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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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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詩 스크랩 禪宗五家의 詩歌 경계 6. 법안종 선시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126 18.10.19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禪宗五家의 詩歌 경계 / 이은윤


6. 법안종 선시

 

법안종法眼宗은 선종 5가 중 가장 늦게 개산한 종파이다

량문익淸凉文益(885985)이 창종한 법안종은 오대의 남당南唐 주군 이경이 문익에게 법안선사라는 시호를 내린 데서 종파 이름이 유래했다.

 

宋初에 크게 융성했고 고려에도 그 종풍이 불어와 법안 종지의 특징 중 하나인 선교일치禪敎一致가 풍미했고,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 선림은 선교회통의 통불교通佛敎 전통을 내세운다.

 

법안종의 종안宗眼은 진여 본체의 편재성에 강조점을 두고 눈앞의 일체 자연 현상에서 

당하當下에 진여를 느끼고 깨달아 본체로 회귀할 것을 촉구하는 현성現成이다.

 

법안문익 선사가 창도한 일체현성은 유식관과 이사론理事論에 기초하고 있는 법안종의 핵심 선지禪旨. 따라서 법안종의 시선감오도 종요宗要일체현성이 주류를 이룬다.

 

법안종은 능엄삼매 · 금강반야 · 능가유식 · 원각요의 · 유마불이 · 화엄법계 사상 등과 같은 교학의 가르침을 광범하게 흡수해 제3세 법맥인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에 이르러 선교융합의 선지를 정립했다. 결과적으로는 교종과 구분되는 선종의 특색을 상실하는 자기모순을 초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미감 넘치는 법안종의 시선감오도 단명으로 종막을 내리고 말았다.

 

종풍은 운문종의 간명함과 조동종의 세밀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학인을 대하는 접화 언구는 평범하다. 종요의 핵심은 반야무지般若無知를 초석으로 한 문성오도聞聲悟道 견색명심見色明心으로 개괄된다.

 

반야무지는 법안종 선시 색상에 짙게 배어 있는 특징적인 컬러이기도 하다

승조의 반야무지론을 그대로 수용한 법안종의 반야무지般若無知는 한마디로 신비적인 직관을 말한다.

 

무지는 일체를 하나로 꿰뚫어 통찰함으로서 알지 못하는 게 없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지혜다. 논리적 사유와 추리작용, 주객을 가르는 분석 등에 의해 습득되는 편면적인 세속의 지식 · 지해知解와는 전혀 다른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지혜가 반야무지다


무소부지의 지혜가 관조하는 대상은 구체적 객관 사물이 아니라 무상無相의 진제眞諦. 이같은 관조는 감각적 사유나 언어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속의 지식이 갖는 편면성을 초월한 대전大全의 지식인 일체지一切知라는 무지의 지는 늘 허정의 심경을 유지하고 예민한 통찰력을 가짐으로써 세속의 지식이 전개하는 인식활동과는 다른 신비한 직각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직관에 바탕한 촉목보리觸目菩提’ ‘직각의상直覺意象은 법안종 선시가 가지고 있는 미감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량계교思量計較를 통해 얻는 세속의 지식은 부분적이고 유한적이며, 불연속적이지만 반야무지는 전체적이고 무한적이며, 연속적이다. 세속적인 지견知見을 깨끗이 제거해 버리면 외재적 자연 산수는 관조의 주체에게 더 이상 색상色相이 아니라 관조자의 아름다운 내재적 불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촉목보리라는 직각이다.

 

어떤 것이 연수 선법의 묘처妙處입니까?”

이 영명연수의 선지를 알려면 문 앞의 호수를 보라

햇볕이 비치고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인다.”

 

연수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연수가 주석했던 절강성 항주 정자사 앞에는 지금도 관광명소로 유명한 서호가 있다

연수가 말한 호수는 청정무염의 자성을, ‘바람은 번뇌 망상이 들끊는 마음의 동요를 각각 상징한다. 사물을 비교 분석하고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세속 지해가 발동해 번뇌 망상의 바람을 일으키면 자성이라는 호수면은 평정을 잃고 파도타게 된다


세속지世俗知와 관조 주체의 신념의식을 제거하고 눈앞의 사물을 통찰하면 보고 듣는 것 모두가 자성(불성)의 유로流露 아님이 없는 촉목보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의 견색명심이다

색상을 버리고 사물을 관조하는 데서 곧바로 깨치는 촉목보리는 법안종 선시의 중요한 미감적 특색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선재동자의 종사宗師, 삼업三業과 미혹이 보현보살의 경계다.”

 

도항道恒 선사의 법문이다


법안종 선사들은 사량계교와 추론적 사유는 진제를 져버리는 패륜이라고 단언한다

의념意念으로 보는 사물의 색과 상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보리 아님이 없고 산수자연이 모두 불성의 현현이라는 설법이다.

 

법안종 2세인 천태덕소天台德韶 선사는

산하대지가 진짜 선지식으로 늘 법문을 하고 있고 시시각각 사람을 제도한다.”

고 설파했고,

 

본선本先 선사는

깊은 산 속의 새 우는 소리, 계곡 물에서 뛰노는 물고기, 하늘을 흘러가는 조각구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네가 득도를 위해 들어가야 할 곳이 아니냐.”

고 일깨워 주었다.

 

어떤 것이 부처의 마음입니까?”

산하대지다.”

 

법안종 혜달慧達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자연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는 진여를 보라는 얘기다

무정물無情物도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법 진리를 설하고 있다는 법안종의 무정설법은 자연 산수야말로 여법한 진여라고 거듭 강조한다.

 

시인, 묵객들도 청산녹수가 펼쳐 보이는 산수 진여를 귀히 여겨 빈번히 읊조린다.


청산불묵천추화靑山不墨千秋畵 

   청산은 붓을 들어 그린 그림이 아니어도 천추에 뛰어난 그림이요,

록수무현만고금碌水無弦萬古琴 

   계곡을 흐르는 푸른 물소리는 줄이 없지만 만고에 빼어난 악기(거문고).

 

청산불묵천추화靑山不墨千秋畵 청산은 먹이 없어도 천년그림이요

녹수무현만고금綠水無弦萬古琴 녹수는 현이 없이도 만년 거문고요

 

산수수곡취무화山隨水曲趣無畵

산자락 이어지고 물 구비처 흐르니 산수화 없이도 그 정취 딱이네

청산불묵천추화靑山不墨千秋畵 청산은 먹물 없이도 천년의 산수화요


시인, 묵객들이 자연 산수에서 느끼는 시정화의詩情畵意와 선승들이 산수를 관조하면서 감오하는 깨침은 다 같이 물아일여物我一如와 직관을 필요 충분조건으로 한다. 선경禪境과 시경詩境이 산수 진여를 관조하는 목적과 방법은 일치한다.

 

깊은 숲속 새들의 지저귐이 생황의 연주소리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는 길게 늘어뜨린 비단이다.

밥 짓는 연기가 산 계곡의 고요를 감싸주고,

바람은 살구꽃 향기를 날라준다.

매일같이 조용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고 온갖 심려를 잊는다.

언어문자가 미치지 못하는 불법진리를 말하고자 하거든,

나무 아래서 헤아려보고 생각해보는 게 좋다.

 

법안문익의 선시다


선승도, 시인도 물아일여의 심경으로 산수 진여를 직관하면서 마음에 깊이 느끼어 깨달으면 오도를 증득하고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된다. 예술의 영감과 선의 돈오는 다 같이 신비스러운 직관이다.

 

직관은 반야무지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절대 필요조건이다

반야무지의 직관은 상대적 이원론에 기초하는 세속 논리를 초월하며 일체의 추론을 거부한다. 논리적 사변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반야지혜라는 장검을 번쩍 들어 상대적 이원대립 개념으로 사물을 분석, 분별하는 사유체계를 단칼에 쳐버린다. 그 장검으로는 논리적 지식을 진퇴양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촉배관觸背關과 언성을 봉쇄해 버리는 쇄구결鎖口訣을 휘두른다. 이는 법안종이 유별나게 많이 즐겨 활용하는 작법이다.

 

법안이 지장계침地藏桂琛 선사의 인도로 오도할 때의 이야기다

법안이 지장원에 묵다가 행각의 여로를 떠나자 계침 선사는 앞마당까지 나와 전송을 했다. 이때 계침은 그에게 정원의 큰 돌을 가리키면서 

저 돌이 네 마음속에 있느냐, 아니면 네 마음 밖에 있느냐.”고 물었다


법안은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을 강조하는 유식학에 달통해 있었지만 오도하지 못한 채 헤매다가 계침이 몰아넣은 이같은 사유의 함정에 빠져 헤매다가 돌연 깨쳤다.


계침은 이 질문을 통해 이라는 대립개념을 제시해 견성을 가로막는 사변적 지식을 부정한다. 에도 에도 떨어지지 않는 게 명심견성이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중도中道가 곧 부처라는 도리다


마음 안과 마음 밖으로 나누는 내외 구별은 논리적, 지성적 사변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며 모순이다. 여기서 심내心內’ ‘심외心外하는 대답은 모두 한쪽 편면만 본 것이 되고 만다. 계침은 승조僧肇 대사가 만물여아동근萬物與我同根 만물은 나와 한 뿌리라고 설파한 일원론을 산하대지와 자기는 동일하다는 말로 번안해 시중示衆했다.

법안은 후일 한 속인 선비가 그림을 선물하자 받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 그림은 당신의 손이 그린 것이오, 아니면 마음이 그린 것이오?”

 

그림은 대립 분별적인 마음이다. ‘어느 한쪽이 그려낸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하나로 통일돼 그려낸다. 화의畵意와 수법의 일치 없이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촉배관은 학인으로 하여금 대립적 개념이 갖는 모순 속을 헤어나 초탈의 길을 찾게 하는 충격적인 방편이다.

쇄구결은 불법 진리는 심의식心意識의 경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지성적인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설법이다.


어떤 것이 분명한 한마디입니까?”

말해 봐라!”

 

법안종 선지식들은 시의詩意 넘치는 한마디 쇄구결로 분별심을 차단해 텅 비고 고요한 심령으로 이끌어 주는 예리하고 통쾌한 기봉機鋒을 멋지게 휘두른다.

 

법안종의 본래현성에 기초한 일체현성一切現成종풍은 법안종 선시의 일용시도日用是道와 범성일여凡聖一如 · 이사원융理事圓融 · 삼계유심三界唯心의 미감적 특징을 북돋우는 영양소다. 법안에게 개오의 문을 열어준 계침 선사의 가르침에 나오는 정원의 돌은 지연으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일체처에 있다

심내, 심외라는 양변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가 편견이다.

 

처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난다.

길 하나하나가 다 고향으로 통한다.

본래 다 구족하게 완성돼 있거늘,

어찌 사량계교가 필요할까 보냐?

 

신조본여神照本如 선사의 개오시다(오등회원6). 

각자가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구족한 천부적인 인간의 각성覺性이라는 얘기다.

 

법안종의 일체현성종요는 본여 선사의 본래현성을 계승한 선요禪要

다만 일체현성은 진여 본체의 편재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본래현성은 선적 깨달음의 주체가 가지고 있는 불성의 원본 구족에 강조점을 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성은 본래부터 완성품이기 때문에 오직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돈오가 필요할 뿐, 사량계교로는 불성에의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성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이루어진 것, 타고난 것이라는 뜻인데, 흔히 선이 말하는 무위법無爲法 · 무사無事와 같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 가들이다.”

 

법안종 징식澄湜 선사와 한 학인의 선문답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다. 혜초慧超 스님으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은 법안은 

네가 바로 혜초다

라고 대답, 개개인 모두가 부처님을 일깨웠다.

 

번뇌가 곧 보리중생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관건은 수연임운隨緣任運 하는 가운데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모두 소멸시키고 현성 세계의 평범한 사물들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 감수하는 즉물즉진卽物卽眞이다. 이것이 바로 승조가 강조한

현실 세계의 번뇌를 떠나지 않고 보리열반을 증득해야 한다

는 반야무지론의 실천구조다.

 

법안종은 교학사상을 흡수, 용해해서 독특한 종안으로 반야무지 · 일체현성의 종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법안종의 선시는 사량분별을 버리고 당하當下의 현실성을 중시하는 담백하고 편안하며 고요한 의경意境을 표출, 57종의 선시들 중에서도 뛰어난 광채를 발했다.

 

한편 법안종 선시들의 생생한 실생활적 감오는 독자들이 푸근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정詩情을 만끽하게 했다. 사물로 변신한 법신이 만상 가운데 또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만상은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법신과 만상은 둘로 나누어 파악할 수도, 만상을 떠나 법신을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은 자연산수의 색뿐만 아니라 여색女色까지도 포함한다.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여색도 마음을 밝히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안종의 開祖,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 스님은 절강성 여항余杭 사람으로 속성은 노씨이다

스님은 7세에 지통원智通院 전위全偉 스님의 문하에 출가한 뒤 20세에 월주越州 개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출가 초기 스님은 교학의 가르침을 익히고 유교의 경전도 공부한다. 그러나 스님은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껴, 다른 위대한 선사禪師들과 마찬가지로, 의 길을 걷게 된다.

 

스님은 처음에 설봉의존雪峯義存(822908) 스님 문하인 장경혜능長慶慧稜(854932)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두 사람의 동학同學과 함께 행각行脚에 나선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복건성의 지장원地藏院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도반道伴들과 더불어 조론肇論의 

하늘과 땅은 나와 더불어 한 몸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다

라는 구절을 토론하였는데, 이때 지장원의 방장方丈 나한계침羅漢桂琛(867928) 선사가 마침 지나가다가 옆에서 그것을 듣고는


스님에게 물었다

산하대지가 그대들 자신과 같은가, 다른가?” 


스님이 다릅니다라고 대답하자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였다

다시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사는 손가락 다섯 개를 세워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불법은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 스님의 선법은 일체현성이 바탕

理事의 원융이 으뜸가는 가르침. 불립문자 사로잡힌 선종 폐해 극복.

 

이튿날 눈이 그쳐서 스님의 일행이 선사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선사가 스님에게 말했다. “여보게들,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은 오직 식이 아닌가?” 


스님 일행이 머뭇거리며 서 있자, 선사는 뜰의 바위를 가리키며

그렇다면, 이 바위는 마음 속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라고 물었다

스님이 대답했다. “마음 속에 있습니다.” 


선사는 그 말을 듣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행각行脚 나가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저 무거운 바위를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던 스님은 출발을 보류하고 한 달 동안을 더 머무르면서 결택決擇을 얻으려고 매일 자기가 본 견해를 선사에게 바쳤다.

 

그렇지만 선사는 그때마다 불법佛法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마침내 스님은 지쳐서

저는 이제 할 말도 없고, 또 불법이라는 것이 이치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다

정말 참다운 불법佛法을 논하자면, 모든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스님은 선사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언하言下에 크게 깨쳤다.

 

스님의 선법은 불법의 바른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바르게 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일체현성一切現成의 가르침을 그 특징으로 한다


스님은 설파한다

는 이에 의해서 서 있고, 는 사를 빌어 분명해진다

이사理事가 서로 돕고 도리어 눈과 발과 같다

만약 사가 있고 이가 없으면, 곧 진흙에 빠지는 꼴이 되어 통하지 못한다

만약 이가 있고 사가 없으면, 즉 한만汗漫해서 귀하는 바 없다

그 둘의 둘 아님[不二]을 원하면, 원융圓融이 있음을 존귀하게 생각해야 된다

바다의 성질이 무변無邊하지만, 하나의 털끝 위에 다 포함되어 버리고, 수미산이 지극히 크지만, 다 장하여 하나의 겨자씨 속에 넣는다

모두 다 마음이 짓는 것에 연유한다

과 중생이 함께 평등한 까닭이다.” 


스님에 의하면 마음의 근원적 법칙()’세계의 현상()’은 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理事의 원융圓融이야말로 으뜸가는 가르침이 된다.

 

스님의 선사상은 화엄華嚴사상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화엄사상을 선에 도입한 스님의 선법은, ‘불립문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당대 선종의 폐해를 극복하고, 대 선종의 새로운 지남指南이 된다. 이후 스님의 법은 천태덕소天台德韶(891972),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로 이어지면서 법안종法眼宗이라는 5가의 한 종파를 이루고 송나라 초기의 불교를 열어주었다

이들은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였고 천태학天台學과도 관련이 깊다. [출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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