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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109) 해산하는 여인...
본문 : 요16:16-22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의 긴 말씀은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의 분위기는 대단히
엄숙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은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걱정스러웠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기에....
대단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확신을 주시고자 노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고
하시면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데,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16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날 저녁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중 가룟 유다에게 팔려....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가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머지않아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자들은 도저히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17-18절 읽어라>17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절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
그 말씀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십니다..(본문 19절-20절 읽어라>
19절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은 20절에서 자신의 고난당함을 인해
제자들을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기에
좋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의 가시를 제거한 것처럼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20b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근심이 되는 일로, 곡하고 애통할 일입니다.
그러나 애통 후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잠시 잠깐 후면,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며.....
결국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전의 근심과
애통에 비해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지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자신의 고난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없이는
사랑하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여 구원의
복음을 완수하기 위하여 ....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실패가 아닙니다. 의도된 고난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피할 수 없는 잔임을 알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단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로 단정내리는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고난입니다.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죽음 없이 부활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고난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해산을 앞둔 여인은 여러 가지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담력이 센 여자라고 할지라도
해산날이 가까워지면 온갖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쌓이게 됩니다.
- 자신이 지금 이 아기를 잘 낳을 수
있을 것인지?...
- 아니면 아기를 낳다가 혹시 자신이나
아기가 죽지나 않을는지? ...
- 아기는 정상인지? 아기가 나오다가
잘못하여 다치지는 않을는지? ..
- 아들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딸이면
어떻게 하나? 등 ..
온갖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해산의 과정에서 받는
아픔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
이 세상의 그 어떠한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입니다.
때문에 해산할 때에 고통이 시작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고 울며불며 야단을 칩니다.
실로 이 해산에는 산모나 아기의 건강과
생명에 위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때문에 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산의 때가 가까우면 ...
산모는 물론 모든 가족이 다 긴장하게 됩니다.
지금이야 진통이 오면 병원으로 달려가면 되겠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병원분만이란 것은 없었을 것이고
자연분만이 전부라서 아기를 낳다가
잘못되는 경우도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해산의 근심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는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는
생명을 낳기 위한 예고로서의 진통입니다.
잠깐만 있으면 자기의 분신인
아기를 낳게 되기 때문에...
이 해산의 고통은, 해산의 수고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수고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마다하거나
슬퍼할 사람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걱정을 한다하여
동정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크나큰 생명을 얻고
그로 인한 큰 기쁨을 얻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당하는 고난도
새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0b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고난을 대하는 자세>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고난을 앞두신
예수님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는 말로 형언키 어려운
십자가의 고통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시며
그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마저도 ‘잠깐’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는 말은 헬라원어로 '미크론' 이라고 하여
잠시 잠깐이라는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며
요즈음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마이크로(micro)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잠시 잠깐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빨리 죽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대로 받고 잘 죽지 않습니다.
온갖 수치를 다 경험해야 하고,...
피가 온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 가운데 천천히
죽어가야 합니다. 가장 잔인한 살인도구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오전 9부터 오후 3시에 이르기까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산채로 그렇게 매달리셨습니다.
그리 간단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로 제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받을 영광을 기억하고 잠시 받는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사랑스런 자녀를 바라며
고난을 견디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앞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받을 영광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처소가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괜히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에게는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변하지 않는 약속입니다.
그 천국은 영원한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 영광의 천국을 생각하면 여기서
예수님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받을 영광을 기억하고 잠시 받는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 여기서 받는 고난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해산의 수고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받는 고난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끝이 있는 고난입니다.
고난은 결코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윤회가 아닙니다.
직선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내 인생이 유한하듯,.............
세계의 역사도 유한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있듯.....,
이 세상도 마지막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내 일생의 나날은 물론
그 동안의 기쁨도, 슬픔도, 영화도 모두가
다 잠깐이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고생이나 아픔도
모두가 다 잠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들도 잠깐이라는 생각으로
견디면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 지날 갈 일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현재를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받을 영광을 기억하고 잠시 받는 고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 여기서 받는 고난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의미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고난 받습니까?
잘못해서 고난 받는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15:18-21 읽어라>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절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절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에,....
우상을 타파하고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세우려고 하기에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맹장 수술을 한
여자 집사님 병원 심방을 갔습니다.
심방 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사님이.....
“집사님, 아이를 낳아 보셨으니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아이 낳는 것이 아픕니까? ...
맹장 수술하는 것이 아픕니까?” 그러자 심방을
갔던 사람들 사이에 맹장 수술이 더 아프다는 사람,
아이 낳는 것이 더 아프다는 사람으로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런데 그 맹장 수술을 하신 그 여자 집사님이
참 의미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맹장 수술이 더 아픕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맹장 수술은 의미 없는 고통이었지만,
해산의 고통은 새 생명을 얻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은 가치 있는 고난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에는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이 세상뿐이면 믿음으로 인한 고통이나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사랑스런 자녀를 바라며
진통을 참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진통의 기간이 끝나면 사람 난 기쁨으로 인해서
기뻐할 순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는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고 참는 자에게는
해피 엔드(Happy end)로 끝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으로 인해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당해야 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고난을 그 당한 만큼
하나님 앞에 가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듯 ...
하나님 나라의 꿈을 품는 자가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진정 미래의 분명한
영광과 보상을 바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고
또한 믿을 수가 있다면 현재의 이 고난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저와 성도님들이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여기서 당하는 고난은 작은 것으로 생각하고
“잠시 후면 다시 오실”우리 주님을 담대히 기다리면서,
주님을 위해 더욱 충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