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웬 때 늦은 뒷북치기냐고 의아해하고 계시죠?^^
김남석 선생님의 지엄하신 명(?!...^^*)이 있었기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글을 올립니다
못난 글을 일일이 읽어 주시고 코멘트를 달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꾸벅~~~~~ㅠ.ㅠ
약간 압축하라는 선생님의 명을 받잡고 압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능력이 부족하야 뭔가 뺄 데를 안 빼고
안 뺄 곳을 빼서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느낌도 없잖지만,
더 생각해봐야 별 수 없을 거란 생각으로 글을 올립니다.
(혹 원본을 읽기를 원하시는 학형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멜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실 분이 계실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음은 오태석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쓴 감상문입니다
고별(苦別)을 고(告)해야만 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조가(弔歌)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1. 낭만주의여, 안녕!
누구나 살면서 어느 나이에는 낭만주의와 결별할 때라고 느낀다. 이 때의 낭만주의는 사랑의 경우이건, 이념의 경우이건 어느 정도 이상주의와 같은 뜻으로 나는 쓰고 있다. 사랑이건 이념이건 20대 초반 내지 중반까지는 사람들은 이상을 믿고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하지만 여러 현실적인 제약들을 차츰차츰 경험하다가, 그래서 소위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상투적이니 만큼 보편적인 갈등을 통과 의례처럼 겪다가 대부분 30대를 전후하여 현실 쪽으로 방향타를 결정해 버리고, 나머지 인생은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보낸다.
평소에 작품 감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나는 객관적 감상이요, 다른 하나는 주관적 감상이다. 전자는 작품의 주제 내지는 표현 방법에 대한 다소 학술적인 분석이고 후자는 나의 영혼에 남긴 흔적의 모양새를 그리는 작업이다. 전자의 감상은 문학, 내지는 서사 장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훈련만 되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후자의 감상이고, 보통 다른 사람의 경우 역시 작품을 보고 영혼에 인두로 지진 듯한 붉은 자욱을 남긴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이 그들의 인생에서 소중할 뿐만 아니라 소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청자의 입장이라도 그런 이야기가 훨씬 재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소위 주관적 감상-이를테면 내가 그 연극을 보고 오열을 한 이유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으로 흐를 것이다.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웬 구닥다리 같은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 지겹겠구만'이라고 생각하며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극 시작 후 이십 여분이 지났을 때, 즉 무도회에서 둘이 만나고 담장 뒤에서 입을 맞추고 학춤을 추며 천진난만한 사랑의 환희를 누리고 있을 때 나는 참지 못해,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통곡하고 있었고, 주변 관객들에게 쪽팔리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오열 때문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왜냐고? 그들이 하는 짓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고 밖에 나는 말 못 하겠다. 흔한 이야기이지만, 예쁘고 어리고 천진난만한 것들은 왜 슬픈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 연극은 사랑에 관한 연극이 아니었고 낭만에 관한 연극이 아니었다. 낭만적인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의 추잡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통렬한 사실주의 아니, 자연주의 연극이었다.(여기서 말하는 사실주의니, 낭만주의니 하는 용어는 표현 방법이라기보다 작가의 가치관이 구분 근거가 되는 다소 주관적인 언어 사용이다.) 오태석이 두 가문 모두 싸우다 멸망하는 것으로 원작의 결말을 바꾸었다면, 그에게는 이 작품을 현실에서 붕 뜬 이야기가 아닌 현실에 발을 담근 사실적인 이야기로 만들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와 같은, 천상의 놀음과도 같이 아름다운 것들은 이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서 살 수 없었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은 천상에서나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신은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일찍 데려간다거나, 佳人薄命이라는 속설이 떠돌겠는가. 그들의 희생이 구원이 될 만큼 세상이 여유로운 곳도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예수처럼 인류를 구원하기는커녕, 사람들은 악하고 남 탓하기만을 좋아하여 결국 싸우다가 모두 불행해지고 만다. 오태석이 만든 이야기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예리하게 현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사랑을 예찬했는지 모르지만, 오태석은, 적어도 내가 읽은 오태석은 세상에서 용인되지 않는 낭만주의에 대해 조의를 표하고 있었고, 용인하지 않는 세상을 통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누군들 낭만적인 꿈이 좋지 않겠는가. 그것과 결별해야 할 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소간 개가를 하기 위해서 낳은 자식을 버려야 하는 어미의 심정 같은 것을 누군들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비닐 하우스 안의 비리비리한 풀 한 포기로 인생을 끝장내지 않으려면, 진열장 속의 생기 없이 예쁘기만 한 마네킹의 삶을 살지 않으려면, 아니면 진정으로 가인으로 살다가 박명하지 않으려면,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안타까움만을 남기는 슬프지만 쓸 모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누구나 언젠가는 낭만주의와 결별해야 한다. 그것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학춤처럼 견딜 수 없게 아름다워서 차마 발이 안 떨어지더라도 말이다.
탈낭만의 당위에 대한 요청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서른 즈음, 나의 오열은 어쩌면 苦別을 告해야 하는 낭만주의에 대한 弔歌였다기 보다는 스러져가는 청춘에 대한 哀歌였는지도 모른다.
2. 약간 다르게 읽기
어쩌면 이 이야기는 남녀간의 사랑의 본질에 관한 사실적인 우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 없는 도취, 사소한 어긋남으로 만나지 못 함, 오해를 풀지 못하고 맞는 파국, 미화되어 기억됨'의 수순을 따르는 사랑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우화인지도 모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처음에 정신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사소한 어긋남으로 부부지연을 맺지 못 하고, 가짜로 죽었다는 사실 하나를 알지 못해서 파국을 맞는다. 보통의 남녀 관계도 처음에 정신 없이 서로에게 빠져 들지만, 사소한 어긋남으로 깊게 만나지 못하고, 쌓인 오해를 풀지 못해서 헤어진다. 헤어지고 나서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미화된 추억을 곱씹고 사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것 같다.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전설이 그들 본인들에게는 비극일지언정 후세의 사람들에게 미화되어서 회자되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추상적인 관념의 구체적인 상징이 되는 것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이야기 전체를 한 관념에 대한 상징으로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란 해석의 여지가 많아야 함을 고려할 때 이렇게 다각도로 조명이 될 가능성이 많은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훌륭하다.
3. 오태석이 오태석인 이유
명품은 섬세한 곳에서, 지나치기 쉬울 만큼 작고 하찮은 곳에서 비명품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전체적인 품격은 높지만, 그 높은 품격의 원인이 되는 것들은 너무 사소해서 잘 발견하기 어렵다. 나도 모든 것을 다 발견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눈에 띄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일단 내가 '보자기의 미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 대해서이다. 사실 그 얇고 넓은 천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그 보자기가 작품에 주는 영향에 대해 신선하다고 느낄 즈음 오태석의 대담집에서 작가 자신도 그 보자기의 역할에 대해 의식을 많이 했음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오태석은 우리의 방 구조가 방석을 깔면 응접실이 되고, 요를 깔면 침실이 되는 등 깔개에 따라서 방의 용도와 분위기가 변화무쌍하게 바뀐다는 점에 착안하여 연극 무대에 보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내가 보기에는 분위기 형성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 데에도 보자기는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예컨대 신방 장면에서 줄리엣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로미오를 만나지 못 하는 장면에서는 둘이 만날 수 없는 미묘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는 동시에 만나지 못 하는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다. 다음날 줄리엣이 아버지에게 결혼하라는 통보를 들으면서 보자기로 온몸을 두껍게 둘둘 감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감옥에 갇힌 듯, 굴레에 씌인 듯 답답한 줄리엣의 심경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줄리엣의 성격 창조이다. 이 작품의 줄리엣의 성격은 우리가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았을 때의 여주인공의 성격과 사뭇 다르다. 보통 줄리엣 하면 우아하고 품위 있는 성격을 상상하기 쉽지만, 오태석은 천진난만하고 푼수끼 다분한 장난꾸러기 소녀로 줄리엣을 재창조했다. 줄리엣의 성격이 이러했기에 작품의 비극성이 강조된 부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태석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미학이 돋보이는 면이다.
시작 장면에서 등장 인물들이 군무를 출 때 하회탈 바가지처럼 약간 부자연스럽게 웃는다. 이것 역시 오태석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개가라고 생각한다. 딱히 이유를 꼬집어 말 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장면들이 작품의 미학을 조금씩 조금씩 드높인다. 어쩌면 그 장면에서 '슬프지만 그래도, 억지스럽더라도 웃을 수 있는 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1절에서 이야기했듯이 이야기 전체는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오태석은 어쩌면 결말에서 할 이야기보다 더 나중에 해야 할, 결정적인 마지막 이야기를 서두의 군무에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등장인물에게 소복을 입힌 것, 등장인물이 자주 뒹굴거나 무대 바닥에서 버둥거리게 했던 것도 나름대로 오태석만의 고유한 미학 창조에 기여한다. 그런 것들은 보기에 좋고, 다른 작품들과 다르다고 느껴지게 하는 부분들이지만, 사실 평범함에서 아주 작은 변형을 했을 뿐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 작은 변형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신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보자기의 미학, 미소 짓는 비장함의 미학, 소복의 미학, 뒹굴기의 미학이라고 표현해도 될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렇게 전반적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상상력,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는 크고 작은 파격의 실험 등등이 오태석을 오태석이게 하는 자산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