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성지는 초대 교회 교우촌이자 처형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바닷길이 열렸듯이 매일 썰물 때면 육지까지 바다가 열려 길이 생기는 제부도의 신비스런 광경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어 더욱 좋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에 위치한 남양 성모 성지는 서울에서 1시간 30분, 수원에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의 위치를 갖고 있고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돼 있었다.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는 지금도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 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양에서 버스를 내리면 길 건너편에 '로사리오교'라는 자그마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 앞에는 '남양 성모 성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입간판이 하나 서 있고 여기가 바로 남양 성지에 들어서는 입구이다.
앞쪽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된 성지에는 곳곳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데 특히 구불구불하게 키가 커 올라간 소나무들이 볼 만하다. 소나무들 밑동에 정성스럽게 감아 놓은 새끼줄들은 성지에 담긴 후손들의 정성을 보여 주는 듯해서 흐뭇한 감을 준다.
성지를 들어서는 순례자는 마치 성모님의 품에 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성지의 양편과 뒤쪽으로 구릉처럼 나지막한 동산들이 성지를 감싸 안듯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안으로 성지가 들어앉아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둔덕을 지나가면 눈에 확 들어오는 '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은 남양 성지의 자랑이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2006년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경당 위 야산 정상에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을 새로 조성해 봉헌했다. 이 동산은 성서에 따른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산 정상에 넓은 잔디 광장과 함께 조성되었고, 동산 가운데 하느님 자비의 상을 세우고 그 한 편에 피에타 성모상을 그리고 동산 둘레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구하는 5단 묵주기도 길을 조성하였다. 동산 아래에는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남양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모 성지이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1991년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이며 수원교구 설정 기념일이기도 한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됐다.
성모 성지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한 곳을 의미한다. 현재 전 세계에 1천 7백 29곳이 있는데 그중 성모가 발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인도네시아에 각각 두 곳,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각각 한 곳이 있고, 베트남에는 네 곳, 필리핀과 인도에는 여섯 곳이 각각 있다.
남양 성지는 성모 성지로 선포된 후 지속적인 기도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묵주 기도 고리 운동은 현재 수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매일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15분간 5단을 바침으로써 24시간 내내 묵주 기도가 이어지게 하고 있다. 또 1년에 두 차례씩 실시되는 피크로스(PICROS) 운동은 며칠 동안 도보 성지 순례를 하면서 끊임없이 묵주의 기도를 함으로써 희생과 고통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낙태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도 모임을 매주 토요일마다 마련하고 있다.
남양 성지 순례를 모두 마치면 제부도로 가서 바닷길이 열리는 장관을 목격할 수도 있다. 남양면에서 사강 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20분 정도의 시간으로 제부도에 도착할 수 있다.
제부도에 갈 때에는 사전 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하루에 두 번 썰물과 밀물이 반복되는데 썰물 때에만 제부도로 들어갈 수 있다. 제부도 서편에 있는 2.5킬로미터의 모래밭과 그 뒤의 미루나무 숲이 볼 만하다. 특히 썰물 때마다 6시간씩 계속해서 열리는 바닷길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웅장함을 보여 준다.
썰물 시간이 맞지 않을 때에는 인근 대부도를 찾아갈 수도 있다. 피서철이면 이곳들을 찾는 인파가 많아 교통 체증이 심하기 때문에 미리 적절한 시간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순교자들의 성모 신심 이어받아 성모님께 봉헌한 남양 성모 성지
“ㅇㅇㅇㅇㅇㅇ에서 돌아오며 나는 행복했다. 그것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 하나를 얻었다는 기쁨이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눈 내리거나 바람 불 때도… 그렇게 찾아가자면 나는 어느새 성모님에게 조금씩 더 가까이 가 있지 않을까.”
작가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씨의 성지순례기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작가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든 ㅇㅇㅇㅇㅇㅇ는 어디일까. 그곳에서 그 무엇이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그곳은 바로 한국교회에서 유일하게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모 성지, 경기도 화성에 있는 남양 성모 성지(전담 이상각 신부)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모 신심은 각별하다. 힘든 일에 부닥치게 되면 엄한 아버지보다는 편한 엄마를 먼저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속내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언제 찾아가더라도 지친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는 성모 마리아를 모신, 성모 마리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지가 바로 병인박해(1866년) 순교터 위에 세워진 남양 성모 성지이다.
성지를 둘러보자. 성지의 얼굴은 뭐니 뭐니 해도 성지 한가운데에 있는 로사리오 광장과 왼편에 있는 남양 성모 마리아상을 빙 둘러싼 20단 묵주기도 길이다.
빼어난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묵주기도 길에서 순례객을 인도하는 것은 대형 돌 묵주알, 화강암으로 만든 지름 0.7m 크기의 묵주알이 로사리오 광장 주변과 야산의 오솔길을 따라 4.5m 간격으로 놓여 있어 순례자들은 그 묵주알들을 한 알 한 알 짚어가며 묵주기도 20단을 바칠 수 있다.
묵주기도가 길고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도 이곳에 오면 생각이 달라진다. 철따라 다른 빛으로 피어나는 갖가지 예쁜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계절이나 밤낮, 날씨에 상관없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를 부르며 성모 마리아께 매달리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돌 묵주알은 신자들의 간절한 마음과 기도의 손길로 반들반들 윤이 난다. 성지를 찾는 이들은 “이곳에 오면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푸근함을 느끼며, 돌 묵주알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성모님께서 손을 잡아주시는 것 같은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 입을 모은다. 성모 마리아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모이는 곳, 성모님을 그리워하는 신자들의 발길로 다져진 곳이기에 그럴 것이다.
묵주기도 길 왼편 잔디밭에 있는 남양 성모 마리아상(높이 3.5m)은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마리아상과는 크게 다르다. 남양성모성지를 대표하는 이 성모상은 ‘우리 엄마’와 같은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조각가 오상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씨 작품으로, 어린 예수가 엄마 마리아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친근한 형상이다.
성모 마리아께 매달려 있는 아기 예수가 순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엄마를 사랑하며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너도 너의 모든 어려움과 슬픔, 근심과 걱정을 말씀드리며 엄마에게 매달려라.” 그래서일까. 아기 예수님처럼 성모께 다가가 만지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신자들 모습이 하나도 이상스럽지 않다.
남양 성모 성지를 방문했을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이다. 묵주기도 방향과는 반대로 나 있는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언덕 정상, 그러니까 로사리오 광장 오른편에 있는 이 동산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하며 기도하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조성된 것이다. 동산 잔디밭에서는 자비로우신 예수님상과 피에타 성모상, 그리고 하느님 자비의 사도인 성녀 파우스티나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흉상이 순례객을 반긴다.
이 동산 둘레는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5단 묵주기도 길이다. 순례자들은 이 묵주기도 길에서 가시관, 못과 망치, 못에 뚫린 예수 손과 발, 창에 찔린 심장 등을 형상화한 묵주알 위에 손을 얹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하느님 자비를 구하는 5단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에서 로사리오 광장으로 내려오자면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과 낙태 아기들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 고통을 가장 깊이 함께 나눴을 성모 마리아의 마음을 묵상하며 기도드리는 길이다.
이 십자가의 길은 예수와 성모가 겪은 수난과 고통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바닥에 돌을 깔아 맨발로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각 처마다 아들 예수의 고통을 느끼는 성모의 마음을 1인칭으로 표현한 묵상글을 담았다.
낙태 아기들 무덤은 낙태에 대해 속죄하며 보속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한 곳이다. 이곳에는 생명수호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꾸몄으며, 생명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상을 모셨다. 낙태를 부추기는 사탄과 싸우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묵주기도의 터전에서 생명수호를 위한 기도를 바치는 것처럼 의미 있는 일도 드물 것이다.
‘남양성모성지=이상각 신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난 20여 년간 성지개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이가 이 신부다. 이 신부는 “순교자들이 죽는 순간까지 매달린 이가 성모 마리아요, 그들이 바친 기도가 묵주기도”라며 “이곳은 바로 순교자들의 성모신심을 잇는 성모성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단체로 어쩌다 한 번 다녀가고 마는 그런 성지가 아니라 한 번 와본 이는 꼭 다시 찾는 영혼의 쉼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성모님 품에 안겨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성지’가 바로 남양 성모 성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신부는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께 매달릴 때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다”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면 남양 성모 성지를 찾아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혼의 양식을 얻어갈 것을 권했다. 묵주기도만으로 부족한 이는 성지 한 켠에 마련된 성체조배실을 찾아 침묵 중에 하느님을 만나도 좋을 듯하다.
남양 성모 성지는 매일(월요일은 사무실에 확인) 오전 11시에 미사를 봉헌하며,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오후 3시 30분 특별고해소를 운영한다. [출처 : 평화신문, 2009년 10월 4일, 남정률 기자, 일부 편집]
남양의 순교자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100여 년 동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비롯한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병인년 대박해 때에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났는데, 당시 교우의 총 수가 2만 3천여 명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얼마나 잔학한 박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이 병인년 대박해 때 남양 도호부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하였다.
남양성모성지에서는 자신의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죽음을 선택한 순교자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을 받고 계시는 무명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을 통해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분뿐이다.
그러나 이분들에 대해서도 어디 사람이고, 언제 치명하였으며, 치명 당시의 나이는 얼마였는지 등 매우 간략한 정보만이 전해지고 있다.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沔川)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본래 성품이 순량한데다가 신앙생활에 철저했던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신부가 공소를 순방할 때마다 모든 준비들을 직접 하였고, 교우들이 타당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곤 하였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新里, 현 충청남도 합덕읍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양(南陽)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온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가 자신이 바로 ‘그대들이 찾던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포졸들은 필립보를 체포하자마자 매질을 하고는, 천주교 신자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렇게 체포되었다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책은 지난 박해(즉 병인박해) 때에 모두 불태워 버렸고, 아는 신자 하나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
그러자 포졸들은 필립보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남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갔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세였다.
부부 순교자들의 얼이 서린 곳
한국천주교회 내의 유일한 성모성지인 남양에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20단 야외 돌 묵주기도의 길(약 1km 정도)이 조성되어 있다. 많은 순교자들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묵주를 손에 들고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지에서, 비록 시대는 바뀌었지만 순교자들과 같이 묵주를 손에 들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 깊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 남양의 순교자 네 분 중 두 분은 같은 날, 같은 장소, 즉 남양에서 동시에 순교한 부부 순교자들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 필립보는 아내 박 마리아와 함께 충청도 내포의 사위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기도 중에 붙잡혔는데, 포졸들이 김 필립보만을 붙잡아 오려는 데도 박 마리아가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며 자원하고 나서, 이들 부부는 한 달 정도 남양 옥에 함께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868년 8월 3일, 같은 날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심을 바탕으로 사랑하며 살다가 주님을 증거하며 죽기까지 몸과 마음이 늘 함께하기를 희망했던 남양 부부 순교자들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이혼율이 급증하고 가정 파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가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부부가 나란히 순교한 장소를 무엇보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성모님께 봉헌하고 성모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남양성모성지는 이렇게 평화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가정을 위해 가족들이 함께 순례하며 묵주알 위에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는 가정 기도의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 성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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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성모 성지(화성시 남양동)는 1866년 병인년 대박해때 무명의 교인들이 순교한 거룩한 땅이며, 성모님의 품처럼 아늑한 자연경관을 지닌곳이다.
이곳은 1991년 10월 7일(로사리인 동정 마리아 축일, 수원교구 설정 기념일)에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되었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 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로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품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 넓은 주차장에서 들어서는 입구 소로길로 한적한 숲길이다.
조선 말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할 때 남양 반도 일대는 교인들이 옹기를 구워 연명하면서 숨어 살던 곳이다. 따라서 인근에 백학(白鶴:쌍계리), 활초(活草:싸리뿌리) 등 여러 공소가 형성되었는데, 특히 백학 공소는 갓등이라 불리던 왕림과는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국 초대 교회의 성지인 안양의 수리산, 양지의 골배마실, 안성의 미리내, 진천의 배티, 아산의 걸매리 등과도 가깝기 때문에 복음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남양 성모순례지는 병인년 대박해 때 이름없는 순교자들이 피흘리며 죽어간 순교지이다. 하지만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었다. 지금의 성지가 성역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꾸준히 기도하는 순교지로 가꾸어져 오던 남양은 1991년 10월 7일 마리아 축일에 봉헌되면서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는 사람은 김필립보, 박마리아 부부와 정 필립보, 김홍서 토마 네 사람 뿐이다. 이들 4명이외에도 더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순교했을 것이다.
순교지로서의 남양
조선조 때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 부사가 부임했던 곳이다.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 아래 이반 행정에 관한 권한외에도 민사소송과 형사범을 다루는 사법권까지 갖고 있었다.그래서 남양은 물론 그 인근에서 붙잡은 천주교인들을 도호부사가 있던 남양으로 끌어다가 처형했다.그리고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신앙 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한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당시 이곳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남양과 이웃해서 백학 교우촌이 있던 것도 이곳이 순교지가 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화성군청 참고)
▲ 수목원에 온 느낌을 주는 남양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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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하고 간결한 남양성지內 성당
▲ 주차장에서 숲을 지나서 들어가다보면 넓은 광장이 나온다.'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은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다.
▲ 성모 성지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한 곳을 의미한다. 현재 전 세계에 1천7백29곳이 있는데 그중 성모가 발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인도네시아에 각각 두 곳,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각각 한 곳이 있고, 베트남에는 네 곳, 필리핀과 인도에는 여섯 곳이 각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