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홍은동 옥천암
하얀 부처, 맑은 샘물에 백의민족 시름 씻기다
옥천암은
약수 나오는 곳에 마애불
외국인 눈에도 진귀한 풍경
이교도 만행으로 우여곡절
냇가에 하얀 부처가 있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발 아래로 홍제천이 흐른다.
부처님 얼굴은 온화하고 근엄하며 자태는 우아하다.
5미터 높이의 부처님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바위를 쪼았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고,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민씨(閔氏)가
고종의 복을 비는 치성을 드리며 불상에 분을 바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이 아닌 구전이다.
하얀 마애불을 모시고 있는 옥천암(주지 정경 스님)이 있다.
옥천(玉泉)이란 맑은 샘을 뜻하니 당연히 그 유래가 있다.
▲옥천암에 모셔진 하얀 부처 마애불.
“창의문 밖 한북문 곁에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샘이 언덕 위 바위 사이에서 흘러 바람병, 체증 있는 사람이 마시면 신효하게 낫고
눈병에도 씻으면 낫는다고 한다.
옥천암의 불상은 언덕 바위를 깎아서 만들고 해수관음보살이라 한다.” (한경지략)
“창의문 밖 옥천암 약수는 산허리에 있는 암혈에서 나오는데
병을 제거하는 효험이 있다 하여 도회의 남녀들이 줄을 서서 다투어 물을 마신다.” (임원경제지)
바위에서 흘러내리고 그 곁에 부처가 계시니 약수는 그 자체로 효험이 있었을 것이다.
옥천암암은 서울의 여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예불을 했던 제일의 기도처였다.
옥천암의 마애불이 언제 흰 옷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구한말 이 땅을 찾은 외국인들의 여행기에는
‘하얀 부처’ 이야기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특히 스코틀랜드 출신 여성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하얀 부처’라는 그림을 남겼다.
그림 속의 부처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맑은 냇가에 앉아 있다.
푸른 눈에 비친 하얀 부처는 조선 풍물 중에서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1925년에 남긴 그림.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여행기를 보면
구한말 하얀 부처가 있던 옥천암 근처의 풍경은 황량했던 것 같다.
“주변에서 가장 좁은 골짜기에서 큰 개울이 하나 흐르고
그 옆으로는 거대한 화강암이 턱 버티고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웅장한 부처의 상이 보였다.
불상은 하얗게 색칠되어 빨간 건물 안에 모셔져 있었다.
불상 앞에는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한 채로 엎드려 있었다.
이들은 우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말끔히 삭발한 머리와 옆 땅바닥에 놓여있는 엄청나게 큰 모자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어느 절에서 하산한 승려들인 것 같았다.
이들은 이 불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려고
수천 리 길을 여러 날 동안 걸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들은 무언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입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얼어붙은 바위처럼 몸 한번 까딱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불상과 두 승려의 모습은
주위의 험한 지세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치 감동을 주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골짜기 위로는 겨울의 차가운 태양이 날카롭게 빛을 던지고 있었고,
북풍은 악귀들과 다투기라도 하듯이 소리를 내면서 휘몰아쳤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정말 악귀들이 산다고 한다.”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에서)
아손 기자의 묘사가 날카롭다. 그때 승려들은 무슨 기도를 올리고 있었을 것인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이 땅 위 백의민족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아손 기자가 본 하얀 부처는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거대한 바위에서 불성을 보았는지,
누가 부처에게 흰옷을 입혔는지 알 수 없지만
마애불은 탄생하면서부터 물소리를 들었다.
아마 물소리가 바위에, 마애불 전신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어찌 똑 같을 것인가. 낮과 밤이 다르고 계절마다 다를 것이다.
북한산 모든 생명붙이들의 애환이 녹아 있을 것이다.
멀리 조선시대 인조반정을 모색했던 무리들이
거사 후에 검을 씻은 물도 마애불 앞을 흘러갔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고 세초(洗草)의식을 거행한 곳도 세검정 부근이었다.
그 사초(史草)를 씻은 물도 마애불 앞으로 흘러갔다.
실록 편찬 후에 사관들의 구설(口舌)을 막기 위한 의식이었지만
어쩌면 임금이 죽고 한 시대를 씻어내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낮게 내려와 물에 그림자 빠뜨리고 있는 마애불,
아무리 큰 비가 와도 감히 부처의 발을 적시지는 못했다고 한다.
홍제천 위로는 온통 절 골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절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스러졌다.
어떤 절은 겨우 당간지주 하나만을 남겼고, 어떤 절은 이름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계곡의 바위가 신묘하고 골이 깊으니 무당들도 많았을 것이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계곡을 진동시켰을 것이다.
무당들은 주문을 외고 발을 구르며 복을 빌었을 것이다.
윗 절의 범종소리도, 무당들의 주문도 계곡을 따라 내려왔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내려가고 마애불만 남아있다.
아마 아손 기자가 전해준 전설 속의 ‘악귀’도 사라졌을 것이다.
어느덧 옥천암은 기도의 요람이 되었다. 주로 민초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었다.
마애불과 관련한 많은 영험한 얘기들이 전해진다.
구원이란 어쩌면 ‘버리는 것’일 것이다. 마애불은 흐르는 물에 인간의 마음을 씻기고 있다.
나라를 되찾고, 또 한국 전쟁이 멈춘 후 옥천암은 크고 작은 불사가 이뤄졌다.
스님들의 기도가 퍼져나갔다. 보도각 속의 하얀 부처를 보러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89년 5월11일 옥천암에 괴한들이 침입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새벽이었다. 바람이 거세고 비가 사납게 내렸다.
괴한들은 하얀 부처 얼굴에 붉은 페인트로 ‘개++’ ‘돼지’ 등이라고 썼다.
석탑 3기와 석등 2기를 파손하고 사찰문과 돌계단에도 ‘개집’ ‘미친+’이라고 썼다.
이교도들의 만행이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바람은 계곡을 훑으며 울었고 빗발이 옥천암 주변을 무섭게 두드렸다.
날이 밝아 부처 얼굴을 본 신도들은 몸을 떨었다.
보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하얀 살결은 더럽혀지고, 부처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옥천암 신도 이복희 보살은 누구보다 슬피 울었다. 1
965년부터 옥천암 부처님을 뵈었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괴한들은 마애불에 망치질은 하지 않았다.
신도들은 페인트를 지우며 용서를 빌었다.
하얀 살갗을 찾을 때까지 옥천암에는 슬픔이 그득했다.
이복희 보살과 마애불은
가족과 물놀이 왔다 친견
47년 동안 참배하며 외호
6번 흰옷 갈아입히는 불사
이복희 보살(74)은 가족들과 물놀이를 왔다가 하얀 부처를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옥천암의 신도가 되었다.
지금까지 47년 동안 하얀 부처를 뵈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하얀 부처와 옥천암을 지켰다.
하얀 부처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로 지정되었고(1973),
작은 경내지만 범종을 만들어 세웠고(1989년), 법고·목어·운판을 조성했다(2007년).
그 중심에 이 보살이 있었다. 그 동안에 부처님의 흰 옷을 여섯 번이나 갈아 입혔다.
개금은 정성이었다. 이 보살에게 불사는 곧 기쁨이었다.
부처님은 어느 날은 웃고, 어느 날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또 어느 날은 편하게 내려다 보셨다. 그것은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이었다.
사경을 하며 마음을 갈았다. 2년 동안 법화경을 옮겨 적었다.
붓 여섯 자루가 닿아 없어졌다. 그걸 부처님 방석 안에 넣어드렸다.
살아오는 동안 여섯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고, 오래 동안 협심증을 앓고 있지만
이 보살은 그간의 마음공부로 자신을 웬만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몇 해 전 노년에 다시 시련이 닥치고 마음이 어지러웠다.
사기조직단의 마수에 걸려 수십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 순간에 날렸다.
이 보살이 다시 찾아가 엎드릴 곳은 옥천암 뿐이었다.
새벽마다 하얀 부처를 찾아가 눈물로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마음이 편해졌다.
집 안 구석구석에 붙어있던 차압 딱지가 그리 두렵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빠져나간 재물에 대한 욕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용서하고 마음을 비우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이 하나씩 다시 모여졌다.
가피는 이처럼 시나브로. 자신도 모르게 찾아들었다.
이 보살은 이제 신도들이 기도하는 것만 봐도 소원을 이룰지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남을 위해 기도해야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보살은 옥천암이 그런 자리이타의 기도 도량으로 솟아오르리라고 믿고 있었다.
심산유곡에 정갈하면서도 흰 모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보도각 마애불.
하지만 지금은 주변이 많이 변했다. 냇가에 집들이 아무렇게나 들어섰고,
홍제천 곳곳에 다리가 놓였으며, 건너편에는 내부순환로가 흉하게 뻗어있다.
또 고층아파트가 함부로 솟아 올라 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다.
새소리와 물소리보다 자동차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부처님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오토바이, 앰뷸런스 소리가 비명처럼 날아든다.
스님들도 잠을 설치는데 냇가의 하얀 부처는 얼마나 시끄러울 것인가.
그러나 하얀 부처 앞에는 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탄생 설화까지 흘려보내고 희게 웃고 있는 하얀 부처, 그 곁에 이복희 보살이 있다.
2012. 10. 10
김택근 기자
법보 신문
첫댓글
세초(洗草) 의식
조선 시대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뒤
남은 사초·시정기·교정지를 잘게 부순 뒤 차일암에서 물에 불려 씻던 절차.
세초는『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여 인출(印出)한 후에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이 창의문 밖 차일암으로 가서
『조선왕조실록』 초본을 비롯하여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교정지 등을
물에 담가 먹의 흔적을 씻어 내어 해당 관아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세초하는 날을 전후로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특히, 세초가 단순히 사초를 처리하기 위한 실무의 의미에 그쳤다면
실록청당상관과 낭청이 서리를 데리고 마무리해도 될 일이었지만,
모든 『조선왕조실록』 편찬자가 참여하였고
이들에게 왕이 내리는 술인 선온(宣醞)을 내려 잔치를 열어 주었다는 것은
그 의례적 집단성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초와 세초연(洗草宴)은 곧 ‘사초의 상례(喪禮)’로,
한 시대의 마감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세초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공감하는 예식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