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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20) :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
+ 본 문 : 요한계시록 11장 1절 - 19절 (신약성경 409쪽 )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이르되 감사 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아멘!
지난 예배시간을 통해서, 요한계시록 10장은 두 번째로 삽입된 장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삽입된 말씀 – 요한계시록 7장의 말씀은 하늘로 올라오라 하셔서 위로를 경험하게 하셨고,
두 번째로 삽입된 말씀인 요한계시록 10장은, 위로 받았으면 사명을 가지고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1장에서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두 증인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늘 이런 식입니다. 각 시대마다 그 사명을 감당했던 샘플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너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도전을 주시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도 똑같은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3절, 4절 말씀은 하나님이 내세우신 샘픔에 대한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에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아멘! - 여기 나오는 두 감람나무는,
구약의 스가랴서 4장 3절 말씀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아멘!
이어 4장 14절입니다. “이르되 이는 기름부음 얻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여기 나오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 는 표현은 당시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져버린 성전을,
재건한 주역들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바벨론에서 유대 총독으로 파견 받은 스룹바벨을 일컫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입어서, 당시 무너진 성전재건 완성이라는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 라고 표현한 것은 이 두 증인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촛대” 는 무엇을 할까요? 요한계시록 1장 20절 말미에,
촛대에 대해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두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렇게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의 의미를 종합하여 보면, 두 증인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님의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두 증인을,
샘플로 등장시키셔서 어떻게 하면 10장에서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 3절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두 증인은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 증이 왜 베옷을 입었을까요?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타락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할 때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을 봅니다.
그 중에 한 예를 들면, 요나서 3장 5절에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크게 회개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걸 압시다. 교회는 회개를 촉구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참회하는 공동체입니다.
레온 모리스라는 분이 이런 진리를 말했습니다. “교회는 참회하는 교회일 때에만 능력 있는 교회이다.”
오늘 한국 교회, 아니 지금의 우리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바로 여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 됨을 통해서 진정한 부흥성장을 원한다면, 회개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심령의 변화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이것을 놓치고는 우리교회의 회복이나 부흥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해남중앙교회가, 그리고 우리 심령이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두 증인의 모습을 분석해봐야 합니다. 두 증인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명자의 특징은, 사명자들인 두 증인들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6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 참으로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인 두 증인은, 구약성경에서 강력한 능력으로 적들을 무찔렀던 모세와 엘리야를,
섞어 놓은 듯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증인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나는 이 두 증인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목사인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면,
내가 목회하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그들이 가진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큰 능력을 가진 증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힘없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미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 아멘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능력을 가진 오늘 본문의 두 증인들이, 맥없이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두 주인공들의 세 번째 특징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강한 능력을 가졌지만,
비참하게 죽는 길로 나아갔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활시켜주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3일 반 후에,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크게 두려워하더라.”
이렇게 두 증인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과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이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 증인을 등장시키셔서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을까요?
우선 그들에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원수들을 무찌르고 죽일 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린데 두 증인은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원수들을 짓밟고 복수하는데 쓰지 않고,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 그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데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능력을 가진 두 증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그런 힘을 가지고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십자가의 길로 걸어 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우와! 힘이 있단다. 엄청난 힘이란다. 부럽다.”
너도 나도 다들 강력한 힘만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행이 바로 여기서 시작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삶이 어긋나고 꼬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십자가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의 강력한 힘과 능력만을 원한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맨 날 달라고 기도하고, 죽기 살기로 얻기를 원하는 것이 뭡니까? 강력한 힘입니다.
강력한 돈의 힘, 강력한 권력의 힘, 사람들에게 내세울만한 미모, 지식, 배경 같은 힘을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두 증인이라는 샘플을 통해, 그 능력을 그런 식으로 휘두르고,
자랑하는 일에 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 지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
그 희생의 길을 가는데 힘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다른 종교는 살기 위해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죽기 위해서 믿습니다.
어쩌면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죽어야 다시 사는 거듭남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힘을 과시하고 그 힘을 휘두르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죽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살고, 그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종교입니다. 날마다 내 자아를 꺾어야 하고,
날마다 내 고집을 꺾고, 날마다 묵묵히 용납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내가 죽어야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렇게 죽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이요. 이렇게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의 복음이요. 영생하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에 죽고, 부활로 다시 살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걸 보여 줍니다. 두 증인이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자, 주님이 그들을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참 재미있고도 슬픈 사실은 요한계시록 6장부터 16장까지 하나님께서 그령게 악한 자들에 대해,
엄청난 심판을 경고하고 계신데도 사람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전혀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두 증인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죽는 길,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고,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살려내셨을 때,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회개하라는 말을 못 들어서,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동안 회개하라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데 듣고도 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회개하라고 외쳐도 회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설교자인 저의 고민 중의 고민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그렇게 강단에서 외쳐도 회개하지 않는지 아느냐?
그렇게 소리 질러 설교한다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인 네가 먼저 희생하고,
손해보고, 포기하고, 심지어 죽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때, 비로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아멘!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을 향해 그렇게 타이르고 욱박지르고,
잔소리를 수없이 해대는데도 자녀들이 왜 변하지 않는 지 아십니까? 엄마로서, 아빠로서 부모가 먼저,
십자가의 길, 손해 보고 죽는 길로 나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걸 두 증인이 샘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고, 돌이켜야 한다고, 누가 그것을 몰라서 안 합니까?
이제부터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복음으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우리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증인이 그걸 보여 준 것입니다. 힘이 있지만 휘두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의 길, 그 길을 말없이 묵묵히 걸어갈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마땅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잘 안 됩니까?
너무나 간단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손해보고 희생하고 죽어지면 두 증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이 나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못 죽습니다. 아니 안 죽습니다.
목사인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선 죽어야 한다고 설교하지만, 막 강단을 내려와서 살다보면,
손해 보기 싫습니다. 죽기 싫습니다. 믿음 있는 척 하며 살아가지만, 그런 내게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엎드려 “믿음을 주시옵소서. 내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는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을 달라고 엎드려 구해야 합니다.
우리 솔직히 믿음 있는 척, 거룩한 척 하지 말고,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갑시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진심으로 조용히 주님과 함께 죽으러 십자가의 길로 갑시다. 그때 회개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계시록 11장을 보면, 주인공인 두 증인이 1절부터 바로 등장하지 않고 3절부터 등장합니다.
1절, 2절에서는 측량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아멘!
이와 같은 성전 측량의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에 대한 보호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않고 그냥 두였더니, 악한 것들이 와서 짓밟아버렸다고 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면, 성전과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 측량되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보호되는 것을 상징하고, 성전 밖 마당을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보호하심을 받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부의 공격을 받아 고통당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내 영혼은 보호해주시면서 육신은 내버려 두실까요? 왜 예수 믿는 우리를 절망에 내버려 두실까요?
이 질문에 대해 묵상하다가 항상 은혜가 되는 이사야 43장 1절, 2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멘입니까?
1절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2절에서는 물 가운데로, 불 가운데로,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물 가운데서 건져 주세요.
불 가운데서 보호해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물과 불 같은 시험을 당하고서야 피하게 해 달라. 건져 달라. 잘 살게 해 달라.
육신의 문제만 구합니다. 그 지경에서 영혼을 구원해 달라. 믿음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시험 듭니다. 자기감정과 다르면 비난합니다.
초대교회 생도들은 극심한 핍박 속에서, 심지어 목숨을 잃는 순교를 하면서도,
육신을 살려달라. 불 가운데서, 물 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구하기보다, 먼저 내 영혼을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순교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혼을 천국에서 받으셨고, 그들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로마의 박해를 뛰어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복음이 2천년의 역사를 지나, 오늘 이곳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도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이런 말이 유행합니다. “우리나라는 정직하면 망하는 사회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물론, 정말로 정직해야 할 공무원까지도 이 말은 거의 수학공식처럼 여겼습니다.
정직하게 장사하면 망한다. 정직하게 공직생활해서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정답입니다. 가면 갈수록 이 말은 진리처럼 입력이 되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만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똑 같습니다. 예수님이 다 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이럴 땐 적당히 눈 좀 감아 주세요. 이래야 사는 거 다 알잖아요.”
초대교회 성도들! 한 번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안 죽는데, 사는데,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기에,
예수 믿는다고 정직하게 고백했다가 죽었잖아요. 순교했잖아요. 그들이라고 안 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도, 여러분도, 지금 우리는 너무나 부끄럽게도 정직해서 망하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생경책은 끼고 사는데, 예배시간에 감동해서 눈물은 흘리는데, 우리는 부정직해서,
사는 길, 흥하는 길을 선택했지, 정직해서 죽는 길, 망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말씀의 능력이 사라졌습니다. 영적 신비도 사라졌습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하늘 사람으로 사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1장을 통해서, 우리가 정답을 찾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증인들처럼 내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맙시다. 십자가 밑에 엎드려 회개합시다.
영혼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에게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죽는 길을 먼저 선택합시다. 손해 보는 길, 희생하는 길,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두 증인들처럼, 참 사명자의 샘플이 되어,
주님의 은혜와 기쁨을 맛보아 아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