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경대병원 앞 진석타워에서 고딩 송년모임이 있었습니다.
진석타워가 있는 삼덕동 일대는 제가 30대 초반을 보내던 곳으로, 곳곳에 지난 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진석타워가 있는 자리는 원래 동명목재가 있던 자리였지요. 학교 책걸상을 주로 만들곤 했는데요.
넓은 땅에서 손가락 대부분이 잘려나간 제재소 직원들이 나무를 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동명목재 강사장이 "내가 죽거든 무엇을 짓던말던 마음대로 하라!"고 그만큼 말렸다는데
외국물 좀 먹고 돌아왔다는 아들은 듣지않고 고집대로 오피스텔을 짓다가는 완성도 못한채 망했다고 하지요.
고생 안하고 부를 세습받은 있는 집 자식들이 물려받은 재산 말아먹는 전형적인 방법을 답습했는데요.
그렇게 말아먹은 이름있는 재벌도 많지요? 진로가 그렇고 해태가 그렇고 동아건설이 그렇게 망했습니다.
2층 부페식당에는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의 토요일이라 많은 팀들이 돌잔치나 송년의 밤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푸짐하게 담아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저는 초밥만 적당히 담았습니다. 요즘은 안주로 초밥을 무척 즐깁니다.
술잔을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옛날 대건고 야구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핏대를 올리며 자기 주장이 맞다고 언성을 높이는가하면 답답하다며 우랑우탕처럼 가슴을 마구치기도 하고.^^
그날 이야기의 논란은 장태수 선수가 충암고로 갔이 전학을 갔나 안갔나? 와
또 한 녀석의 기아의 감독인 조범현 선수가 우리와 동기가 맞나 안맞나? 였는데
대건고 출신이라면 야구에는 다들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조범현이 우리하고 동기라고 주장했던 친구는
금방 승복을 하고 꼬리를 내렸는데, 장태수가 충암고로 전학을 갔다는 넘은 끝가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넘은 급기야 "똥고집 부리지 마라! 벌써 치매기가 있나?" 하는 저한테 "돈 100만원 걸자! 됐나?"핏대를 올렸습니다.
내기 붙어봐야 내가 이긴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만 "됐네, 이사람아!" 하고 말았습니다.
2주 전에는 또 다른 친구와 50만원 내기가 붙었드랬습니다.
어떤 친구를 두고 삼수를 했네 안했네를 가지고 내기를 걸었는데.
마침 그넘은 봉덕동 팔군 후문 저의 가게를 제집 드나들 듯 하던 놈으로 저의 수하(?)에 있던 놈이었거든요.^^
날만 밝으면 내 가게에 와서 라면 끓여먹으며 빈둥빈둥대다가 저녁만 되면 술얻어 먹던 빈데였는데, 그놈이 79학번이라고?
그런데 양 쪽 돈 50만원씩 받아들고 심판을 봤던 친구는 내가 이긴 것으로 판정만 내리고는
딴 돈은 커녕 제가 걸었던 돈마저도 돌려주지 않고 걍 동기회 기금으로 넣어버렸습니다.-_- 이런 된장!^^
자, 이제 야구이야기 정리를 하겠습니다. 지금은 야구에 관심을 껐지만 저도 한때는 야구광이었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적에 같이 캐치볼을 하고 야구에 관심을 갖게 했더니 지금은 아이들이 야구광입니다.^^
제가 1976년도 3월에 대건고에 입학을 하니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야구를 보지 못한 저는 당연히 빨려들었겠지요.
3학년에는 장태수 원민구 2학년에는 조범현 이근식 기세봉 1학년에는 정용락 이런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지요.
마침 다음에 검색을 해보니 옛 대건고 야구부 사진이 있었습니다.
뒷줄 첫번째 원민구 투수 세번째 조범현 포수 일곱번째 장태수 유격수 중간에 앉은 이는 주무였던 백인식 체육 선생님입니다.
당시 고등학교 야구대회는 중앙일보의 대통령기 조선일보의 청룡기 한국일보의 봉황대기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 등이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열리는 대붕기와 부산에서 열리는 화랑기 대회는 나중에 생겼습니다. 매일신문의 대붕기 전신이 문교부장관기였지요.
전 해인 1975년도 황금사자기 4강에 까지 올랐던 우리 야구부는 대통령기 대회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을 하고 맙니다.
내야 스텐드는 시멘트, 외야스텐드는 잔디 계단으로 되어 있던 시민운동장을 찾아가 목이 터저라 응원을 한 보람도 없이.
대통령기 대회는 대구상고와 군산상고가 결승에서 만나 격돌을 벌였는데요.
훗날 같은 한양대로 진학을 하는 김시진 투수와 김용남 투수가 대결을 벌여 투수전 끝에 대구상고가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 청룡기 대회에서 대건고는 지역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오르게 됩니다만
1회전을 약체팀을 만나 가볍게 승리하고 2회전에서 부산의 경남고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훗날 국내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게되는 최동원이라는 투수가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기는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들으며 응원을 하던 저를 무척이나 안타깝게 했습니다.
도대체 안타를 쳐야 점수를 내던동 말던동 하지. 정말 대단한 구위였습니다.
그 당시 제 일기장에는 경기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거의 무안타로 허덕이다가 결국 4대1로 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다른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대건고 야구부는
결국 우리가 2학년으로 올라가던 1977년 해체와 함께 서울 충암고로 전학을 가게됩니다.
당시 충암고의 감독이 지금 '野神'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이었죠.
대건고 야구 선수들이 충암고로 전학을 갈때 대구상고에 다니던 장호연 선수도 같이 갔습니다.
대부분 대건중 출신이던 대건고 선수들과 같은 중학교를 다녀서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었겠지요.
장호연 선수는 충암고를 거치며 동국대를 나와 프로야구 OB에서 조범현 이근식 선수와 함께 크게 이름을 날립니다.
거의 한두명만 빼고 대부분 대건고 출신들이 주축이던 충암고는 그해 봉황대기를 우승으로 이끕니다.
자료을 찾아보니 최우수 선수상에 조범현, 최우수 투수 기세봉, 타격1위 정용락, 2위 이근식 등으로 모두 대건고 출신입니다.
1977년도 대건고를 졸업한 장태수 선수는 대학을 진학않고 실업팀 상업은행에 입단하여 중심타자로 활약합니다.
훗날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선배인 권영호 박승호 허규옥 선수 등과 함께 옛 대건고의 영광을 재현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모두들 기억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같습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몇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학교 뒤 주교관으로 몰려가 재단이사장인 서정길 대주교 면담 요청을 한답시고 데모를 한적이 있는데
저는 그 사건이 야구부 해체에 반발해서 한 데모인줄 알았는데 그건 존경받던 선생님의 효성여고로의 전출때문이었다는군요.
어제 핏대를 올리며 우기던 친구도 오늘쯤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면 좀 민망스러울 것입니다.
저도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과 다른 경우로 나타나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그래도 머리에 든 것이 많지 않아 회로가 복잡하지 않아서인지^^ 아직은 기억력이 쓸만하긴 합니다.
제가 내기를 해서 진 적은 별로 없으니까요. 옛날을 돌아보고 기억을 떠올려보는 것도 기억력 유지에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래 살았을수록 두고온 지난 날이 많을텐데요.
그 세월들을 눈을 지긋이 감고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반추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