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26일 일요일 오전 10시19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 입구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2~3분 정도 도로를 따라 오르자
해인사 성보박물관 앞을 지난다.
옛것을 배워 새롭게 한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주제로 조성되었다고는 하나
자연미 빼어난 가야산의 경관이나 천년고찰이라는 해인사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진듯한 건물의 외양이
내 눈에는 허접한 싸구려 건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한방에서 비늘줄기를 진해·강장 효과 등을 위한 약재로 쓰는 참나리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준다.
마치 허접쓰레기처럼 보이는 성보박물관을 바라 보느라 마음 상한 나를 달래 주듯이...
오전 10시25분
성보박물관을 지나면서부터 울창한 나무 숲 아래를 지나는 아늑한 숲길이다.
좌측으로는 이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이어진다.
해발고도 1,400m를 넘는 가야산과 그 남쪽의 해발고도 1,010m 매화산 사이에서 흘러 내리는
이 홍류동 계곡은 여름철 땀을 씻는 길손들에게 오아시스같은 역할을 한다.
가야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이르는 4km의 홍송이 울창한 이 계곡은
10여리에 걸쳐 수석과 송림이 이어진 절경으로
가을 단풍이 너무 붉어서 물이 붉게 보인다고 해서 홍류동계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길섶에는 작고 예쁜 야생화인 이질풀도 제철을 만나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린다.
많은 양의 타닌과 케르세틴이 들어 있어 소염·지혈·수렴·살균 작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야생화는
예전 이질이 번창하던 시절 이질 치료에 효과가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한다.
요즈음 강원도 함백산,대덕산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둥근이질풀보다 크기가 작지만 색깔은 더 선명한 꽃이다.
물가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또 다른 여름 야생화인 물봉선도 물기를 촉촉히 머금고 피어난다.
흰색이나 노란색 물봉선을 찾아보려 했으나 이곳 홍류동계곡 주위에는
온통 진분홍 물봉선뿐이다.
이 물봉선의 잎과 줄기는 해독, 소종, 종기, 뱀에 물렸을 때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전 10시32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지난 1993년 열반하신
성철 스님 사리탑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성철스님은 지난 1967년 이곳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을 지내신 바 있다.
오전 10시34분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각인을 해둔 안내석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해인사는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 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이라 불린다. 여기서 삼보 사찰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세가지의 보물
즉 佛(불), 法(법), 僧(승)을 각각 대표하는 사찰을 뜻하는 것이며, 해인사가 법보 사찰이 된 것은 바로 대장경 때문이다.
불가에서 법이란 곧 불경이고, 국내 최대 불경인 대장경이 이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다.
바로 앞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는 일주문을 들어서야만 실질적인 해인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내로 들어가는 첫번 째 문이다.
기둥을 한 줄로 세워 짓는 건축 구조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이름이 유래 한다.
이곳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는 별칭까지 붙어 있다.
거대한 고사목(枯死木) 너머로 '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천왕문이 보인다.
이 고사목인 느티나무는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서기 802년) 순응,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왕의 병이 완치된 은덕에 감사하여 왕이 두 스님이 수행하던 자리에 해인사를 창건토록하면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해인총림이란 현판이 붙은 이곳 해인사 사천왕문의 별칭은 봉황문이다.
통상적인 사찰 양식에서 사찰로 들어가며 거쳐야하는 문은 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불이문의 4개 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찰에서 금강문을 세우지 않듯이 이곳 해인사에도 금강문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 해인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조계종 종합수도도량인 해인총림(海印叢林)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총림은 강원과 선원·율원·염불당·종무원 등을 갖춘 종합수련원으로,
1967년 해인총림이 가장 먼저 설립되었으며 초대 방장은 성철 스님이었다.
방장[方丈]이란 총림의 최고 책임자의 명칭을 말함이며,
해인총림에서 상시 수련에 열중하는 스님 숫자는 약 500에 달한다고 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서 잇따라 '해동원종대가람'이란 현판이 걸린 '불이문'으로 들어 선다.
사찰에서 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이 불이문(不二門)이다.
진리는 둘이 아니며 진정한 불이(不二)는 모든 번뇌를 벗어나 참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하여
불이문을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해인사 불이문에도 내부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오전 10시44분
해탈문을 지나고 뒷편 넓은 마당에 해인도가 그려진 구광루를 거쳐
이곳 해인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앞에서 잠시 멈춘다.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잇는 선에서 약간 동쪽으로 비켜 세워진 탑은 '정중삼층석탑'으로
일반적으로 사찰의 석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축조한 것이나
이 탑은 특이하게도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석탑이다.
대적광전을 거쳐 그 위에 자리한 장경각으로 향한다.
대부분 사찰에서는 그 사찰의 본당인 대웅전(또는 대웅보전)이나 대적광전이 가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으나
이곳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해도 내부를 쉽게 볼 수 있게 해 놓았을뿐더러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음은 물론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촘촘한 그물로 감싸 놓았다.
촘촘한 철망 사이로 경판의 일부가 어슴프레 보인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 경문을 새겼다고 한다. 글자를 한자씩 새겨 넣은 선현들의 숨결이 느껴지는듯 하다.
더구나 8만여장의 경판을 머리에 이고 강화도에서 이곳 해인사까지 옮긴 우리네 아녀자들의 정성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는데,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1011년에 시작하여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몽고군의 방화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 후 5년 뒤인 1236년에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16년에 걸쳐 81,340 여장 고려대장경을 완성하였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장경판수가 팔만 여장에 이르는 데서 비롯되기도 했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장경각은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오전 11시3분
대적광전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본 후 뒤돌아선다.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이 본당인 점으로도 해인사가 화엄종의 이념을 추구하는 사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웅전"과 "대적광전"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웅전 [大雄殿]은 불교의 선종 계통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는 곳이다.
‘대웅(大雄)’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한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반면 대적광전[海印寺大寂光殿]은 석가모니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다.
화엄종 최고의 부처는 비로자나불이이므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본당을 대적광전이라고 부른다.
대적광전을 떠나 구광루 앞에 이르니 앞 뜰의 해인도를 따라 소원을 빌며 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눈에 띈다.
의상스님이 도안했다는 해인도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는 오묘한 도안으로,
합장하고 한 바퀴 돌면 큰 공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때 마침 범종각에서 맑은 종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진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범종각을 향해 선 채 합장을 한다.
범종각에서는 스님 네 분이 경건한 자세로 타종 행사에 임하고 있다.
범종각은 불전사물(佛前四物)인 범종(梵鐘)·운판(雲板)·목어(木魚)·홍고(弘鼓) 등을 비치하는 사찰당우 중의 하나로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오전 11시10분
사천왕문을 나서 일주문을 향하며 해인사를 벗어난다.
해인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우리들 마음의 바다에는 번뇌라는 물결이 일고 있는 데 이는 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어리석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잔잔해지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명백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중생들이 귀의해야할 참된 근원이라는 것이다.
나 자신 어느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으나, 사찰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교회나 성당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씩 배우다 보면
그 분들의 고귀한 사상에 항상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일주문을 나서면 바로 왼편에 이처럼 크기는 작지만 맑은 물이 찰랑대는 연못이 있다.
가야산 정상이 이 연못에 비친다해서 '영지(影池)'라는 이름을 얻은 이 연못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가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 칠불봉으로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여
가야산을 찾았으나 산에 오를 수 없어 아들들의 그림자라도 보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진 중인 왕자들의 모습이 이 연못에 비쳤다고 한다.
일주문을 벗어나 다시 출발했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이처럼 녹음 우거진 아름다운 숲길이다.
비록 더운 날씨이긴 하지만 숲길 옆을 따르는 홍류동 계곡의 맑은 물을 바라보며
또 맑은 물이 흐르는 경쾌한 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걷는 길은 마음이 편안한 길이다.
낮 12시40분
해인사를 떠나 도착한 다음 행선지는 경남 거창군 거창읍 중앙리에 위치한 거창시장이다.
오늘 여행은 전통시장 활성화 목적으로 중소기업청 산하 시장경영지원센터에서 여행경비의 일부를 지원하여 운영되는
프로그램으로 방문 시장에서 2시간 체류하게 되어 있다.
간혹 혼자서라도 시간을 내어 여러 곳의 재래시장을 찾는 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추어탕 전문 식당에서 추어탕을 주문했다.
63,000 여명의 거창군 전체 인구 중 이곳 거창읍의 인구는 39,700 여명이다.
거창읍 중심지에 자리한 거창시장 주변에 추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만도 10여군데 있을 정도로
거창은 추어탕이 유명하다.
30여년 전 매월 2~3차례씩 거창에 출장을 올 때면 꼭 단골집에 들러 추어탕을 한 그릇씩 해 치웠었다.
그 때 그 집은 찾을 수 없지만 혀 끝을 톡 쏘는 산초를 살짝 뿌린 국물 맛은 그때 그대로인듯..
오후 1시34분
요즈음은 고속도로는 물론 도로 여건이 좋아졌지만 불과 3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 거창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이면서 경남 타 지역과는 무척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자연 이웃한 대구 생활권에 자연스레 편입되었던 곳.
생각보다는 재래시장은 물론 장날에 와 보면 무척 큰 시장임을 알 수 있다.
올 가을 김장 준비를 위함인지 장터 곳곳에 배추 모종 판매하는 곳이 유난히 많다.
배추 모종 다음으로 많이 눈에 띄는 물품이다.
장터 구경을 나온 도회지 사람 누군가 상인에게 무엇인지 물어본다.
얼굴에 깊은 주름이 진 할머니의 답변은 "파시".
도회지 사람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재래시장을 많이 다녀 본 내가 통역을 해 준다. "이건 쪽파를 기르기 위한 씨 입니다."
쌍 시옷 발음을 어려워하는 경상도 할머니는 "파 씨" 발음을 못하니 어쩔 수 없다.
흰 "쌀밥"을 "살밥"으로밖에 발음 못하는 경상도 사투리.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높은 산으로 둘러 싸인 지역인 거창은 여름에는 복숭아,
가을이면 사과가 맛 있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과는 아직 철이 이르고 복숭아는 이제 끝물이라 맛이 떨어지는고로
오늘은 가족들을 위한 농산물 구입은 하지 못한 채 장터를 벗어난다.
장터를 벗어나 인접한 거창군청 앞을 지나 일행들이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거창읍을 비롯한 12개 읍면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거창군청 앞의 경관이 무척 깔끔하다.
요즈음 대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로터리 중앙의 녹지대도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거창의 인상을 좋게 해준다.
오후 1시57분
거창 읍내 중심을 흐르는 개천이 무척 깨끗하다.
천변을 단장하여 편리한 대형 무료주차장을 마련한 것도 인상적이다.
흰 날개를 펼친 백로가 날아다니는 이 큰 개천의 이름은 "위천"이다.
잠시 후 우리는 저 맑은 물이 흐르는 위천을 따라 거창군 위천면에 자리한
국민관광지 '수승대' 로 향하게 된다.
오후 3시3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수승대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 후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황산고가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마을길로 들어선다.
18세기 중엽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하면서 번성한 씨족마을인 이곳의 고택들은
여름 휴가철 길 건너 수승대를 찾는 사람들의 민박촌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마을 입구에 붙은 안내판에 표기된 20호 가까운 민박집 주인도 하나같이 성씨가 신씨인 이곳.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었다는 능소화가 담장을 따라 핀 고택들이 이어진다.
이곳의 옛담장들은 등록문화재 제259호이다.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다. 토석담과 활처럼 휘어진 전통담장길이
전통고가와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 길을 따라 이처럼 맑은 개울물이 쉬임없이 흐른다.
수년 전 들렀을 때와 다름없이 맑은 물이다.
내 어린 시절만해도 도시 변두리에서 자주 접하던 아주까리가 물가에 피어난다.
예전에는 저 아주까리 씨가 설사,종기 치료 등 약으로 쓰는 것은 물론
피마자(?麻子) 기름을 짜기도 하고 비누,화장품 원료,공업용 염료 등 다방면에 이용되었었다.
자연이 살아 숨쉬던 옛날이 그립다.
마을 입구를 지키듯 위엄있게 서있는 보호수를 뒤로 하고 길 건너 수승대 관광지로 발길을 돌린다.
지난 1982년 마을 보호수로 지정된 저 느티나무의 수령은 600년 정도라고 한다.
나무의 높이는 18m이고 둘레는 7.3m에 달하는 엄청나게 큰 느티나무이다.
보호수를 지나 수승대로 향하는 길섶에서 자주 접하기 어려운 꽃을 만난다.
울타리,담장 등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인 박주가리다.
익은 열매가 표주박을 닮아서 그 이름을 얻은듯 하다.
예전에는 어린 순은 나물로 먹고,지혈제 등으로 썼으며
최근 씨앗에 자외선 차단성분이 다량 함유되었음이 알려졌다고 한다.
지난 2008년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었을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수승대는
이제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여름철 휴가지가 되었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매년 7월하순부터 8월 중순에 걸쳐 국제연극제가 열리기도한다.
금년에도 제24회 국제연극제가 지난 8월12일까지 이곳에서 열린바 있다.
이곳 수승대 관광지의 중추역할을 하는 곳.
여름철에는 수영장으로 봄,가을에는 보트 놀이를 할 수 있는 곳. 그 위로 붉게 채색된 현수교가 가로지른다.
수승대는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있는 널따란 화강암 암반으로, 깊은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이룬다.
'안의삼동' 중 나머지 두곳은 함양군 서하면의 거연정이 있는 화림동과
함양군 안의면의 용추폭포가 있는 심진동을 말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였던 이곳은 오래 전 삼국시대에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그 후 1543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을 지나면서 그 내력을 듣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고
수송과 수승이 소리가 비슷하므로 ‘수승(搜勝)’으로 고친다고 이른 4율시에서 비롯되어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시원한 물 속에 발을 담그고 현수교를 뒤로 하고 상류쪽으로 걸음을 옮겨 본다.
멀리 눈 앞으로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을 사이에 두고 멋진 정자와
기묘한 형상의 바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큰 암반 위 소나무 숲에 둘러 싸인 자그마한 이 정자의 이름은 요수정(樂水停)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자연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한 저 정자는
조선 중기에 선교랑(宣敎郞) 훈도(訓導)를 지낸 '요수(樂水)' 신권(愼權)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요수정을 마주 바라보며 물 건너 우측에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가 바로
이곳 수승대에서 가장 유명한 볼거리의 하나인 이른바 거북바위이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이곳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 놓은
거북 모양의 커다란 천연 바위 대(臺)이다. 대의 높이는 약 10m, 넓이는 50㎡에 이른다.
그 생김새가 마치 거북과 같아 구연대 또는 암구대(岩龜臺)라고도 한다.
또 수많은 현인들과 은사들이 찾았던 대라 하여 모현대(慕賢臺)라 불렀다.
거북바위 돌출부의 하류쪽 가까이에서 바위를 살펴본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전국의 수많은 계곡을 다녀보면 멋진 형상의 바위에는 빠짐없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옛날에는 오늘날과 같은 사진으로 기록할 수 없었기에 바위에 기록을 남긴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빼곡히 새겨진 바위는 보지 못했다.
그만큼 이곳을 다녀간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일까?
거북바위의 하류쪽 면에서부터 상류쪽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바라보며 걸음을 옮긴다.
거북바위 뒷편 숲 속에 작은 2층 누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관수루(觀水樓)라는 현판이 걸린 이 누각은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영조 16년(1740)에 건립했다.
'관수(觀水)'란 <맹자>에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한다.
'맹자'에 나오는 문구라는 '관수(觀水)'의 의미를 음미하며 거북바위 쪽을 바라다 본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다못해 쪽빛으로 비치는 물색깔과
그 주위로 적절히 배치된듯한 암반들, 그 암반을 뚫고 자라는 소나무의 어울림.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는 정경이다.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다 본다.
거북바위를 돌아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겨가는 동안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빈틈을 주지 않는다.
저 거북바위 앞의 너럭바위에는 '연반석(硯磐石)', 그리고 '세필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연반석이란 거북이가 입을 벌린 장주암(藏酒岩)에 앉은 스승 앞에서 제자들이 벼룩을 갈던 바위란 뜻이고,
세필짐이란 수업을 마친 제자들이 졸졸 흐르는 물에 붓을 씻던 자리라는 의미이다.
이제 처음 보았던 거북바위의 반대방향에서 바위를 가까이 본다. 온갖 글씨로 빼곡하다.
대부분이 사람 이름을 새긴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퇴계 이황의 '4율시'도 새겨져 있다.
搜勝名新換(수승명신환) 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봉춘경익가)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겠네
遠林花欲動(원림화욕동) 멀리 숲 속 꽃들은 피어나려 하고
陰壑雪猶埋(음학설유매) 응달의 눈은 녹으려 하는데
未寓搜尋眼(미우수심안) 수승을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惟增想像懷(유증상상회) 속으로 상상만 늘어 가누나
他年一樽酒(타년일준주) 뒷날 한 동이 술을 마련하여
巨筆寫雲崖(거필사운애) 커다란 붓으로 구름(단애) 벼랑에 쓰리라
오후 3시45분
퇴계의 감칠 맛 나는 시를 음미하며 깨끗한 원학동 계곡 물로 몸의 땀을 씻어낸다.
마음 속 깊은 곳의 느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남은 어쩔 수 없는 일.
여름 막바지 피서를 즐기며 야영을 하는 젊은이들의 부탁으로 그들의 사진을 정성들여 찍어준 후
내 스마트폰을 건네 주며 오랫만에 내 사진 한 장을 부탁한 후
행복했던 휴일 하루 여정을 마감하고 귀가길에 오른다.
위 지도상에 붉게 밑줄을 그은 곳이 오늘 하루 방문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