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시를 쓰는 이유
문헌상 최초의 시는 기원전 26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 ‘길가메시(Gilgamesh)’로 여겨진다. 길가메시는 수메르 왕조 초기 시대인 에레크(우루크) 제1왕조 중 다섯 번째 왕이며 126~7년을 산 전설의 영웅이다.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어로 가장 오래된 서사시는 유랑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Odyssey)’이다. 기원전 600년경의 고대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대서사시는 ‘라마야나(’Ramayana)이다. 기원후의 작품으로 8~9세기의 키르기스 카나트(Great Kyrgyz Khanate)의 건국 이래 천년 이상 구전된 후, 18~19세기에 채록이 시작된 50만행 이상의 세계 최장의 키르기스탄 민족영웅의 서사시 ‘마나스(Manas)’도 있다.
중국에서는 문헌상 공자(기원전 551~479년)의 가르침을 기록한 ‘시경(詩經)’이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한국에서 문헌상 가장 오래된 고전 시가는 ‘공무도하가’ 또는 ‘공후인’으로 불리는 연대미상의 고조선(기원전 2333~108년) 시대에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이 지은 서정 시가이다.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 대한 나의 공부가 부족한 한계성을 고백한다.
‘길가메시’는 왕의 영웅적 삶을 기록한 것이며,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도 영웅들의 업적을 찬양한 서사시인 반면, 인도의 ‘라마야나’는 신들의 세계를 그린 서사시의 성격을 갖는다. 반면, 중국의 시경은 공자의 가르침을, 한국의 공무도하가는 서민의 애달픈 삶을 묘사한 서정시가라는 특징을 이룬다. 더불어 모든 시가들이 분명 원작자에 의하여 창작되어 구전되어 오다가 후대에 이르러 기록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편집자에 의해 다시 각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전시가들은 인간으로서 신격화 된 영웅, 위인, 또는 소시민의 세상살이,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강렬한 정서의 표현이었고, 시대적 이상의 추구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신화도 결국 신들의 세상을 동경하고 이상화하는 인간 세상에 대한 노래, 또는 고대세계의 역사적 승자인 개인의 삶을 우상화, 신격화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어로 myths는 근거가 희박한 사회적 또는 신화적 ‘통념’으로도 정의되는 바, 신화가 믿기 어려운 과장된 이야기임이 분명하고, 왜 이렇게 서사시로 당시 신민, 평민에게 회자 되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신화의 근본원리를 ‘신인동형론’으로 제시한다. 신화의 초자연적인 신령, 데몬은 자연현상에 겁먹은 인간의 자화상이며, 인간의 주관적인 것을 자연에 투사하여, 결국 인간이라는 주체로 환원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신화속의 모든 신은 다양하고 주관적인 인간인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질서이든, 사악한 힘들에 대한 불안, 구원에 대한 희망이든, 영원히 반복되는 ‘틀’로서 신화를 이해하고, 계몽의 이상인 신화의 ‘체계’로 창조된 것이다. 그에게 신화는 영웅적인 인간에 대한 과장과 미화를 통하여, 인간의 신격화를 ‘체계’화함으로써 피지배자에 대한 교육, 즉 ‘계몽’의 목적물인 것으로 파악한다.
칼 구스타프 융은 정신을 인류의 역사로서 인간의 뇌에 유전되어 있는 무유형의 마음의 집합소라고 말하고 있다. 융은 정신의 원형(태고유형)으로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Self)를 제시하며 이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집단무의식의 원형들이 발전하여 삶, 탄생(생명), 죽음, 신, 하늘, 땅(대지의 여신), 어둠, 지옥, 공포, 뱀, 천사, 영웅, 기우제, 전쟁, 고아, 마법사, 전사, 용맹, 토템, 꿈, 예언, 선, 악 같은 상징어로 신화 속에서 나타난다는 그의 말에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시론의 출발을 살펴보자면, 기원전 384년에서 322년까지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시론은 예술의 모방기원설의 디딤돌이고 고전문학비평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시론의 고전은 기원전 65년 12월 이탈리아 베누시아에서 태어난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이다. 그는 풍자시와 서정시를 주로 썼으며, 그의 3번째 서간시 “피소 삼부자에게 보내는 편지 Epistles to the Pisos”를 후세 사람들이 “시론 Ars poetica”이라 제목을 붙였다. 특히,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즐겁고 교훈적인 시의 시작법(詩作法) 제시했다.
호라티우스가 말하는 시란,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시적으로 알맞은 소재의 선택과, 적절한 조사(助詞)와 감각적인 시대언어를 채택하여, 내용에 어울리는 운율을 지녀야 한다. 또한 화자의 성격에 적합한 대사를 가지며, 독창성은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전래되는 것도 훌륭한 시적 소재가 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 고대에서 왕조, 봉건시대를 거쳐,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를 담는 그릇, 형식과 내용이 풍성해졌다. 시의 형식은 시의 설계, 사조(思潮)로 흔히 대표될 수 있다. 시의 사조는 시대마다 작가들의 주류적 삶의 풍경과 고민을 담았으며, 동시대 시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고전주의(~17C), 낭만주의(18~19C), 사실주의(19C), 자연주의(19C), 상징주의(19~20C)와 20세기에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표현주의, 주지주의, 이미지즘으로,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 21세기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실험되고 있다.
시대적 시의 흐름으로 시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지만, 시인들의 사회적 계급으로도 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는 객지를 떠돌아다니던 고독한 음유시인으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장님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장애인으로 사회적 하층민이었고 약자인 셈이다. 17세기 영국의 계관시인은, 왕실에서 뛰어난 시인에게 부치는 명예적인 호칭이다. 이는 계간시인이 상류층의 식자층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들의 시가 상류층의 삶에 본질적으로 닿아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한국의 현대시에서 살펴보자면, 우선 주류시와 비주류로 구분해 보자. 주류란 적어도, 대학 중심의 시인, 시집을 생산하는 주요 출판계, 협회를 중심으로 한 문단, 다소 파생적이지만 기성문인을 심사원으로 신춘문예를 주도하는 언론매체들이 검증한 시인들이다. 이들 집단의 검증을 통과한 시인들과 그들과 교류 없이 홀로 글을 쓰는 시인들로 주류, 비주류를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시적대상을 과거의 서정적인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고통스런 일상을 시적대상으로 확장시킨 구분도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박노해의 노동시, 김남주의 리얼리즘의 저항시가 있고, 동인지 실천문학은 실존주의를 근간으로 현실 비판, 현실 참여, 민족·민중문학을 지향하고 있다. 노동시, 저항시, 참여와 비판시도 이제는 시의 영역으로 자리매김 되었지만 아직은 두드러진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다. 미처 알지 못한 비주류의 실험시도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또 다른 현대시의 구분은 중앙문단과 지방문단으로 구별해 볼 필요도 있다. 이것은 시적 지면의 할애라는 측면에서 중앙에 편중된 매체의 편협성 탓으로, 시의 평가와 교묘하게 관련된 상업성의 자본화로 고착화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추천 중심의 평가적 특성을 가진 시인들의 계보화와 특정 집단화, 상업화, 자본화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까지 한국문학을 이끌어 온 힘인 반면, 문단 패권중심의 한계이기도 하다. 21세기 고도의 정보화 시대에서 벌어지는 자본 중심의 주류 시문화가 지방에서 발생하는 시인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역설적 현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은 지방의 시를 지면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와의 시적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길을 열고 있다. 문제는 얼마나 시인 스스로 홍보라는 공간의 디자인과 콘텐츠(내용물) 문제를 해결하느냐 라는 새로운 과제가 시인에게 추가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2019년 원로 시인 고은의 문단 내 성폭행 사건이 미투(MeToo) 운동으로 촉발되었지만, 중앙문단의 자본화와 문단 독점 현상이 궁극적으로 곪아 터진 부산물이다. 결국 시인들의 관계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폭력문화가 실재하여 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시문학의 외향(표리부동한 시 껍데기 문화)뿐만 아니라, 시인의 윤리(시가 지녀야 할 본질)도 시문학의 범주에 포함되어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구인 셈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 없이는 별로 달라질 것도 없는 주류 시단의 모습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꼭 평가라는 시류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쓰다보면 대중적이라는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처음부터 시인을 검증한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인 데, 등단을 강조하는 시류에 매몰된 경향도 없지 않다. 시의 현실성도 중요하지만, 예술의 일반적 경향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점에서,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고통 받는 예술가들도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부터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아서, 몸이 지각하는 대로 느끼고, 생각의 힘은 그리 크지 않았던 생활이었다. 그 시절 눈물도 있었지만, 일시적, 충동적이었고, 지속적이지 않았다. 중3 졸업식을 마친 1월 어느 날, 나는 마지막 교문을 터덜터덜 나서며 종합운동장을 지나 군인극장을 끼고 시내를 가로질러 돌아오는 40분 동안, 내내 흘리던 눈물은 지속적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하루 종일 울었다. 나는 내 눈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계속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토록 슬픈 걸까? 나의 눈물은 어떤 감정으로부터 왔으며, 그 감정은 어떤 일로 만들어 진 것일까?
하루 종일 골방에 처박혀 울었고, 아버지가 마침내 와서, 왜 그리 슬프냐고 물었다. 아버지 저도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요. 나의 슬픔의 근원은 바로 가난이었다. 아버지는 일수로 3만원을 빌려 나를 고등학교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고, 박민수 국어선생님을 만났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내 시의 시작은 그리움이자 외로움이었고 운명에 대한 질문이었다. 5살에 엄마와, 21살에 아버지와 사별한 후,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원형의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청년기를 보냈다.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 나의 삶은 가난한 학생이 가질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질문으로 사유의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山寺의 밤
소리 없이 바람이 와 울어
그 밤을 또 헤아려 지새우며
山寺는 외로워 밤이 깊습니다
아직은 열시도 못 되어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불고
가로등 희미한 대웅전 처마 끝
풍경소리 맑게 부셔져 갔습니다
숲은 깊고 무서워
두려움에 떠는 밤은 너무 깊습니다.....”
중풍(뇌출혈)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려 절에 머물던 시절, 내가 죽음 앞에 할 수 있는 일이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우는 것뿐이라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있었다.
소한 타령
간밤 꿈속
개천 바닥에
두어 마리 까치 얼어 죽고
개 같은 녀석 얼굴
그럴싸하게 보여도
눈만 뜨면 허연
서리 깔린 천장
소한엔 머리만 내밀어도
입에선 뜨거운 김만 난다.....
한 놈만 죽고
한 놈만 살아도
바르신 땅에 누워
소한에는
단칸방 구들장 지고
오두방정에
아침부터 궁상만 떨어도
두 다리 펴면 살만한 세상
등때기만큼 따스한 19공탄
아궁이서 활활 불타고 있것다.
대학시절 추운 겨울 아침 쓰러져 가는 판자집 자취방에서 잠이 깨어, 가난한 사람들과 하얗게 눈이 쌓인 논바닥에서 아이들 소리와 구들장만 따뜻한 단칸방의 아침 풍경이다. 말 그대로 타령이다. 가난한 고학생의 푸념이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자화상이다. 자연은 죽고 사는 것에 냉혹하며, 그 속에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자연과 운명에 저항하고 있는 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가난과 자연에 대한 저항시인 셈이다.
외할미 가시는 날
외할미 종이옷 입으시네
앙상한 몸 가벼웁게
훨훨 날아가시려고
새하얀 속곳 갈아입네....
외할미 연지 바르시네
오늘은 앞서 간
서방님 만나는 날
먼저 간 꽃 같던 큰 딸
먼 길 마중 나오는 날
외할미 삼베옷 입으시네
날개옷 바람결에 날아갈까
두루마기 촘촘히 여미시고
천섬 생쌀 입에 물고
언제 볼까 고운 자식들
삼베고깔 곱게 쓰면
나는 가네 나는 가네.
외가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아련하다. 그곳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외할머니는 죽은 엄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의 전이(轉移)였다. 동구 밖까지 늘 배웅해 주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어린 내게 각인된 시절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10리 길을 마다않고 걸어갔으며, 원주로 이사 나온 후에도, 내 삶에 슬픔이 차오를 때마다 때론 자전거로 3시간을 달려가기도 했고, 아주 가끔 버스비가 마련되면 시외버스에 몸을 싣기도 했다. 엄마는 세상을 일찍 떠난 불효한 큰 딸이었기에, 나를 볼 때마다 시린 가슴으로 각별한 정을 주셨던 외할머니가, 7, 8년 후 사고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죽어서라도 행복하게 만났으면 하는 바람의 시이다. 내세를 믿지 않아도 자연의 순환으로 생과 사, 무와 유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쓴 내 마지막 외할머니와의 해후의 시이다.
영시를 공부하며 유난히 기억나는 시인의 작품은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미국 태생 영국의 시인이며 극작가, 문학비평가인 Thomas Stearns Eliot(1888~1965)의 “The Waste Land”이다. 그는 이 시에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함을 냉혹하게 난해하게 표현했다. 그는 특히 시어의 선택에서 ‘객관적 상관물’을 주창하며, 시인의 주관적 언어를 넘어서 시적 대상과 감정의 완전한 적합성을 갖는 객관적 시어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기며, 정통적 시어들을 사용을 배제하였다. 그를 만난 후, 고전적 감성적인 시어를 멀리했으며 감정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시어들의 선택에 나는 신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상어, 구어적인 말을 시어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시는 감정의 언어일까 이성의 언어일까 라는 고민을 해 보았다. 인지의 과정으로서 이성의 발달이 지각과 감정에서 시작하여 인식의 이성으로 발달한다고 추론해 본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원시인이 느꼈을 지각과 감정에서 두려움과 경이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그런 원시적 원형적 지각과 감정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고 생각해 본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을 예로 들어보자.
엄마 걱정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 시에는 기형도가 생각했던 ‘내 유년의 윗목’을 차지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차가운 이미지로 ‘윗목’에 잘 나타나 있다. ‘시든’ 해와 ‘찬밥’처럼 방 윗목에 담겨 있는 나를 ‘차가운’ 빗소리라는 매체를 통하여 어린 시절의 감정을 들추어낸다. 시든, 찬밥, 빗소리, 윗목들은 ‘차갑다’와 ‘무서운’이라는 지각에서 출발하여 혼자 훌쩍거리는 움츠러든 감정으로 응집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후, 그 아련했던 엄마가 부재했던 빈 방의 적막함과 외로움의 단절된 시간을 되새김이라는 인식을 통하여 ‘이성’의 깨달음을 만들어 낸다. 그 시절에 간직했던 ‘슬픔’을 세월이란 우물에서 시적으로 다시 길어 올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가난’이라는 사회적 산물이 어린 시절에 자식과 엄마의 따뜻한 시간을 빼앗아간 ‘찬밥과 윗목’의 원인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시인은 감정을 통해 사회적 공감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긴다.
물론 감정과 이성이 동시적일 경우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어린 시절 ‘가난’했던 경험이 가졌던 원형의 감정이, 어른이 되어 시를 쓰는 순간, 이성의 인식으로 전환되었다고 이해해도 충분하다. 문제는 그런 무의식의 감정을 소유한 기형도의 ‘이성’의 문제이다. 가난한 가운데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서, 마침내 대학을 마치고 사회적 엘리트인 신문사 기자가 된 ‘기형도’, 그동안 그를 키워주고 스스로 성장시켜 온 것이 바로 기형도의 자기의지, 자기인식, 자기사유의 ‘이성’이 분명할 진대, 그동안 스스로 담금질해 오면서 억압되고 감추어 온 불편했던 감정들이 ‘이성’으로 자기실현에 성공한 기형도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해석한다. 과거의 몹시 불편했던 감정들이 성인인 기형도 이성의 시적 사유물(思惟物)이며, 치유의 과정인 사유를 통해 회복되어 이 시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살인의 감정, 광기를 겪으며, 감정이라는 우물로부터,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성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감정의 발달이 이성의 발달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시는 감정을 통한 이성의 ‘계몽’일 수도 있고, 이성의 ‘깨달음’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이기를 바란다.
아도르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문학과 예술에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으로 미메시스(Mimesis)를 전통적 예술이론에서 예술가의 창작원리라고 말한다. 미메시스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무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라, 자연이나 대상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아도르노 &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p.15) 이것은 수많은 역사 속에 자연과 마주친 인간이, 그리고 마주쳤던 감정과 이성의 결과물인 작품들을 대면했던 시인들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학습의 과정으로서의 창작의 원리를 말한다고 하겠다.
파울 첼란(Paul Celan)은 ‘타자’로부터, ‘너’로부터 오는 음성이 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시는 언어가 ‘목소리를 낼 때’ 시작하고, 시는 타자와의 만남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한다.(한병철, 타자의 추방, p.89) 예술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을, 인간적인 것을 쳐다보는 섬뜩한 영역으로의 진입”을 낳는다. 예술의 제자리는 섬뜩한 것 속에 있다. 시적영상들은 ”영상을 가져오는 것, 즉 익숙한 것의 장면 속에 낯선 것을 보이도록 편입시키는 것“이다. 낯선 것의 편입이 없으면 같은 것이 지속된다. 같은 것의 지옥 속에서 시적 상상력은 죽는다.(한병철, p.95)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는 시인은 타자의 이름으로, 전적인 타자의 이름으로 말한다.(한병철, p.96) 시적 원리로서의 자연은 경청의 근본적인 수동성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p.97)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한병철, p.98) 아도르노는 “세상에 대한 낮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낮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한병철, p.93)
미셸 뷔토르(Michel Butor)는 오늘날 문학의 위기를 정신의 위기로 파악한다.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작들이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요. 이는 소통의 위기 때문입니다.”라며 오늘날 경탄할 만한 새로운 소통 수단을 갖게 되었음에도 엄청난 소음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한병철, p.98)
오늘날의 사회는 신자유주의, 신자본주의의 시대로, 풍요, 정보, 소비가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시대이며, 민주, 공산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벗어나, 선호와 취미가 중심인 소비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소화하고 있는 ‘좋아요’의 무한 긍정의 광고 시대이기도 하다. 생산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시대에서 소비가 사회의 주체인 시대에 이르렀다. 이제 과거 시대의 자연시, 사랑시에서 벗어나 소비시대의 정신적 황폐를 표현해야 하는 시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긍정의 시보다는 부정의 시가 훨씬 시의 본질에 더 가깝다. 시인 자신의 목소리보다 시인 안에 있는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간들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할 시대이다. 그것을 현대 철학자들은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낡은 시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역사적 사유의 지평을 위하여 나는 과거의 철학자들도 주목했지만, 근대, 현대 철학자에게도 길을 묻고 있다. 나의 안목보다 철학자들은 현실세계의 불편들을 고민하고 보편적 이성을 탐색하며, 전문적 식견으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시대적 고통들을 제시하고 있다.
현대의 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과거의 시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와야 한다. 문학이 하나의 취미활동으로 영역을 넓혀, 폭넓은 독자들을 창작의 세계로 끌어내는 소비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상도 있지만, 좀 더 진지하게 문학 본연의 전문영역에서 현대시는 과거의 낡은 흔적들을 제거해야 하고, 단절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신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감각적 감성적 미적세계에 대한 거부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되었고, 그것은 이 시대에 풍요한 자본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적 대상이 시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그러한 타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시적 공감을 불러와야 하는 시대적 요구인 셈이다.
나 자신에게도 참으로 쉽지 않은 시적 역할인 셈이다. 그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분야이기에 도전해 볼만 한 미지의 영역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남은 시간들을 정진해야겠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이른 아침 책을 읽으며, 때론 산책을 하며, 오랜 시간 생각을 모은 끝에 이 글을 마무리하니 참 정신이 맑다. 나에게 맑은 정신으로 글을 쓸 기회가 많이 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