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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1988)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78-134. (P. 467) .
박홍규(朴洪奎, 1919-1994), 1988년 12월 11일 강의,
* 플라톤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존재론에서 동일성(불변성, 영원성), 인식론에서 탁월성(시초와 과정의 지식), 실천론에서 자신을 아름답게 타인과 사랑을 그리고 공동체를 조화롭고 완전하게 하는 것이리라. 이 완전성의 추구에는 미래의 과정이라, 그 과정의 욕망을 사랑이라 부르고, 욕망의 실현은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의 영혼, 국가의 체계, 우주의 조화로 나간다. 결국은 우주의 원운동으로 조화라는 것은 지속적인 움직임(운동)에는 영원성과 불멸성을 보았을 것이다. 이 불멸의 운동이 천체에서 태양과 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덩어리의 내부에 있다고 하는 생각이 헤라클레이토스 였을 것 같다. - 이런 추론이 외부를 내부로 옮겨 놓는 것이라고들 한다. 태양이 주체(지구) 속에, 지구 속이 자아(주체) 속에, 주체 속에 온자연의 운동이 있다. 기나긴 주기와 같이 보이지만 생명체인 한에서 어제(과거)의 긴 시간이후에 이제 그 현상의 고리들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아직도 아제(미래)는 과거를 아는 것보다 더 모른다. 벩송이 미래는 과거의 회로의 일부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과거 회로는 또는 현재에 알고 있는 것도 무한히 더 많다는 것이다. 즉 어제>이제>아제이다. 21세기는 어제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영혼은 어제에서 이제로 그리고 아제를 잘 몰라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영혼은 만드는 동안 잔존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을 자연 위에 두고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동일성은 영원성 또는 불멸성 추구로서 인간의 삶에서 보면 아제(미래)의 일이다. 미래에 있을 수 있거나 또는 미래에 있을 지도 모를 사건(일)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정신(오성)의 오류 추리이다. 벩송 표현으로 미리 추론한 그 결과를 앞당겨서 현재에 심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착각이다.
정신(오성, 속좁은 이성)이 시초(또는 원질)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고 싶은 것도 추론이다. 이런 추론(칸트의 4가지 이율배반)은 모든 일에 인관관계(인연연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상에서 또는 현존의 단면들의 관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무한히 확장시켜보고자 하는 오성이 있다. 이 오성의 한계는 개인의 신체가 불연속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단면의 무한한 연속 연결은 거짓이다. 그럼에도 과정의 연속을 연관 속에서 파악하면 인간종의 연속성, 나아가 생명종의 연속성, 또 물체(소립자)의 연속성, 나아가 운동성의 연속성으로 연관지어 인과응보는 기원에서부터 이라고 할 것이다. 시초를 아는 것과 과정을 아는 것이 한정된 부분이 아니라면, 그 135억년을 알아야 하는데, 100년을 겨우 사는 인간이 135억년의 과정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135억년을 기록하여 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고들 한다. 그 기록은 추론으로서 시간을 당기고 늘이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두뇌)가 아는 시초와 과정은, 한마디로 시초와 종말은 오성은 모른다가 정답이다. 과정의 일부를 논할 뿐이다. 즉 현실에서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갈래의 서로 마주치며 서로돕기도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또 달리 이질적이지만 함께 진행하려고 한다. 개미들이 먹을 것을 옮기는 작업이 자석의 쇠줄밥의 연결선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52TLG)
참조: 박홍규 묘소의 추모비(追慕碑)에 <χρή και φάναι τουμον σώμα θάπτειν “내 몸을 묻는다고 말해야 한다”(파이돈, 115e). 나 자신이나 내 영혼이 아닌 몸만이 묻힌다는 뜻>
# 일별하여 보면
소크라테스의 ‘이뭣꼬’에서 ‘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동하는 영혼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이다. 이 둘째가 학문의 영역이다. 학문이 되려면 즉 서로 소통하는 담론이 되려면 동일성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 꼬레는 동일성이 확보되지 못하여 학문이 될 수 없다. 8천만의 동일성에 대한 논의 없이 남측 과 북측이라고 하는 것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지칭하며 이런 논의는 학문이 아니라 상상보다 공상에 속한다. 결국 남측과 북측에서 각각의 절편들의 이야기가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삶에서도 담론이 되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삶에서는 다양한(여러갈래)의 선들이 있고, 이 선들의 각각에는 제각각에 맞는 인식론이 성립할 수 있다. 마치 수학들이 산술학, 기하학, 미적분, 지수학, 행렬, 조합(확률론), 무한론이 성립하듯이, 각각에 맞는 인식론은 대상을 각기의 틀에 맞게 정의한다. 삶에서 각각의 차원들이 다양한 것은 각자의 삶의 양식과 그에 따른 각자의 삶의 표현이다.
‘이뭣꼬’고 ‘뭣’(무엇)은 대상화이며 정의(définition)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실재 살았던 소크라테스와 담론의 대상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다르다. 담론으로 대상화에서 고유명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담론의 대상으로서 소크라테스와 다르다. 삶의 과정과 그가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와 사람들이 말하는 소크라테스는 차히이다. 전자의 소씨는 잘 알 수 없는 대상(내용)이다. 그 실재적 대상이 사라졌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를 대상으로 잘 이해한 자는 자신이외 드물다. 안티스테네스가 잘 이해했을까? 이 후자의 소크라테스는 그를 대상화하여, 그에 대해(‘뭣’) 말하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류종렬이 말하는 ‘빨강이 소크라테스’는 차이들이 있다. - 언어학적으로 실재의 측면의 소크라테스는 이미 다른 차원이고, 그 다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내용(signe 기호)도 있고 또 다른 기표(상징)도 있다. 일반적으로 내용과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은 “이뭣꼬”에서, 문장(명제)는 표현과 상징에 대한 해석(interpré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속으로 또는 내용의 범위와 과정(뒤나미스)을 따라가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것을 철학으로 삼은 철학자는, 박홍규에 따르면, 아페이론을 긍정적으로 보는 플라톤[플로티노스]과 베르그송이라 한다. 그런데 내용과 표현에서 내용은 다 따를 수 없어서 비결정적이고, 표현은 무엇인가를 잘라서 공간화하여 대상화하였다. 어째거나 전자의 비결정성이 존재이며 실재이다. 그런데 후자의 공간화도 실재라고 하지만 그 자르는 측면의 관점은 그 분석(analysis)의 것이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씨쪽, 종족)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일반화 속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화가 일반 공동체에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그 발언자는 다시 해석하고, 다시 설명하며 설득하려 하는데, 그런 정신(사고)가 파라노이아이며 사기이거나 허위이다. 물론 이들은 그자신들이 맞다고 하는 것을 타인과 더불어 맞추어보거나 교정하려는 생각없다. 자기를 교정하고 수정하기보다 상대의 사유를 바꾸어서 자기에 맞게 하려고 애쓴다(꼴꽁이 된다). 자기 견해가 맞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지만, 자기 맞다는 것이 먼저 이고 나아가 영원까지는 아니라도 보편적이고 하는데서, 그 환자의 광기가 파라노이아의 전형(type)이며, 유형학(typologie) 유형은 사고의 한 패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2TLG)
벩송은 DI 제2장에서 구술에 대한 설명을 한다. 구슬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한 곳에 모으고, 그리고 모은 것은 배열하고 그 배열을 추상한다. 그 추상화가 수학의 숫자의 배열이다. 이 네 단계를 플라톤 식으로 잘 들여다보면, 흩어져 있는 구슬들과 모인 것은 어떤 기준으로 정의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고 한다. 구술을 꿰어서 나열하는 것, 즉 물리적으로 배치가 되었을 때 학문의 시작이다. 이 배치의 방식이 크기로 배열인지, 색깔로 배열인지, 재료의 배열인지, 갈아서 만들어진 순서의 배열인지에 따라 달리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크기, 색깔, 재료, 제작 등과 연관없이 배열의 숫자를 헤아려서 추상화하여 다룰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학문이 아니라는 것, 흩어져 있거나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것이 학문이 아니라는 것, 들판에 양들을 풀어놓아 이리저리 다니는 양들의 수를 셀 수 없는 자들이 사고 하는 방식이다. 양치기는 양들과 풀밭, 양들의 수의 늘어남과 즐어듬 그리고 다음 이동하는 양들의 흩어져 있는 단위들로서도 안다.
일반적으로 단어들의 나열이 있으며, 그리고 문장들을 읽는다. 좀 더 내용에 관심이 있을 경우에 사람들은 문장(명제)과 문장 사이에서 연결 관계로서 추리(추론)을 파악한다. 이 쯤에서 사태나 사건들에 대해 외관을 파악한다. 그런데 명제와 명제 사이에 빈칸(entrligne)에도 내용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사물들 사이의 연관과 중간점도 고려한다. 그러다가 사물과 사건의 종합적 또는 총체적 파악에 들어가는 경우에 관계(인과, 추론)이든 연관(공감, 공명)이 이우어지는 결(파동) 즉 지속하는 아페이론(흐름)을 만나게 된다. 이 마지막 단계가 학문의 깊이와 내용에 대해 진솔하게 이해하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단어란 것이 파문(波紋) 또는 파동(波動)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동의 가장자리의 한 점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단어는 그 파동의 중심과 과정과 연결되어 있으며, 실재적으로 단어가 개념으로서 성립은 공상이나 관념으로서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겨들이 퍼져 나가는 가운데 잘려진 단면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따로 떨어져 그 있으면 무의미(non sens)한 것이지만, 생겨날 때 그 단어와 연결 또는 연관을 잊어버리면 무-의미(non-sens)인 것으로 여겨 이를 해석(interpretation)하거나 해명(hermeneutique)하려는 데서 점장이 같은 수법이 등장한다. 학문은 해석이나 해명이 아니라, 개념이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분석, 추론, 종합에 이르는 길을 되찾거나 사물들의 다양한 조합과 종합으로 개념생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어들이 고유하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들은 추상명사이다. 추상명사는 대부분 사고에서 톨로써 파장의 거의 경계에 위치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전설상의 역사상 등장인물로써 고유명사도 추상명사처럼 경계선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지만(단군, 황제, 여와, 아담, 이브), 시기적으로 한 번의 중요성으로써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인물들, 사키야무니, 공자, 소크라테스,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등도 있다. 고유명사 톨로써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쓰여질 때, 또는 보편화하여 이름으로써 작용을 할 때 마치 신화처럼 쓰인다. 환이나 제우스, 야회, 황제 등은, 말하는 사람이 뜻하는 바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서 표현이 될 것이다. 이를 개념 생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52TLH)
표면에서 관계들을 추론에 의해 전개하는 것에는 항상 연결고리가 빠져있는 부분이 있다. 이번 조국 법무부 장관의 청문회 과정에서 추론이 넘쳐났다. 나로서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표면은 안과 밖이 있다. 안은 자연의 연관이며, 밖은 관념의 관계이다. 법은 밖이고 인민의 심성은 안이다. 기득권의 저항은 거세다. 돌이켜 보면 김영삼 대통령시절 하나회 해체든,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보부 제자리 찾기든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검사들과의 갈등이든 현 문재인 대통령의 기무사 해체든, 이 나라의 권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권력의 카르텔과 같은 것이 있기는 있다. 현재로서는 검사동일체와 언론과 유착이 권력으로 보이고 촛불로 생겨난 정부가 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권력체들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잔재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군부의 권력과 정보부(안기부든 국정원이든)의 권력은 그래도 정화되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일제 잔재로서 검사체의 권력은 언론과 유착으로 유지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다른 점이 있다. 다른 권력들은 국가시험이라는 것을 통과하지 않는데 비해 검사체는 국가고시를 통과한 우월한 자들이라는 양식(양심이 아니다)을 지니고 있다. 인민의 저항은 정부, 군부, 정보부, 언론의 저항에 대해 저항하는 힘(puissance)과 노력(conatus)을 실행해왔다. 그럼에도 검사체는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다. ‘저항에 대해 저항’에 대해 벩송이 말하는 것은 기존의 인식 틀에서 벗어나 인간이 개방적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보면 검사체는 열린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한 자기 이익을 유지하는 정태적 사회에 안존하려는 것이다. 이 검사체 권력뿐만 아니라 정부와 정보계에 기생하여 권력을 누린 언론계는, 벩송 표현으로 뻣뻣함을 유지하는, 우스꽝스런 웃음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인민이 보기에 이 두 집단의 구성원들은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거짓을 퍼뜨리고 그 이름을 날릴 경우에 점점 상위로 진급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거짓 뉴스를 생산하거나, 과거에 간첩조작을 했듯이 밝혀지니 않은 피의 사실을 먼저 흘리고 기정사실화 하는 방식으로 언론에 흘리면서 이익을 챙기는 방식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모욕을 주듯이 또는 사건 당사자가 아닌 그 주변 인물들을 괴롭히면서 집단체는 자기 이익을 고수하려고 경직되고 뻣뻣함으로 웃음거리를 만든다. 벩송이 웃음거리를 만드는 것은 사회를 유연하게 하거나 그리고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견고하게 뻣뻣함을 유지하는 것은 조직이 상위자들, 잘난자들, 우월한자들 이라는 자기방어에 있는데, 니체가 그러한 자들을 얼마나 비꼬았던가? 니체가 비꼰 이유는 독일의 전래적인 기독교 유일신앙, 국가주의, 위계적 명령체계에 대한 것이며, 그가 독일을 떠나 스위스 시민권을 가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바라본 것이다. 그 단일의 통일성이 얼마나 야만적 국가이고, 얼마나 참담한 사회이며,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에 대해 경구(잠언)형식으로 여러 책에서 써 놓았다. 그런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습을 본딴 일본제국주의가 지금의 아베정권을 만들어 놓았고, 그리고 일본제국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몇몇 체들(군부, 정보부, 언론체)이 있어왔고, 아직도 그 독일 및 일본 제국주의적 행태를 못 잊어 하는 체들이 인민의 저항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일본 반대(Boycott Japan)는 잠재적으로 인민들이 뻣뻣한 자들의 저항에 대한 저항이다. 이런 저항의 저항은 동학농민 항쟁에서 있었다가 125년이지나 심층(깊이)에서 표면의 균열을 내고 솟아나고 있다. 심층의 저항은 자연과의 연속적인 연관들이 있는 저항인데 비해, 상위 체들의 저항은 관념 또는 권력을 차지하려는 위계의 마름의 짓이라 보인다. 상층의 지배와 명령의 폴리스 체제 옹호자들에 대한 인민의 노마드 분배의 작동은, 야만의 체제와 평등의 체제의 대비와 같다. 설탕물이 녹기까지 가다려야 한다는 벩송에 따라, 들뢰즈의 노마드의 확장이란 새로운 사회의 생성에 있다. 다시, 야만과 참담을 넘어서, 팔천만이 새로운 체계를 생성하는 환경과 생태를 이루어 가기 위하여, 사유의 폭과 결을 넓혀가기 바란다.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52T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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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 박홍규전집 3, 민음사, 2004, pp. 78-134. (P. 467)
- 박홍규(朴洪奎, 1919-1994), 1988년 12월 11일 강의,
[철학(지식)의 두 입장: 동기 대 형태]
박홍규: 여러 철학이 있거든. .. 그런데 철학을 두 가지 입장에서 볼 수 있어 하나는 사람이 아는 거니까 동기(motivation) 입장에서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철학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형태만을 가지고 얘기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실존적(existential)인 입장에서, 본질적(essential)인 입장에서 볼 수 있어. (78) [기원 또는 근원에 대한 입장도 있을 것이다. 이는 아르케(arche)와 아이티아(aitia) 입장일 것이고, 동기와 형태는 아레테(arete)와 이데아(idea) 입장일 것이다.]
[입장이] 왜 달라지느냐? 그것은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의 소산이기 때문이야. 지적능력이란 무엇인가? .. 능력은 희랍어로 뒤나미스(dynamis)야. 뒤나미스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가능성에는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고, 두 가지가 있어. 가능성은 항상 존재에 대한 가능성이야. 그것은 동시에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 그게 항상 따라다니는데, 그러한 부정의 가능성을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연성이라고 해. (79)
희랍어로 뒤나미스(dynamis)라는 것은 능동적(active)이라는 의미도 있고, 능력(potentia)라는 의미도 있어. .. 결정론과 대립돼. (80)
또 그 다음에 가능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렇게 어떤 정도차를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탁월하게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게 나타날 수도 있어. 그러나 전지전능(omnipotence)은 없어. (81) [자연은 전지전능을 이야기 하지 않고, 가끔은 새로운 생성을 기적이라고 사람들이 말할 뿐이다.]
박홍규: ... 희랍의 신은 어떤 재료나 질료(matter)가 있어야 가공한다는 점에서 제약이 있는데, 기독교에서의 신은 허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지 않느냐는 거야. .. 그러니까 무에서 존재를 만들 때에는 지적인 능력이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 강상진: 지적인 능력이 필요 없겠죠. (81)
박홍규: .. 연속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계를 지어 놓으면 그 바깥으로 자꾸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 연속성에서는 전체가 주어지나 안주어지나? / 강상진: 안 주어지죠. / 박홍규: 응. 안 주어져.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을 논할 때 늘 이야기 했어. 연속성은 과정(process)로서만 주어지더라. (82) [스피노자: 연속성은 즐거움인데 반해, 단절 및 절단은 슬픔이다. 벩송에서 생명과 영혼은 지속하는 연속성이다. 죽음이후는 알 수 없다는 측면서 살아가는 것은 연속성이다. ]
그런데 우리 인식 주관, 영혼에는 기본적이고 선험적(a priori, 선천적)인 성격으로서 능력[가능성]이 들어 있어. 능력이 들어 있으니까 영혼은 항상 선험적으로 과오에 빠질 수 있어. (82) [로크의 인식에서 백지(Tabula rasa)는 거짓이다. 아니면 기독교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염두에 둔 유일신앙자의 결과론적 추론으로 우화적(fabulatrice)이며, 이는 여섯 살 애들에게 가르치는 놀이일 뿐이다.]
지적 능력은 ... 기계하고 다르다. 기계는 인과법칙을 가지지만, 능력은 자기운동(autokinêsis)의 그 자기(auto)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계가 될 수 없어. 타고난 본성[la nature]에서 온 거야. 기계는 외부에서 힘이 주어진 것이다.(83)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보다 플로티누스에서 자기운동의 주체는 영혼이다.]
그러면 말이야, ... 모든 철학은 인간이 능력을 발휘한 하나의 결과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어. ... 능력이 발휘되어 나가는 과정을 시간적으로 보면 역사가 된단 말이야. .. 그리고 능력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식(epistêmê)에서의 산파술도 이해할 수 없어. 외부에서 준 것이 아니라는 거야. .. 도와준다는 것은 능력이 항상 옆에서 어떤 조건이 주어져야만 발휘되는 것이지. (83) [소크라테스와 루소의 접점, 교육은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시기와 자연에 맞게. ]
그런데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요전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사물을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취급할 수 있는 능력이다. (84)
[탁월함(arêtê, vertu) 추구:
[지적 기능(지성)의 발달: 탁월함. -대- 영혼의 추구 아르케(원인)에서 아레테(탁월함)으로 ]
그러면 이제 지능이 가장 탁월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경지가 어디냐는 문제가 생겨. .. 그러면 지능의 주제자는 영혼(psychê)의 자기 운동(autokinêsis)의 자기(auto)야. .. 플라톤에서 영혼의 두 가지 기능이 있어. 하나는 운동 그 자체를 유지하려고 하는 능력으로서 지적 능력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 파이돈(Phédon, Φαίδων)에서 83a-b를 봐. (84-85)
파이돈편에서는 신체적인 것과 신체를 벗어나는 것[영혼]으로 나오고, 국가편에 가도 나와, 또 소피스트편에 가면 감각(aisthêsis), 상상(phantasia), 추리(dianoia) 등으로 나와, 상상은 중간의 것이지? 또 필레보스편에 가면 쾌락(hêdonê), 사려(phronêsis), 혼합된 것 등이 나오지. (85) 신체의 방해에서 테아이테토스편을 읽으면, 우리가 잘못 듣고(parakouesthai),잘못 보게 하더라는 거야.(86)
그런데 우리가 행동할 때는 관심(interest)이 들어가지? 그런 것에 떠나라고 했어. 테아이테토스편에서 .. 발밑에 있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무관심(amelês), 즉 관심을 두지 않고 전체를 보거나 자체적인 것을 보는 것을 철학가라 했지. .. 테아이테토스편에 또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설이 나오지? 사회라는 것은 두 사람이 있어야 사회가 되지. ..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딱 구별되어야 돼. (86)
관습이 성립하는 것, .. 상대적 가치가 성립하는 것, ... 그런 것이 성립하는 이유는 요컨대 신체 때문이야. 신체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를 대변하고 있어. 물리적 운동(physical movement)이 있어 그것이 특징이야.(87)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추상 학문 ... 물리적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사유 질료(hylê noêtê)라 그러지. 물리적 공간(physical space)이 아니라 사유적(noetical)인, 즉 이론적 공간이야. (87)
희랍에서 안다는 말은 전부 구체적인 것, 경험적인 것에서 추상적으로 올라가. .. <eidenai(보다, 알다)>라는 말은 첫째 눈으로 본다는 얘기지? .. 안다는 것 일반으로 가. <philosophia> 라는 말도 구체적인 행동을 해서 사물을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나중에는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뜻하게 돼. <Theoria(관조)>는 눈으로 실제로 보는 것인데 나중에 추상적인 것이 돼. (88)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추상으로 경험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결과를 원인(시초)에 부여하는 것은 지성의 편의(안락추구)이다.]
후기 자연철학에 가면 정적인 공간이 나와. 정적인 공간이 나와서 운동자와 운동이 딱 구별돼. .. 초기 자연철학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활론이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Ἠράκλειτος, 전544-480)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만물은 흐른다는 것야. 끊어져 있지 않아. 지능의 발달은 처음에는 정적인 공간이 나오지 않는 동적인 우주에서 정적인 우주로 간다는 거야. (89) .
그러면 그 이전 상태, 즉 신화에서는 어떠냐? ... 최초의 사회는 뭐냐? 아버지, 어머니, 아들 사이의 가족이야. .. 사회 속에 인간이 묻혀 있을 때는 항상 사호가 먼저 세계를 해석, 설명하는 기준이 돼 그래서 의인적(anthrophomorphisch)인 사고가 나와. (89-90)
원시 사회에는 나, 자아가 없어. 그러니까 거기에는 사유재산도 있을 수 없고, 공동체일 것 아냐? .. 지금 우리들이 보면 그건 허구적(fictive)인 거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실재적이야. (90)
자연이나 외부 세계를 인간 세계를 통해서 봐. 바로 거기에 신화가 성립해. 그런데 그것이 허구적임을 자각할 때 철학은 나와. 탈레스가 나와. (91)
혀가 있고 입이 있어야 말이 있지? 기호도 문자 도형이거든? 요컨대 물리적 세계에다 내놔야 기호[un signe]가 돼. 기호와 기호 사이의 관계에 붙잡혀 있는 한 물리적 세계를 못 벗어나. 우연적인 것이야. .. 그러니까 논리학을 아무리해도 철학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둬야 해. .. 논리 구조란 문장구조 아냐? 저 외부세계에는 문장이 없잖아?(91) [태초에 로고스가 있다는 것은 외부세계를 논리세계로 바라보겠다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무에다가 유를 창조하겠다는 것. ]
하여간 자아가 독립한다는 것은 어머니나 가정에서 벗어나서 성인이 된다는 얘긴데, .. 그 말은 어느 사물에 파묻히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야. 그 극한치가 영혼의 자기 자신(kath’hautên)이야. 영혼이 그 자체가 된다는 얘기는 그 얘기야. 내가 독립했다. (91) [사실상 소크라테스에 와서 자아의 성립인데, 크리스트교 1600년이 지나 데카르트가 다시 자아의 성립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을 지성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한 때문이다. 상층에서 표면으로 내려온 것이고,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성립시킨 것이지.]
감정(pathos)이란 무슨 얘기냐? 어떤 규정이 미리 들어 있다는 얘기야. .. 자기 자신(kath’hautên)이란 것은 ..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야 완전히 독립했다. 그래야 그것이 자기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 플라톤에서는 인식[영혼]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데까지 가 최고야. (92) [소크라테스로부터 데카르트까지 근 2500년이나 걸렸지만 새로운 반복이지, 벩송은 다시 새로운 반복으로 주체가 영혼이라고 할 것이고..]
그런데 이런 걸 순수사고라 하면서 자꾸 부정하는 사람이 있어. 그러나 <somatoeidês(신체적인, 신체모습의)>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신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에서 인식 기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국한되면 안 된다는 얘기야. (92)
요컨대 운동에서 벗어나면 자기 동일성이 부여돼. 제일 첫 단계로 자체적인 것(kath’hauto)에서 자기 동일성이 부여돼. 그러니까 사물의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보는 것은 신체적인 것(somatoeidês)에서 벗어나, 물리적 세계에서 벗어나야 돼. (93)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은 자기 말로는 플라톤주의자라 하는데, 그의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것은 플라톤에 따르면 <physei(자연에)>, 즉 자연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라는 말 자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져. 플라톤에서는 형상(Idée)을 의미하는 것 같아. (94)
사상[doxa]하고 학문은 달라. 학[에피스테메]은 검증되어야 되는 것이고, 사회에 대한 사상은 검증할 필요가 없어. (95)
박홍규: 실증과학보다 더 추상적인 것이 철학이지. (98)
[학문: 반성(reflexion) - 철학은 자연에서부터 퍼져나가는 과정에 대한 성찰?]
그러면 말이야. 파이돈편에서 ... 경험적인 오관에서 떨어진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 다시 말하면 신체에서 벗어난 내면적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대상화될 때 우리가 반성이라고 해. (99)
주관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대상이야. 대상을 <object>, <Gegenstand>라고 하지? <Gegenstand>는 저항한다는 얘기야. ..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저항할 필요가 없는 것 아냐. .. 그러니까 자기 동일성이 주어지면 그것이 인식이 돼. 대단히 중요해.... 자체적인 것(kath’hauto)으로서 자기 동일성이 주어지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야. (101-102)
강상진: .. 그럼 공간도 우리가 일정하게 해석을 해서 동일성을 준 겁니까? 박홍규: 아냐 그런 것은 해석이라고 하지 않아. 공간은 물질과 더불어서 주어지지. 해석이란 가령 문자 같은 걸 해석이라 그래. 왜냐? 문자는 도형이거든? 도형인데 .. 정신에 갖다가 그 속에다 집어넣어 놓았거든. 그런데, 그건 우리 눈에 안 보여. 아무리 봐도 문자뿐이지 인식되는 것은 도형이야. 그래서 그때 문잘 해석한다고 그래. 공간은 달라. 공간은 사물과 더불어서 주어져. (103-104)
[이뭣꼬의 물음: 지성(지적 기능)의 발달, 지적 탁월성 추구. ]
그 다음에, 탈레스부터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지적 기능이 죽 발달되었다고 했지? 그래서 플라톤이 <이것이 무엇이냐(ti esti)>[이뭣꼬]를 물은 것, 이것이 대단히 중요해. 지난번 강의는 그 동기적인 입장에서 설명했지. 이번에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인식능력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무엇이냐?>가 문제야. (108)
플라톤에서는 .. <무엇이냐?>의 대답은 뭐야? 정의(definition)야. 정의 그러니까 대상의 세계에서 정의를 넘는 학문 체계는 없어. .. 그러나 가령 베르그송은 정의하는 지성(intelligence)이 자기 자신의 생명 그자체로 돌아와서 하나가 될 때, 전인적으로 움직일 때에는 생명적 기능으로서 넘어선다고 해. 또 이런 감각 기능 밑에 무의식적인 것, 진정한 자유 같은 것이 나와. 직관으로 나갔다가 신비주의(le mysticisme)로 나갔다가 해. ... [플라톤에서] 항상 대상화 시켜서 규정하면 정의가 나와. [이에 비해] 베르그송은 생명현상은 정의의 대상이 아니라 경향(la tendance)만 있다고 해. (108-109) [정의는 고착된 대상에 대한 표현이고 생명 현상은 운동하는 실재성의 과정이니깐 경향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철학은 대상화해서 보는 철학이야[인식론 측면에서]. / 그럼 그 다음에 정의 대상이 되면 있는 수 있는 모든 것이 서로 동시에 주어질 수 있어. 이게 대단히 중요해. .. 그러면서 그 하나하나가 딱딱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어야 명확한 기술이 성립해. (109) [대상화에서 다자의 성립이 있고, 이 성립을 정립하여 체계화하자니 정의가 필요하다. 줄세우기가 불편하니 원주 위에다 하나하나 배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줄세우려면 공통분모가 있어야 하는데, 각 각의 고유성은 직선(공통분모) 위에 줄세우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나아가 공통점으로 존재를 하나의 초점에 두면 초점에서 퍼져나가 각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플라톤이 원주 위의 점을 정의하는데 시간을 보냈다면, 플로티노스는 초점에서 원주로 퍼지는 빛살의 파장(결)과 그 퍼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빛의 경계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빛살의 마지막 경계가 어둠이고, 물체이고 죽음이다. 빛살의 끝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빛살의 투사하는 방식에서 자기만 있는가, 타인과 더불어 공감한 것인가, 타자와 떨어져 있어도 울림으로 공명인가는 투사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투사의 방식의 설명도 기하학적이다. 산수리아니라는 것은 플라톤의 특징일 것이다. 그런 개념의 성립이 산술적으로 내포와 외연처럼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이다. ]
그런데 플라톤은 소피스트편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없는 것은 대상화되지 않는대. 다라서 대상화된 것의 기본적인 특징은 무(無)가 아니라는 것이야. 또 존재(ousia)라고 도 해. .. 소피스트가 허위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자라 정의하려고 하기 때문이야. 허위 명제는 무엇이냐, 허위는 무엇이냐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야. (110-111)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닌기라(이제). 있을 것(아제)이 있는 것은 좋고 없을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아. (어제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과 없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 마땅하다.]
필레보스편에서는 모든 존재자는 무한정자(apeiron), 한정자(peras), 이성(nous), 혼합된 것(mixed)으로 나눠진다고 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티마이오스편이야. 왜냐하면 물리적 세계 전체를 취급하니까.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에 대해 전에 얘기 했었지. 티마이오스편에서 그 원인(aitia)이란 것은 우주가 성립하는 이유나 원인이지. .. 우주가 어떻게 해서 존재(ousia)가 될 수 있느냐 ... 거기에는 방황하는 원인 하고 형상(idea)하고, 제작자(dêmiourgos)rk 나오더라는 얘기야. (111)
운동하는 한에서 보면 우주가 없어져야 되고, 실지로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는데, 없다는 것은 동적(dynamic)으로 보면 모순이 돼.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제논인데, 그 제논의 반론부터 읽어야 해. (111) [제논의 반론을 운동에서 읽은 사람이 DI 제2장에서 벩송(베르그송)이다. 정지의 모순으로 운동이 아니라, 운동의 한 잘려진 측면으로 보는 벩송은 모순개념없이 철학 체계를 세우면서 자르다와 지속하다로 대비시켰다. 기억, 생명, 자연은 지속하며, 지성의 인식의 대상은 자름에서 성립하며 자르는 측면에 따라 다양한 학문들(수학, 물리학, 사회학, 심리학)이 등장한다. 벩송이 스피노자 학문을 평하면서 “스피노자 철학과 철학자들 각각의 철학이 있다”고 하는 것은 벩송 자신의 학문관이라고 보아도 된다. (52TLI)]
그러나 철학 그 자체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 형상이 아니라 방황하는 원인 중심이야. 그런데 방황하는 원인은 그 자체가 원인으로서 불완전하고 방황하기(errant) 때문에 그것만 갖고는 존재[존재자, 현존자]가 나오지 않아. 그래서 보충하는 원인(aitia)이 있어야 되겠는데 그 하나가 형상[이데아]익고 하나는 제작자라는 얘기야. (112)
[연속] 되는 측면은 시간이고, 안 되는 측면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하더라. (112) [지속 대 동시성, 운동 대 이데아, 가능성 대 정태성, 사유 대 사고.]
모든 사물을 성립시키고 있는 원인에 그것을 환원시켜야만 그것이 다른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게 돼. 알아들었지? 이게 대단히 중요하대. 전체를 이루고 있는 그 사물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원인에다가 환원시켜야만 전체와의 연관성이 주어지더라. (112)
그러면 이제 그 전체가 어디서 성립하느냐가 문제야. .. 철학하는 사람은 꼭 읽어둬야 돼. 전체라는 것은 다(多)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로 통일될 때를 말해. 그렇지? 하나가 나와야 돼. 요컨대 하나[l’unité]의 통일자가 나오지 않으면 전체가 나오지 않아. 그러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세 개이고[방황원인, 형상, 제작자], 셋이 합쳐서 동일성(l’identité)이 나오는 데 어떻게 해서 셋이 합쳐서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나와. .. 티마이오스편 해석이 둘 있어. 하나는 원인이 결과 밖에 있다는 거야. 형상이나 제작자는 우주 밖에 있어. [다른 하나는 원인이 내부에 있어야..] 원인은, 그런데 원인은 그것이 합쳐서 결과를 이뤄야 원인이지. 따로 따로 떨어져 있으면 원인 될 수 없어. 그런 어려운 문제가 생겨. (113)
그러니까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지적 능력은, 능력이기 때문에, 전지전능은 없어. 항상 난문(aporia)이 따르기 마련이야. (113)
아까 사회철학하고 사회사상은 다르다고 했어. 사회철학이나 사회학은 객관적으로 연속되어야 돼. 검증되어야 돼. 사회사상은 연속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 (113)
또 공간적으로는, 전체[완전한 우주]가 나오려면 닫힌 체계(closed system)[정태적 우주]가 나와야 돼. .. 시간적으로 처음과 끝이 있어야 돼. .. 방황하는 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체[닫힌 체계]란 없어. (114)
형상[구조] 갖고는 이 우주의 근본적인 분류가 안 돼. 운동이론을 갖고 하면 생물과 무생물이 나와. 그게 베르그송 이론이야. 그건 파이드로스편에 나오는 불명성(athantos)의 범주야. (115) [파이드로스편에서 불명성의 추론은 기원에서 운동, 즉 천체의 원운동이며, 이 원운동의 항상성과 불변성이며, 미학적으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의 추구가 또한 탁월성의 추구와 결합하여 탁월한자 아름다움(영혼)을 완성한자가 불명성을 얻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결합보다도 과정을 무소의 뿔처럼 바람에 걸리지도 않고 나가는 자가 부타이다. ]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 데이터의 일반적인 성격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야. [없지는 않지만 잘려진 양태에 따라 다르다.] ... 기본적으로 분류(classify) .. (115)(116) [분류에 관한 한 소피스트편 참조, 털없는 두발달린 동물도 있고, 그 외에도 시뮬라크르의 두 종류를 주목하자.]
이건 광주강연에서 하지 않은 얘기야. 질은 전부 우연적이야. .. 내가 사람이면 내가 왜 이런 사람이냐, 저 사람은 왜 다르냐 하는 것은 근본에 가면 설명이 안돼. (116) [동물과 사람은 차이로서 설명하는데 비해, 인격 대 인격의 다름은 차히에 있다. 다른 반복을 하는 삶을 산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이 왜 망했냐? ...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개체가 중심인데 그 개체가 성립하느냐?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더라는 이야기야. 사실 내가 거기다 역점을 뒀던 거야. 형상 가지고는 이 우주의 기본적인 질서가 분류되지 않아. (117) [형상 또는 구조를 먼저두고 설명하는 구조주의가 아니라, 생성하는 이질적 반복이 맞다고 하는 것은 벩송(베르그송)을 따르는 들뢰즈이다. / 박선생님도 플라톤주의보다 플로티노스에 가깝다.]
과거에 플라톤을 공부하던 사람은 맨날 형상(idea)만 논의해. .. 플라톤[소크라테스]dl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를 물은 데에서부터 학문의 길이 어떻게 해서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길을 모색하는데 있어. 이 세상에 완전한 철학은 없고, 어느 철학이든 간에 문제가 있어. 베르그송 같은 철학은 생물과 무생물을 설명하는데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 공간의 자립성이 없어져. .. 무생물만이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베르그송이 옳아. (117) [공간의 자립성이라는 개념은 모호하다. 공간은 영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오성)이 범위를 정하는 방식, 즉 절단하는 방식에 따라 구조(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비유클리트 이래로 공간과 무한은 두라 숫적으로(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위상적으로 무한정하게 많다. 그 무한정이 아페이론이라는 용어이다. (52TLI)]
그리고 전체가 주어지면 무엇이 주어지느냐 하면, 고유명사가 주어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내가 얘기 했었지. 닫힌 세계가 나오면 고유명사가 나와. 고유명사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회적인 것인데, 모든 의미에서 일회적인 것은 되풀이 되지 않으니까 학문의 대상이 되지 않아. 알아들었지? .. 소크라테스라 해도 몇 십년을 살았는데? 소크라테스가 해마다 되풀이 되었잖아? (117) [고유명사의 일회성에 대한 견해는 들뢰즈와 같다.]
그리고 또 하나 광주에서 강의할 적에 사람들이 의아해 한 게 이거야. 허구적(fictive)인 것 뒤에 실재적(real)인 것(le réel), 사상(事象, pragma)[les faits]이 있다라는 얘기를 했었지. 우리가 문으로 볼 때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 또 행동, 기술도 항상 대상이 있어야 돼. 그걸 희랍어로 <pragma>라고 해. 그런 <pragma>는 <res(사물)>라고 번역하는데, <onoma(이름)>하고 대립되고, 또 <praxis(행동, 실천)>라는 의미도 있어. <praxis>는 <logos(말)>와 대립되는데, 또 이 <말>에 대립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ergon(일, 행위)>이야. .<ergon(일, 행위)>도 <pragma>, <praxis(행동, 실천)>와 같아. .. 요컨대 말과 대립돼. 내가 누누이 얘기 하지만 신앙은 허구적인 것이어서 말 뿐이야. 그래서 <logos>와 <ergon>의 대립이 철학의 출발점이야.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논리학은 학문에 들어가지 않아. (118)
그런데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ergeia(현실성)>란 말이 나와. 동사 <ergo(하다)>가 있고 명사 <ergon>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ergeia>가 나오는데 <actuality(현실성)>로 번역해. 그런데 그때에는 <potentiality(가능성)>하고 대립돼. (119)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것이 분화된 이유는 다(多)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그것 혼자 성립하지 않고 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다(多)가 구성될 때에는 상호보완되는 다른 타자가 있어야만 성립되지. (119)
중세 보편 논쟁에서... 실재론은 개념(concept) 밖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유명론과 개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재론은 허구적인 것이라는 뜻이야. 개념을 스콜라 철학에서는 <intentio(지향)>라고 해. 지향적 존재(intentional being)하고 실재적 존재(real being)는 구별돼. .. 실증주의자와 경험론자는 그 반대지. 그건 형상이 허구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이 실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120) [벩송과 들뢰즈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는 이런 사유가 근세에서는 흄에서 왔다고 본다.]
[무엇이냐? - 데이터 전체 – 원인 - 분류 – 인식(안다)이 성립한다.]
요는 이렇게만 외어둬. 데이터 전체를 성격지우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찾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원인은 무엇이냐를 찾아서 그 원인에 의해 데이터가 전체적, 일반적, 근본적으로 어떻게 분류(classify)되느냐를 탐구해야 돼 되. 이것이 존재론이야. (120-121) [존재자들을 분류하는 것은 존재론이라기보다 인식론이다.]
심철호: 에피스테메(epistêmê) .. 어원 적으로 분석하면 <epi(위)>하고 <histêmi(서 있다)>로 분석됩니까? / 박홍규: 응 그런데 그건 별 의미가 없어. 호메로스의 본래의미는 그거야. <위에 서 있다>에서 <어떤 것을 할 능력이 있다>. <처리할 능력이 있다>로 된 것 같아. .. 기원전 4-5세기에는 <epistêmê>, <technê(기술)>, <sophia>는 같은 말이었어. .. 그러니까 <epistamai>라는 동사는 어떤 것을 할 능력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 이제 봐. 필레보스편에 보면 이성(nous)이 쾌락(hêdonê)에다가 사려깊음(phronêsis)을 집어넣어서 <존재로의 생성(genesis eis ousian)>과 같은 중간치를 만든다고 되어 있지? 그래서 비존재(mê on)니 하는 것들을 통제(control) 하잖아? 그 능력도 사실은 <epistamai>가 되어야 될 것 아냐. 그렇지? 그런데 그럴 땐 <epistamai>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야. <epistêmê>가 이미 대상화 되어 버렸으니까. 사실 플라톤에서는 심리[영혼]적 기능(psychic function)에 대한 연구가 적어 베르그송에선 심리적 기능은 연구 대상이야. (122)
박홍규: 오늘은 전체[l‘unité]가 철학적 차원에서 얘기 하는 거니까. 고전물리학도 결정론이라고 하지. 가정(hyoithesis) 자체가 결정론으로 되어 있어. (124)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뉴턴 포함)까지 결정론인데, 1830년대 열역학 제2법칙에서 달리 사유하는 양식이 등장한다.]
박홍규: 그러니까 봐. 심리적 기능이 언제부터 발달했느냐? 현대 생물학이 나오고 거기에 기초한 심리학이 발달된 뒤부터 인식 기능이 제대로 연구돼. 그 전에 칸트나 헤겔은 전부 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차원이야. (125)
아메바 같은 것은 눈이 없어. 그런데 현미경으로 보면 물건을 그렇게 잘 찾아다닐 수 없어. 장애물을 비껴가고, 찾아다니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사람을 보면 꼭 그런 모양일 거야. (125) [인식은 오관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체 전체의 자기 활동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 자기 활동성을 생명 또는 영혼이라 이름 지었을 따름이다.]
약에 대해서 어떤 저항을 한다. 적응 방식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 당장 우리 눈에는 안보여. .. 보이지 않으니까 해석이라고 해. 실증과학은 해석이라고 하지 않아. .. 그런데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안다는 것은 성립해..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베르그송을 읽어야 돼. (125) [벩송의 무의식이 기억의 차원이라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추억의 차원이다. 전자의 지속의 사유와 후자는 분석의 사고는 전혀 다르다.]
희랍의 분석(analysis)라는 것은 그런 거야. 내 마음 속에서만 성립한다면, 분석이라고 하지 않아. 내가 누누이 말한 것 같이, 그런 건 검증할 필요가 없어. 내 마음 속에 있느냐 없느냐 그것뿐이야. 그것으로 끝나. 객관성이란 그런 거야. ... 우리 마음속에서 성립하는 인
식 공간은 물리적 세계가 아니야. 달라, 종류가 달라. [에피스테메는 대상화되는 물리적 공간 또는 사고 공간이 있다. 이에 비해 영혼에는 그런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위상적이고 말하기도 한다.]
(13:03, 52TLI)
첫댓글 "조국장관지지 검찰개혁" 교수들 성명(2019 09 22) .. 지지!
류종렬(1953-): 여러 대학 강사를 지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마실에서 천사흘밤 이야기: http://cafe.daum.net/milletune> (52T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