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약간 아련한 기억이 되었지만 제 첫 직장은 제약회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지점 첫 여자 영업사원으로, 고지식한 의사들과 약사들을 만나러 다닌다는게 무척 힘들기는 했지만 배운 것도 많았어요.
전공과는 전혀 다른 길이어서였을까, 연수원에서부터 신기한게 정말 많았어요. 보통 약의 부작용이라 그러면 그냥 속이 좀 불편한 정도, 졸린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변비나 배탈을 일으키는 약도 있고, 부작용이 발모나 체중 감소인 약도 있었죠. 그런가하면 여자가 손대거나 복용하면 불임이 되는 위험한 약도 있었습니다.
제가 있었던 회사는 특히 시럽제를 아주 맛나게 잘 만드는 회사로도 유명했는데요, 하루는 나름 약에 대해 잘 안답시고 감기에 효과가 있는 딸기 시럽약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애기들용 약이었기에 좀 많이 먹어도 되겠거니 하고 맛있다며 마구 마셨죠.
그러고 업무를 보러 약국을 갔는데 머리가 핑핑 도는게 도저히 서있을 힘도 없이 졸리더라구요. 약사님한테 그 일을 이야기 했더니 뭘 마셨는지를 듣고는 바로 간이침대에 저를 재우셨습니다. 제가 먹었던 약의 페닐레프린과 클로르페니라민이란 성분은 졸음을 유발할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과다 복용을 한지라 운전을 시키면 큰일 나겠다 싶으셨던거죠.
빛이 있으면 반드시 어둠이 있는 법이라 하고, 좋은점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점이 있는 법이라고 합니다. 약이란건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거나 혹은 감소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 어떤 약도 부작용이 없는 약은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비타민도 과다 복용하면 부작용이 있는데 하물며 화학 성분인 약이 그보다 안전할리 없겠죠.
일전에 꽤나 충격적인 뉴스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학생들이 결석이나 조퇴를 하기 위해 게보린을 과다 복용하는 일이 적발됐다는 기사였는데요, 게보린에 포함된 이소프로필안티피린이란 성분은 과다 복용시 소화관 내 출혈을 일으킬 수 있고 이로 인해 피를 토해내거나 식은땀, 현기증 등의 증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예요.
그뿐만 아닙니다. 게보린의 주요 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타이레놀, 펜잘의 성분이기도 해요. 이 성분을 지속적으로 복용하면 간에 손상을 줄 수 있는데다가 과다 복용하게 되면 급성 간부전으로 정말 큰일이 있을 수 있다는점, 혹시 알고 계셨나요?
우리가 약국에서 가장 많이 구입하는 약이 아마도 타이레놀, 펜잘, 게보린일거예요. 약국에서 판매되도 제어가 되지 않는 약이, 편의점에서 판매되면 제어가 될까요? 어차피 제어 안되는게 매한가지라면 그냥 편하게 편의점으로 오픈하는게 맞는걸까요?
분명 그렇진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식품과 약이 구분지어지는 만큼 약은 전문적인 분야이고 누군가 약의 판매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약국에서만 판매되어야 합니다.
또 혹자는 편의점에서 약을 판매해야 응급시 약을 구하기 쉬워지지 않냐고 주장하지만 약국에서 판매하는 약은 대부분 정말 응급 상황에 사용될만한 약들이 아닙니다. 당장 타이레놀, 펜잘, 게보린을 먹지 못해 죽을 사람은 없어요. 불편하고 심각한 상태라면 약국을 찾을 것이 아니라 응급실을 찾아야 맞지 않을까요?
약을 편의점에서 판매하자는 주장에 대해 저는 굉장히 부정적인 편입니다만, 사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데에는 약사들의 잘못도 큽니다. 약의 수익에는 약사의 복용지도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사실 특별히 복약지도라고 할만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약국들은 크게 없어 논란이 되고도 있죠. 소비자들이 약국의 약 판매에 대한 신뢰와 정당성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편의성만을 따져서 약을 편의점에서 판매하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일테니까요.
타이레놀, 펜잘, 게보린의 예만 들더라도 약사에게 판매 단속을 시키는 것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판매 단속을 시키는 것, 어느게 더 나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듯 합니다. 인체의 신비는 아직 모두 밝혀진바가 없으며 약의 부작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아세트아미노펜의 과다복용, 오복용으로 연간 5만6천여명이 응급실로 실려 가고 있고 매년 사망자가 450여명에 달한다는데, 그래도 정말 편의점 판매가 최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