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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영릉(英陵)
가 .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명군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世宗大王)은 1397년(태종 6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에 이방원과 민씨부인(閔氏夫人)의 셋재 아들로 태어났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으로서 그가 태어날 때는 위로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효령대군(孝寧大君) 두 형이 있었다.
<영릉정문>
그는 11세 때인 1408년(태종 8년)에 충녕군(忠寧君)으로 봉해지고 그 직후 우부대언(右副代言)심온(沈溫)의 딸을 맞아 성혼하였는데 그녀가 뒷날의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이다.
그뒤 16세 때에는 忠寧大君으로 봉해지고 5년이 지난 1417년(태종17년)에는 대광보국에 올랐으며 22세가 되던 이듬해 1418년 6월에는 맏형 양녕대군이 부왕의 노여음을 사서 폐세자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두 달 뒤인 8월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조선왕조 4대 임금으로 즉위한 世宗大王은 1450년 54세로 재위 32년만에 돌아갈 때까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겨 후인들이 두고두고 태평성대를 이룬 그의 성덕과 치세를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뒷날 世宗大王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킨 뒤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을 때 이중 成三問 등은 世宗大王의 은덕을 갚고자 사육신으로 죽음의 길을 택한 반면 신숙주 등은 수양대군의 수족이 되어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세종대왕동상>
學文을 좋아하고 효성, 형제애도 지극하며, 또한 인쇄술 개량, 역법 개정, 과학기기 발명 등 그중에도 世宗大王 치적의 으뜸은 한글 창제라 하겠고, 외치에도 힘써 육진 개척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유물관>
이후 世宗大王은 1450년 재위 32년 만에 중풍에 걸려 54세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유학자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대왕이 세상을 뜨자 많은 후궁 중 10여 명이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되어 절로 들어갔다고 한다.
<재실>
나.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의 영릉(英陵)
*소재지 : 여주 능서면 왕대리 <사적 제195호>
영동고속도로 여주IC를 기점으로 진입하여 여주읍내로 들어가기 직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세종국악당과 여주농업고등학교 앞을 지나 표지판을 따라가면 영릉(英陵)이 있는 능서면 왕대리로 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합장한 영릉(英陵)을 쉽게찾을 수 있다.
<방지원도(方池圓島)>
朝鮮王陵 중에서 최고의 입장객이 있는 왕릉으로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왕릉 출입구에 들어서면 世宗大王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물로 유물관인 세종전에는 세종대왕 어진과 한글창제, 육진개척 등 대왕의 업적을 그린 그림과 당시에 발명하여 사용한 각종 科學기기 및 서책류 악기류 등이 전시되어있는 곳을 지나 영릉(英陵)입구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과 영릉비각(英陵碑閣), 대왕릉 등 62만평에 조선 왕조 최초의 합작릉인 世宗과 昭憲王后의 陵을 볼수있다.
<홍살문>
원래 영릉(英陵)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憲陵)옆 대모산(大母山) 서쪽기슭에 모셨으나 19년 뒤인 1469년(예종 원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같은 능서면 왕대리에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이웃하여 병자호란의 국치를 씻고자 와신상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선조 제17대 王인 효종(孝宗)왕과 인선왕후의 쌍릉(雙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서쪽에 있던 것을 1673년(현종14)에 이곳으로 옮겨온 영릉(寧陵)도 자리잡고 있어 함께 찾아볼 만하다.
世宗은 아버지 太宗의 헌릉 서쪽에 미리 수릉을 잡게하였다는 것은 세종의 孝心에 의한 것으로 볼수있으며 세종 역시 다른 왕처럼 수양대군에게 風水를 배우라 명할 정도로 風水에 관심이 깊고 수릉 선정도 수양대군(세조)이 세종의 命을 받고 결정하게 된다.
<참도>
수릉을 점한지 1년후 昭憲王后가 승하하자 천광(穿壙)에 물이 나오자 대신들이 대모산이 적당하지 않음을 상소하나 세종의 명으로 안장됬고,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合葬陵을 만들었다. 아마도 凶地라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그토록 부모곁이 그리워서였다하니, 1418년 6월17일,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세자로 책봉했던 태종은 그해 8월 8일, 21세의 세종에게 왕위를 전한 아버지의 결단은?........
世宗은 1450년 2월 17일 54세로 승하하고 6월6일 발인하는 날 문종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葬地로 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곳 世宗大王의 영릉(英陵)은 세조 이후 영릉(英陵)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단종도 죽음을 당하니 영릉 천장론(遷葬論)이 고개를 들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예종 1년(1469) 에 천장(遷葬)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地師를 선발하여 世宗大王을 모실 明堂을 찾으라고 명하여 결국 이곳 여주의 북성산 아래 자리를 잡았다.
世宗의 陵을 옮기는 데는 부역군 5천명과 공장(工匠) 150명이 동원되어 3월16일 여주 영릉에 遷葬하여 永遠히 잠들게 되었다.
<영릉>
다 . 영릉(英陵)의 風水論
영릉(英陵) 자리는 원래 광주 이씨(廣州 李氏)인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묘역(墓域)이라는 주장과 한산 이씨(韓山 李氏)로 세조 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대제학과 영중추원사를 거쳐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에 봉해진 이계전(李季甸)의 묘역(墓域) 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나 자세히는 알수없다.
입구에 잘 조성된 방지원도(方池圓島)는 네모 형식의 연못은 갖췄지만 중앙에 둥근 섬인 원도(圓島)는 없고 먹이를 찾는 잉어들만 놀고 있으니 아쉬움을 준다.
홍살문과 참도에 들어서면서 원래 王陵의 참도는 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걸어가는 御道와 神王이 가는 神道인 2道가 기본이며 홍살문 앞에서 시작한다. 참도가 2도가 아닌 황제의 참도인 3도로 되어있는 것은 전문가의 고증도없이 오히려 無知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릉 성역화 사업으로 왕의 참도가 2도가 아닌 황제의 참도인 3도로 되어있는 이유는 무었일가?. 또한 홍살문과 정자각까지 참도가 비스듬히 있는 것이 다른 王陵에도 있다는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陵에 오른다. 陵上까지 길을내어 참배객이 쉽게 오를수 있어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게 트인 山勢와 全景이 가슴을 탁트이게 한다.
"天下明堂!" 임자가 따로있나 하지만 "明堂은 임자가 있는 법".................積德者라 했던가?.
여주에는 북쪽으로 북성산이 있고, 동북쪽에는 양평과의 경계에 용문산이, 동쪽으로는 원주와의 경계에 치악산이 있다.
북성산의 용맥(龍脈)을 두고 용문산에서 한강을 건너 왔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남쪽의 속리산에서 뻗어 온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볼 때 북성산의 맥은 영릉(英陵)쪽으로 와서 뒤편 남한강의 삿갓바위에 부딪쳤다가 북성산을 향해 되돌아보는 셈이 된다. 따라서 영릉(英陵)의 형국(形局)은 용이 돌아와서 正南向으로 영릉을 처다보기에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의 산세가 봉황 날개를 펼치고 알을 품듯 영릉을 감싼다해서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라고도 한다.
<장명등>
영릉(英陵)의 혈명(穴名)을 풍수가에 따라 여러 산봉우리와 산줄기가 마치 꽃 잎 모양으로 혈을 감싸고 있으므로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 하기도 하고, 용(龍)이 마치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라 하여 비룡승천혈(飛龍昇天穴)이라고 하기도 하며, 혈(穴)이 군왕(君王)이라면 주변의 산들은 왕을 배알하는 신하들로 마치 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를 하는 모습이라 하여 군신조회형(君臣朝會形)이라고도 한다.
또 풍수가에 따라서는 이 곳을 모란꽃이 반쯤 핀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왕릉(王陵)이 있는 혈(穴)과 주위의 산세를 볼 때, 이 곳의 形局은 봉황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도 있다. 穴의 左.右에 있는 靑龍과 白虎는 모두 비단 장막처럼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이라는 것이다.
<안산과 조산>
혈(穴) 앞에 안산(案山)은 혈보다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 너머 조산(朝山)은 바로 이곳의 주산(主山)인 북성산이 맡고 있다 .
그 형상은 한 마리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고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혈(穴) 자리는 암컷이고, 조산은 수컷이라고 볼 수 있어 결국 자웅봉황상락형(雌雄鳳凰相樂形.암수 두 봉황이 마주 보고 즐기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본다면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제까지 형국론(形局論)과 형기론(形氣論)으로 龍, 穴, 砂, 水의 外的 아름다운 용모를 보았으니 內的 性格을 보기위해 理氣論으로 영릉의 明堂안을 바라보니 우수도좌(右水到左)하여 손사방(巽巳方)으로 去水되니 坐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팔십팔향법에 吉向이라는 水局의 정양향(正養向)으로 坐向을 잡은 듯하다.
正養向이 되며 귀인녹마상어가(貴人祿馬上御街)라 貴人祿馬가 벼슬길에 오른다는 것이며, 인정(人丁)이 왕성하고 재물이 성하여 공명현달(功名賢達)하고 發福이 오래간다는 것으로 지리 중에서 최고 吉한 向이다.
山川과 穴場은 예나 지금이나 그자리에 똑같은 모양으로 正坐하고 있건만 찾아오는 길손마다 보는데로 느낀데로 形形色色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大明堂이 아니라면 가능할까?.
지금 영릉(英陵)이 위치한 곳은 오래 전부터 '王 터'라고 불리던 곳으로, 한자로는 '왕대(王垈)라 해 왔다. 光州李氏 先山 을 빼앗아 세종임금을 모셔 왕릉이장(王陵移葬)으로 조선 王朝가 百年 더 지속됐다고 풍수가들이 傳하니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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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세종대왕릉(英陵)
영릉(英陵)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합장한 능이다.
세종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한글(훈민정음: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록, 1997)을 창제하고 측우기(側雨器),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으며, 아악(雅樂)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4군(四郡)과 6진(六鎭)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모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活子)를 개량하여 월인청강지곡(月印千江之曲 :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책), 농사직설(農事直說 : 농업 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 한국의 지리책), 석보상절(釋譜詳節 : 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취(醫方類聚 : 의학백과사전)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聖德)이 하늘같이 높았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원년(1469년)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 영릉 보수 정화 사업을 추진하여 세종전(유물 전시관)을 새로 짓고 경역(境域)을 성스러이 정화하였다.
<정자각>
*정자각(丁字閣)
제례(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T" 자 모양을 하고 있어 "T" 와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東入西出(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뒷벽의 중앙칸에 달린 문짝은 제사를 드릴 때 열어 놓게 되어 있으며 뒷편 서쪽에는 제문(祭文)을 태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영릉비>
*영릉비(英陵碑)
세종대왕릉(英陵)은 원래 광주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 원년)에 이 곳으로 이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1745년(영조 21년)에 세웠고, 비각도 이 때에 건조되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 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감>
*예감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으로 제사가 끝난 뒤 철상(撤床-제사 음식을 치움)하면서 축문(祝文)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수라간>
수
*수라간
다른 능역(陵域)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이며 주기적으로 드리는 제사나 임금의 친행(親行)이 있을 때 제물을 마련하던 집이다.
주초석(住礎石)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끝.
첫댓글 반갑습니다. 오늘서야 좋은 글과 사진을 발견했습니다.해설사답게 잘 만드신 내용이군요. 우리 사업단에서도 6월20일 영릉을 다녀왔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건승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