집 남자들’ 이라는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보고 있는데 거기 나오는 처남매부가
골프치러 다니면서 실랭이하는 장면이 두 회에 걸쳐서 방영 되는 것을 노인이 옆에서 같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월 9일
아침밥만 실하게 먹은 후 두 끼를 거른 노인. 10미터 마다 다리에 힘이 풀이는 노인은
5시간 넘게 걸었어도 멀쩡한데 나는 하루종일 기진맥진 비몽사몽으로 보냈다.
‘참담함’을 모르는 이와 ‘참담함에 저려 버린' 이의 차인인 것인가.
나는 아직도 참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