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려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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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가 맑아지면 외형이 곧 맑아집니다 부처님오신날 특집 [BBS초대석]에 방송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주-
사회자: 불교학자이자 교육자이고 법사이신 목정배 교수님 모셨습니다. 목정배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목정배 교수 : 안녕하십니까?
사회자 : 네, 오랫동안 동국대학교에서 연구와 후학활동에 매진해 오셨는데요. 작년인가요? 정년퇴임 하셨죠?
목정배 교수 : 작년 8월 31일날 퇴임하고, 바로 9월 2일날 서울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가서 지금 총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사회자: 대학원대학교요?
목정배 교수 : 네에. 대학원대학교가 지금 25곳이 교육부에서 인가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기독교 관련학교이고 불교계에서 하나밖에 없어요. 현재 단설 대학원을 대학원대학교라 칭하고 있습니다. 석사 박사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자: 그래서 이름이 대학원대학교군요.
목정배 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는데, 안양 보장사 정덕재 스님이 학교를 설립해서 지금 불교과, 상담심리, 명상심리, 요가 이런 등의 석사과정을 지금 개설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오늘도 학교에서 오는 길입니다. 아침마다 마포다리를 건너갔다 오고 건너가고 그럽니다. 학교가 독산동에 위치해있기에 아침마다 불교방송국을 보면서 아, 내가 예전에 불교방송국에서 개국부터 58회를 방송한 곳을 오늘도 지나간다 오늘도 지나온다 그럽니다.
사회자: 네에, 그럼 작년 8월 31일에 퇴임하시고 퇴임하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대학원대학으로 가셨는데요. 정년퇴임이다 그러면 좀 아쉽거나 이런 생각은 없으셨나보죠?
돈오로 끊어야지
목정배 교수: 저는 본래부터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 생명이 있는 동안, 살아 있는 동안 누가 나에게 목을 졸라 가지 않는 한 부처님법을 전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보고 그래요. 선생님, 그 전에는 그렇게 잘하다가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그래요. 끊었죠. 그래서 어떻게 끊었냐 물어요. 딱 끊었다 그래죠.
사회자: 그렇게 좋은걸 어떻게 다 끊으셨어요?
목정배 교수: 그래 돈오로 끊었지. 돈오. 점수로 끊은게 아니고 돈오로….
사회자: 돈오로 끊었다. 한 찰나에….
목정배 교수: 그게 한 찰나에 끊어야 끊는거지…무슨 참선만 돈오하는게 아니라 못된 짓도 단박에 돈오로 끊어야 일체적 여래지에 들어가는 겁니다.
사회자: 네에, 그 점에서도 또 하실 말 많으시겠네요. 암튼 퇴임하시고 나서 더 바빠지시고 더 보기 좋아지셨습니다. 아주 뭐 혈색도 좋아지시구요.
목정배 교수: 나보고 그래요. 어떤 사람은 얼굴 만지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아요. 나는 뭐 보통 세수 할 때도 별로 비누도 사용하지 않는데. 비누도 안하는데 얼굴이 나보고 훤~~ 하다고 그래요.
사회자 : 네에, 그렇시네요
목정배 교수: 왜, 훤하게 되었냐. 내면세계가 맑아지면은 외형이 곧 맑아집니다. 이 세계는 내 앞에 어떤 병이든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병이든. 그 병을 본인이 감지를 하지 못해 그렇지. 병은 다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병을 벗어나는 생활. 그게 뭐이냐. 번뇌와 접촉하지 않고….번뇌와 떨어진다는 생각이 없이 떨어지는, 번뇌를 버린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번뇌 버림 없이 버림. 그런게 아닌가 합니다.
사회자: 작년에 퇴임하시면서 퇴임법회도 가지셨지 않습니까? 정각원에서 하셨죠. 감회가 그래도 남다르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정배 교수: 정각원을 동국대학교로 옮기던 시기에 제가 간사를 맡아 일을 봤어요. 그 옛날 백성욱 총장님이 승정전에서 문화사 강의를 하고, 그 다음에 양재동 박사도 그곳에서 국어학 개론을 가르쳤는데, 저도 늘 그곳에서 강의를 한번 했으면 했는데, 보통 때는 법회는 가능하지만, 이번 퇴임할 때는 정각원에서 했으면 좋겠다 해서 정각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사회자: 정년퇴임은 어떠셨어요? 좀 남다르시지 않으셨어요?
내면세계의 종말처리장
목정배 교수: 남다르기보다도 그 때 강의를 하면서 자연, 인간, 불교 이런 주제로다가 자연,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 그 다음이 인간의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한자리에 들어서는 것이 불교다. 그 내용을 보면, 쉽게 종말처리장을 만들자. 왜냐면 인간은 하수도 종말처리장을 만드는데, 인간 내면세계의 종말처리장을 하나씩 만들어서 자기 내면 세계에 있는 일체의 삼독 등을 종말 처리장에서 잘 처리해서 보내야 하겠다. 자기자신의 종말처리장이 없으니,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해서 상대방에게 분노를 느낀단 말입니다. 그래서 종말처리장을 만들자. 그런 주제로 정년퇴임때 마지막강의를 했더니 박수 많이 나왔어요.
사회자: 그러셨군요. 자 그러면 동국대학교에 언제부터 그렇게 몸담으셨습니까?
목정배 교수: 동국대학교에 얼마나 있었냐면, 58년에 입학을 하여, 뒤에 대학원 다니고 조교를 거쳐, 교수로 2002년까지 있었으니…. 44년을 있었지요. 44년. 내 죽거든 화장해서 동국대학교에다가 화장해서 뿌려라 할 정도로 내가 동국대학교를 아끼고 사랑하고 그럽니다.
사회자: 네 삶의 고향정도 되시겠네요.
목정배 교수: 네에, 수도꼭지가 어디 있고, 어디에 무슨 나무가 있고, 또 어디에 무슨 꽃이 피고, 어느 곳에 무슨 돌멩이 돌이 박혀 있는지 까지도 알고 그럽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인사합니다. 요즘도 화요일에 대학원 강의가 있어 학교에 들리는데, 어떤 경우에는 깜짝 놀랍니다. 쫓아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면서 학교가 요즘 조용합니다. 선생님이 안계시니. 이런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비오는 날에는 우산을 갖고 서있습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라는게 권력으로써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 그 어떤 신앙, 진실성, 이런 것이 인간과 인간간의 공감대를 주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그 좀. 힘이 있다고, 우기고 다녔으면 그 사람들이 내가 나가고 난 뒤 욕을 할겁니다.
동국대 발전과정의 산증인
사회자: 네에, 그런 면에서도 행복을 찾으시고, 네 아주 소박한 마음.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아직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네, 동국대학교 58년부터의 인연이면 정말 대단한 하네요.
목정배 교수 : 44년.
사회자: 44년. 네에, 지금 양손가락을 다 꼽으셨는데. 정말 많은 일들을 겪으셨고, 눈으로 봐오셨고, 항상 같이 느끼셨을 텐데. 그래도 가장 보람있는 일도 꼽으실 수 있으실까요?
목정배 교수 : 보람 있는 일은 정각원 법당 짓는 거 도운일, 그 다음에 고려대장경을 완간하는 데 도운일, 또 한글대장경 하는데 도운일, 불교문화연구원에서 또 학보 만드는데 도운일, 그 다음에 세계학자들이 와서 회의하는데 말석에서 도운일, 그 다음엔 1979년에 동국대 경주캠퍼스 지을 때에 처음으로 거 봉사하러간 일, 그 당시만 하더라도 경주에 서울 본교에 있는 분들이 경주에 잘 내려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국문과 교수, 영문과 교수, 불교과 교수 이 세 사람이 자발적으로 내려가서 경주캠퍼스가 자리잡는데 도움을 주고 강의도 했습니다.
사회자: 네에, 동국대학교의 발전과정에 산 증인이십니다. 여러 가지 꼽으셨는데 하나도 다 놓치기 싫은 소중한 일들이실거에요. 처음에 그 많은 학과 다 제치고 불교학을 전공하게 된, 그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목정배 교수: 제가 부산 해동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해동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경봉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경봉스님 말씀이, 인간이 도를 통해야 된데요 도를 통해야, 그 때는 내가 어릴 때 들었기에 도가 굉장한건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서울대학교의 원자물리학과가 개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원자물리학과를 갈려고 했죠, 물리학에 대해서, 화학에 대해서, 수학에 대해서, 상당히 재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봉스님 말씀이 원자물리학보다도 도를 통하는 것이 좋다 그래요. 도를 통하는 근데 도가 높으다 이거야, 핵보다도 도가 높다. 아! 그러면은 도통하는 과가 뭐냐 그랬더니. 불교과가 도통하는 학교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때는 동국대학교 58명 모집할 때는 불교과가 40명 모집입니다. 40명 모집인데, 많이 모집했어요. 그 때 불교과에 들어와서 공부를 했는데, 참 그 당시만 하더라도 남산 학교 지금 석조 건물이 다 지어지지 않을 때니까. 거의 판자집이라….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가 58년이니 이제 불교 분규가 있고 난 이후, 그 당시는 저는 확실하게 느끼지도 못했는데, 분규가 있고 난 후, 양쪽에서 제자를 길러야 되지 않나 하는 이런 역사적 사명을 맡긴 것 같아요. 그러니 비구쪽에서도 입학하고, 대처쪽에서도 입학하니 학생들이 많이 늘었죠. 당시 재학생들은 비구다 대처다 생각 없이 그냥 같이 공부했는데, 먼훗날 보니 저분은 태고종에서 와서 공부한분, 이 분은 조계종에서 공부한분. 그리고 일반 중립적으로 와서 공부한분으로 나뉘게 되더라구요. 당시 동국대는 교수들도 참 좋은 분들 많았습니다. 58년에서 60년대 소위 말하는 5.16혁명이 있기 전만 하더라도 아마 대한민국에서 제일 교수진이 훌륭했었습니다.
어머니의 세존단지
사회자: 네 이렇게 불교학을 선택한 것 자체가 불연이다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어머님의 영향도 많이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정배 교수: 우리 어머님은 일종식을 했어요. 일종식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초이레인가 보름인가 한달에 한 4번씩은 한끼 밖에 드시는 않는 겁니다. 그것을 일종식이라 그래요. 요즘 오후불식이나 같은 것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일종식이라고 이렇게 들었어요. 절에 가는 날은 초여드렛날, 보름날, 스무나흐레날 가시는데, 목욕을 하시고 일종식을 하시고 안방 장롱 위에 하얀 백자에 늘 절을 해요. 해마다 거기를 보면 수수, 그 다음엔 조, 그 다음엔 옥수수 이런 것을 거기다가 담아 놓는데 그것을 세존단지라고 들었는데, 요즘 들어서 세존단지라구하는 집안에 모셔진 부처님이야. 새해에 난 알곡 있잖아요. 수수, 조, 옥수수를 거기에다가 세존한테 바친다고 해서 세존단지라고 일컫는 것 같아요. 어머니 당신이 영향을 받은 것이 법문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삶의 모양새라 할까 삶을 느끼는 것이라 할까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15살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6살때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는 6살 먹을 때 돌아가셔 가지고, 완전히 거 어머니의 훈육을 많이 받고 제가 7남매의 끝물로 낳았서요, 그래 끝물로 낳았기에 키도 안커요
사회자: 요즘 막내들이 키가 다 크던데요.
목정배 교수: 이게, 이게 기운 빠져 가지고 기운 빠진 마지막에 태어낳기 때문에 이기 아무, 그래서 키도 작고
사회자: 그래도 사랑은 제일 많이 받으셨겠어요
목정배 교수 : 그런데 끝물로 낳는데 알차게 타고 난것 같아요. 머리 좋아요 머리, 선암사 칠전선원에 있는 지허 스님이의 이야기를 보면은 차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그 열매가 다음 꽃이 필 때까지 일년을 기다려야 그 씨가 떨어진다고 그러는데, 화실상봉한다고 그러는데, 화실, 꽃하고 씨하고 일년만에 본다 이 말이야, 화실상봉하는데, 내가 어쨌든 머리는 좋아요. 머리는 좋아요.
불성개현
사회자: 네 그러셨어요, 그러니까 어린나이에 좀 조실부모하셨다고 해도 될까요.
목정배 교수: 조실부모했지만 한번도 구김살이 없어. 골목대장, 지금도 골목대장.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이. 어릴 때의 골목대장이 지금도 골목대장. 자기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해야 된다. 백양사에게 계시는 스님처럼 수처작주 어는 곳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 되야 되는데, 환경이 나쁘다 해서 이렇게 빛이 눌리면 안된다 이거야. 불성이라는 것이 뭐이냐. 어떤 환경에서도 광명을 발하는거라, 불성. 부처님의 성품이라는 거는 어떤 역경에 있더라 하더라도 광명을 발하는 게 불성이라 이거야.
그래 우리 불자들이 제가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불자들이 어느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참답고 아름다운 이 불성을 개현해야 됩니다, 그래야 불국토가 되지요. 그 기분 좋은면 이렇게하고 기분 나쁘면 주저앉고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죠.
사회자: 목정배 교수님 이시간에 자랑하셔도 되요
목정배 교수: 그래 만날 연설할 때도 유명한 목정배 왔습니다. 그러잖아요
사회자: 어떠한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어도,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불성 또 어떤 적극성 그런 걸 배워나가야겠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요 재미있는 얘기가 아주 많을 텐데요. 시간이 벌써 다 됐습니다. 오늘 목정배교수님 모시고 말씀 나눴습니다. 이번 한주 계속해서 좋은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목교수님 감사합니다.
목정배 교수: 감사합니다.
사회자: 오늘 BBS 초대석 여기서 이만 접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계속) | | |
발행인:목정배/편집장:정충모/발행처:(사)대한불교법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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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승이 인생의 크나큰 재산입니다
불기 2547년 부처님오신날 특집 [BBS초대석]에 방송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주-
마음을 깨쳐야
사회자: 목교수님,안녕하세요? 지난 시간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하다 시간이 다 되서 아쉬운 작별을 했는데요, 그 어머님, 아버님 말씀하다가 제가 계속해서 질문을 드렸어야 했는데…. 저도 궁금한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불교활동도 계속 하셨고, 아무래도 어머님의 영향으로 계속이어 나가신 것 같은데요, 큰 스님과의 인연도 있었고…그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목정배: 제가 부산에 해동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불교가 정화운동이 일어나서 부산 대각사에 청담 큰스님께서 정화의 의의에 대해서 강연하러 오셨어요.
그 때 청담스님이 마음을 깨쳐야 된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도를 깨쳐야 된다 그랬습니다만, 도를 깨칠라면 큰스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럼 부산에서 제일 큰 스님은 누군가 이래 여쭈어 보고 그랬더니 경봉 큰스님이라 그래요. 경봉 큰스님이 도인이래요. 해서 그렇다면 경봉스님을 뵙는 것이 좋겠다 해서 경봉스님을 찾아 극락암으로 갔죠. 극락암에서 몇 달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때 출가를 했다면 지금도 출가승이 되었을텐데, 그 때만 해도 2월 보름날, 계를 준다는 날, 그 날 야반도주가 아니고 새벽, 새벽에 도망을 왔어요. 계 안받고. 그 때가 57년이구…그 다음해 58년에 대학교 들어갔습니다.
그때 이야기가 나왔으니, 고등학교 2학년 중반에서 3학년 초까지 두 서너달 결석을 했으니, 학교에서 야단났지요. 석 달 이상 결석한 사람을 학교에 입학이 되나. 학교가 재적이 되어 있는데, 해동고등학교가 원효학원재단였구, 그 때에 박벽안 스님이, 벽안 스님이 그 해동고등학교 이사장으로 계셨고, 또한, 경봉스님과는 사제지간인가이 되니 어찌어찌 해서 다시 제가 복학이 되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죠.
통도사 극락암에서 석 달 동안 지내면서 재미난 일이 많고, 경봉 큰스님께도 많이 배웠는데 경봉 큰스님 법문은 “니가 이세상에 왔으면 니 나름대로 연극을 해라”이겁니다. 니 나름대로 연극을 해라. 연극을 못하면은 바보다. 니 나름대로 연극을 그래 연극을 하는데 니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다.
하루는 통도사 극락암에 있다가 자장암에 갔어요. 자장암에. 금와보살이 나온다구해서. 금개구리가 나온데요. 아 그, 제가 내려와서 보니까 금와 보살이 얼굴을 쪼금 내밀고 있어요.
너는 거사불교다
사회자: 진짜 보셨어요?
목정배: 네 봤어요. 그래서 더 볼려고 올라갔더니 금와 보살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가지고 나오게 하려고 그 구멍으로 가지로 쑤시는데 자장암 원주가 뒤에서 내 머리를 잡아가지고 바위돌에다가 쾅 밀치는 겁니다. 그만 완전히 갈아졌어요.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우는동 마는동 극락암에 올라왔더니, 연못가에 경봉스님이 이미 연못가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서 “야 너 어데 갔다오느냐, 그 이마가 그게 뭐냐”그러시는 겁니다. “아 스님 자장암에 가서 금와보살 쪼금 더 볼라고 이러다가…” “야 이 자슥아, 니가 그런 짓을 하니까 뭐가 되겠냐, 니는 손오공이가 손오공이가??”
아무튼 경봉스님 밑에 있으면서 그렇게 지냈는데, 저는 참선 잘 몰라요. 참선 모르는데 하~경봉스님이 참선 가르치신다고, 아침 한 세 시간, 세 시간씩 앉는데, 두 달 동안에 금방 죽비쳤는데 조금 있으니까, 또 죽비를 쳐요. 그러니까 순간이 찰나야. ‘거 이상하다?’ 했는데 ‘내가 졸았나?’ 졸지도 않았는데. 그래 지금까지 고 통도사 극람암에 있으면서 그 두 번을 그런 경험을 했어요. 정말로 일념이 삼천이라고 하고 삼천이 일념이라고 하는 그런 순간을 맛보았는데, 지금도 그런 것을 맛볼라고 그러는데 이제는 안돼. 왜 안되느냐, 내가 완전히 속물이 되어버렸다.
그 때는 17, 8살 그 참 순함, 그 맑음이 푸른 삼매에 들어갔는데 ‘아! 이런 묘미가 있구나’ 정말로 분신삼매, 금강분신삼매, 사자분신삼매의 그런 세 시간이 압축되어 가지고 한 찰나의 금방 죽비 쳤는데 조금 있으니까 또 죽비를 쳐. 이 죽비를 왜 치나? 이런 순간이였어. 그래서 지금도, 이 이야기는 아끼는 이야기인데, 간혹 참선 삼매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면은 제가 그 때 17살에서 18살 넘어가는 그 때에 그 기분을 이야기 합니다.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정년퇴임하고 2002년 시월 달에 그 극락암에 갔더니, 그전에도 가보고 이번에도 갔는데 그 때에 내가 앉아서 했던 방의 구조는 그대로 있는데 나는 지금 이상한 몰골을 해가지고 그 법당 앞에 서성이는 걸 보고 내가 많이 타락하고 있구나. 안 그러면 타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도정을 가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 경봉스님 말씀 가운데에 “너는 앞으로 머리를 깎고 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너는 학자가 될 것이다. 너는 거사불교가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새겨지고, 그 때 머리를 깎았더라면은 더 불교를 보호하는 사람이 되었을 건데. 그래도 이렇게 지금 머리가 기르고 이렇게 불교운동하는 것도 또 어떤 내 혼자 위안이지, 뭐 부처님으로부터 받는 위안이 아니고 내가 합리화 시킨 위안을 하기 때문에 내가 좀 나쁜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 내 상좌해라
사회자: 아유~~무슨 말씀을 하세요. 그렇게 또 정말 아주 파릇파릇한 나이에 그런 묘한 맛도 느끼셨는데 출가의 유혹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 안 하셨네요.
목정배: 그 이후에 청담스님도 상좌로 만들라 그랬고 성철스님도 상좌로 만들라고…그 때는 1965년도 이후인데, 그 때는 문경 봉암사에 성철스님과 청담스님께서 거기다가 총림을 만들라고 그 불교신문사 사장하셨던 이한상 사장님하고 성철스님, 청담스님이 문경 김용사에서 그 봉암사를 우리나라의 선찰총림으로 만들려고 할 때에 말석에 끼어서 갔습니다. 갔을 때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이 서로 “너 내 상좌해라”하는 이런 말씀도 들었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 살아오면서 여러 형태로 종정스님을 종정을 지내신 여러 스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거, 저의 참 불연 중에서 고마운 연이라 생각하고 있죠.
전국순회강연과 새벽목탁석
사회자: 네, 그래요. 아주 깊은 인연을 벌써 청소년기에 또 맞으셨고, 그래서 또 불교대학으로 진학하셨고. 불교대학교, 대학에 가셔도 또 포교활동도 열심히 하셨죠?
목정배: 대학에 다닐 때부터 그 전국순회강연 같은 것도 했어요.
사회자: 대학에 들어가셔서요?
목정배: 대학에 다닐 때, 그 여름 방학 때. 전국에 순회강연 같은 것을 했어요. 68년 이후에 전국순회강연 하는데. 전국순회강연 하면 수원에서 천안, 천안에서 대전, 대전에서 김천 이런 식으로 순회강연을 했습니다.
김인덕 선생하고, 박동기 선생하고 이렇게 같이 전국순회강연을 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그 대단한 운동이지요. 그래서 그 때에 순회강연 하던 주제가 ‘영원한 생명’이었죠. 당시 양주동 박사가 그 때 대학원 원장이신데, 양주동 박사가 추천서를 써줘 그것을 전국에 불교하고 약간 관계되는 고등학교에다가 공문을 보냈죠.
그리고 차비는 어떻게 했는가. 그 때 우리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는 차비만 있으면 되요. 가서 또 뭐 어떻게 하면은 저녁도 얻어먹고, 그 다음에 차비도 얻으면은 다음 지역에 가고. 뭐 이런 식으로 그 때야 뭐 무슨 운동비, 후원비가 없고 어쨌든 어느 누구가 오백 원을 주던, 천 원을 주면 그 돈 가지고 밥 사먹고 가고 그렇게 했죠.
어떤 때는 안동역에서도 자고 그랬습니다. 안동에서 강릉가서 강릉에서 속초로 오고. 그래 전국순회강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전국순회강연전에는 부산에서 부산불교학생회 할 때 새벽 목탁석을 했어요, 목탁. 목탁을 가지고 한 팀은 초량까지 출발해서가고, 한 팀은 대신동에서 가고, 하나는 남부민동으로 해서 목탁으로 나무석가모니불해서 아침 네시에 일어나 여섯시까지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 그 때 경남여고, 부산여고, 부산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그런데 그래도 뭐 해동고등학교가 종립학교니까 해동고등학교 사람들이 많았죠. 한 육십명 모이는데 이십명 씩, 이십명 씩 편을 짜서 그렇게 부산시내를 목탁석을 했습니다. 목탁석 하는데, 참으로 굉장해요. 초파일 같은 때 하면요, 전부 다 등 켜가지고 새벽에 나와서 그랬습니다.
사회자: 시민들도 같이 동참을 하고. 네에~
목정배: 대단했어요. 근데 그런 열의가 있었는데, 요새 제등행렬 하는걸 보면 우린 옛날에 다 했어요. 그리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연극, ‘이차돈의 사’를 만들어 가지고 대각사 법당 안에서 했어요.
사회자: 연극도 하시구요.
목정배: 네에. 무대가 없으니, 담요로 막을 삼고 열고 닫고 그랬더니, 신도들이 접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좋다고 그러고 했습니다.
개인의 역사가 불교사
사회자: 아 불교 포교를 위해서는 뭐든지 다 아낌없이 다 하셨네요.
목정배: 그 때, 뭐 스무 살 전에 다 했으니까요…스무 살 전에 하다 그 다음에 대학교 들어와서는 전국순회포교도 하고 그랬죠.
지금 신도들이 그 지금 어느 절에다가 시주하는 개인의 역사사가 없잖아요. 이런 개인사를 축적하는게 불교의 역사입니다.
저는 어떤 이름 있는 사람만의 역사를 쓰지 말아라, 이겁니다. 그래 개인사를, 개개인의 개인사를 축적해서 역사를 만들자 이거야.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뭡니까. 이 개개인의 역사를 모은 게 삼국유사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무슨 큰 불사를 하면, 큰 일만 한 사람만 역사에 남는 것처럼 하는데…. 불교방송 뒤에 있는 석불사도 주지스님 이름이 나올 것이 아니라, 그 마포 석불사 다니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뭐 조그마한 등불을 밝히는데 어떻게 한다, 이런 개인사를 모아 가지고 이렇게 불교 방송국에 후원금 준 사람도 많이 낸 사람만 이름 나오는 게 아니라 백 원 냈다, 오백 원을 냈다 이런 개인사의 축적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사가 많이 있는데 뭐 부끄럽다, 이야기 할 필요없다 이러면은, 개인사가 소멸되고 나면은 사실 공적인 역사도 소멸된다. 저는 그래 봅니다.
빙빙과세, 얼음을 밟듯이 해라
사회자: 아 네, 아주 중요한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 개인의 역사가 결국 불교의 힘이 된다라는 그런 말씀이셨는데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정말 어렸을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그런데는 여러 가지 큰스님과의 만남도 있었을 테고, 어머님의 물론 영향도 있었을테지만, 그래도 또 스승의 만남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생에 있어서.
목정배: 스승 만남 참 중요하지요. 내가 동국대학교 들어와 가지고 우리 스승님 중에서 김잉석 선생님을 뵈었거든요. 김잉석 선생님은 화엄학의 대가이시며, 우리나라의 화엄학개론을 처음 쓰신 분이고, 유식도 잘 공부하시고, 그 담에 구사 이런데, 그 얼굴이 시커머서 흑승이라고 그러는데 우리 선생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담에 조명기 박사님, 장원규 선생님, 이런 분들. 그리고 임석진 스님이라고 계셨어요. 임석진 스님, 이런 훌륭한 스님. 그리고 총장이면서도 강의에 열의를 가지신 백성욱 박사님. 보통 행정일 보시다가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은, 총장실에다 학생들 오라 해가지고 강의를 하고 그랬습니다.
사회자: 그런 여러 스승님들한테, 그 당시 또 스승, 그 아주 훌륭한 스승들이 많이 계셨다고 그러셨는데요, 어떤 삶의 원칙이라던가 자세, 이런 거를 아주 확고하게 받으신거 같아요. 어떤 가르침을 받으셨습니까?
목정배: 우리 김인석 선생님은 그림자가 발라야 된다, 그림자가 본래 바르는데, 그림자가 바르는데 그림자가 발라라. 또 빙빙과세라, 빙빙과세. 빙빙과세라는 말은 얼음얼음, 얼음을 밟듯이 빙빙과세. 세상을 지나가는데 빙빙과세. 세상을 지나가는데 얼음을. 밟듯이 해라. 얼음…얇은 얼음을 밟아가듯이 가야 된다. 그리고, 늘 우리 선생님은 공부를 하실 때 보통 때는 농담을 잘하시고, 우리 선생님이 참 술을 과하게 자셨는데, 술 자실 때 술이 많이 오르실 때는 불교교리를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몽당연필을 하나 갖고, 수첩을 놓고 모든 것을 받아 적어 공부했습니다.
유식강의 하시는데 오성각별 이런 설명을 하는데 보통 때는 안 하시고, 술이 한잔 딱 되면은 하시기 때문에 수첩을 늘 갖고 다니다가 살짝 쓰면 이 놈!!‚ 또 쓴다고 야단치시거든요. 그런 식으로 정말 공부를 공부 안 하는 척 하면서도 공부를 하고, 선생님도 안 가르치는 척 하면서 가르치시고. 그렇게 소위 말하는 사자상승 되는 것이 어떤 뭐랄까, 묘한 테크닉 위에서 제가 성장했습니다.
유마경 승만경 법화경
사회자: 어디에서든 들어 볼 수도 없고, 찾아 볼 수도 없는 사제지간의 그 끈끈한 묘한 정 같은 거 느껴지게 됩니다. 네 그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시고, 또 나름대로 많은 경전도 탐독하셨으리라 봐요. 어떤 경전을 가장 그 좋아하셨습니까?
목정배: 저는 원시경전 가운데에 법구경이라 할까 숫타니파타가 그래도 부처님 경전가운데서 그것이 부처님의 육성인 남아있는 것, 또 불설아미타경, 불설대반야경…불설해가지고 뭐 보통사람들이 뭐 부처님 경전이 아니다 하지만 언어 형태상 가장 부처님의 그 육성이 원시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숫타니파타나 달마파타가 아닌가 이래 법구경을 보는데 그래도 제가 한국불교를 위해서는 세 가지 경전이 있어야 된다 이래 봅니다.
첫 째는 그 남성을 위해서는 유마경, 여성을 위해서는 승만경, 그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아우르는데는 법화경이 좋지 않나, 이렇게 보는데, 그러면은 우리 한국불교하고 조금 상치되는게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금강경을 주로 하고 화엄경을 주로 하고 있는데, 너무 이상적이고 실리 위주의 종교보다도 인간이 사회와 어떻게 보조를 맞춰야 되느냐, 그러면은 여성은 승만경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남성은 유마경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이 두 부류가 한 계단 높은 제법실상의 법화경에다가 초점을 맞추어서 가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서 그 두 경 뿐만 아니라 한국논사의 논소를 공부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요사이는 원효의 법화경 종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아아 그러시군요. 네, 네, 선생님 만나뵈려구요, 여러 가지 많은 질문 준비를 계속 많이 했는데 세상에 이렇게 시간이 금방 갔네요. 네, 내일 이 시간 또 기약해야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삶의 영향을 주고 바르게 이끌어 주는 분은 모두가 스승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 역시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재산이 되겠지요. BBS 초대석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