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시장에서 있었던 김경훈 시집 ‘우아한 막창’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은근히 막창집을 기대했으나, 그냥 돼지고기 수육 삶은 것에다 막걸리를 마시며, 국제적인 행사를 치렀다. 일본의 평화운동가 이타쿠라 히로미씨가 나와 김경훈의 시집 ‘不服從の漢拏山’을 번역 출판하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얘기해 열렬한 박수를 받은 것. 김경훈 시집 ‘우아한 막창’은 75편을 4부에 나누어 실었고, 발문은 딴따라 후배인 한진오가 ‘점유이탈물횡령죄를 되묻다’라 썼다. 김경훈 시인은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 ‘삼돌이네 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일본어판 4·3시선집 ‘不服從の漢拏山’, 마당극 대본집으로 ‘살짜기 옵서예’>가 있다. 4·3관련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으며,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 자서 이를 테면, 불빛 없는 곳에서 구워 먹었던 새까맣게 탄 돼지고기, 목숨 걸고 썰어먹었던 복쟁이회, 제사 음식 남은 거 이것저것 다 쓸어 모아 끓인 잡탕찌개 같은 것, 농사지을 때 점심 대신 먹었던 물외 두 개, 라면 살 돈도 떨어져 눈물로 말아먹던 누룽지, 또는 그냥 밥, 국, 반찬,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의 시다. 저급한 식탁의 언어가 아니라 우아한 막창의 배설인, 이 시집이 지친 사람들의 술 한 잔, 담배 한 개비, 차 한 모금이었으면, 그들의 삶에 쌓인 상념들을 단 한 순간이라도 날려버릴 수 있는 그런,
♧ 가름도새기 가름*을 돌다 내가 자꾸 우리를 뛰쳐나가는 건 다만 발정 난 때문만은 아니다 일상은 나의 거처가 아니라 무기력한 안일의 누적된 무덤 편안한 거짓에 길들여지면 불편한 진실이 경계를 허문다 묏들을 주름잡던 야생의 유전자 그 거침없는 저돌적 일탈을 찾아 내가 자꾸 우주의 가름을 도는 건 다만 갈증 난 때문만은 아니다 --- * 가름 : ‘작은 마을이나 동네’를 뜻하는 제주말.
♧ ‘언제 나왔냐?’와 ‘아직 안 갔냐?’의 차이 제주통일청년회 전 대표의 집이 압수수색 당한 후 그를 만나선 어떤 분 왈, “언제 나왔냐?” 내가 한 말, “아직 안 갔냐?” 그러니까, 정실 교도소를 두고 한 말인데 ‘오다’에 중점인 고운 마음 ‘가다’에 방점인 못된 심보 이를 테면 소주잔과 왕대포의 대비 넉넉하거나 쪼잔한 인생관의 차이 역시 나는 그릇이 작다 은연중에 다 드러난다
♧ 조난曹難 바다에서 떠밀려온 한 평 정도 되는 배를 주워서 어랭이 낚으러 갔다가 표류당했다 노 대신 가지고 간 삽자루로 좆 빠지게 삽질해도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박할 해안가는 저만치 점점 멀어지고 죽음의 밧줄에 목매단 사람처럼 걷어 올린 닻은 표류의 거처를 알 수 없었다 죽음의 징후가 배를 강한 악력으로 끌어당기며 수평선 모가지로 떠밀려냈다 기진 맥진 힘이 다하자 삶의 기억들이 포말로 튀어올랐다 집착과 미련 그런 걸 포기할 때쯤 배는 멀리 돌아 겨우 땅에 닿았다 조류를 타면 저절로 닿을 곳을 그렇게 필사적으로 허둥댄 것 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 썩다 감귤을 오래 저장하다보면 썩는 놈들이 나오기 마련인데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시커멓게 혼자 타들어가는 놈 아닌 척 고요히 썩어가는 놈 겉은 멀쩡한데 속으로 썩어가는 놈 쭈글 쭈글 말라가며 썩어가는 놈 흐물흐물 껍질 녹으며 썩어가는 놈 잿빛으로 변하며 썩어가는 놈 하얗게 분바르며 썩어가는 놈 수염 자라듯 곰팡이 키우며 썩어가는 놈 제 썩는 물로 옆의 놈 도 같이 썩게 하는 놈 사람도 오래 묵으면 썩게 마련인데 세상 사 온갖 썩은 것들 속에서 그중 가장 썩은 놈들이 제 썩은 줄 모르고 썩은 것들 나무라며 군림하려는데 이미 다 썩은 상자 속 세상 통째로 들어다 시원히 파묻어버려야 할 것인데 나도 이왕 썩을 거면 썩기 전에 고고히 버려져 감귤밭 거름이나 될 일이다
♧ 여뀌와 대우리 콩밭의 여뀌 콩인 체 보리밭의 대우리* 보린 체 같잖은 것들 뽀록날 허세 솎아내면 콩밭엔 콩 보리밭엔 보리 ---- * 대우리 : ‘메귀리’의 제주어
♧ 우아한 막창 식욕은 대지를 삼키고 사막을 토해내지만 배설은 폐허를 삭혀 존재의 숲 일군다 낮추되 비굴 않고 비우되 과시 않는 도도한 저자세의 우아한 영구적永久的 혁명 어떤 누구도 막창 속엔 똥이 들어 있듯 어느 누구도 막창 먹을 땐 똥폼 잡지 않는다
♧ 들꽃 이름 외우기 순남 언니나 창집 선생은 들꽃 박사다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다 나도 한번 따라한답시고 몇 개 이름 외우다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의미는 자신을 관통하는 마음 떨림에 주파수를 공명한다 가치는 그것이 내 심장에 각인된 파동에 정비례한다 문득 내 이름이 잊혀질듯 이름 잊은 들꽃에게 부끄러이 들켜버린다 도대체 아는 것이 없다 들꽃이나 들꽃 닮은 이들을 닮아야겠다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