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청 주의 겸 사복 이상(李祥)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에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 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 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이경복(李 景福)․노윤발(盧潤發)․윤백년(尹百年)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2월 초2일 [양력 3월 23일]<신해> 맑다.
아침에 도망군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처벌했다.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됐다고 했다.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동궁에게 올린 달본(신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각 관포 에 공문을 써 보냈다. 활 열 순을 쏘았다. 바람이 잔잔하지 못했 다.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허물을 따졌다.
2월 초3일 [양력 3월 24일]<임자> 맑다.
새벽꿈에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광풍이 세게 일었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우우후가 빚진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보냈다. 원식․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했다. 면 천공문 한 장을, 원식이 남해에게 쇠붙이를 바치고서, 받아 갔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2월 4일 [양력 3월 25일]<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거북함이 들어왔다. 조카 봉( )과 이설(李渫)․이언량(李彦良)․이상록(李尙祿) 등이 강돌천(姜乭千)을 데리고 왔다.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鄭琢)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조카 봉( )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 초5일 [양력 3월 26일]<갑인>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 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우 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우조방장 및 우우후․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 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 스럽다.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2월 6일 [양력 3월 27일]<을묘> 비가 내렸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순천부사․조방장․웅천현감․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어두울 무렵 흥양에서 김방제(金邦濟)가 왔다. 누르고 향기로운 것(柚子?) 을 서른 개 가져 왔는데 새로 캔 것 같았다.
2월 7일 [양력 3월 28일]<병진>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와 홍군우(洪君遇)․ 이숙도(李叔道)․ 강인중(姜仁仲) 등에게 문안편지를 조카 분(芬)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芬)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芬)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각 배에 솟장(所志) 이백 여 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고성현령(조응도)이 보고에,"적선 쉰 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리 끄승개)에 이르렀다"고 했 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諸萬春)이 와서 서울 소식 을 말했다. 이경복(李景福)을 격군 붙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방답첨사에게 죄인을 잡아오라고 전령했다. 낙안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준계(金俊繼)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도 붙잡아 오라고 전 령했다.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월 8일 [양력 3월 29일]<정사>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봉과 분(芬) 등이 배를 타고 떠났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고성 땅 소소포(召所浦: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쉰 여 척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 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우병사의 군관이 편 지를 가져 와서 저희 장수 방지기(房人)를 면천하는 일을 말했다.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이야기하 고서 저녁에 돌아왔다.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순 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변존서(卞存緖)가 당포에 가서 꿩 일곱 마리를 사냥해 왔다.
2월 9일 [양력 3월 30일]<무오> 맑다.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 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머리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 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 인지도 물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 았다. 이유함(李惟 )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 (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후․ 사도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사천현감․하동현 감․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물무렵에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무군사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시위할 긴창을 수십 자루를 만들 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날 동궁이 문책하는데 대한 답을 써 보냈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31일]<기미> 가랑비와 센바람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했다.
2월 11일 [양력 4월 1일]<경신> 맑다.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 다. 종사관의 공문 세 통을 써 보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 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술 열 잔을 마시니 취하여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우조방장도 왔다. 같이 취했다. 저물어서 활 세 순을 쏘았다.
2월 12일 [양력 4월 2일]<신유>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芬)의 편지에 선 전관 송경령(宋慶 )이 수군을 살펴볼 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시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임금의 분부(有旨)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 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보며, 형세 를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으며, 비밀문서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던 적어 올리라"는 것 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 가지 소식과 역적 들의 일을 들었다.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도 왔다.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2월 13일 [양력 4월 3일]<임술>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 경령)을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사량만 호(이여염)․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오후 여섯 시쯤에 첫나발을 불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우수사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春 元浦)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곧 나 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내어 상의케 하면서 전하게 한 말은,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 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 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조항첨사․순천부사․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 다. 박영남(朴永男)․송덕일(宋德馹)이 되돌아갔다.
2월 14일 [양력 4월 4일]<계해>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
경상도의 남해․하동․사천․고성 등지에는 송희립(宋希立)․변 존서(卞存緖)․ 류황(柳滉)․ 노윤발(盧閏發)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卞有憲)․나대용(羅大用)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본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정종(鄭宗)․배춘복(裵春福)도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왔다. 장언춘(張彦春)을 천민 에서 면하게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2월 15일 [양력 4월 5일]<갑자> 맑다.
새벽에 거북함 두 척과 보성의 배 한 척을 멍에나무(駕木) 치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 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신문했다. 흥양배 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또 순천부사․우 조방장․우수사의 우후․발포만호․여도만호․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 때에 순찰사(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조도어사 박홍로(朴弘老)의 계본에서 순천․광양․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바친 바, 수 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 려왔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2월 16일 [양력 4월 6일]<을축>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柳夢寅)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李夢祥)․무장 현감 이충길(李忠吉)․영암군수 김성헌(金聲憲)․낙안군수 신호 (申浩)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담양부사(李景老)․ 진원현감(趙公瑾)․ 나주목사(李用純)․ 장성부사(李貴)․ 창평현령 백유항(白惟恒)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암행어사 류몽인(柳夢寅)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장․ 우수사우후․ 사도첨사․ 발포만호․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 등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순천감목관이 진에 왔다가 돌아갔다. 우수사가 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2월 17일 [양력 4월 7일]<병인>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지휘선에 연기 그을리는 일 때 문에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각 처에 공문을 써 보냈다. 오전 열 시쯤에 우수사가 들어왔다. 우두머리 군관 정홍수와 도 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아흔 대를 쳤다. 이홍명(李弘明) 및 임희 진(林希璡)의 손자도 왔다. 대로 총통(竹銃筒)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우수사가 거느린 전 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더욱 한스럽다. 순천부사․우조방장이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월 18일 [양력 4월 8일]<정묘> 맑다.
아침에 배 첨지가 왔다. 가리포 이응표(李應彪)가 왔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魏大器)에게 명령 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 때마침 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한두번 밖에 못했다. 초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왔다.
2월 19일 [양력 4월 9일]<무진>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조금 있다가 손충갑(孫忠甲)이 왔다고 보고하기에 불러 들여서 그 왜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 더니, 감개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저물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본영으로 갔다.
2월 20일 [양력 4월 120일]<기사>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울(蔚)이 우수사 영감의 배에 갔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월 21일 [양력 4월 11일]<경오> 맑고 따뜻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 담(魚泳潭)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봤더 라고 보고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우 영감은 청주영감의 아제이다. 해질녘에 돌아갔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諸漢國)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여덟 척이 와서 대었다고 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삼도에 전령하기를, 진격할 약속을 내리고서 원균(元均)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2월 22일 [양력 4월 12일]<신미>
밤 한 시가 막 넘자 제홍록(諸弘祿)이 와서 말하는데, "왜선 열 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春原浦)에 이르 렀다"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명령하고서 보냈다. 아침에 순천부사 ․우
2월 28일 [양력 4월 18일]<정축>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우수사를 처벌했다.
2월 29일 [양력 4월 19일]<무인> 맑다.
아침에 종사관과 같이 식사를 하고, 또 전별의 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도 함께 했다.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 (諸漢國)의 긴급보고 내용에, "적선 열여섯 척이 소소포로 들어 왔다"고 하므로 각 도에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
갑오년 3월 (1594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20일]<기묘> 맑다.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곧바로 올라가 검모포만호에게 캐묻고서 만호에게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정경 달)이 돌아왔다. 막 어두울 녘에 출항하려할 때, 벽방척후장 제한 국(諸漢國)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도망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월 초2일 [양력 4월 21일]<경진> 맑다.
아침에 방답․순천․우조방장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 우조방장․ 순천부사․ 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에 장흥이 와서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강진의 모종으로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모두 다 타버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22일]<신사> 맑다.
아침에 전문(명절하례로 임금께 올리는 글월)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 이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를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좌조방장․ 우조방장․ 방답첨사․ 가리포 첨사․ 좌수사 우후․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척후장(제한국)이 보고한 내용에,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당항포 등지에 정박 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 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3월 초4일 [양력 4월 23일]<임오> 맑다.
밤 두 시쯤에 출항했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섯 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돝섬(猪島: 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저도. 용두산 해발 203m)에서 두 척을 불태워 버렸다. 또 소소강 에 열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경상우수사 원균(元 均)에게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고성땅 아잠포(阿自音浦;고성 군 동해면 당거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3월 초5일 [양력 4월 24일]<계미> 맑다.
겸 사복(윤붕)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 므로 빈 배 열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경상우 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우수사가 와서 볼 적에 비 가 많이 퍼붓고바람도 몹시 불었다. 바로 자기 배로 돌아갔다.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우조 방장과 순천․방답․배 첨사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 갔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25일]<갑신> 맑다.
새벽에 망군이 보니, 적선 마흔 척 남짓이 청슬(거제시 사등면 지석리)로 건넜다고 했다. 당항포 왜선 스무한 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긴급보고를 했다. 저녁나절에 거제로 향하는 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 조차 불편하다. 저녁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고서 보냈다.
3월 초7일 [양력 4월 26일]<을유>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손의갑(孫義甲)으로 하여금 작성했는 데도 그것마저 못 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鄭思立)에게 이를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두 시쯤에 출항하여 밤 열 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3월 초8일 [양력 4월 27일]<병술> 맑다.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아팠다.
3월 초9일 [양력 4월 28일]<정해> 맑다.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29일]<무자> 맑다.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 뿐이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3월 11일 [양력 4월 30일]<기축> 종일 큰 비가 왔다.
어두울 무렵에는 개였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 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월 12일 [양력 5월 1일]<경인>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 장계를 정서하 는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3월 13일 [양력 5월 2일]<신묘>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 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 )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오후에 원균(元均) 수사가 왔다. 그의 잘못된 일을 말했다. 그래 서 장계를 도로 가져 와서 원사진(元士震)과 이응원(李應元) 등 거짓으로 왜인 노릇한 놈을 목잘라 바친 일을 고쳐서 보냈다.
3월 14일 [양력 5월 3일]<임진> 비가 내렸다.
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강진현감(류해)․ 첨지 배경남(裵慶男) 같이 갔다.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薪場)에 왔다"고 한다. 종일 몸이 불편했다.
3월 15일 [양력 5월 4일]<계사>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종일 신음했다.
3월 16일 [양력 5월 5일]<갑오> 맑다.
몸이 매우 불편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월 17일 [양력 5월 6일]<을미> 맑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변유헌(卞有憲)은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도 돌아갔다. 해남현감(위대기)는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은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3월 18일 [양력 5월 7일]<병신> 맑다.
몸이 몹시 불쾌하다. 남해현감 기효근(奇孝謹)․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 적량첨사 고여우(高汝友)가 와서 봤다. 기효근(奇孝謹)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보성군수는 말을 하려 했다가 사정을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낙안 유위장(留衛將)과 향소(鄕所) 등을 잡아 가두었다.
3월 19일 [양력 5월 8일]<정유>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3월 20일 [양력 5월 9일]<무술> 맑다.
몸이 불편하다.
3월 21일 [양력 5월 10일]<기해> 맑다.
몸이 불편하다.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로 여도만호(김인영)․남도 포만호(강응표)․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을 뽑아 담당시켰다.
3월 22일 [양력 5월 11일]<경자> 맑다.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書契: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3월 23일 [양력 5월 12일]<신축> 맑다.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방답첨사(이순신)․흥양현감(배흥립)․ 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봤다. 견내량이 미역 쉰세 동을 캐어 왔 다. 발포만호(황정록)도 와서 봤다.
3월 24일 [양력 5월 13일]<임인> 맑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미역 예순 동을 캐 왔다. 정사립 (鄭思立)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3월 25일 [양력 5월 14일]<계묘> 맑다.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希順)가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의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 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저녁에 아우 여필․아들 회( )․ 변존서(卞存緖)․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3월 26일 [양력 5월 15일]<갑진>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 같다. 조방장․방답첨사가 와서 왔다. 발포 만호가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사량만호․ 사도첨사․소비포가 아울러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 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 겠다고 했다.
3월 27일 [양력 5월 16일]<을사> 흐리되 비는 아니 오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초저녁에 비가 왔다. 봉( )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17일]<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조카 봉( )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걱정된다.
3월 29일 [양력 5월 18일]<정미> 맑다.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웅천현감․ 하동현감․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장흥부사․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저녁에 여필과 봉( )이 같이 돌아갔다. 봉( )은 중 병이 들어 돌아 갔으니 밤새도록 걱정으로 새웠다. 어두워서 방 충서와 조서방의 사위 김함(金 )이 왔다.
3월 30일 [양력 5월 19일]<무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도훈도를 처벌하고 낙안유위장․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저녁나절에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이 와서 봤다. 저녁에야 숙소로 내려왔다.
갑오년 4월 (1594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20일]<기유> 맑다.
매일 먹는 밥인데도 밥을 먹지 못했다. 장흥부사(황세득)․진도 군수(김만수)․녹도만호(송여종)이 여제(악질병에 걸려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고 아뢰고 돌아갔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4월 초2일 [양력 5월 21일]<경술>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삼가현감과 충청수사 와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4월 초3일 [양력 5월 22일]<신해> 맑다.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내려왔다.
4월 초4일 [양력 5월 23일]<임자> 흐렸다가 어둘녘에 비가 왔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송홍득(宋弘得)과 변홍달(卞弘達)이 새로 급제한 홍패(과거 합격증)를 가지고 왔다.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 창령(朴昌齡)의 아들 박의영(朴義英)이 와서 그의 장수의 안부 를 전했다. 식사를 한 뒤에 삼가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정 자로 올라가니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일 오손도손 이야기하였다.
4월 초5일 [양력 5월 24일]<계축> 흐리다.
새벽에 최천보(崔天寶)가 죽었다.
4월 초6일 [양력 5월 25일]<갑인> 맑다.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丙年마다 보이던 문무 시험)를 보는 시험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구사직)이요,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황세득)․ 고성현령(조응도)․삼가현감(고상안)․웅천현감(이운룡)을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4월 초7일 [양력 5월 26일]<을묘> 맑다.
일찍 모여 시험을 받았다.
4월 초8일 [양력 5월 27일]<병진> 맑다.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28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큰 비가 왔다. 조방장 어영담 (魚泳潭)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4월 초10일 [양력 5월 29일]<무오> 흐리다.
순무어사(각지의 군대와 백성을 순찰하려고 파견되는 중앙관리) (서성)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4월 11일 [양력 5월 30일]<기미> 맑다.
순무어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문안하는 배를 내어 보냈다.
4월 12일 [양력 5월 31일]<경신>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경상 수사(원균)․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억지 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4월 13일 [양력 6월 1일]<신유> 맑다.
순무어사가 전쟁연습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그래서, 죽도(통영 시 한산면)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했다. 선전관 원사표(元士 彪)․금오랑 김제남(金悌男)이 충청수사(구사직)를 잡아갈 일로 왔다.
4월 14일 [양력 6월 2일]<임술> 맑다.
김제남과 함께 자세한 말을 했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 기밀을 자세히 의논했다. 잠시후에 우수사가 오고, 순 천부사․방답첨사․사도첨사도 아울러 왔다. 나는 하직하고 배로 돌아왔다.
4월 15일 [양력 6월 3일]<계해> 맑다.
충청수사(구사직)가 선전관(원사표)․금오랑(김제남)․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왔다. 충청수사 우경(虞卿) 구사직(具思稷)과 작별 했다.
4월 16일 [양력 6월 4일]<갑자>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올라갔다. 밀려 쌓인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고경운(高景雲)과 도훈도 및 변고(變故)에 대비하는 색리․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저녁에 송두남(宋斗南)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장계에 따라 낱낱이 하교한 대로 시행했다.
4월 17일 [양력 6월 5일]<을축> 맑다.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거제현령(안위)가 급히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백 여 척이 본토(日本)에서 처음 나와서 절영도(折影島)로 향한다."고 했다. 저물 무렵에 거제에 살다가 사로잡혔던 남녀 열여섯 명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4월 18일 [양력 6월 6일]<병인> 맑다.
새벽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적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마도 평의지(宗義智)는 웅천땅 입암(진해시 웅천동 제덕 리)에 있고, 평행장(小西行長)은 웅포에 있다고 한다. 충청도 신임 수사(李純信)․순천부사 및 우수사우후(李廷忠)가 왔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도 왔다.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세차게 왔다.
4월 19일 [양력 6월 7일]<정묘> 비가 내렸다.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원수부에서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논 의하고서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4월 20일 [양력 6월 8일]<무진> 종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았다.
우수사․충청수사․장흥부사․마량첨사(강응표)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에 관한 일도 의논했다.
4월 21일 [양력 6월 9일]<기사> 비가 오락가락 했다.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으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첨사가 충청수사로 되어 중기(重記)를 수정하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에 김성숙(金惺叔)과 곤양의 이광악(李光岳)이 와서 봤다. 저물녁에 흥양이 들어 왔다. 본영 탐후선도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4월 22일 [양력 6월 10일]<경오> 맑다.
바람이 시원하여 가을 날씨 같다. 첨지 김경로가 다시 돌아왔다. 장계를 봉하고, 또 조총을 동궁에게 줄 긴 창과 더불어 봉해 올렸다. 장흥부사가 왔다. 저녁에 흥양현감도 왔다.
4월 23일 [양력 6월 11일]<신미>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권준)․흥양현감(배흥립)이 왔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이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4월 24일 [양력 6월 12일]<임신> 맑다.
아침에 서울 편지를 썼다. 저녁나절에 영암군수(박홍장)․마량 첨사(강응표)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각 항목의 장계를 봉해 보냈다.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순찰사 종사관이 왔다고 한다.
4월 25일 [양력 6월 13일]<계유> 맑다.
꼭두새벽부터 몸이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아침에 보성군수가 와서 봤다. 밤새도록 앉아서 앓았다.
4월 26일 [양력 6월 14일]<갑술> 맑다.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4월 27일 [양력 6월 15일]<을해> 맑다.
통증이 잠깐 덜하다. 숙소로 내려갔다.
4월 28일 [양력 6월 16일]<병자> 맑다.
기력과 아픈 증세가 많이 덜했다. 경상수사(원균)과 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봤다. 울(蔚)이 들어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17일]<정축> 맑다.
기운이 상쾌해진 것 같다. 아들 면이 들어왔다. 곧 고을의 종 넷과 관의 종이 들어왔다.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갑오년 5월 (1594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18일]<무인>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의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무척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계집 종 넷, 관 계집 종 네 명이 병을 간호하러 들어왔다. 덕이(德)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내일 돌려 보내라고 일렀다.
5월 초2일 [양력 6월 19일]<기묘> 맑다.
새벽에 회는 계집 종 등과 더불어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돌아갔다. 우수사(이억기)․흥양현감(배흥립)․사도첨사 (김완)․소근첨사(박윤)이 와서 봤다. 몸이 차츰 나아져 갔다.
5월 초3일 [양력 6월 20일]<경진> 맑다.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장흥부사와 발포 만호가 와서 봤다.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힌 사령 장) 삼백 여 장(丈)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5월 초4일 [양력 6월 21일]<신사> 거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리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더 심하게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왜적 세 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통영시 산양면)에 온 것을 만나 잡아 왔다."고 했다. 이를 추문(推問)한 뒤에 압송할 일로 일러 보냈다. 저녁에 공 대원(孔大元)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 (日本)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를 조 종할 수가 없어 떠 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 나 간사한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이설(李渫)․이상록(李尙 祿)이 돌아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월 초5일 [양력 6월 22일]<임오> 비바람이 세게 불어쳤다.
지붕이 세 겹이나 말리어 조각 조각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 같이 내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우습다. 사도첨사가 와서 문안 하고 돌아갔다. 큰 비바람이 오후 두 시쯤에야 조금 멈추었 다. 발포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 왔다. 탐후선이 들어 왔다.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5월 초6일 [양력 6월 23일]<계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사도․보성․낙안․소근 등이 와서 봤다. 오후에 경상수사 원 균(元均)이 왜놈 세 명을 잡아 왔기에 문초를 해 보니, 이랬다 저랬다 만번이나 속이므로 수사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우수사도 왔다. 술을 세 순배 돌렸다가 상을 물리고 돌아갔다.
5월 7일 [양력 6월 24일]<갑신> 맑다.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5월 8일 [양력 6월 25일]<을유> 맑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邊應慤)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 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 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수사 를 불어 의논했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밤에 큰 비가 왔다.
5월 9일 [양력 6월 26일]<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 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아득하여 술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5월 10일 [양력 6월 27일]<정해> 비가 내렸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 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해도 섬멸할만하다. 저녁나절에 우우후(李廷忠)과 충청수사(李純信)이 와서 두 사람이 장기를 두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보성군수(金得光)가 저물 무렵에 왔다.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 )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소비포권관이 약품을 보내 왔다.
5월 11일 [양력 6월 28일]<무자> 비가 저녁 때까지 내렸다.
3월부터 밀려 쌓인 공문을 낱낱이 적어서 내려줬다.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5월 12일 [양력 6월 29일]<기축> 큰 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이 되서 야 조금 그쳤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5월 13일 [양력 6월 30일]<경인> 맑다.
이 날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붙들렸는데, 많은 보자기들이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복들을 보 내어 잡아 오게 하였더니, 원균(元均) 수사가 도리어 사복(司僕) 들을 묶어서 가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 를 풀어 주게 했다. 밤 열 시쯤에 비가 왔다.
5월 14일 [양력 7월 1일]<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이순신)․낙안군수(김준계)․임치현감(홍견)․목포만호( 田希光) 등이 와서 봤다. 영리(營吏)에게 시켜 종정도(벼슬이름을 품계와 종별을 따라 그려 놓고 윷놀이 하듯이 말을 쓰는 놀이)를 그렸다.
5월 15일 [양력 7월 2일]<임진> 종일 비가 내렸다.
아전에게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5월 16일 [양력 7월 3일]<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어서 마른 데가 없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매우 괴로울 것이 염려된다. 곤양군수 (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당 유정이 진진 안으로 왕 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각 관청에서 업무상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던 글)를 보내 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5월 17일 [양력 7월 4일]<갑오>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바다의 안개가 캄캄하여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5월 18일 [양력 7월 5일]<을미> 종일 비가 내렸다.
미조항첨사(金勝龍)가 와서 봤다. 저녁에 상주포권관이 와서 봤다. 저녁에 보성현감이 돌아갔다.
5월 19일 [양력 7월 6일]<병신> 맑다. 장마비가 잠깐 걷혔다.
마음이 몹시 상쾌했다. 아들 회와 면과 계집 종 등이 돌아갔다. 그때때, 바람이 순탄치 않았다. 이날 송희립과 회가 같이 착량에 가서 노루를 잡을 적에 비바람이 몹시 일고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초저녁에 돌아왔는데도 활짝 걷히지 않았다.
5월 20일 [양력 7월 7일]<정유> 비가 오고 또 거센 바람이 조금 그 쳤다.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관찰사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에 더 많이 유감스럽다.
5월 21일 [양력 7월 8일]<무술> 비가 내렸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를 했다. 거제 장문포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卞師顔)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센 바람이 밤낮으로 불 었다.
5월 22일 [양력 7월 9일]<기해>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는 29일이 장모의 제삿날이다. 아들 회와 면을 내보냈 다. 계집 종들도 내 보냈다. 순찰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또 순변사에게도 편지를 써 보냈다. 황득중(黃得中)․박주하(朴注河)․ 오수(吳水) 등은 격군을 잡아 올 일로 내 보냈다.
5월 23일 [양력 7월 10일]<경자> 비왔다.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왔다. 저녁나절에 해남현감(위대기)이 와서 술과 안주를 바치므로, 충청수사(李純信)를 청하여 왔다.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5월 24일 [양력 7월 11일]<신축> 잠시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웅천․소비포가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해남도 왔다. 오후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구사직(具思稷)에 대한 장계를 가져 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5월 25일 [양력 7월 12일]<임인>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조카 해가 돌아갔다.
5월 26일 [양력 7월 13일]<계묘> 걷히기도 하고 비오기도 하였다..
마루에 앉았는데 서쪽 벽이 무너져 있었다. 바라지 창으로 들어 오는 바람을 다시 쐬니 기분을 맑게 하여 무척 좋았다. 과녁판을 정자 앞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 이인원(李仁元)과 토병 스무세 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두어 들이라고 일러 보냈다.
5월 27일 [양력 7월 14일]<갑진> 맑다가 비오기더 했다.
사도첨사가 충청수사․발포만호․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소비포권관이 누워서 앓았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5일]<을사> 잠깐 개이다.
사도첨사․여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겠다고 여쭈었다. 그래서 우수사․충청수사를 청해 와서 활쏘고, 취하여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광양 4호선의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16일]<병오>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엿다.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진도군수(金萬 壽)가 아뢰고 돌아갔다. 웅천현감(李雲龍)․거제현령(安衛)․적량 첨사(高汝友)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물녁에 정사립(鄭思立)이 보고하는데,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간다"고 했다. 그래서 잡아서 가두었다.
5월 30일 [양력 7월 17일]<정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왜놈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도 보 자기 세 명을 처벌했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왔다.
갑오년 6월 (1594년 6월)
6월 초1일 [양력 7월 18일]<무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6월 초2일 [양력 7월 19일]<기유> 맑다.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진으로 갔더니, 강진현감(류해)이 술을 바쳤다. 활 두어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원균(元均)도 왔다. 나는 곧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누워서 충청수사와 첨사 문길(門吉) 배경남(裵慶男)이 내기 장기두는 것을 구경했다.
6월 3일 [양력 7월 20일]<경술> 초복이다. 아침에 맑더니 오후에 소 나기가 퍼부어 종일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바닷물 빛조차 흐리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충청수사․첨사 배경 남(裵慶男)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6월 4일 [양력 7월 21일]<신해> 맑다.
충청수사․미조항첨사와 웅천현감이 와서 보기에 종정도를 놀게 했다. 저녁에 겸 사복이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그 사연에 이르기를,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전날의 버릇을 버려라."는 것이다. 통탄하기 그지없다. 이는 원균(元均)이 술에 취하여 망발한 때문이다.
6월 5일 [양력 7월 22일]<임자>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사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밤 열 시쯤에 급창(관청의 심부름하는 종) 김산(金山)과 그 처자 등 세 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세 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가다니, 참으로 슬프다. 무우밭을 갈았다. 송희립․낙안군수․흥양현감․보성군수가 군량을 독촉할 일로 나갔다.
6월 6일 [양력 7월 23일]<계축> 맑다.
충청수사․여도만호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소나기가 왔다.
6월 7일 [양력 7월 24일]<갑인> 맑다.
충청수사․첨사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남해군관과 색리 등의 죄를 처벌했다. 송덕일(宋德馹)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有旨)가 들어온다고 했다. 오늘 무우씨 두 되 다섯 홉을 부침했다.
6월 8일 [양력 7월 25일]<을묘> 맑으며 물쿠었다.
우우후가 왔다. 충청수사와 다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저녁 에 종 한경(漢京)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기쁘고도 다행이다. 미조항첨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회 령포만호(민정붕)가 진에 왔다. 전공(戰功)에 따라 포상하는 관교 (官敎:敎旨)도 왔다.
6월 9일 [양력 7월 26일]<병진> 맑다.
충청수사․우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 기했다. 밤이 깊은데 피리소리 가득한 바다, 거문고를 타며 장수를 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6월 10일 [양력 7월 27일]<정사> 맑으며, 물쿠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6월 11일 [양력 7월 28일]<무오> 맑으며,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蔚)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회포가 씁쓸하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몹시 사나와지며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앉아서 오래도 록 있다가 헤어졌다.
6월 12일 [양력 7월 29일]<기미>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가뭄이 너무 심하다. 농사의 근심이 더욱 염려스럽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본영의 배 격군 일곱 놈이 도망갔다.
6월 13일 [양력 7월 30일]<경신> 바람이 몹시 불고 더위는 찌는 듯하다.
6월 14일 [양력 7월 31일]<신유>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하다.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 농사일이 아주 걱정된다. 충청수사․사 도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와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충청 수사가 가장 잘 맞혔다. 이 날 경상수사는 활꾼을 거느리고 우수 사가 있는 곳으로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고 했다.
6월 15일 [양력 8월 1일]<임술> 맑더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신경황(申景滉)이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라를 근심함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지사 윤우신(尹又 新)이 죽었다니, 애석할 따름이다. 순천부사․보성군수가 달려와 보고하는데, "명나라 총병관 장 홍유가 호선(號船)을 타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 벽파정(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르렀다."고 했다. 날짜로 짚어보면 오늘이나 내일에 이르를 것이지만, 바람이 맞불 어 맘대로 배를 부리지 못한 것이 닷새째이다. 이 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렸다.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게 아니겠는가.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 )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6월 16일 [양력 8월 2일]<계해>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에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6월 17일 [양력 8월 3일]<갑자>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충청수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탐 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으나, 면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몹시 걱정된다.
6월 18일 [양력 8월 4일]<을축> 맑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조추년(趙秋年)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원 수가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러 광양현감(송전)이 수군 중에 복병을 뽑을 적에 사사로운 정을 썼다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군관 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으니, 놀라운 일이다. 원수가 그 서처남 조대항(曺大恒)의 말을 듣고 이렇게도 사사로이 행하니 통탄스럽 기 그지 없다. 이 날 경상우수사가 청했는데 가지 않았다.
6월 19일 [양력 8월 5일]<병인> 맑다.
원수의 군관과 배응록(裵應祿)이 원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변존서(卞存緖)․ 윤사공(尹思恭)․ 하천수(河千壽) 등이 들어왔다. 충청수사가 와 보고서 그 어머니 병환 때문에 곧 그의 사처(私 處)로 돌아갔다.
6월 20일 [양력 8월 6일]<정묘>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보고 활을 쏘았다. 박치공(朴致恭)이 와서 말하 고 서울로 갔다. 마량첨사도 왔다. 저녁에 영등포만호는 본포(영 등포)에 물러나 있었던 죄를 다스렸다. 탐후선 이인원(李仁元) 이 들어왔다.
6월 21일 [양력 8월 7일]<무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바닷길로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 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6월 22일 [양력 8월 8일]<기사> 맑다.
할머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오늘 불꽃과 같은 삼복 더위가 전보다 더하여 큰 섬이 찌는 듯하여 사람이 견디기가 여 간 어렵지 않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두 끼니나 먹지 않았다. 초저 녁에 소나기가 내렸다.
6월 23일 [양력 8월 9일]<경오> 맑더니 저녁나절에 소나기가 왔다.
순천부사․충청수사․우우후․가리포첨사가 아울러 와서 봤다. 우후(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았다. 왜적의 동태를 캐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 니, 염초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6월 24일 [양력 8월 10일]<신미> 맑다.
순천부사․충청수사가 와서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월 25일 [양력 8월 11일]<임신> 맑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여념(李汝恬)도 와서 활을 쏘았다. 종사관(정경달)을 모시는 아전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 데, 조도어사의 말이 몹시 놀라왔다. 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6월 26일 [양력 8월 12일]<계유>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여도만호․고성현령 등이 활을 쏘았다. 일찍 김양간(金良幹)에게 단오날의 진상물을 봉해 올렸 다. 마량․영등포가 여기 왔다가 곧 돌아갔다.
6월 27일 [양력 8월 13일]<갑술>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6월 28일 [양력 8월 14일]<을해> 맑다. 더위가 찌는 듯하다.
나라제삿날(明宗 祭日)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진무성(陳 武晟)이 벽방산의 망보는 곳의 부정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은 없더라고 보고했다.
6월 29일 [양력 8월 15일]<병자> 맑다.
순천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수사․충청수사와 같이 와서 활을 쏘았다. 윤동구(尹東耈)의 아버지가 와서 봤다.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갑오년 7월 (1594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6일]<정축> 맑다.
배응록(裵應祿)이 원수에게서 들어 왔다. 원수가 뉘우치는 말을 하고서 보냈다는 것이다. 우습다. 이 날이 나라제삿날(仁宗 祭 日)이라 홀로 종일 앉있었다. 저녁에 충청수사가 여기 와서 서로 이야기했다.
7월 초2일 [양력 8월 17일]<무인> 맑다.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 날 순천의 도청(원을 보좌하는 아전)과 색리․광양의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좌도 사수들의 활쏘기 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충 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배 첨지가 휴가를 받아 갔다. 노윤 발(盧潤發)에게 흥양군관 이심(李深)과 병선 색리․괄군색리 등을 붙잡아 올 일로 전령을 주어 내 보냈다.
7월 초3일 [양력 8월 18일]<기묘> 맑다.
충청수사․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으로 나가 보았다.
7월 4일 [양력 8월 19일]<경진> 맑다.
충청수사가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량첨사․소비포권 관도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옥과의 계원유사 조응복(曺應福)에게 참봉의 직첩을 주어 보냈다.
7월 5일 [양력 8월 20일]<신사> 맑다.
새벽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심약(審藥: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도에 파견하는 종9품의 벼슬인데, 전의감 혜민서의 의원중에서 뽑음)이 내려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열여 순을 쏘았다. 너무 취해서 수루에 올랐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월 6일 [양력 8월 21일]<임오> 종일 궂은비 오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큰 도둑 세 놈을 최귀석(崔貴 石)이 잡아 왔다. 또 박춘양(朴春陽) 등을 보내어 그 괴수를 잡아 왼쪽 귀를 잘라서 왔다. 아침에 정원명(鄭元溟)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이를 잡아 가두었다. 저녁에 보성군수가 들어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밤 11시 쯤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 아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7월 7일 [양력 8월 22일]<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아뢰고 모이지 못했다. 우수사는 순천부사․ 사도첨사․ 가리포첨사․ 발포만호․ 녹도만호가 함께 활을 쏘았다. 이영남(李英男)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간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保人)을 문초했다. 보성이 왔다.
7월 8일 [양력 8월 23일]<갑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곤하여 장수들을 보지 않았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오후에 충청수사에게 가서 봤다. 저녁에 고성 사람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 초했다. 광양의 송전(宋銓)이 그의 지휘관인 병사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우후가 온다고 했다.
7월 9일 [양력 8월 24일]<을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저녁나절에 순 천․낙안․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이 격군을 소홀히 하고 또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가리포․임치․소근포․마량첨사 및 고성현령이 아울러 왔다.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섬을 받아서 나누었다.
7월 10일 [양력 8월 25일]<병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아침에 낙안의 겨냥 벼 찧은 것과 광양 벼 백 섬을 되었다. 신 홍헌(申弘憲)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송전(宋筌)과 군관이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아침에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蔚)과 심약 신경황․ 정사립․ 배응록(裵應祿)을 아울러 내 보냈다.
7월 11일 [양력 8월 26일]<정해> 궂은비가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불고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蔚)이 가는 길이 고 되고 힘들 것이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경상 순무(서성)의 공 문이 왔는데, 원 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같이 활을 쏘았다. 윤언침(尹彦 )이 점고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도로 보냈다. 저물무렵에 비바람이 몹시 치더니 밤 내내 계속 되었다.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7월 12일 [양력 8월 27일]<무자> 맑다.
아침에 소근첨사가 와서 보고 화살 쉰네 개를 만들어 바쳤다. 공문을 적어서 나누어 주었다. 충청수사는 순천․사도․발포․충 청우후와 아울러 와서 활을 쏘았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기 에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여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 다. 이는 류 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날 어둘 무렵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제대 로 걷잡을 수 없다. 염려가 더욱 답답하여 밤이 깊어 가도 잠들 지 못했다. 류 정승이 만약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7월 13일 [양력 8월 28일]<기축>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 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또 류 정승의 점을 친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 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무척 좋았다.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저녁나절에 송전(宋筌)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 를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 서 되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 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7월 14일 [양력 8월 29일]<경인> 비가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묘하다.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를 청해 와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 심이 뱃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나가 몇 바퀴나 어설렁거리다가 돌아왔 다. 탐후선이 오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자정에 비가 또 내렸다.
7월 15일 [양력 8월 30일]<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조카 해․종 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 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조카 분(芬)의 편지 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 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흥종(李 興宗)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李純信)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 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 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 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7월 16일 [양력 8월 31일]<임진>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늦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더니 종일 퍼붓듯이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충청수사․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소비포가 소의 다리 등을 보내 왔다.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사천시 삼천 포)에 이르러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여도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17일 [양력 9월 1일]<계사> 맑다.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병호선(兵號船)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 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작년 7 월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 서 시랑(侍郞) 손광(孫鑛)과 총병(總兵) 양문(楊文)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무에 수고라고 할 것이 있는 가 했다. 나는 차를 마시라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 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7월 18일 [양력 9월 2일]<갑오> 맑다.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점심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술을 서너 차례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공히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으시대면서 추악 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7월 19일 [양력 9월 3일]<을미> 맑다.
아침에 환영 예물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했다. 충청수사도 드렸다. 저녁나절에 우 수사가 예물을 주는데 몇몇은 나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 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한가지라도 아래쪽 힘쓸 것이 없었다. 우습고 우스웠다. 또 자(字)와 호(別號)를 물으니, 써서 주는데, 자는 중문(仲文)이 요, 호(軒號)는 수천(秀川)이라고 했다. 촛불을 밝히고 다시 이야 기하다가 헤어졌다. 비가 많이 올듯하여 배로 내려가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4일]<병신> 맑다.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劉綎)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 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 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 며, "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 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 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그리고 경수(景修:이억기)․ 충청수사․ 순천부사․ 발포만호․사 도첨사와 같이 사인암(舍人巖)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7월 21일 [양력 9월 5일]<정유> 맑다.
아침에 원수에게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공문을 만들어 내 보냈다. 저녁나절에 마량첨사․소비포첨사가 와서 봤다.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저녁에 수루 로 올라 있는데,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그래서 색리와 배 주인에게 발바닥을 호되게 때렸다. 저녁에 소비포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대지 못 했다고 해서 수사 원균(元均)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했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7월 22일 [양력 9월 6일]<무술>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임치첨사와 목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사량만호와 영등포만호이 와서 봤다. 오후에 충청 수사․순천부사․충청우후․이영남(李英男)이 함께 활을 쏘았 다. 저물 무렵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7월 23일 [양력 9월 7일]<기해> 맑다.
충청수사가 우수사․가리포첨사와 같이 와서 봤다. 활을 쏘았 다. 조카 해( )가 돌아갔다. 목년(木年)이 들어 왔다.
7월 24일 [양력 9월 8일]<경자> 맑다.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영의정(류성룡)과 심 병판(심충 겸)․윤 판서(윤근수) 앞으로 보냈다.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7월 25일 [양력 9월 10일]<신축> 맑다.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 보냈다. 아침 식사 를 하고서 충청수사․순천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몹시 취하여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토해냈다.
7월 26일 [양력 9월 11일]<임인>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다. 순천과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 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 )의 병도 나아 진다고 한다. 허씨 댁이 병이 점점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유홍(兪弘)과 윤근수(尹根壽)가 세상을 떠나고 윤돈(尹敦:1551-1612)이 종사관으로 내려 온다고 한다. 신천기(申天機)도 들어왔다. 어둘 무렵 신제운(申霽雲)이 와서 봤다. 노윤발(盧潤發)이 흥양의 색리와 감관을 붙잡아 들어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11일]<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 조짐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날 충청수사․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과하주(여름을 지내도 시어지지 않는 약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다.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7월 28일 [양력 9월 12일]<갑진> 맑다.
흥양의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고 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의능이 와서 그 일을 맡았다.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 왔다.
7월 29일 [양력 9월 13일]<을사> 종일 가랑비가 왔다.
바람기는 없었다. 순천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을 두는데, 구경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낙안군수도 와서 같이 했다. 이 날 밤 신음했는데 아침까지 했다.
갑오년 8월 (1594년 8월)
8월 초1일 [양력 9월 14일]<병오>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수루의 방으로 옮겨 앉았다가 곧 뒷동 헌방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강집(姜緝)을 데려다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군율에 따라 문초하고 내어 보냈다. 비가 종일 내리더니 밤까지 왔다.
8월 초2일 [양력 9월 15일]<정미>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사람(李舜臣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몸이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수루 위로 옮겨 앉 아 충청수사․순천부사 및 마량첨사와 함께 이야기 하며 새로 빚 은 술을 몇 잔 마셨다. 비가 종일 내렸다. 송희립(宋希立)이 와 서 아뢰기를, 흥양의 훈도도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고 했다.
8월 초3일 [양력 9월 16일]<무신> 아침에는 흐렸으나 저물녁에야 개었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서너 순을 쏘았다. 수루(戍樓)의 방을 도배 했다.
8월 초4일 [양력 9월 17일]<기유> 아침에비가 뿌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발포만호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수루의 방의 도배를 마쳤다. 경상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에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머리에 이고 오게 한 죄를 처벌했다. 화살장이 박옥래(朴玉來)가 와서 대를 가져 갔다. 이종호(李宗浩) 가 흥양에 안수지(安守智) 등을 잡아 오려고 갔다.
8월 5일 [양력 9월 18일]<경술> 아침에 흐렸다.
밥을 먹은 뒤에 충청수사․순천부사와 같이 활을 쏘았다. 오 후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에게로 갔더니, 우수사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쯤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이 날 웅천현감․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 및 윤동구(尹東耈) 등이 선봉장으로서 여기에 왔다.
8월 6일 [양력 9월 19일]<신해> 아침에 맑다가 저물녁에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에 장흥부사가 들어 왔다. 보성군수가 나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편 안하시고 아들 면은 차츰 나아진다고 한다. 고성현령과 사도 첨사․적도만호가 아울러 왔다가 갔다. 이 날 밤 수루의 방에서 잤다.
8월 7일 [양력 9월 20일]<임자> 종일 비가 내렸다.
8월 8일 [양력 9월 21일]<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8월 9일 [양력 9월 22일]<갑인> 비가 내렸다.
우수사 및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 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8월 10일 [양력 9월 23일]<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이 날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8월 11일 [양력 9월 24일]<병진> 종일 비가 많이 내렸다.
이 날 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세 겹 이나 벋겨져 삼대 같이 비가 샜다. 밤새도록 앉아서 새벽을 맞았 다. 양 창문은 모두 바람에 깨져 다 젖었다.
8월 12일 [양력 9월 25일]<정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웅천현 감․소비포권관도 와서 활을 쏘았다. 아침에 원수의 군관 심 준(沈俊)이 여기 왔다. 그 전령에, 군사 약속을 직접 만나서 논 의하자고 하므로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8월 13일 [양력 9월 26일]<무오> 맑다.
아침에 심준(沈俊)이 돌아갔다. 노윤발(盧潤發)도 돌아갔다. 오전 열 시쯤에 배에서 내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별도로 날랜 장수들을 뽑아 춘원포(春原浦:통영시 광도면 끄승개) 등지로 가서, 적을 엿보아 무찌르게 할 일을 사도첨사에 게 전령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없어 잔잔하여 해( )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뒀다.
8월 14일 [양력 9월 27일]<기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녁에 비가 왔다.
사도첨사․소비포권관․웅천현감 등이 달려 와서 보고한 내용에, "왜선 한 척이 춘원포(春原浦)에 정박해 있으므로 불의에 엄습하였더니, 왜놈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 달아나기에, 우리 나라 남녀 열다섯 명을 빼앗아 돌아오고, 적의 배도 빼앗아 왔 다."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양력 9월 28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경상수사 원균(元均)과 함께 월명포(통 영시 산양면 수월리)에 이르러 잤다.
8월 16일 [양력 9월 29일]<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에 돛을 올려서 사천 선창((船滄: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 니, 기직남(奇直男)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 17일 [양력 9월 30일]<임술> 흐리다가 저물 무렵에 비가 왔다.
원수가 오정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현감(기직 남)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다. 원균(元均)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 지 못하였다. 우습다. 술을 가지고 마시자고 청했다. 여덟 순을 돌리니 원수가 몹시 취하여 상을 물리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朴宗男)과 윤담(尹潭)이 와서 봤다.
8월 18일 [양력 10월 1일]<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 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앞에 이르러 잤다.
8월 19일 [양력 10월 2일]<갑자> 맑다. 저녁에 잠깐 비가 왔다.
새벽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뒷쪽에 이르니,원균(元均)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을 예순 동이나 캐니, 원균(元均) 수사가 그제야 왔다. 늦게 출항하여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이르러 잤다.
8월 20일 [양력 10월 3일]<을축> 맑다.
느지막이 출항하여 진(한산도)에 이르렀다. 우수사(이억기)와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와서 보고는 정은 곧 돌아갔다. 우수사 및 장흥부사․사도첨사․가리포첨사․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미안스러운 일이 많았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흥양으로 곧장 도로 돌아갔다.
8월 21일 [양력 10월 4일]<병인> 맑다.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곤양군수․사도첨사․ 마량첨사․ 남도만호․ 영등포만호․ 회령포만호․ 소비포권관가 아울러 왔다. 양정언(梁廷彦)이 와서 봤다.
8월 22일 [양력 10월 5일]<정묘> 맑다.
나라제삿날(成宗貞顯王后 尹氏)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 우우후가 와서 봤다. 낙안군수․사도첨사도 왔다가 갔다. 저녁 에 곤양군수․거제현령․소비포권관․영등포만호가 와서 이야 기하고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8월 23일 [양력 10월 6일]<무진> 맑다.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잡았다. 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 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그대로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험악하게 불었다. 장흥부사․녹도만호가 같이 왔다. 저물 무렵에 곤양군수과 웅천현감․영등포만호․거제현령․소비 포권관도 왔다. 초저녁에 헤어져 돌아갔다.
8월 24일 [양력 10월 7일]<기사> 맑다.
각 고을에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朴彦春)․김륜(金倫)․신 경황(申景潢)을 내어 보냈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돌아갔다. 저물 무렵에 소비포가 와서 봤다.
8월 25일 [양력 10월 8일]<경오> 맑다.
아침에 곤양군수․소비포권관을 불러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사도첨사가 휴가를 받아 갔다. 9월 초7일에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다. 현덕린(玄德麟)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신천기(申天紀)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흥양이 돌아왔다. 활 터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鄭元明)이 들어왔다고 했다.
8월 26일 [양력 10월 9일]<신미> 맑다.
아침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흥양 보자기 막 동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처형하여 효수했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활터정자에 앉아 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8월 27일 [양력 10월 10일]<임신> 맑다.
우수사는 가리포첨사․장흥부사․임치첨사․우후 및 충청우후가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현감은 술을 바쳤다. 아침에 아들 울 (蔚)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 보냈다.
8월 28일 [양력 10월 11일]<계유> 밤 두시쯤부터 비는 조금 오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비는 아침 여섯 시께 개었으나, 바람은 종일 세게 불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 회가 잘 갔는지 아닌지 몰라서 몹시 염 려된다. 진도군수(김만수)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원수의 장계로 해서 문책 하는 글이 내려 왔는데, 대체로 장계를 낸 것에 잘못 풀이한 때 문이었다.
8월 29일 [양력 10월 12일]<갑술> 맑으나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첨사․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도양장의 머슴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세 놈중에 장손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둑 자를 새겼다. 해남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成應祉)가 죽었다니, 참으로 슬프다. 8월 그믐날 [양력 10월 13일]<을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해남현감 현즙(玄楫)이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 및 장흥부사(황세득)가 와서 봤다. 저물 무렵 충청우후(원유남) ․웅천현감(이운룡)․거제현령(안위)․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허정은도 왔다.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이 났는지 모르 겠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쓰리고 아프구나. 김양간(金良幹)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沈 忠謙:병조판서)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고 했다. 원균 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천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 곤양군수가 병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너무 너무 섭섭하다. 밤 열시쯤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못잤다.
갑오년 9월 (1594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14일]<병자> 맑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순무 사서성 (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15일]<정축> 맑다.
아침에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 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16일]<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有旨)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초 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 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 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원균(元均)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18일]<경진> 맑다.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 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19일]<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 종 효대(孝代)․개남(介南)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방필순(方必淳)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밤 열시쯤에 복춘(福春)이 왔다. 저물녘에 김경 로(金敬老)가 우도(右道)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월 7일 [양력 10월 20일]<임오>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 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 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9월 8일 [양력 10월 21일]<계미> 맑다.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 사(典祀)로 삼아서 초아흐레 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入齋) 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22일]<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元均)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23일]<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김경숙(金 敬叔)이 창신도로 되돌아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맑다.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남평(南平)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 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 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9월 12일 [양력 10월 25일]<정해> 맑다.
일찌기 김암(金岩)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의 종놈 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을 써 보냈다. 우수사․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26일]<무자> 맑고 따뜻하다.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尹敬立)의 장계 두 통 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 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 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9월 14일 [양력 10월 27일]<기축> 맑다.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9월 15일 [양력 10월 28일]<경인> 맑다.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종 경(京)이 들어왔다.
9월 16일 [양력 10월 29일]<신묘> 맑다.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9월 17일 [양력 10월 30일]<임진> 맑고 따뜻하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후 이몽 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孝代) 등이 나갔다.
9월 18일 [양력 10월 31일]<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이수원(李壽元) 및 담화(曇花)가 들어왔다. 복춘(福春)이 들어왔다.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9월 19일 [양력 11월 1일]<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1월 2일]<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 오다가 눈 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9월 21일 [양력 11월 3일]<병신> 맑다.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 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순천부사․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사병 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4일]<정유>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장흥부사․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9월 23일 [양력 11월 5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수사 원균 (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 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9월 24일 [양력 11월 6일]<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 사와 같이 먹었다. 오늘 더그레(號衣: 각 영문의 군사와 馬上才의 軍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 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9월 25일 [양력 11월 7일]<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저녁에 첨지 박종남(朴宗男)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붕(趙 鵬)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8일]<신축> 맑다.
새벽에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 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朴春陽)을 보내어 건너온 까 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9월 27일 [양력 11월 9일]<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 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충용 김덕령(金德齡)․별장 한명련(韓明璉)․주몽룡(朱夢龍) 등 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림득의(林得義)․ 이홍사(李弘嗣)․ 이충길(李忠吉)․ 강중룡(姜仲龍)․ 최여해(崔汝諧)․ 한덕비(韓德備)․ 이안겸(李安謙)․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9월 28일 [양력 11월 10일]<계묘> 흐리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 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바람이 고르지 않았 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9월 29일 [양력 11월 11일]<갑진> 맑다.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갑오년 10월 (1594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12일]<을사>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와 잔라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수사와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할 즈음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지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우수사의 군관은 그들의 실수를 간단히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시행했다. 밤 열시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13일]<병오> 맑다.
다만 선봉선 서른 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의 적정을 가서 보고 오게 했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14일]<정미> 맑다.
몸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장문포로 가서 종일 싸우 려는데, 적의 무리들은 두려워 항전하러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15일]<무신> 맑다.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 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 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육군은 적이 칼을 휘드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貂皮: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16일]<기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계초고를 초잡았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17일]<경술> 맑다.
일찍 선봉으로 하여금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놈 한 명이 칠 천도 산기스락에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잡아 배 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18일]<신해> 맑다.
병사 선거이(宣居怡)․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나 갔다. 띠풀 백여든세동을 베었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19일]<임자>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 오지 않았다.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로 되돌아왔다가 그 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일제히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되 었다. 흉도에서 띠풀 이백예순 동을 베었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20일]<계축> 맑다.
아침에 정자로 내려 오니 첨지 김경로․첨지 박종남․조방장 김응함․조방장 한명달(韓命達)․진주목사 배설(裵楔)․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아울러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김과 박은 종 일 활을 쏘았다. 박자윤(朴子胤)은 마룻방에서 자고 춘복(春福)이 함께 잤다. 김성숙(金惺叔)은 배로 내려가 잤다. 남해현령․하 동현감․사천현감․고성현령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0일 [양력 11월 21일]<갑인> 맑다.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았으며, 흥양현감․보성군수․장흥부 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울(蔚)과 변존서(卞存緖)․유□(有憲?) 및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0월 11일 [양력 11월 22일]<을묘> 맑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공문을 처리하였다. 일찍 잘 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2일 [양력 11월 23일]<병진>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하였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여기에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 로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그래서 공문을 만들어 와서 주었다.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 (耳掩: 귀가리개)를 전라좌도에 열다섯 개, 전라우도에 열 개, 경 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를 나누어 보냈다.
10월13일 [양력11월24일]<정사>맑다.
아침에 아전을 불러 장계초안을 지었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우수사가 충청수사를 와서 보고도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술이 몹시 취한 까닭이었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 보냈다.
10월 14일 [양력 11월 25일]<무오> 맑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포(六穴砲) 다섯 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치며,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하는 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0월 15일 [양력 11월 26일]<기미> 맑다.
박춘양(朴春陽)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27일]<경신> 맑다.
순무사 서성이 해질 무렵에 이곳에 왔다. 우수사․원균(元均) 수사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맑다.
아침에 사람을 어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아침을 먹은 뒤에 당도한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속이 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도 해괴하다. 원균(元均)도 왔다. 그 흉악 하고도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나절에 그쳤다. 어사에게로 갔더 니, 이미 원 수사에게 갔다고 했다. 그곳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술이 나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고서, 서로 인사했다.
10월 19일 [양력 11월 30일]<계해>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와 수루의 방으로 들어 갔다. 어사가 우수사한테 가서 종일 술마시며 이야기했다고 하였 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저녁에 종 억지(億只) 등을 좨쳐서 왔다. 박언춘(朴彦春)도 왔다.
10월 20일 [양력 12월 1일]<갑자> 아침에 흐렸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가 나갔다. 작별한 뒤에 대청으로 올라 앉 았있으니 우수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공문 작성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밤 열시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1일 [양력 12월 2일]<을축> 맑다가 조금 흐렸다.
종사관․우후․발포만호가 나갔다. 투항해 온 왜놈 세 명이 원균 (元均) 수사에게서 왔기로 문초하였다. 영등포만호가 왔다가 밤 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 아이가 있다고 했다. 데려 오도록 일러 보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2일 [양력 12월 3일]<병인> 흐렸다.
의능(宜能)․이적(李迪)이 나갔다. 초저녁에 영등포만호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심부름이나 시키고자 머물러 두었다.
10월 23일 [양력 12월 4일]<정묘> 맑다.
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종 억(億)의 죄와 애환(愛還)․정말동 (丁唜同)의 죄를 다스렸다. 저녁에 그 아이를 본디 있던 곳으로 보냈다.
10월 24일 [양력 12월 5일]<무진> 맑다.
우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금갑도만호도 왔다.
10월 25일 [양력 12월 6일]<기사> 맑으며 하늬바람이 세게 일었다.
저녁나절에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을 나가지 않았다. 남도 포만호(강응표)․거제현령이 왔다. 영등포만호(조계종)도 와서 한참 이야기하는 적에,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申浩)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목화․벙거지 및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0월 26일 [양력 12월 7일]<경오> 맑다.
빙부(方震)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申浩)에 게서 들으니, 김상용(金尙容)이 이랑(吏郞)이 되어 서울로 갈 때 에 남원부내에 들어가 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 로 갔다가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 한경(漢京)이 본영으로 갔다.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0월 27일 [양력 12월 8일]<신미>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28일 [양력 12월 9일]<임신> 맑다.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금갑만호․이진만호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우우후․경상우후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저 물 무렵에 잠자는 방에 들어갔다.
10월 29일 [양력 12월 10일]<계유> 맑다.
하늬바람이 몹시도 살을 에 듯이 차겁다.
10월 30일 [양력 12월 11일]<갑술> 맑다.
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라고 군사를 들여 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엔 전선이 없어서 다른 배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갑오년 11월 (1594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12일]<을해>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13일]<병자> 맑다.
전라좌도에서는 사도첨사(김완)를, 전라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을 장수로 정하여 적을 수색․토벌하게 들여 보냈다.
11월 초3일 [양력 12월 14일]<정축> 맑다.
김천석(金天碩)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투항해 온 야에몬(也汝文)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에 이르렀다. 수색토벌하러 나갔다 오니 벌써 밤 열 시쯤이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11월 초4일 [양력 12월 15일]<무인> 맑다.
투항해 온 왜놈들의 사정을 들었다. 전문(箋文)을 가지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1월 초5일 [양력 12월 16일]<기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송한련(宋漢連)이 대구 열 마리를 잡아왔다. 순변사(이일)가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세 명을 잡아 보냈다. 밤새도록 비가 많이 내렸다.
11월 초6일 [양력 12월 17일]<경진> 흐리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이정충(李廷忠)도 왔다. 첨지 신호(申浩)와 함께 이야기했다. 송희립(宋希立)이 사냥하러 나갔다.
11월 초7일 [양력 12월 18일]<신사> 저녁나절에 개었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항복해온 왜놈 열일곱 놈을 남해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금갑도만호․사도첨사․여도만호․영등포 만호가 아울러 왔다. 이 날 오정때에 첨지 신호는 원수가 되 돌아와서는 수군에 머물러 있다더라고 보고했다.
11월 초8일 [양력 12월 19일]<임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 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차려 입었고, 나는 관을 벗은 채 함께 민종각(閔宗慤)의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1월 초9일 [양력 12월 20일]<계미>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11월 10일 [양력 12월 21일]<갑신> 맑다.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에 왔다고 했다.
11월 11일 [양력 12월 22일]<을유>
동짓날이라 11월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우후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보고나서 돌아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23일]<병술>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순천 색리 정승서(鄭承緖)와 역자가 남원에 서 폐해를 끼쳤기로 벌주었다. 첨지 신호에게 작별의 술을 대접 했다. 또 견내량에서 경계선을 넘어 고기를 잡은 사람 스무네 명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11월 13일 [양력 12월 24일]<정해> 맑다.
바람이 차차 자니 날도 따뜻했다. 첨지 신호와 아들 회( )가 이 희남(李喜男)․김숙현(金叔賢)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漢 京)도 은진 김정휘(金廷輝) 집에 다녀 오게 일렀다. 장계도 내보 냈다. 원수가 방어사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네 명을 데리고 왔다. 저녁에 윤련(尹連)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망발이 많 다.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버려진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때문이다. 열닷샛 날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한 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11월 14일 [양력 12월 25일]<무자> 맑다.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투항해 온 왜놈 일곱 명을 자기 군관을 시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곧 남해현으로 보냈다. 이함(李 )이 남해에서 왔다.
11월 15일 [양력 12월 26일]<기축>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다. 오 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므로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으니, 슬 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물무렵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순천 의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또 아들 울(蔚) 등의 편지 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와 그 아들 윤엽(尹曄)이 본영에 이르렀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7일]<경인> 맑으나, 바람기가 제법 쌀쌀하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에 앉았다. 우우후․여도만호․회령포만호 ․사도첨사․녹도만호․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전 어란진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다.
11월 17일 [양력 12월 28일]<신묘> 맑고 따뜻하다.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산들바람이 종일 불었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뇌와 아들 울 (蔚)이 들어왔다. 한밤에 미친 듯 바람에 세게 불었다.
11월 18일 [양력 12월 29일]<임진> 맑다.
바람이 저녁내 세게 불더니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11월 19일 [양력 12월 30일]<계사> 맑다.
바람이 세게 불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월 20일 [양력 12월 31일]<갑오>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대청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밤까지 세게 불었다.
11월 21일 [양력 1월 1일]<을미>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조카 뇌가 나갔다. 그리고 이설(李渫) 이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 금선(金善)․우년(禹年)․이 향(離鄕)․수석(水石)․행보(行寶) 등도 나갔다. 김교성(金敎誠)․ 신경황(申景潢)이 나갔다. 남도포만호․녹도만호가 나갔다.
11월 22일 [양력 1월 2일]<병신> 맑다.
아침에 회령포로 나갔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우우후(李廷忠) 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왜놈의 옷감으로 무명 열 필을 가져 갔다.
11월 23일 [양력 1월 3일]<정유> 맑고 따뜻했다.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 등을 받아들였다. 저녁나절에 이경복 (李景福)이 자기 소실(妾)과 함께 들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는다고 하였다.
11월 24일 [양력 1월 4일]<무술> 맑다.
따사롭기가 확실히 봄날 같다. 대청으로 나가서 공문을 적어 보냈다.
11월 25일 [양력 1월 5일]<기해>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李鎰: 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 이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심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여염집에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수군 각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품하며 기지개켜다 깨고 보니 한 바탕 꿈이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 앉아 공문을 적어 주었다. 조금 뒤에 우우후와 금갑도만호가 왔다. 피리를 듣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1월 26일 [양력 1월 6일]<경자> 소한. 맑고 따뜻하다.
방에 앉아 있으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 메주를 열 말을 쑤었다.
11월 27일 [양력 1월 7일]<신축> 맑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으로 나가 앉아 있다가 좌도․우도로 갈라 보낸 투항해 온 왜놈들을 모조리 와서 모았다. 그래서 총쏘 는 연습을 시켰다. 우우후․거제현령․사도첨사․여도만호가 아울러 왔다.
11월 28일 [양력 1월 8일]<임인> 맑다.
(**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 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 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 이 다음 장부터는 글쓴 내용이 많이 고쳐 적혀 있다.)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짐이 육지나 바다가 똑 같이 되버렸습니다. 대총 유정은 이미 군사를 철수시켜 고국으로 되돌아가니 위급한 세력의 급박함이 호흡하는 순간에 달려 있어 온갖 생각을 해도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 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 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호남의 한 도에 의뢰하였으나, 호남에도 큰 난리가 일어나, 전쟁으로 화재를 입은 땅이 더욱 심하며, 이때부터 닥칠 앞 군량과 군사를 의뢰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날마다 줄어드니, 급히 모음만 같지 못하고, 곳곳의 잡색 군사 육로의 요해지를 끊어 막거나 혹 수군을 합세하여 곧바로 적진에 쳐들어 갔습니다. 하나, 영남의 우도의 적세는 전과 같이 별로 다른 흔적이 없고, 다만 다시 그 형상을 보니, 굶은 빛이 많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가을 곡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며, 우리 나라가 미리 방어 해 놓고 있어야 하는 데 극히 두려워하는 자는 수군이요, 수군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모이기도 하고 흩 어지기도 하면서 옮겨 다니며 얻어 먹는 무리도 가난하게 되었 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양식을 보지 못하여 질병이 또 일고, 사망이 서로 줄을 이었으니, 여러 장수가 이에 갖추고자 공문을 원수 (元帥)와 관찰사에게 돌리고 계략도 베풀 명령도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지만, 방어하여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이 세력이 파산되어 이 한 몸 만번 죽음도 달게 받을진대, 이 나라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 해의 여러 고을에 쌓여 있어도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파견하여 곳간을 뒤지어 조사해 실어 가도 저는 다른 도 먼 바다에 있으니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만약 달리 수군을 보내어 어사가 모든 수군의 일을 구 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장계합니다.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면 영남의 순무어사가 명령을 한 날에 겸하여 불러 모을 군 사는 오로지 물러만 갈 것입니다. 하나, 순변사 이일(李鎰) 그 집에 있어 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 다는 것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해의 수군의 원 소속 병사들이 일시의 편안이 거의 내버려 두게 되어 그 고을에서 독려한다면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잡아 오지 않는 것이 일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나, 정경달(丁景達)이 종사관이 되어 다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공문에, 도 안의 일이 본디부터 관찰사가 주재하고 통제하여 둔 전치는 일을 검사받게 하는 것은 실로 그 본디 임무가 아닙니다. 하물며 다른 도의 바다에 진을 치고 멀이 있으니 이 또한 검사하면서 지을 수도 없고 이 뒤로는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민망함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 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하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 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3일 머물러 있으니, 송(宋)․이(李)의 옹폐 (壅蔽: 어른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함이 많이 유감스럽습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나라는 어지럽건만 바로잡을 이 그 누구뇨. 몇 해를 배를 타며 해놓은 일들도 홀로 생각하니 임만 속이고. 수십년 뱃전에서 해놓은 일들도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마음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나라가 태평한지 200년이요 문물의 화려함은 3000 이라네. 몇 해를 원수 막이 꾀 뿐인걸. 앞에서 나온 것과 본영의 것을 가져와 모으니, 하얀 접는 부채(白 貼扇) 358 자루, 보통보다 달리 만든 부채(別扇) 453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5 자루를 보냈다. 기름친 부채(油扇) 590 자루에 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0 자루를 보냈다. 옻칠한 부채(漆扇) 58 자루에서 5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일반부채(扇扇) 50 자루에 서 10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갈모(笠帽) 40개, 손칼(刀子) 323 자루, 육장부(六丈付) 2개, 들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壯油紙) 5 권,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 5 권을 본영으로 가져 왔다. 들기름 먹인 종이(壯油紙)와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는 앞의 것과 같다. 수은을 빼낸 금(火金) 70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흥양에서 대대로 사는 종 매마(每馬)․ 대준(大俊)․ 영세(永世)․ 방죽(方竹)․영로(永老)가 큰 대(大竹) 23개, 중치 대(中竹) 23개를 7 월 4일에 만들려고 옥지(玉只)가 받아 갔다. 크고 작은 대 93개를 7월 27일 옥지(玉只)가 만들려고 받아 갔다. 큰 대화살(大竹箭) 65 개를 만들어 바쳤다. 중치 대 화살(中竹箭) 40개와 22개를 9월 5일 에 무재(武才)가 바쳤다. 6월 6일 삶은 대(熟竹)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50개, 상품(上品竹) 11개, 약간 가벼운 대(輕竹) 53개가 좋은 품질이다. 가볍고 작은 대 (輕小竹) 48개에서 30개를 충청병사에게 보냈다. 큰 대 78개를 군 관 등에게 주었다. 다음 중치 대(次中竹) 44개를 우수사에게 보냈 다. 좋지 않은 대(下下竹)는 26개다. 본영(여수)의 전선 7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5 척을 정비하여 왔 고, 전에 만든 2 척에서 의병에 1 척, 개조한 것이 1 척이다. 순천에는 10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 1 척 방답의 배 5 척이다. 흥양에는 10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본영의 배 1 척, 사도의 배 5 척이다. 낙안에는 3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광양에는 4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보성에는 8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녹도가 2 척, 발포가 2 척이 다. 방답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여도에는 3 척에 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발포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사도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녹도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도양장 논의 벼가 20섬 13말 5되 이고 아울러서 13섬 14말 8되와 콩 1섬 7말을 지었다. 1594년 1월 21일에 싸움에 나갈 수군(奔赴水軍) 21 명을 내 보고, 팔결군(八結軍) 16 명을 도로 보냈다. 5월 3일 곳간 뒤지어 조사하 니, 군량이 349섬 14말 4□, 나무를 팔아서 들인 쌀 8십□□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보내온 것이 65섬 12말 4되가 있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의 자(字)는 중문(仲文)이고 호는 수천 (秀川)이며 □강성 영파부(折江省寧波府)에 살며, 머슴은 주증(周 曾)․구덕(丘德)이고, 같이 온 기패관은 장도관(張覩 )․반준(潘俊) ․주봉(周鳳)이다.
12월기록에없음
을미년 1월 (1595년 1월)
1월 초1일 [양력 2월 9일]<갑술> 맑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흐르는 줄 도 몰랐다. 또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여러 색리․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세배를 했다. 원전(元琠)․윤언심(尹彦諶)․ 고경운(高景雲) 등이 와서 봤다. 여러 색리와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1월 초2일 [양력 2월 10일]<을해> 맑다.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 祭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장계 초고를 수정했다.
1월 초3일 [양력 2월 11일]<병자>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1월 초4일 [양력 2월 12일]<정축>맑다.
우우후․거제현령․금갑도만호․소비포권관․여도만호 등이 와서 봤다.
1월 초5일 [양력 2월 13일]<무인> 맑다.
공문을 결재했다. 조카 봉과 아들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 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밤새도록 온갖 회포 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월 초6일 [양력 2월 14일]<기묘> 맑다.
어응린(魚應麟)과 고성현감(趙應道))이 왔다.
1월 초7일 [양력 2월 15일]<경진> 맑다.
흥양현감(배흥립)․방언순(方彦淳)과 함께 이야기했다. 남해의 투항해 온 왜놈 야에몬(也汝文) 등이 와서 현신했다.
1월 초8일 [양력 2월 16일]<신사>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광양현감(송전)의 공식적인 인사를 받은 뒤에 전령에게 기한을 어긴 죄로 곤장을 쳤다.
1월 초9일 [양력 2월 17일]<임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야에몬(也汝文) 등을 남해로 돌려 보냈다.
1월 초10일 [양력 2월 18일]<계미>
순천부사 박진(朴晉)이 교서에 숙배했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선창에 왔다고 했다. 불러 들여 같이 이야기했다. 순천부사․우 우후․흥양현감․광양현감․웅천현감․고성현감․거제현령도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1일 [양력 2월 19일]<갑신> 우박이 내리고 샛바람이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흥양현감․고성현감․웅천현감․영등 포만호가 와서 이야기했다. 고성현감은 새 배를 독촉하여 만드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1월 12일 [양력 2월 20일]<을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영남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봤다.
1월 13일 [양력 2월 21일]<병술>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박치공이 왔다.
1월 14일 [양력 2월 22일]<정해> 맑다.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불편하여 누워서 끙끙 앓았다. 영등포만호․사천현감․여도 만호가 와서 봤다.
1월 15일 [양력 2월 23일]<무자> 맑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을 불렀더니, 이정충(李廷忠)은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져 한참이나 헤엄치는 것을 간신히 건져냈다. 그를 불러서 위로했다.
1월 16일 [양력 2월 24일]<기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1월 17일 [양력 2월 25일]<경인>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없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우후․소비포권관․거제현령․미 조항첨사가 아울러 와서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8일 [양력 2월 26일]<신묘> 흐렸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활 열 순을 쏘고서 헤어졌다.
1월 19일 [양력 2월 27일]<임진> 맑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옥구의 피란민 이원진(李元軫)이 왔 다. 장흥부사․낙안군수․발포만호가 들어왔다. 기한을 어긴 죄를 곤장쳤다. 조금 있다가 여도 전선에서 잘못으로 불을 내어, 광양 ․순천․녹도 전선 네 척에 불길이 번져 탔다. 통탄함을 이길 수 없다.
1월 20일 [양력 2월 28일]<계사> 맑다.
아우 여필과 조카 해( )가 이응복(李應福)과 함께 나갔다. 아들 울(蔚)은 조카 분(芬)과 함께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1월 21일 [양력 3월 1일]<갑오>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이경명(李景明)과 함깨 장기를 두었다.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李鎰)의 처사가 극히 형편없고 나를 해 치려고 무척 애쓴다고 하니, 참으로 우습다.
1월 22일 [양력 3월 2일]<을미> 맑으나,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원수의 군관 이태수(李台壽)가 전령을 가지고 왔다. 여러 장수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를 알고 간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다락위에 올라가 잘못으로 불을 낸 여러 장수들과 색리들에게 곤장을 쳤다. 초저녁에 금갑도만호의 옆집에서 잘못하여 불을내어 다타버렸다.
1월 23일 [양력 3월 3일]<병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후․흥양현감이 와서 이야기하고 날이 저물어 돌아 갔다.
1월 24일 [양력 3월 4일]<정유>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원진(李元軫)을 배웅했다.
1월 25일 [양력 3월 5일]<무술> 맑다.
장흥부사․흥양현감․우후․영등포만호․거제현령이 와서 봤다.
1월 26일 [양력 3월 6일]<기해> 흐리고 바람 불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흥양현감(배흥립)을 잡아갈 나장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희(李禧)도 왔다.
1월 27일 [양력 3월 7일]<경자> 맑다.
춥기가 한겨울 같다. 대청에 나가, 영암군수․강진현감 등이 공식 인사를 받았다.
1월 28일 [양력 3월 8일]<신축> 맑다. 바람이 세게 불고 추웠다.
황승헌(黃承憲)이 들어왔다.
1월 29일 [양력 3월 9일]<임인> 흐리나 비는 오지 않았다.
1월 30일 [양력 3월 10일]<계묘>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보성군수(안홍국)가 들어왔다.
을미년 2월 (1595년 2월)
2월 초1일 [양력 3월 11일]<갑진>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보성군수의 기한 어긴 죄를 곤장치고, 도망 치던 왜놈 두 명을 처형했다. 의금부의 나장이 와서 와서 흥양현 감을 잡아 갈 일을 전했다.
2월 초2일 [양력 3월 12일]<을사>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흥양현감(배흥립)이 잡혀갔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2월 초3일 [양력 3월 13일]<병오>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흥양 배에 불을 던졌다는 신덕수(申德壽)를 심문했으나, 실증을 얻어내지 못하여 가두었다.
2월 초4일 [양력 3월 14일]<정미> 맑다.
몸이 불편하다. 장흥부사․우우후가 왔다. 원수부의 회답 공문과 종사관의 회답 편지도 왔다. 조카 봉․아들 회․오종수 (吳從壽)가 들어왔다.
2월 초5일 [양력 3월 15일]<무신> 맑다.
충청수사가 왔다. 천성보만호 윤홍년(尹弘年)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초6일 [양력 3월 16일]<기유>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부사․우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2월 초7일 [양력 3월 17일]<경술> 맑다.
보성군수가 술을 가져와 종일 이야기했다.
2월 초8일 [양력 3월 18일]<신해> 흐렸다.
2월 초9일 [양력 3월 19일]<임자> 비가 내렸다.
2월 초10일 [양력 3월 20일]<계축> 비가 뿌리고 바람도 세게 불었다.
황숙도(黃叔度)와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2월 11일 [양력 3월 21일]<갑인> 비가 오더니 저녁나절에 잠깐 갰다.
황숙도(黃叔度)․조카 분(芬)․허주(許宙)․변존서(卞存緖)가 돌아 갔다. 종일 공무를 봤다. 저물 무렵에 임금의 분부가 왔는데, 둔전을 검열하라는 것이다.
2월 12일 [양력 3월 22일]<을묘> 맑으며 바람은 일지 않았다.
윤엽(尹曄)이 들어왔다. 저녁나절에 활 열 여 순을 쏘았다. 장흥 부사․우우후도 와서 활을 쏘았다.
2월 13일 [양력 3월 23일]<병진> 맑다.
일찍 도양의 둔전에서 벼 삼백 섬을 실어 와서 각 포구에 나누어 주었다. 우수사․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남도포만호․마 량첨사․회령포만호 등이 들어왔다.
2월 14일 [양력 3월 24일]<정사> 맑고 따뜻하다.
식사를 한 뒤에 진도군수․무안현감․함평현감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방비처에 수군을 일제히 징발해 보내지 않은 것과 전선을 만들어 오지 않은 일로 처벌했다. 영암군수도 죄를 논했다. 조카 봉․해․분(芬)과 방응원(方應元)이 아울러 나갔다.
2월 15일 [양력 3월 25일]<무오> 맑고 따뜻하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가리포첨사․진도군수가 아울러 와서 참가했다. 지휘선(上船)을 연기로 그을렸다.
2월 16일 [양력 3월 26일]<기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니, 함평현감 조발(趙撥)이 논박을 당하여 돌아가려 고 하므로 술을 먹여서 보냈다. 조방장 신호(申浩)가 진에 이르 러, 교서에 숙배하고서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옮기어 정박했다. 밤 열 시쯤에 출항하여 춘원도(통영시 광도면 끄승개)에 이르니 날은 밝아 오는데도 경상도 수군은 와 있지 않았다.
2월 17일 [양력 3월 27일]<경신> 맑다.
아침에 군사들에게 식사를 재촉하여 먹이고, 곧장 우수영 앞바다 에 이르렀다. 성 안에 있던 왜놈 칠백 명은 우리 배를 보고는 도 망치므로, 배를 돌려 나와서, 장흥부사 및 조방장 신호(申浩)를 불러 종일 대책을 논의하고서 진으로 돌아왔다. 저물 무렵에 림 영(林英) 및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2월 18일 [양력 3월 28일]<신유> 맑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2월 19일 [양력 3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거제현령․무안현감․평산포 만호․회령포만호 및 허정은(許廷誾)도 왔다. 송한련(宋漢連)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2월 20일 [양력 3월 30일]<계해> 맑다.
우수사․장흥부사․조방장 신호(申浩)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원균 (元均)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전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2월 21일 [양력 3월 31일]<갑자> 비가 조금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보성군수․웅천현감․우우후․소비포권관․강진현감․평산포만호 등이 와서 봤다.
2월 22일 [양력 4월 1일]<을축>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계를 봉했다. 저녁나절에 우후․낙안군수․녹도 만호를 불러 떡을 먹였다.
2월 23일 [양력 4월 2일]<병인> 맑다.
조방장 신호(申浩)․장흥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2월 24일 [양력 4월 3일]<정묘> 흐렸다.
우뢰와 번개가 많이 치면서도 비는 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 원전(元琠)이 아뢰고 돌아갔다.
2월 25일 [양력 4월 4일]<무진> 흐리고 바람도 고르지 않았다.
아들 회와 울(蔚)이 들어왔길래 들으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 다고 한다. 장계를 받들고 온 이전(李筌)이 들어왔다. 조정의 소 식과 영의정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2월 26일 [양력 4월 5일]<기사> 흐렸다.
아침에 편지와 장계 열여섯 통을 봉하여 정여흥(鄭汝興)에게 부쳤다.
2월 27일 [양력 4월 6일]<경오> 한식. 맑다.
원균(元均)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 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2월 28일 [양력 4월 7일]<신미> 맑다.
대청으로 나가 장흥부사․우우후와 함께 이야기했다. 광양현감․목포만호도 왔다.
2월 29일 [양력 4월 8일]<임신> 맑다.
고여우(高汝友)가 창신도로 갔다. 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둔전치 는 일을 논의하였다. 조방장 신호(申浩)도 왔다. 저녁에 옥포만호 방승경(方承慶)․다경포만호 이충성(李忠誠) 등이 교서에 숙배했다.
2월 30일 [양력 4월 9일]<계유> 비가 내렸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을미년 3월 (1595년 3월)
3월 초1일 [양력 4월 10일]<갑술> 맑다.
삼도에 겨울을 지낸 군사들을 모아 임금님께서 하사하신 무명을 나누어 주었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3월 초2일 [양력 4월 11일]<을해> 흐렸다.
3월 초3일 [양력 4월 12일]<병자> 맑다.
3월 초4일 [양력 4월 13일]<정축>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이 들어왔다.
3월 초5일 [양력 4월 14일]<무인> 비가 내렸다.
노대해가 왔다.
3월 초6일 [양력 4월 15일]<기묘> 맑다.
3월 초7일 [양력 4월 16일]<경진>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조방장 신호(申浩)․우후(이몽구) 및 진 도군수(박인룡)가 와서 봤다.
3월 초8일 [양력 4월 17일]<신사>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갔다.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배설)․양 조방장(박종남․신호)․ 우후(이몽구)․ 가리포첨사․ 낙안군수․ 보성군수․ 광양현감․ 녹도만호가 아울러 모두 와서 이야기 했다.
3월 초9일 [양력 4월 18일]<임오> 맑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의 새로 부임한 첨사 장린(張 麟)․옥포의 새로 부임한 만호 이담(李曇)이 공사례의 인사를 했 다. 진주의 이곤변(李坤 )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초10일 [양력 4월 19일]<계미>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이야기했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 國이 아뢰고 돌아갔다.
3월 11일 [양력 4월 20일]<갑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사도시(대궐 안의 쌀․간장 등을 맡은 관청)의 주부 조형도(趙亨 道)가 와서 전라좌도의 왜적의 정세를 말하고, 또 투항해 온 왜놈 들의 말을 전하는데,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삼년간이나 출병해도 끝내 효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 부산에다 진 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월 11일에 바다를 건너 오기로 벌써 정해졌다고 했다.
3월 12일 [양력 4월 21일]<을유> 흐렸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우후(이몽구)가 장기를 두었다.
3월 13일 [양력 4월 22일]<병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자윤 박종남(朴宗男) 영감을 불러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 에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趙亨道)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3월 14일 [양력 4월 23일]<정해> 비는 오고 바람은 그쳤다.
남해현령이 진에 이르렀다.
3월 15일 [양력 4월 24일]<무자> 비가 잠깐 그치고 바람도 잤다.
식사를 한 뒤에 조형도(趙亨道)가 아뢰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3월 16일 [양력 4월 25일]<기축> 비가 내렸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이 들어왔다. 그 편에 들으니, 충청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군량미 이백 여 섬을 조도어사 강첨(姜簽)에게 발각되어 그 때문에 잡혀 심문당했다고 했다. 또 새로 부임한 충 청수사 이계훈(李繼勛)은 배에서 불을 내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 랄 일이다. 동지 권준(權俊)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3월 17일 [양력 4월 26일]<경인> 비가 걷힐 듯하다.
아들 면․허주(許宙)․박인영(朴仁英) 등이 돌아갔다. 오늘 군 량을 계산하여 딱지를 붙였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달려 와 보고 하는데, 수사 이계훈(李繼勛)이 불을 내고 자신은 물에 빠져 죽었 으며, 군관과 격군 백마흔 여 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하니, 놀랍 기도 하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견내량의 복병한 곳에 서 온, 투항한 왜인 심안은이(沈安隱已: 시마즈)를 문초했더니, 그 놈은 본시 영등에 있던 왜놈이고, 그의 장수 심안둔(沈安頓: 島津 義弘)이 그의 아들(島津忠恒)을 대신 두고 가까운 시일내에 본국 으로 돌아갈 것이라 한다."고 했다.
3월 18일 [양력 4월 27일]<신묘> 맑다.
권언경(權彦卿)․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李壽元) 등이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말을 들으니, 천만다 행이다. 우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3월 19일 [양력 4월 28일]<임진> 맑다.
권언경(權彦卿) 영감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0일 [양력 4월 29일]<계사> 비가 내렸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수사 배설(裵楔)을 만나 배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그는 밀포(蜜浦)의 둔전치는 곳을 살펴 볼 일로 간다고 했다. 그 길로 우수사에게로 가서, 몹시 취하고, 저물어서 돌아왔다.
3월 21일 [양력 4월 30일]<갑오> 맑다.
저녁나절에 아우 여필․조카 봉․이수원(李壽元)이 돌아갔다. 나주 반자(元宗義)와 우후(李夢龜)가 와서 봤다.
3월 22일 [양력 5월 1일]<을미>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날씨가 일찍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여기 와서 같이 쏘았다. 날이 저물어 헤어져 돌아왔다.
3월 23일 [양력 5월 2일]<병신>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세 조방장 및 우후와 함께 걸어서 앞산 봉우 리에 오르니, 삼면으로는 바라보이는 앞이 막히지 않고, 길은 북 쪽으로 트여 있다. 과녁을 세우고 자리를 닦고, 거기에 앉아 종일 토록 돌아올 것을 잊었다.
3월 24일 [양력 5월 3일]<정유> 흐리고 바람이 없다.
공문을 결재했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과 함께 활을 쏘았다.
3월 25일 [양력 5월 4일]<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
동지 권준(權俊)․우후․남도포만호․나주반자가 와서 봤다. 영광 군수도 왔다.동지 권준(權俊)과 장기를 두었는데 권준(權俊)이 이 겼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했는데 닭이 울어서야 열이 조금 내리고 땀은 흐르지 않았다.
3월 26일 [양력 5월 5일]<기해> 맑다.
영광군수(丁淵)가 나갔다. 저녁나절에 조방장 신호(申浩)․박종남 (朴宗男)과 우후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저녁에 수사 배 설(裵楔)․이운룡(李雲龍)․안위가 와서 새 감사(監司) 맞이할 일 을 아뢰고, 사량(통영시 사량면)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동쪽이 어둡다가 밝아지니, 무슨 상서로운 조짐인지 모르겠다.
3월 27일 [양력 5월 6일]<경자>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가 여기 와서 종일 활을 쏘았다. 어둘 무 렵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에게로 가서 발포만호․사도첨사․녹도 만호를 불러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표마(表馬)와 종 금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3월 28일 [양력 5월 7일]<신축>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저녁나절에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기를,"각 포구의 병부(兵符)를 순찰사의 공문에 따라, 각 포구에 직접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3월 29일 [양력 5월 8일]<임인>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두 조방장과 이운룡(李雲龍)․조계종(趙繼宗)이 활 스무세 순을 쏘았다. 수사 배설(裵楔)이 순찰사에게서 오고, 미조항첨사(성윤문)도 진에 왔다.
을미년 4월 (1595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9일]<계묘> 맑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남원 유생 김굉이 수군에 관한 일로 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2일 [양력 5월 10일]<갑진> 맑다.
종일 공무를 봤다.
4월 초3일 [양력 5월 11일]<을사> 맑다.
세 조방장이 우수영의 진으로 가고, 나는 사도첨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4일 [양력 5월 12일]<병오>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배설)가 활을 쏘자고 청하므로, 권․박 두 조방 장과 함께 배를 같이 타고 경상수사에게 갔더니, 전라수사(이억 기)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같이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4월 초5일 [양력 5월 13일]<정미> 맑다.
선전관 이찬(李燦)이 비밀 유지(有旨)를 가지고 진에 이르렀다.
4월 초6일 [양력 5월 14일]<무신> 가랑비가 종일 내렸다.
동지 권준(權俊)과 같이 이야기했다.
4월 초7일 [양력 5월 15일]<기유> 맑다.
저물 무렵 바다로 내려가 어두울 때에 견내량에 이르러 잤다. 선 전관(이찬)이 돌아갔다.
4월 초8일 [양력 5월 16일]<경술> 맑으나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왜적들이 밤에 도망갔다고 하므로 들어가 치지 않았다. 저녁나절 에 침도에 이르러,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裵楔)과 함께 활을 쏘았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와서 참여했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4월 초9일 [양력 5월 17일]<신해>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과 함께 활을 쏘았다.
4월 초10일 [양력 5월 18일]<임자> 맑다.
구화역(仇化驛: 丘墟驛) 역졸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세 척이 또 역앞(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삼 도의 중위장들에게 각각 다섯 척씩 배를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달려가 형세를 보아 무찌르게 했다.
4월 11일 [양력 5월 19일]<계축> 맑다.
우수사가 와서 보고는 그대로 활을 쏘고, 종일 이야기하다가 돌 아갔다. 정여흥(鄭汝興)이 들어왔다. 또 변존서(卞存緖)의 편지를 보니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줄을 알겠다. 기쁘다.
4월 12일 [양력 5월 20일]<갑인> 맑다.
장계의 회답 열여덟 통과 영의정(류성룡)․우의정(정탁)의 편지와 자임(子任: 李軸)영감의 회답 편지가 왔다. 군량을 독촉할 일로 아병(牙兵: 군사의 일종) 양응원(梁應元)을 순천․광양으로, 배승 련(裵承鍊)을 광주․나주로, 송의련(宋義連)을 흥양․보성으로, 김 충의(金忠義)를 구례․곡성으로 정하여 보냈다. 삼도의 중위장 성윤문(成允文)․김완(金浣)․이응표가 견내량에서 돌아와 왜적이 물러갔다고 보고했다.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밀포(蜜浦)로 나갔다.
4월 13일 [양력 5월 21일]<을묘> 흐리고 비가 내렸다.
세 조방장이 같이 왔다. 장계와 편지 네 통을 봉하여 거제 군관 편에 올려 보냈다. 저녁에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가 와서 왜적의 일을 말하고, 또 "거제의 왜적이 웅천에 군사를 청하여 야간에 습격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비록 믿을만 하지는 않으나, 그럴 염려가 없지도 않다.
4월 14일 [양력 5월 22일]<병진>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교서에 숙배했다.
4월 15일 [양력 5월 23일]<정사> 흐렸다.
여러 가지 장계와 단오절의 진상품을 봉해 올렸다.
4월 16일 [양력 5월 24일]<무오> 종일 큰 비가 왔다.
비가 흡족히 오니, 올해 농사는 큰 풍년임을 점칠 수 있다.
4월 17일 [양력 5월 25일]<기미> 맑으나 높새바람이 세게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세 조방장과 활 열다섯 순을 쏘 았다.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여기에 왔다가 해평장의 논밭 일구 는 곳으로 갔다. 미조항첨사도 와서 활을 쏘고서 갔다.
4월 18일 [양력 5월 26일]<경신>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우수사(이억기)․경상수사 배설 (裵楔)․ 가리포첨사(이응표)․ 미조항첨사(성윤문)․ 웅천현감(이운룡)․ 사도첨사(김완)․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발포만호(황정록 ) 등 삼도의 장수가 모두 와서 모여 활을 쏘았다. 권준(權俊)․신 호(申浩) 두 조방장도 같이 모였다.
4월 19일 [양력 5월 27일]<신유> 맑다.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이 적을 수색․토벌하는 일로 배를 탔다.
4월 20일 [양력 5월 27일]<임술> 맑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에게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이 영남이 장계 회답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남해현령을 효시하라고 했다.
4월 21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대청에 나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4월 22일 [양력 5월 30일]<갑자> 맑다.
오후에 미조항첨사(성윤문)․(웅천현감)이운룡(李雲龍)․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과 두 조방장이 아울 러 왔다. 그래서 정사준(鄭思竣)(판관 鄭承復의 아들)이 보낸 술과 고기를 같이 먹으면서, 남해현령이 군령을 어기었으니 효시하라는 글을 보았다.
4월 23일 [양력 5월 31일]<을축> 맑다.
마파람이 세게 불어 배를 운항할 수 없으므로 다락위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4월 24일 [양력 6월 1일]<병인> 맑다.
이른 아침에 아들 울(蔚)․조카 뇌․완(莞)을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내어 보냈다. 오정 때에 강천석(姜千石)이 달려 와서 보고하기를, "도망한 왜놈 망기시로(望己時老: 孫四郞)가 우 거진 풀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잡혀 왔고, 다른 한 놈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했다. 곧 그 놈을 압송해 오게 하고 삼도에 갈라 맡긴 항복한 왜놈들을 모두 불러 모아 곧 머리를 베라고 하였더니, 망기시로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으로 독한 놈이었다.
4월 25일 [양력 6월 2일]<정묘> 맑도 바람도 없다.
구화역 역졸 득복(得福)이 경상우후(이의득)의 보고를 가지고 왔 는데, "왜적의 대선․중선․소선을 아울러 쉰 여 척이 웅천에서 나와 진해(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수(吳水) 등을 정탐하도록 내어 보냈다. 흥양현감이 와 서 봤다. 사량만호 이여념(李汝恬)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회 및 조카 해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다행이다.
4월 26일 [양력 6월 3일]<무진> 맑다.
새벽에 우수사가 조방장 신호(申浩)와 함께 자기 소속의 배 스무 여 척을 거느리고 탐색하러 나갔다. 저녁나절에 종지 권준(權俊)․ 흥양현감(배흥립)․ 사도첨사(김완)․ 여도만호(김인영(金仁英))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4월 27일 [양력 6월 4일]<기사> 맑으며 바람도 없다.
몸이 불편하다. 동지 권준(權俊)․미조항첨사(성윤문)․영등포만 호(조계종)가 와서 같이 활 열 순을 쏘았다. 한밤 자정에 우수사 가 적을 수색․토벌하고서 진으로 돌아아서는, "아무데도 적의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4월 28일 [양력 6월 5일]<경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우수사․경상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송덕일이 하동현감(성천유)을 잡으러 왔다.
4월 29일 [양력 6월 6일]<신미> 밤 두 시쯤에 비가 오더니, 아침 여섯 시쯤에 깨끗이 개었다.
해남현감(최위지)이 공사례를 마친 뒤에, 하동현감에게는 두 번이 나 기일에 이르지 않은 죄로 곤장 아흔 대를 때렸고, 해남현감에 게는 곤장 열 대를 때렸다. 미조항첨사는 휴가 가겠다고 아뢰었 다. 세 조방장과 같이 이야기했다. 노윤발(盧潤發)이 미역을 아흔 아홉 동을 따 가지고 왔다.
4월 30일 [양력 6월 7일]<임신>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을미년 5월 (1595년 5월)
5월 초1일 [양력 6월 8일]<계유>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5월 초2일 [양력 6월 9일]<갑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었다. 웅천현감․거제현령․영등포 만호․옥포만호가 와서 봤다. 밤 열 시쯤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며, 종사관이 벌써 본영에 이르렀다고 한다.
5월 초3일 [양력 6월 10일]<을해> 맑다.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와서 봤다. 금갑도만호는 진에 이르렀다.
5월 초4일 [양력 6월 11일]<병자>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다.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녁나절에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王爵德)이 (고려)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5월 초5일 [양력 6월 12일]<정축> 비가 내렸다. 오후 여섯 시쯤 잠깐 개었다.
활 세 순을 쏘았다. 우수사․경상수사와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 였다. 오후 다섯 시에 종사관 류공진이 들어왔다. 이충일(李忠一) ․최대성(崔大晟)․신경황(申景潢)이 같이 이르렀다. 몸이 춥고 불편하고 아파 토하고서 잤다.
5월 초6일 [양력 6월 13일]<무인> 맑으며 바람도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례를 받고 함께 이야기 하였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7일 [양력 6월 14일]<기묘> 맑다.
아침에 종사관(류공진)․우후(이몽구)와 함께 이야기했다.
5월 초8일 [양력 6월 15일]<경진>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삼도가 가 같이 선인암(仙人巖: 통 영시 한산면 하소리 하포)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고 구경도하며, 또 활도 쏘았다. 오늘 방답첨사(張麟)가 들어와 아들들의 편 지를 가지고 왔는데, "초나흘에 종 춘세가 잘못 불을 내어 집 열 채가 번져 타버렸다. 다만 어머니께서 계신 집에는 불이 붙지 않 았다."고 했다. 이거야 말로 다행이다. 어둡기 전에 배를 돌려 진에 이르렀다. 종사관과 우후는 방 붙이는 일로 뒤떨어졌다.
5월 초9일 [양력 6월 16일]<신사> 맑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종사관이 돌아갔다. 우후도 같이 갔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초10일 [양력 6월 17일]<임오> 맑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많이 적중했다. 종사관 등이 영문에 이르 렀다고 했다.
5월 11일 [양력 6월 18일]<계미> 저녁나절에 비가 뿌렸다.
두치(하동읍 두곡리)의 군량, 남원․순창․옥과 등을 합하여 예순 여덟 섬을 실어왔다.
5월 12일 [양력 6월 19일]<갑신> 궂은비가 그치지 않더니, 저녁에야 잠깐 개었다.
대청에 나가 공무를 봤다. 동지 권준(權俊)과 조방장 신호(申浩) 가 함께 왔다.
5월 13일 [양력 6월 20일]<을유> 비가 퍼붓듯이 오는데 종일 그치지 않다.
홀로 대청 가운데 앉아 있으니 온갖 회포가 끝이 없다. 배영수 (裵永壽)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했다. 또 세 조방장을 불러 오게 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하루 걸릴 탐후선이 엿새나 지나도 오지 않아 어머니 안부를 알 수가 없다. 속이 타고 무척 걱정이 된다.
5월 14일 [양력 6월 21일]<병술> 궂은비가 그치지 않고 종일토록 왔다.
아침에 식사를 한 뒤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가 와서 보고하는데, "흥양현감이 받아 간 전선이 암초에 걸려 뒤집 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대장(代將) 최벽(崔璧)과 십호선 장수(十船將)와 도훈도(都訓導)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동지 권준(權俊)이 왔다.
5월 15일 [양력 6월 22일]<정해>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겠다.
새벽 꿈이 어수선했다. 어머니 소식을 들은지 이레나 되니 몹시 속이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조카 해가 잘 갔는지 궁금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 광양의 김두검(金斗劍) 이 복병으로 나갈 적에, 순천과 광양의 두 원에게서 이중으로 월 급(朔料)을 받은 것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나왔는데다가 무척 오만하므로 곤장 일흔 대를 쳤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5월 16일 [양력 6월 23일]<무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다고 하고, 아 내는 실수로 불을 낸 뒤로 마음이 많이 상하여 담천이 더해졌다 고 한다. 걱정이 된다. 비로소 조카 해 등이 잘 간 줄을 알았 다.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동지 권준(權俊)이 잘 맞추었다.
5월 17일 [양력 6월 24일]<기축> 맑다.
아침에 나가 본영의 각 배에 사부․격군의 급료받은 사람들을 점 고했다. 저녁나절에 활 스무 순을 쏘았는데, 박․권 두 조방장이 잘 맞추었다. 오늘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18일 [양력 6월 25일]<경인> 맑다.
충청수사가 진에 이르렀다. 다만, 결성현감(손안국)․보령현감․ 서천만호(소희익)를 거느리고 왔다. 충청수사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세 조방장과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 열 순을 쏘았다. 거제현령이 와서 보고 그대로 잤다.
5월 19일 [양력 6월 26일]<신묘> 맑으나, 샛바람이 차게 불었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권․박․신 세 조방장과 사도․방답 두 첨사 와 함께 활 서른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宣居怡)도 와서 같이 참여했다. 저녁에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부어 만들었다.
5월 20일 [양력 6월 27일]<임진> 비바람이 저녁내 오고 밤새도록 멎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공무를 봤다. 수사 선거이(宣居怡)․조방장 권준(權俊)과 같이 장기를 두었다.
5월 21일 [양력 6월 28일]<계사> 흐렸다.
오늘은 꼭 본영에서 누가 올 것이겠지만 당장 어머니 안부를 몰 라 답답하다. 종 옥이(玉伊)․ 무재(武才)를 본영으로 보내고, 전복과 밴댕이 젓갈, 물고기알 몇 점을 어머니께 보냈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보자니,투항해 온 왜놈들이 와서 보고하기를, "저희 같은 또래 중에 산소(山素)란 놈이 흉칙한 짓거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했다. 그래서 왜놈을 시켜서 그놈을 목을 베게 했다. 활 스무 순을 쏘았다.
5월 22일 [양력 6월 29일]<갑오> 맑고 화창하다.
동지 권준(權俊) 등과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이수원(李壽元) 이 상경할 일로 들어왔다. 비로소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이다.
5월 23일 [양력 6월 30일]<을미> 맑다.
세 조방장과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5월 24일 [양력 7월 1일]<병신> 맑다.
아침에 이수원(李壽元)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조방장 박종남 (朴宗男)과 충청수사 선거이(宣居怡)를 시켜 활을 쏘게 했다. 소금 굽는 가마솥을 부어 만들었다.
5월 25일 [양력 7월 2일]<정유> 맑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렸다.
경상수사․우수사․충청수사가 모여서 같이 활 아홉 순을 쏘았 다. 충청수사가 술을 내어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경상수사 배설 (裵楔)에게서 김응서(金應瑞)가 거듭해서 대간들의 혹평을 받고 있고, 원수도 거기에 끼었다는 말을 들었다.
5월 26일 [양력 7월 3일]<무술> 저녁나절에 개었다.
홀로 대청에 앉아 있었다. 충청수사․세 조방장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 저녁에 현덕린(玄德麟)이 들어왔다.
5월 27일 [양력 7월 4일]<기해> 맑다.
활 열 순을 쏘았다. 수사 선거이(宣居怡)와 두 조방장이 취하여 돌아갔다. 정철(丁哲)이 서울에서 진에 왔다. 장계 회답 내용에, " 김응서(金應瑞)가 함부로 강화에 대하여 한 말이 죄가 죄었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 영의정(류성룡)․좌의정(김응남)의 편지가 왔다.
5월 28일 [양력 7월 5일]<경자> 흐리다가 마침내 저녁에 비가 많이 내렸다.
끝내 밤에 바람이 세게 불어, 전선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는데, 간간히 구호했다. 식사를 한 뒤에 수사 선거이(宣居怡)․세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5월 29일 [양력 7월 6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 부었다.
사직(社稷: 社; 土地의 神, 稷; 穀食의 神)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 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인으로 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