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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명(明 / 1368 ~ 1644)의 쇠망(1) - 당쟁과 3역(役) 3안(案)
임광자 추천 0 조회 128 08.06.05 17: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明 / 1368 ~ 1644)의 쇠망(1) - 당쟁과 3역(役) 3안(案),

명(明 / 1368 ~ 1644)의 쇠망(1) - 당쟁과 3역(役)3안(案),

가.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                                        이길상

(1) 장거정의 개혁 정치

영락제의 장릉(長陵) 입구에 세워진 석상들1566년북로남왜(北虜南倭)의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염원했던세종 가정제(嘉靖帝)는 선약(仙藥)의 비방 덕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로서는 장수하여1566년 향년 60세로 생을 마감했다.

태자로 있던 목종 융경제(穆宗 隆慶帝 / 1566∼72)가즉위하여 대학사 장거정(張居正 / 1525 ~ 1582)을 기용하고 중흥의 정치를 펴고자했으나 그는 아깝게도 제위 6년만에 죽었다.

뒤를 이어 명나라 13대 황제로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72 ~ 1620)가 즉위하였는데, 당시 만력제의 나이는 갓 열 살에 지나지 않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있던 장거정은 다시 내각의수보(首輔)로 기용되어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동시에 환관과 내통하여 권력을 장악한후, 정권을 독점하고, 선대이래 누적된 적폐해소에 전력을 투구하였다.

우선 사사건건 말만 앞세우는 언관(言官)들을 누르고향당(鄕黨)의 소굴로서 여론(與論)을 주도했던 서원(書院)을 닥치는 데로 폐쇄했다.언론의 장악 없이 과감한 개혁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개혁을휘두르면 독재자로 매도 당하는 것은 고금동서(古今東西)라고 다를 것이 없다. 전제군주체제에서도정치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독재권을 확립한 장거정은 불필요한 관직을 폐지하거나통합하여 고급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고 궁정경비를 줄이고 토지정리와 황하의 치수공사를완공하여 만성적인 적자 재정을 바로잡고 국고를 충실히 하였다.

마시(馬市 / 互市라고도 함)라는 국경 무역(貿易)을열어 몽골족을 달랬으며, 만주 방면의 변경수비에는 토착군벌 이성량(李成梁 / 조선출신)을 기용하여 여진족을 누르고, 산해관(山海關/ 산하이관) 남쪽에는 왜구 토벌에서공을 세운 척계광(戚繼光)을 배치하여 북변을 더욱 튼튼히 하였다.

서남지방으로는 광서(廣西/광시)의 요족( 族/야오족)과장족(壯族/좡족)을 평정하여, 만족(蠻族)의 발흥을 원천봉쇄(源泉封鎖)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만력 10년(1582) 6월, 무쇠처럼 단단했던 장거정이미약(媚藥 /紅沿丸)의 과용으로 독재집권 10년만에 수많은 정적(政敵)들만 남기고58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쓰러졌다.

장거정의 권력에 짓눌려 숨을 죽이고 지냈던 언관들이죽은 그의 시체를 두고 다시 매질을 시작했다. 결국 그는 독재자로 전락되고, 관직은삭탈(削奪)되고, 가산은 적몰(籍沒)되었으며 가족들은 귀양 길에 올랐다.

(2) 재정파탄과 만력의 3대정(三大征)

만력제의 정릉(定陵) 입구장거정이 사망하고 신종만력제가 만기(萬機)를 친람(親覽)하여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만력제는황제치고는 지독한 구두쇠였고 만년에는 마약인 아편에 중독되었다.

황제가 절약의 본보기로서 구두쇠가 되었다면 참으로다행스러운 일이겠으나 그 도가 지나쳐 아예 황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뇌물을바치면 큰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고 그것을 탓하는 언관(言官)들에게는 사정없이매질을 가했다.

만력제가 사부(師傅)로서 숭앙했던 장거정이 죽은후, 그 시체를 매도하게 된 것도 장거정이 남긴 어마어마한 재산에 탐을 내고, 이를합법적으로 뺏기 위해서 였다.

환관들을 각지에 보내어 폐광이나 다름없는 은광(銀鑛)을다시 파게 하고. 고급관료의 결원이 생겨도 지급할 녹봉(祿俸)이 아까워 그 후임자를임명하지 않았다.

은광의 채굴을 빙자해서 환관들은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고처녀와 부인들까지 사람들을 징발했으며,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광맥이 있다 하여사대부들의 묘(墓)를 파헤치고, 집을 부수고, 논밭은 마구 짓밟았다.

이렇게 모은 재산으로 그의 사후세계를 위한 지하궁전을짓는데는 구두쇠답지 않게 아낌없이 돈을 썼다. 작금(昨今)의 베이징 여행자라면누구나 한번쯤은 베이징 북쪽 약 40㎞ 지점의 천수산 기슭에 자리잡은 명나라 13릉(陵)을둘러보았을 것이다.

이곳에는 명나라가 북경(北京) 천도 후 제위(帝位)에있었던 영락제로부터(長陵) 숭정제까지(思陵) 13명의 황제들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발굴해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고, 공개된 묘실(墓室)이신종 만력제가 살아 생전에 지하궁전으로 조영한 정릉(定陵)이다. (토목의 변으로황제가 되었던 경태제의 능은 이곳에 없음)

6년 세월과 8백만 냥을 들여서 만들었다는 정릉(定陵)은그 규모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당시 명나라 1년 경상비가 4백만 냥 정도였다고하니 이런 거대한 공사로 국고가 바닥 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이런가운데 두 차례나 자금성의 대 화제까지 잇달아 일어났다. 군사비로는 땡전 한 닢내기조차 싫어했던 황제였지만 궁성을 재건하는데는 역시 아낌없이 돈을 썼다. 장거정이애써 모은 국고는 탕진되고 부족한 재원은 가혹한 세금으로 충당했다.

나라가 조용할 리 없다. 안팎에서 크고 작은 전란이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군대를 동원했던 세 번의 큰 난리를 "만력의3대정" 혹은 만력의 역(役)이라고 한다.

만력 20년(1592) 3월, 서북 방의 녕하(寧夏/닝샤)에서몽골인 발배(?拜)가 반란을 일으켰다(발배의 난). 발배는 오르도스를 장악하고 그서북쪽까지 세력을 떨쳤다. 군대를 파견했으나 연패(連敗)를 거듭하게 되자 요동(遼東/랴오뚱)군의총수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겨우 진압했다.

그 해 4월에는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명나라를치기 위함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假道征明)는 것이 왜군의 침략 이유이고 보면,명으로서는 군대를 보내어 막지 않을 수 없었다. 락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를선발대로 보낸 후 발배의 난을 평정한 이여송의 4만 5천 군대를 곧 바로 조선에 보냈다(萬曆의役).

만력 25년(1596)에는 남쪽 귀주성(貴州/꾸이저우)에서현지 인들(苗族/먀오족)의 추장인 토사(土司) 양응룡이 난을 일으켰다(楊應龍-亂)이 난은 1600년 중앙정부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한 후 양응룡이 자결하여 겨우끝났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명나라 멸망의 서곡에 불과했고군사력으로 모면할 수 있었지만, 만력 39년(1616년, 조선 광해군 7년)  1월,만주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건주좌위의 여진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 / 1558 ~1626)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연호를 천명(天命)으로 정하여 황제자리에 올라 명에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1618년 누르하치는 그의 부조(父祖) 횡사에 대한 원한등 명에 대한 7대한(七大恨)을 갚는다고 호언하고 군사를 몰아 무순(撫順 / 푸순)과청하(淸河 / 칭허)를 유린하고, 이듬해 1619년에는 살이호(薩爾滸 / 샤르후 혹은사르푸)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때 조선의 광해군은 명의 원군 요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강홍립을 대장으로 1만 3천의 군대를 보냈으나, 강홍립은 언덕에진을 치고 사태만 관망하다가 명의 감시관을 골짜기에 처박아 버리고 전원 후금에게항복하고 어쩔 수 없이 출정하게 된 전말을 후금에게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이를 조선에서는 부차의 패전(富車 - 敗戰)이라 해서존명(尊明) 사대사상에 몰입되어 있던 양반 사류(士類)들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주었고, 그 후유증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가 쫓겨나고 능양군이 그 뒤를 이어인조가 되었으나, 친명배금(親明背金)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외교노선으로 회귀하여두 차례에 걸쳐 호란(胡亂)의 전화를 입고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였다.

(3) 3안(三案)과 당쟁(黨爭)과 동림파(東林派)

신종 만력제는 황후와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이귀비 소생의 장자 상락(常洛)을 황태자로 삼아야 되나 황제는 정귀비를 총애하여그가 낳은 셋째 아들 상순(常洵)을 태자로 삼을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1593년 신종은 아들 세 명을 왕으로 봉하고 태자 책립을어물쩍하여 뒤로 미루고자 했다. 이런 신종의 처사에 반발해서 항의하다가 면직되어향리인 강소성(江蘇省/짱쑤성) 무석(無錫/우시)으로 돌아가 동림서원(東林書院)을재건하고 강학(講學)의 길을 연 것이 고헌성(顧憲成 / 1550 ~ 1612)이라는 강직한관료출신 성리학자였다.

고헌성은 사대부(士大夫)는 마땅히 천하에 대하여정치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며 학문이 단지 지식의 축적이나 개인의 수양에 그쳐서는안 된다고 역설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런 고헌성의 학문적 성향과 태도에 동조하거나 추종하는무리들이 모여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성리학만을유일한 학문으로 숭상하였고, 양명학은 철저히 배격하였다.

이 시기 관료사회는 3벌(三閥)이라고 해서 출신지역에따라 파벌화가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을 제당벌(齊黨閥 / 山東지방 출신),초당벌(楚黨閥 / 河北, 河南省 출신), 그리고 절당벌(折黨閥 / 折江省 출신)이라고불렀다.

이들 파벌들은 정권을 틀어쥐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있었고, 이런 틈새를 비집고 선당(宣黨 / 安徽省 출신)과 곤당(崑黨 / 江蘇省 출신)의우두머리들도 권력의 주변에서 서성대며 기회 포착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출신지역에 따라 관료사회가 술렁이고, 이것이 지역감정으로 비화되고, 지역차별과 푸대접으로까지이어지자 아무리 좋은 정책도 감정의 골만 더 깊게 했을 뿐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동림당도 정계의 파벌싸움에 휘말리고 끝내는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크게 갈라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혼탁한 당파싸움을하게 되었는데,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동림당은 자기들만이 청류(淸流)에속한다고 주장하고 동지적(同志的)인 결합이 매우 강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다른 파벌은 모두가 사당(邪黨)으로 취급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고수하는데있었다. 이들이 한 번 주장하면 그 선악(善惡)이나 진위(眞僞)에 관계없이 타협의여지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소위 3안 문제가 불거졌다. 신종은장자인 상락을 제치고 복왕(福王)으로 있는 셋째아들 상순을 편애하여 그를 태자로세우고자 했다. 이렇게 되자 동림당이 들고일어나고, 마치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수선을 떨고야 결국 장자인 상락을 태자로 앉혔다.

만력 43년(1615), 장차(張差)라는 사람이 몽둥이(挺)를들고 황태자의 처소인 동궁을 습격하다가 수비 중인 환관에게 들키자 환관을 몽둥이로내리치고 달아났는데 이를 정격의 안(挺擊 - 案)이라고 한다. 이런 황태자 살해 미수사건의배후에는 정귀비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떠들썩했으나 황제 신종은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1620년 8월,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던 신종이향년 58세로 승하(昇遐)하여 그 자신이 만들어 놓았던 지하궁전(?)에 안장되고, 황태자가즉위하여 광종 태창제(光宗 泰昌帝 / 1582 ~ 1620)가 되었다.

그런데 광종은 즉위 후 겨우 한 달만에 심한 설사를만나 몸이 형편없이 허약했는데 신하가 미약(媚藥)인 홍연환(紅鉛丸)을 권하자 한알을 먹고 차도가 있는 것 같아서 밤중에 일어나 한 알을 더 먹었다가 이튿날 싸늘한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이를 홍환의 안(紅丸 - 案)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책임문제를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광종의 아들 주유교(朱由校)는 이때 열 여섯 살로서아직 태자로 책립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태자책립 의식부터치러야 한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여윈 주유교를 맡아 키웠던 궁인 이선시(李選侍)는환관 이진충(李進忠 / 후일 위충현)과 짜고 이 황자(皇子)를 감추어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강직한 환관 왕안(王安)이 나서서 사태를수습하고 주유교는 황제로 즉위하여 희종 천계제(熹宗 天啓帝 / 1620 ~ 27)가 되었다.천계제가 이선시를 귀비로 승격시키자, 이귀비를 황제와 같이 두면 정치에 관여할염려가 있다고 하여 다른 궁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를 이궁의 안(移宮 - 案)이라고한다.

이상의 3안을 두고 동림당은 끝까지 진실을 소상하게밝혀야 된다고 주장했고, 비동림파는 실정을 참작하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처리하기를주장했다. 알맹이 없는 이런 명분 싸움은 나라가 망한 후 까지도 계속되었다.

명나라의 만력연간(1573 ~ 1620)은 조선왕조의 선조와광해군의 치세 기간에 해당한다. 이 기간 조선왕조에서는 동·서 붕당이 발생(선조8년 1575년)하였고, 선조 24년(1591)에는 세자 책립을 두고 소위 건저(建儲) 문제가발생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왜란이 일어났다.

선조의 왕비(의인왕후 박씨)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1591년 좌의정 정철은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유성룡과 사전에 합의하고, 공빈이씨소생으로서 선조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建儲)을 건의했다가, 동인이산해의 배신과 모략으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진주(晉州)로 유배되고, 다시 강계(江界)로이송되었으며, 서인일파는 정계에서 쫓겨 났다. 이것을 건저문제라고 한다.

왜란을 당하여 경황 중에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으나,같은 태자 책립문제로 역시 말썽이 많았던 명나라에서는 첫째 아들을 두고 둘째아들을세자를 세우는데 의문을 품고, 고명인신을 내리지 않았다. 광해군으로서는 시기적으로운이 나빴고, 이것이 즉위 후까지 멍에처럼 따라 다녔다. 광해군이 명나라에 등을돌리고 후금으로 기울게 된 심리적 변수에는 이런 것도 내재되어 있었다.

(4) 조선에서의 임진왜란

왜란(1592 ~ 98)을 우리 나라에서는 그 발생 간지(干支)에따라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6)이라고 하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들이 사용한연호에 따라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役),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문록(文祿)의 역(役), 정유재란을 경장(慶長)의 역(役), 혹은 이를 합쳐서 문록경장(文祿慶長/분로쿠 게이초)의 역(役)이라고 한다.

왜란(倭亂)에 대한 원인, 경과, 결과 및 그 영향에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고 여기에 곁들인 영웅일화를 비롯하여 후세의 교훈적인사실도 많이 남기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재론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몇가지 석연치 못한 이런 의문점도 있기에 여기에 소개코자 한다.

경상·전라 일대에 걸친 남해안에는 각각 좌(左)·우(右)수영(水營) 네 곳을 두고 있었고, 1592년 4월 14일 새벽, 왜군의 선단은 경상좌수영이있던 동래(東來)로 들어왔다. 이때 이곳을 책임지고 있었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부산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현장에서순국(殉國)한 것과는 달리 그는 이듬해 다른 전투에서 전사하고 병조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이때 왜군이 이순신(李舜臣)이 지키던 전라좌수영(여수)이나,이억기(李億祺)가 지키던 전라우수영(명량), 원균(元均)이 지키던 경상우수영(통영)으로들어왔거나, 아니면 왜군이 침략했던 경상좌수영에 박홍 대신 다른 사람이 수사로있었다면 과연 왜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까? 정유재란때 원균과 이억기는 칠전도해전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으며, 이순신 역시 노량해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왜란 초기바다를 지켰던 네 사람 모두 전사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죽은 후(死後)긴 했으나보다 높은 관직을 받고 공신이 되었다.

왜군이 동래를 출발한지 보름만인 4월 29일에는 서울에들어왔다. 많은 군대가 대오(隊伍)를 만들고 도보(徒步)로 보름만에 천리가 넘는길을 이동했다면 싸움다운 싸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나,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천험의 요새라고 하는 새재(鳥嶺)를 버리고, 각각상주와 충주에서 싸우다가 패했으며, 특히 신립은 탄금대에서 남한강을 배수진(背水陣)으로하였다가 부하장졸이 전사하고 자신은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沕)과 함께 강물에투신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장 터를 수없이 누비고 다녔던 이들이그걸 몰라서 새재를 버렸고, 무모하기 그지없이 남한강에서는 배수진을 쳤을까? 이들이죽은 후, 신립과 김여물은 영의정으로, 병사(病死)한 이일은 좌찬성으로 각각 추증되었다.그 덕(?)은 후손들이 보게 된 것이다.

명나라는 논란 끝에 왜군이 명나라에 들어오기 전에조선에서 격퇴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를 선봉장으로심유경(沈惟敬)을 유격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보내고, 뒤 이어 발배의 난을 평정하고돌아온 이여송(그의 五代祖가 조선 강계 출신의 성주 이씨라고 하며, 그의 아버지가 만주에서 세력을 떨쳤던 이성량이라고 함)제독(提督)의 4만5천명을 추가로 파병했다. 조선으로서는 이들의 뒤 치닥거리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유격장으로 들어온 심유경은 처음부터 일본과의 화의(和議)를서둘렀고, 조선을 배제(排除)한 체 저들끼리 화의를 시작하였다. 이때 심유경의 교섭상대는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끼나가)이었고, 논란 끝에 이들은 각각 본국의승인을 받아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교섭의 조건이 보고 된 내용과는 너무나 달랐다.명나라는 토요토미를 왜왕(倭王)에 봉한다는 고명인신(誥命印信)만 주면 되는 줄로알았고, 토요토미는 명나라 황녀(皇女)를 후비(后妃)로 삼을 것과 조선의 8도중 4도를할양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왜 이런 엄청난 거짓말이 등장했을까? 결국 왜군은다시 쳐들어왔고(정유재란) 심유경은 명나라에서 매국노로 매도(罵倒)되어 처형당했다.그렇다면 심유경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거짓으로 강화조건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했을까?

선조 37년(1604) 갑진(甲辰) 4월. 임진란의 전투에공이 있었던 문무 공신들을 기리기 위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18명을 책록 하였을 때 1等 3員에 들었던 세 사람은 그 첫째가 덕풍부원군 이순신(德豊府院君李舜臣),둘째가 영가부원군 권율(永嘉府院君權慄), 셋째가 원릉군 원균(原陵君元均)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완흥군 이억기(完興君李億祺)는 2등공신에 올랐다.

원균을 비롯한 다른 세 사람도 왜란을 당하여 혁혁한전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다만 이순신은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자신의 일상을 기록으로남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를 못했다. 기록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 -



Joe Sr.'S Passing (영화 'Far And Away' 삽입곡) - John Williams

 

 

세계는 지금........2002년 2월4일. 월요일

멕시코 14.200 피트의 코리마 화산(Mexico's Colima volcano)이 1913년 이후
이 달 들어 세 번이나크게 폭발... 경각심을 높여주고 있다.
(Reuters/Daniel Aguilar)

서부 예로스톤에서는 올림픽 성화의선두주자 (Torchbearer)
Janet Whitesell양이 개 썰매(dog sled)를타고
성화를 다음 주자에게 전하기 위해(Torch Relay) 눈 위를달리고 있다.
Sunday, Jan 27, 2002. (AP Photo/Chevrolet, JoePolimeni)

일본 삿보로에서 개최하게 된 월드컵 점프-스키(FIS World Cup Ski-Jumping)
선수로 참가한 오스트리아의Andreas Widhoelzl 선수가
공중을 치솟는 점프 연습에 열중하고있다.
Sapporo, Japan, Saturday morning, Jan. 26, 2002.(AP Photo/KatsumiKasa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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