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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논문은 현행 학교국사사관(리조국사사관-강단사학계의 입장)에 기초하여 쓴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이 논문을 올리는 것은 리조개국 과정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리조선 건국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리조개국세력들이 얼마나 명나라에게 사대하며 조아리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저히 한겨레 정통정신인, 실사구시 주인정신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시고 특히 파랗게 된 글 부분을 눈여겨 보시길 바래요.
깨어있는 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조선 500년의 토대를 다진 革命兒
오랜만에 조선시대의 正宮(정궁)인 경복궁을 찾았다. 鄭道傳(정도전)의 체취를 느껴 보기 위해서였다. 11월 초의 날씨는 쌀쌀했다.
홍례문을 지나 御溝(어구)를 건너자 정전인 勤政殿(근정전)이 단아하면서도 장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근정전은 「君臣(군신) 모두 국태민안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삼가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鄭道傳이 얼마나 고심해서 작명했는지를 생각하니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朝鮮」이라는 국호도 그가 제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사자를 明나라로 보내 「조선」과 「和寧(화녕)」의 복수안을 올렸다.
화녕은 지금의 함흥으로 李成桂(이성계)의 고향이다. 그러나 화녕은 예우 차원에서 선택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끼워 넣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선」을 새 왕조의 국명으로 삼고자 하는 鄭道傳의 치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복궁은 鄭道傳의 정신이 숨쉬는 곳이다. 19세기 중엽 대원군이 경복궁을 重建(중건)하면서 수백 년 동안 역신으로 간주된 그를 복권시키면서 文憲公(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원된 景福宮 전경. 景福宮 및 宮內 殿閣들의 이름은 鄭道傳이 지었다.
그는 어렸을 때 개경 동남방에 있는 지금의 북한산(삼각산) 부근에서 살았다. 그의 호 三峰(삼봉)은 삼각산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본관은 경상도 奉化(봉화)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조 내내 봉화지역의 토착 鄕吏(향리)였다. 봉화 鄭氏 집안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부친 鄭云敬 때부터였다.
鄭云敬은 26세 때인 1330년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상주목사에 제수된 뒤 지방관을 지내다가 成均司藝(성균사예)와 양광도 안렴사 등을 거쳐 1353년에 전주목사로 나갔다가 공민왕 5년(1356)에 병부시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 8년(1359)에는 형부상서에 제수되었으나 몇 년 뒤 병으로 사퇴하고 榮州(영주)로 돌아와 요양하다가 1366년에 62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러나 그의 母系는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고려사」에는 그의 政敵(정적)들이 그를 두고 「家風(가풍)이 부정하고 派系(파계)가 밝지 못하다」고 탄핵한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원년 8월 조는 그의 母系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이후 우연은 딸을 하나 낳은 뒤 貢生(공생) 鄭云敬에게 보냈다. 훗날 鄭云敬은 벼슬이 형부상서에 올랐다. 鄭云敬은 아들 3명을 두었다. 鄭道傳이 그 맏아들이다>
두문동 72현의 하나인 車原?(차원부)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車文節公遺事(차문절공유사)」에 그 해답이 있다. 이에 따르면 우연은 원래 중랑장 車公胤(차공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연은 차공윤의 딸을 정처로 맞이한 뒤 鄭道傳의 외조모를 첩으로 거느렸던 것이다.
모든 여건이 鄭道傳이라는 인물을 시대의 풍운아로 만드는 데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漢고조 劉邦(유방)을 앞에 내세워 天下一統의 大業을 이룬 前漢제국의 일등공신 張良(장량)과 닮아 있다. 그러나 장량은 功을 이룬 뒤 몸을 숨기는 소위 「功成身退」의 처신으로 천수를 다한 데 반해 鄭道傳은 李芳遠의 의심을 사 비명횡사했다.
마침 공민왕이 反元·親明策(반원·친명책)을 펴면서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대폭 강화하기 시작했다. 鄭道傳은 공민왕 9년(1360)에 성균시에 합격한 뒤 부인 최씨와 결혼해 이듬해에 맏아들 鄭津(정진)을 얻었다. 이어 2년 뒤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벼슬길에 접어들었다.
그가 낙향한 이듬해에 부친 鄭云敬과 모친 우씨가 잇달아 사망했다. 鄭道傳은 3년 동안 부친의 고향인 榮州로 내려가 侍墓(시묘)했다. 이때 마침 鄭夢周가 그에게 「孟子」 한 권을 보내 주었다. 鄭道傳은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정독하며 孟子의 「易姓革命(역성혁명)」 주장에 공감했다.
이색이 성균관 大司成(대사성)이 되고 鄭夢周와 이숭인 등이 교관으로 임명되자 이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鄭道傳도 이들의 천거로 정7품의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당시 고려왕조는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현상이 극에 달해 있었고, 왜구의 침입 또한 극심해 亡國의 징후가 뚜렷했다.
이는 고려와 힘을 합쳐 明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논의키 위한 것이었다. 親元派인 이인임 등이 鄭道傳을 영접사로 임명해 北元의 사자를 영접케 했다. 鄭道傳이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데 끝내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氣(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이 여지없이 蕩散(탕산)하여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賢人과 君子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입니까>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그대가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름이 있겠소. 각자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 成敗(성패)와 利害(이해), 榮辱(영욕), 得失(득실) 모두 하늘이 정한 것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鄭道傳은 田父의 식견에 놀라 그를 「隱君子(은군자)」로 칭송하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田父는 농사를 지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천분으로 알고 살아가는 농민이라고 겸양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대략 이때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이 해에 鄭道傳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나주로 귀양간 지 꼭 10년 만이었다. 鄭道傳은 이내 典儀副令(전의부령)의 자격으로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鄭夢周를 따라 明나라 수도인 金陵(금릉: 남경)에 다녀오게 되었다. 이는 우왕이 왕위에 오른 것을 승인받고 시호 책봉을 요구키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鄭道傳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때 그이 나이 46세였다. 이듬해인 우왕 14년(1388) 4월, 遼東(요동)출병이 이뤄졌다. 이는 문하시중으로 있던 崔塋(최영)의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조선조 건국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李成桂는 5월22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최영이 제거된 뒤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이 창왕으로 즉위했다. 이듬해에 창왕마저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면되고 말았다. 鄭道傳은 곧 민심을 잡기 위해 백성들의 숙원사업인 田制改革(전제개혁)에 착수했다.
이는 李成桂 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제개혁에 대한 鄭道傳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한 뒤 인구수에 따라 나눠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지주 출신의 관료는 물론 그간 가깝게 지내며 성리학을 함께 공부한 학우들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때 鄭夢周는 田制개혁에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내심 鄭道傳의 야심을 읽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에 鄭道傳은 南誾(남은)과 沈孝生(심효생) 등을 새로운 혁명동지로 끌어들였다. 당시 李成桂 일파에 의해 옹립된 공양왕은 유약한 인물로 단지 李成桂 일파의 개혁안을 추인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鄭道傳은 평소에 생각했던 개혁의 구상안을 새 왕조 건립에 앞서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파평군 尹彛(윤이)와 중랑장 李初(이초)가 明나라 황제 朱元璋(주원장)을 찾아가 『공양왕은 왕씨가 아닌 李成桂의 친척이고, 李成桂는 장차 군마를 조련해 요동을 침공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고 무고했다.
明나라의 힘을 빌려 李成桂 일파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鄭道傳이 곧 성절사로 가 이를 해명하며 사건을 일단 무마시켰으나 주원장은 의심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이때 鄭道傳은 同判都評議使司(동판도평의사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며 文官의 인사권을 장악한 데 이어 武官의 인사에 관한 軍政權(군정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해 4월에 공양왕이 백관들에게 災異(재이)를 극복키 위한 求言(구언)의 교지를 내리자 鄭道傳은 이를 빌미로 이색 및 우현보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鄭道傳은 왜 스승인 이색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새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할 길이 없었다. 스승 이색에 대한 단죄를 요구한 鄭道傳의 모습에서 혁명가로서의 냉혹한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공양왕이 곧 그 뜻을 읽고 곧바로 鄭道傳을 平壤府尹(평양부윤)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관직을 삭탈해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李成桂 일파의 지원으로 鄭道傳은 이듬해인 공양왕 4년(1392) 봄에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반대세력은 鄭道傳을 제거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鄭道傳을 제거하지 않고는 心腹之患(심복지환)인 李成桂의 세력을 거세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해 4~7월은 혁명파와 反혁명파 사이에 생사를 건 일전이 벌어진 해였다. 오랫동안 李成桂 일파와 행보를 같이 해 오다가 田制개혁 때부터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鄭夢周는 차제에 李成桂 일파를 완전히 거세하고자 했다. 공격의 화살은 鄭道傳과 조준, 남은 등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이로써 상황은 일거에 반전되었다. 당시 李芳遠의 나이는 26세였다. 李芳遠의 과감한 조치는 위기에 빠진 李成桂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鄭夢周가 제거되자 李成桂 세력을 견제할 힘을 잃고 만 공양왕은 이내 鄭道傳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한양 全圖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원도 간성으로 옮겨진 뒤 다시 3년 뒤에 삼척으로 쫓겨났다가 이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文翰(문한)의 책임을 맡는 寶文閣大學士(보문각대학사)와 왕을 교육하고 역사를 편찬하는 知經筵藝文春秋館事(지경연예문춘추관사)도 겸했다. 이로써 鄭道傳은 정책결정과 관료인사, 국가재정, 군사지휘, 교서작성, 역사편찬 등 새 왕조 경영에 필요한 모든 요직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색과 이숭인, 우현보 등 56명의 反혁명 세력에 대한 처벌도 언급되어 있다. 이색 등 4명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李成桂에 의해 감형되었다. 그러나 이숭인을 포함해 이들의 일부 후손 및 추종자들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그러나 배극렴 등은 방번의 행실이 거칠다는 이유로 강씨의 둘째 아들인 芳碩(방석)을 거론했다. 태조가 이에 동조했다. 이로써 후사문제까지 鄭道傳이 바라는 바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李芳遠과 대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태조 2년 3월에 귀국한 鄭道傳은 얼마 후 동북면 都安撫使(도안무사)로 나가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돌아왔다.
조선조 개국 후의 모든 사업이 鄭道傳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의흥삼군부는 고려 말에 설립된 삼군도총제부를 개편한 것으로 새 왕조의 군사를 통할하는 최고기구였다.
李成桂의 親兵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왕자와 宗親 절제사들이 侍衛牌(시위패)로 불리는 사병을 거느리면서 이에 반발했다.
이때 李成桂의 관심은 온통 한양 遷都(천도)에 있었다. 그는 한양의 毋岳(무악)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을 건설하자는 河崙(하륜)의 의견을 듣고 직접 지금의 신촌 일대를 답사하는 등 일을 서둘렀다.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이 오랜 근거지인 개경을 떠나는 것에 반대했다. 이에 李成桂는 여러 재상들로 하여금 새 수도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올리도록 명한 뒤 직접 지금의 청와대 일대를 답사하고 지관인 尹莘達(윤신달)의 의견을 물었다.
鄭道傳이 곧 천도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신도궁궐조성도감 판사들과 더불어 한양에 내려와 종묘와 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도면을 그려 바쳤다. 이해 10월28일 李成桂를 비롯한 대소신료가 3일 만에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다.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된 지 두 달도 채 안 돼 遷都가 단행된 것이다. 이때는 아직 궁궐을 비롯한 토목공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이 책은 한 해 전에 편찬한 「조선경국전」의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으로 鄭道傳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인 재상 중심의 관료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이 소상히 드러나 있다.
이해 9월 드디어 궁궐과 종묘가 완공되어 12월에 새 궁궐로 이사했다. 기공식이 있은 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鄭道傳이 생각하는 바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明나라가 이해 정월에 「조선에서 보낸 신년 축하의 글 중 황실을 戱侮(희모: 희롱하여 모독함)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트집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이 표전문은 원래 성균관 대사성 鄭擢(정탁)이 짓고 權近(권근)이 교정한 것이었다.
그는 윤이와 이초 등이 李成桂를 모함할 때부터 시종 조선이 北元과 합세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實勢(실세)인 鄭道傳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李成桂는 明나라의 압력에 굴복해 실무 책임자인 金若恒(김약항)을 明나라로 압송했다. 그러자 明나라는 압력의 강도를 높여 최종 결재자인 鄭道傳을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李成桂는 주원장의 반발을 염려해 鄭道傳이 맡고 있던 삼사판사 자리에 설長壽(설장수)를 임명하고 鄭道傳을 奉化伯(봉화백)에 봉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도록 조치했다.
鄭道傳은 이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곧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해 10월에 鄭道傳은 새로 설치된 有備庫(유비고)의 책임자가 되었다. 유비고는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明나라의 鄭道傳에 대한 공세는 집요했다. 이해 11월 중순에 明나라에서 돌아온 성절사 鄭允輔(정윤보)가 충격적인 소식을 갖고 왔다. 정총과 노인도 등이 주원장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 권근은 주원장이 준 옷을 입었으나 정총 등은 태조의 비인 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복을 입었다. 이에 대로한 주원장은 권근만 돌려보내고 정총 등은 잡아서 신문하게 했다. 정총 등은 신문 도중 죽고 말았다.
「태종실록」에 나오는 조준의 卒記(졸기)에 따르면 당시 개국공신 남은과 세자 방석의 장인인 沈孝生(심효생) 등이 李成桂에게 요동정벌을 설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李成桂가 鄭道傳을 불러 의견을 구하자 鄭道傳은 지난날 주변의 異民族으로 中原을 정복한 金나라와 元나라 등을 예로 들며 요동정벌을 권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鄭道傳은 생전에 고구려 강토의 회복이 자신의 원대한 이상이라고 말한 적이 전혀 없다. 그의 문집과 저술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커녕 암시조차 없다. 실록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략 鄭道傳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형성하는 데 최대 걸림돌이 되어 있는 私兵을 혁파하기 위해 明나라와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활용하고자 했을 공산이 크다.
이는 사실상 백의종군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鄭道傳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鄭道傳은 이듬해 초까지 함경도 일대를 정비하는 일에 열중했다. 李成桂는 태조 7년(1398) 3월에 鄭道傳이 한양으로 돌아오자 연회를 베풀고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사흘 뒤 사헌부에서 삼군절제사와 상장군, 대장군, 군관 등 모두 292명을 탄핵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李芳遠을 비롯해 방번과 방과, 방간 등의 왕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왕과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로 사면되었으나 이들이 거느리고 있던 휘하 장수들은 모두 50대의 태형을 받았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8월26일 밤에 鄭道傳은 남은 및 심효생 등과 함께 왕자들을 죽이기 위해 松峴(송현: 현재의 중학동)에 있는 남은 첩의 집에 모여 모의를 했다. 李成桂가 위독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여러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뒤 곧바로 병사들을 동원해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李芳遠은 곧 이숙번 등과 함께 기병 10명, 보졸 9명, 노복 10여 명을 데리고 鄭道傳이 있는 송현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李芳遠은 보졸들로 하여금 鄭道傳이 있던 집 주위를 둘러싼 뒤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했다.
이에 놀란 鄭道傳 등은 집을 뛰쳐나와 피신하다가 李芳遠의 보졸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李芳遠은 鄭道傳을 죽인 뒤 삼군부로 가서 화염을 보고 달려온 찬성 柳曼殊(유만수)와 친군위 都鎭撫(도진무) 朴?(박위)를 참수했다.
당시의 정황은 鄭道傳이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한꺼번에 죽이려고 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당시 鄭道傳은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과 궁 안에 아무 병력도 배치하지 않은 채 왕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鄭道傳의 죽음과 관련해 실록은 「戊寅難(무인난)」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後世의 史家들은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는 「周禮(주례)」에 나오는 이상국가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으로 재상 중심의 臣權(신권)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현대의 내각책임제와 매우 흡사한 통치체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갓 개국한 조선조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통치체제였다. 그의 이런 구상은 조선 개국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李芳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李芳遠은 功臣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난 데다 私兵마저 혁파되어 武力的 기반을 완전히 상실해 있었다.
그는 鄭道傳이 조선왕조를 창업한 뒤 취중에 곧잘 「漢고조 유방이 子房(자방: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漢고조를 이용했다」며 자신의 功을 은근히 자랑한 사실에 전율했다.
조선조는 연산군이 폐위된 이래 臣權이 급속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하들에 의해 보위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광해군마저 폐위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君王은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구차하게 君王의 입지를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中國은 臣權이 유독 강했던 南宋이 멸망한 이래, 이를 거울삼아 明나라가 들어선 후 줄곧 황제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도 조선은 유독 南宋대를 본받아 「君弱臣强(군약신강)」의 臣權국가로 진행해 갔던 것이다.
조선조는 中宗 이래 늘 君主權이 臣權에 눌리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亂世(난세)에 커다란 위기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조선조가 후기에 들어와 사상 유례 없는 명분론에 빠져 대세를 그르쳐 마침내 세도정치로 일관하다가 亡國으로 치닫고 만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鄭道傳의 爲民(위민)과 民本(민본)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조준의 卒記에 나오는 근거 없는 얘기를 토대로 그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는 식으로 美化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
첫댓글 일제가 분열정책을 취하려 특정 성씨가 지배했다고 표현하고 세뇌한 "이씨조선"이란 표현을 묘하게도 역사 바로잡자는 삼태극 운영진들만 "이씨조선"이라고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짜 식민 사상에 철저하게 물든 사람은 따로있죠~~!!!
이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론 역대 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 그리고 고려만해도 특정 성씨가 그렇게 장기간 집권한적은 오늘날의 역사책을 보아도 찾아볼수가 없는데요;; 하지만 이씨왕조도 나름의 합리성과 및 정보성에서 만큼은 기존 교과서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니 무조건 이씨왕조만 탓할노릇은 아닌듯 하네요,
정도전도 사실은 검증해 봐야 할 필요가 있지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