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창작수필문인회 원문보기 글쓴이: 엄지바우(이봉길)
<작가탐구> 2 ‧ 박연구(1)
자기애의 신화
독자들은 매원(梅園 : 박연구의 호) 수필을 읽고 난 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의 수필에는 독자의 인문적 교양에 보탬이 되는 현학스러움이 없다. 삶의 지표가 될 잠언적 메시지도 없다. 독자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감각적 표현도 없다. 화려한 수사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누구의 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꼈다. 이것을 위로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 확실한 위로다. 나는 지쳐 있었고...... .
나는 그의 수필을 읽을 때면,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이 곁에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것 같은 환청을 떨치지 못하였다. 결코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삶이 끊임없이 담담하게 자기 일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감격스럽지도 않았고, 흥미진진함도 없었지만, 들으면서 그냥 미소가 지어지고, 그러면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끊기면 서운할 것만 같았다.
나는 유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눌변의 리듬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렇다. 익숙함이다. 인간이 타악기의 단순한 리듬에 빠져드는 것은 태아 때 들어 익숙해졌던 엄마의 심장 박동의 리듬 때문이라던가.
독자를 포근하게 하는 요소에는 분명 그의 문체도 한 역을 하고 있었다. 묘사의 문체가 아닌 구술의 문체, 묘사란 평면적인 문장을 시각화시켜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독자는 이미지가 입체화되기까지 수고로운 두뇌 작용을 해야 한다. 구술의 문장은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들려주던 민담류의 톤에서 경험했듯이, 청자(廳者)를 편안하게 하고 아늑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첫눈이 왔던 날 아침이다. 나목(裸木)으로 추워만 보이던 복숭아나무가 가지마다 눈꽃을 피우고 있으니까 집이 한층 운치 있게 보였다.
- <말을 알아듣는 나무> 중에서
간밤에 눈이 내렸고, 아침이 되어 문을 나서니 천지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것은 기적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기적을 감흥에 겨워 묘사하고픈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이 시선은 단 한 그루의 복숭아나무에 머물렀을 뿐이고, 묘사는 – 눈꽃을 피우고 있는 복숭아나무의 아름다움 – 독립된 한 문장이 되지 못하고, 집이 운치 있어졌다는 주절을 위한 종속절의 위치만을 차지할 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소설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말로 들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정경을 상상할 수 있도록, 청각의 문장이 아니라 시각의 문장을 사용한다. 시각화를 위해서 묘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독자에게 말로 들려주는 구술적 문장에서 묘사의 입지란 좁을 수밖에 없다. 구술적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전달이다. 그 이야기를 얼마나 구성지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박연구의 위트는 이 ‘구성짐’에서 나온다.) 지나친 묘사는 줄거리를 잇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구술적 문장에서 묘사는 양념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구술적 문체는 문장을 평면적으로 만든다. 한국 시사(詩史)에서 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시가 시각화되면서, 평면적이던 시가 입체화되었던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할 것이다.
분명 구술적 문체는 원시적이다. 그러나 나는 원시적인 데서 리듬감을 느꼈고 그것이 나를 편안케 했다.
매원의 수필 세계 출발은 가난이다. 그는 가난한 문사이다. 한평생을 돈이 되지 않는 수필만을 지키며 살아왔고, 한 번도 ‘정식’이란 직함을 갖고 직장 생활을 해보지 못했으니 가진 재산도 권력도 없다. 고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니 학벌도 없다. 그리고 회갑은 10년을 앞당겨 쇠겠노라 할 정도였으니 건강마저 가난했다.
그는 젊은 날의 한때를 열패감에 싸여 보냈다. 그가 수필을 들고 문학판에 끼어들었을 때, 문단에서는 수필은 문학의 반열에 끼워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70여 장의 원고지를 메꿀 체력이 안 되어 소설을 쓰지 않고 수필을 썼다는 그의 고백과 김동석이 글에서 스스로 수필가라 세 번이나 지칭했다는 말에 감격했다. 당시 문단에서 수필가로서 받았던 설움은 대단했으리라.
그가 상경하여 서울에 자리 잡았을 때까지의 눈물겨움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직 문학적 재주 하나만을 믿고 올라온 패기만만한 시골 청년이 낯선 서울 하늘에서 겪었을 온갖 시련들.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가 기댈 언덕은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건강이 허약한 자신과 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아내와 철없는 어린 자식들과 연로한 부모님뿐. 그는 부귀와 영화의 꼭대기를 바라지도 않은 것 같다. 그가 숨쉬고 살 만큼의 작은 공감만을 바랐다. 그러나 이 사회가 어디 그것인들 허락하는가. 송곳 하나 꽂을 공간도 싸워 쟁취해서 얻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정체성의 위기, 한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밖의 세상이 높고 화려한 만큼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잡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밖의 세상에 눈감은 한 청년의 비애를 본다. 그런 면에서 그의 수필은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지구에 와서 비로소 알았다. 온갖 투정을 부려 그의 애간장을 녹였던 그 꽃의 이름이 장미이며, 그것은 수많은 장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왕자의 실망은 대단했다. 그러나 실망에 빠져 있는 그에게 여우는 말했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귀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쏟았던 정성의 시간만큼 귀한 것이 된다고.
박연구 수필의 힘은 이 반전에 있다. 객관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작고 하찮은 것들이 일단 그의 시선을 통과하고 나면, 모두 귀한 것들로 변하고 만다. 결국 그가 쏟았던 정성의 시간만큼 귀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특이한 사항이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들이 한결같이 자기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내와 자식들과 부모님, 그리고 손자들, 작은 화단에 있는 나무 등등. 자기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대단한 자기애다.
자기애(自己愛)의 수필에는 당연히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이기와 아집과 편협과 독선이다. 그러나 매원의 수필에서 그런 것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자기애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가지지 못함에 대한 한이 없다. 그 점이 그의 수필을 무욕(無慾)의 문학으로 만들었다. 애착이 무욕이 되는 이 비밀. 이 모순의 함수 관계에 박연구 수필의 성공비결이 있다.
어린 왕자가 자기의 장미에게 돌아감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가는 회한의 귀향이 아니고, 장미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듯이. 박연구가 자기 것으로 돌아감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돌아가는 회한의 귀향이 아니고, 자기 것에 대한 연민도 아니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무한한 애정 때문에 돌아갔다. 그래, 애정이다. 그리고 그의 수필이란 ‘정(情)의 미학(美學)’이라 믿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수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생활의 발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다시 ‘생활의 발견’에 대해서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사랑의 발견’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등식 하나를 만들어보았다. - ‘생활의 발견’ = ‘사랑의 발견’ = ‘정의 미학’, 수필을 일러 ‘정의 미학’이라고도 일컫고 보면, 이등식을 역순으로 해서 말해도 무방할 듯싶다. - ’정의 미학‘ =’사랑의 발견‘ = ’생활의 발견‘
- <어느 봄날의 일기> 중에서
그는 육안으로 보면 못생기고 초라한 것을 심안으로 봄으로써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바로 이 점을 김열규는 ’일상성(日常性)의 쇄신‘이라 말했다. 김열규의 일상의 쇄신이란 박연구가 말한 생활의 발견이다. 생활(일상성)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곧 정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 그의 애정의 눈을 통과하고 나면 따뜻한 이야깃거리로 새로 태어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으로 만드는 이 마력은 일상성의 쇄신을 일으키는 그의 눈빛이다. 그것은 인간을 거룩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는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내 것에 대한 무한한 애착이다. 그것은 차라리 동물적이다.
그의 비밀을 사진을 통하여 털어놓았다.
사진이란 피사체에 대해서 무조건 셔터만 누르면 찍힌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인식이다. 앵글을 어떻게 조작하고 피사체의 어느 순간을 포착하느냐에 따라서 사진효과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것도 이론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반복 조작에서 오는 자기 터득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피사체에 대한 지극한 애착심이 있어야 한다.
한 번도 고백한 일은 없지만 나는 한때 고향에서 카메라를 소지하고 사진을 찍으러 다닌 일이 있다. 무명작가 시절, 아니 습작 시절, 카메라를 가지고 나의 헛헛한 젊은 시절을 어느 피사체를 향해서 진한 애착심으로 셔터를 조작한 경험이 오늘날 글을 쓰는 일에 밑받침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애착심> 중에서
그의 영원한 연인 K와의 사랑도 사실은 별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청년 시절 K에게 끝없이 ’기도 같은 연신‘을 보냈건만 그녀는 ’너는 좋지만 허약해서 싫다‘는 말을 남기고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인이다. 그의 수필의 많은 부분에서 K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 같다.
“K도 내가 틀림없이 회갑을 넘기도록 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날 그렇게 매정한 말을 던지고 돌아서지 않았을 것인데...... .”
- <회갑 기념 출판 기념회> 중에서
그는 아직 살아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k에게 자랑하고 싶다.
“외손녀의 울음소리를 k에게 들려주고 싶다.”(<생명의 신비>)
k와의 연애는 그 당연히 연애의 필수적으로 따랐던 편지쓰기 수준 이상의 진전됨이 없어 보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것은 청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에게 k는 여전히 귀중한 사람이다. 왜일까?
k는 그의 유일한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젊은 날을 회상할 때 k를 빼놓고는 회상할 수 없다. 그의 청춘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초라함 속에서 k를 간직했고 지금까지도 k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k는 그의 청춘의 보물이다. k는 그에게 한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자주 k를 말함은 그의 보물을 완상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는 자기의 가난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너무나 솔직하게 털어 놓아버림으로써 듣는 사람을 당황케 한다.
박연구는 행복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을 줄 아는 눈길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E.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이란 행복한 그 실체가 있어 그것을 획득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박연구 문학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결코 행복을 밖에서 찾고 있지 않다. 거창한 것에서 찾고 있지 않다. 생활의 발견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는 자기의 영역 안에 있는 것들에 끝없는 애착을 가짐으로써 행복을 찾는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것에 행복을 느끼는 능력, 바로 여기에 박연구 수필의 마력이 있다. 서민의 기쁨을 가장 서민적으로 그려내는 것, 그것이 박연구 수필의 진가다.
<바보네 가게>
박연구
우리 집 근처에는 식료품 가게가 세 군데 있다. 그런데 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이 몰렸다.
'바보네 가게'-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쟁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째서 '바보네 가게'라고 부르는 가고 물어보았다. 지금 가게 주인보다 먼저 있던 주인의 집에 바보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데, 지금 주인 역시 그 이름을 싫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는 콩나물 같은 건 하나도 이를 보지 않고 딴 가게보다 훨씬 싸게 주어 버려 다른 물건도 으레 싸게 팔겠거니 싶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거다.
어느 작가의 단편 <상지대 商地帶>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똑같은 규모의 두 가게가 마주 대하고 있는데, 계산에 밝은 인상의 똑똑한 주인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주인의 가게는 손님이 많아 장사가 잘되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보 주인의 상술인즉 이러했다. 일부러 말도 바보스럽게 하면서 행동을 하면 손님들이 멍텅구리라 물건을 싸게 주겠거니 하고 모여든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똑똑하다는 걸 인식할 때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 거다.
바보와 비슷한 이름이 여러 개 있다. '멍텅구리 상점', '돼지 저금통', '곰 선생'-이 얼마나 구수하고 미소를 자아내는 이름들이냐.
'멍텅구리 상점'은 '바보네 가게'와 비슷하니 설명을 생략하고 '돼지 저금통'과 '곰 선생'을 이야기해 보자
우리 집에 돼지 저금통이 몇 개 있다. 왜지 꿈을 꾸면 재수가 좋다는 말도 있듯 집에서 남자아이들을 흔히 애칭으로 '돼지'라고 부르는 걸 볼 수 있다. 돼지는 아무거나 잘 먹는 소탈한 성품이어서 자손이 귀한 집 아들 이름을 돼지라고 하는 수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신발 닦은 값이라도 주면 눈꼬리가 길게 웃고
있는 돼지 저금통 안에 넣어 주지 않을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내 아내도 50원짜리 동전을 꼭꼭 자기 돼지 저금통에 넣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50원짜리 동전이 생기면 퇴근 후에 웃옷을 받아드는 아내의 손바닥에 한 닢 혹은 두 닢을 놓아 주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돼지를 미련한 짐승으로 보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우악스럽게 기운이 센 멧돼지가 힘을 내면 호랑이도 잡는다. 아무리 영악스런 호랑이지만 멧돼지가 어느 순간을 보아 큰 나무나 바위에 대고 힘대로 밀어 버리면 호랑이는 영락없이 죽고 만다.
바보스런 웃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내 아내의 동전을 주는 대로 삼킨 돼지 저금통이 어느 땐가 위력을 부리면 급병이 난 식구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믿어질 때 더없이 애착이 간다.
누구나 학교 다닐 때 '곰 선생'이란 별명을 지닌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직스러운 듯하지만 한없이 좋은 선생님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선생님이 화나면 어느 선생님보다도 무섭다.
곰은 절대로 미련한 짐승이 아니다. 둔한 동작으로 시냇물 속을 거닐다가 물고기가 나타나면 앞발을 번개같이 놀려 잡아낸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 그 넓적한 발바닥으로 물탕을 치는 동작이야말로 '곰'이 아니라 하겠다.
친구를 사귈 때도 너무 똑똑한 사람은 어쩐지 접근하기가 망설여진다. 상대방에게서도 만만한 데가 보여야 이쪽의 약점과 상쇄가 가능해서 허물없이 교분을 틀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저쪽이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항상 이쪽이 못난 놈으로만 비칠 것 같아 싫을밖에.
세상의 아내들도 조금 바보스럽거나 일부러라도 바보스럽기를 바라고 싶다. 이 말에 당장 화를 내실 분이 있을 듯하다. 어떤 못난 남자가 제 아내가 바보스럽기를 바랄 것이냐고, 옳은 말씀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보는 그런 통념의 바보가 아니다.
특히 남자들은 직장에서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바보 취급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경쟁의식은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고 열등감으로 피로가 겹친다. 이 샐러리맨이 가정에 돌아가면 또 아내라는 사람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 연탄값·쌀값·학비·의복비 등 수 없는 청구서를 내밀면서 지난달에도 얼마가 적자인데 언제까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느냐고 따지면 무능한 가장은 더욱 피로가 겹친다. 쉴 곳이 없다. 이런 경제 능력 말고도 똑똑한 아내에게 이론에 있어서 달리면 열등 콤플렉스가 되어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가 쉽다.
내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우리 아내들이 짐짓 바보인 척하는 것 같다. 유행에 둔감한 척 의상비를 자주 청구하지 않는 거는 남편의 수입을 고려함이요,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는지 대포 몇 잔에 호기를 부리고 대문을 두드리면 영웅 대접하듯 맞아들이는 매너야말로 활력의 '충전充電'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어쩌면 내 집이 바로 '바보네 가게'가 아닌가 한다. 돈은 물론 무엇이든 부족하게 주는 나에게 반대급부가 너무 융숭했기 때문이다. 여섯 살짜리 막내딸 아이는 10원만 주어도 아빠에게 뽀뽀를 해주고 그리고 또….
(1973년)
❍ 핵심정리
✲주제 : 남들보다 어수룩하게 보이도록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어 결국 이익을 얻는 삶의 지혜
✲특징
-‘바보네 가게’라는 상점의 이름 → 참신한 글감으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
-바보스러운 것이 오히려 잘난 것보다 현명할 수 있다. → 개성적 관점을 드러냄.
-‘돼지 저금통’, ‘곰 선생’ 등도 ‘바보네 가게’와 유사한 사례→ 다양한 제재를
찾아 내용을 풍요롭게 함.
- 마지막 막내딸 아이의 이야기에 이어 말없음표를 사용하여 글을 마무리.
→ 재치있는 마무리로 감동의 여운을 지속
❍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 글의 제재인 ‘바보네 가게’는 어딘지 어리숙하고 허수룩해서 경계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친밀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이름이다. 이 글은 남들보다 어수룩하게 보이도록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어 결국 이익을 얻는 지혜를 가졌음을 말하고 있다.
먼저 ‘바보네 가게’라는 흔하지 않은 제재를 소개하여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와 유사한 ‘멍텅구리 상점’, ‘돼지 저금통’, ‘곰 선생’ 등의 예를 통해 어리숙하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득을 가져오는 지혜일 수 있음을 말하여 글쓴이의 개성적인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바보네 가게’라는 상점 이름과 같이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를 친구 사귀는 것이나 가정생활로 발전시켜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고 있다. 자기의 집을 ‘바보네 가게’라고 한 것은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자신에게 과분하게 대해 줌으로써 늘 생의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나아가 그들의 지혜로운 처신을 칭찬하고 있다. 글쓴이는 ‘바보스러운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너무 똑똑한 사람’에 대해 비판적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