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족보발간역사 : 순흥안씨 대종회
순흥안씨 역대족보 서발문 : 순흥안씨 찬성공파 종회
역대 순흥안씨 족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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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순흥안씨 경인보(庚寅譜) : 안재묵(安在默) 주관
1824년 간행된 전보(前譜, 갑신보)가 파보(派譜)임을 개탄하여 3개 파보를 합하고. 여기에 총록 2권과 고증록을 덧붙여 간행함.
현재 순흥 경인보의 원본 소장처는 알려진 곳이 없고, 인터넷 상에서도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다.
안재묵(安在默, 1767~?)은 순흥1파 갑신보( 1824년)와 경인보(1830년) 간행을 주관하고, 《회헌실기(晦軒實記)》 편찬에도 간여하였다. 순흥안씨 찬성공파로 안종약(安從約) - 경(璟) - 인후(仁厚) - 성(珹) - 순좌(舜佐) - 기(玘)의 후손이다. 탐진안씨 족보 서문을 쓴 안명옥(安命玉, 1797-1849)은 그의 아들이다.
순흥안씨 찬성공파 인터넷 족보 검색에서 찾을 수 있다.
재묵(在默) - 업(業) - 종제(宗濟) - 석원(錫元) - 중렬(重烈) - 돈(塾) - 광욱(光郁) - 천건(千健) - 택선(擇善) - 기(玘) - 순좌(舜佐) - 성(珹) - 인후(仁厚) - 경(璟) - 종약(從約) - 원(瑗)
을유보 간행에 간여한 안우제(安羽濟) , 안석경 (安錫儆)과 가까운 집안이다. 광욱(光郁) 의 아들 중 돈(塾)이 맏형, 규(圭), 후(垕)는 동생이다.
우제(羽濟) - 석구(錫龜) - 중필(重弼) - 규(圭) - 광욱(光郁)
석경(錫儆) - 중관(重觀) - 후(垕, 圭의 동생) - 광욱(光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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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보(庚寅譜) 소지(小識) : 안재묵(安在默)
출처 : 순흥안씨 역대족보 서발문 : 순흥안씨 찬성공파 종회
신죽산 안원형(安元衡)을 안목(安牧)의 아들로 등재
순흥안씨(順興安氏) 경인보(庚寅譜, 1830년, 순조30년)에는 최초로 신죽산안씨가 순흥분파라 기록하고 있다. 자손록에는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아들로 문혜공(文惠公) 안원숭(安元崇) 다음에 신죽산 시조 안원형(安元衡)을 등재하였다. 안원형은 이름만 적혀 있고 다른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
경인보 고증록(庚寅譜 考證錄)
신죽산 안원형(安元衡)을 안목(安牧)의 아들로 등재하는데 대한 고증이나,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 오늘날 확인된 바로는 안목(安牧)의 아들은 안원숭(安元崇) 뿐이다.
1845년 을사보의 안우량(安禹良) 서문에서는 경인보의 이러한 고증이 잘못된 것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광주안씨 족보 별록에 실린 충주(忠州) 순흥보에 대한 언급
1980년 순흥안씨 일파 죽산 탐진 족보(順興安氏一派 竹山 耽津 族譜)의 전의록(傳疑錄)의 2번째 항 "庚寅譜曰 ..." 참고
[2] 庚寅譜曰 廣州安氏 新譜 密陽板 別錄註卽 安順菴鼎福所著 有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有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版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 屬之于典農寺尹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專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金姓人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其家亦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族祖唐津公羽濟氏世乘亦曰 此舊譜似是丙午前本也 而第吾宗人亦有於忠州吾安氏外孫柳姓士人家得見 其板本所謄 護軍公以上九世而謄來者則此也 忠鄕之有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之云 故今竝記之
[2] 경인보(庚寅譜, 1830)에 이르기를,
“광주 안씨 신보(新譜)인 밀양판(密陽版) 별록의 주(註)는 바로 안순암정복(安順庵鼎福)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광주 안씨는 시조인 대장군 이하 전농시윤 이상에 빠진 세대가 있었는데, 원주의 종인인 처대(處大)가 충주의 위류면에 사는 순흥 안씨의 외손인 김씨 집안에 가서 순흥 안씨가 간행한 구보(舊譜)를 보니, 또한 광주군(廣州君)을 시조라 하였고, 그 아래에 12 대를 이어 전농시윤에게 소속시켰었다. 처대는 마침내 이것을 등사하여 종중에 보내왔는데, 종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 등사한 것만을 보고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여, 종인인 신형(信亨)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처대는 그와 함께 충주에 사는 김씨 집에 가보니, 순흥의 구보는 이미 화재에 불타 없어졌고, 그 집도 이사해 가서 다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선 별도로 기록해서 후일을 기다리는 바이다.’ 하였으며, 족조(族祖)인 당진공 우제(羽濟)씨의 세보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는 병오보 이전의 본(本)인 듯하다. 다만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 이상 9 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 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보학이 밝지 못하여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보다.
광주 안씨들이 감히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또한 그대로 믿을 수 없으므로 우선 기록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아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이 내용은 이후 간행되는 대다수 순흥보의 전의록(傳疑錄)에 실리게 된다.
순흥안씨 족보 전의록(傳疑錄)의 변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