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소크라테스를 그리 좋아했던건 아니다.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유명인에 대한 반감이랄까. 왠지 고리타분해 보이고 구시대의 대표주자로 보였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정말 하나의 벅차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현자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사형을 언도받는다. 소크라테스에게 씌워진 죄명은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것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라는 것이었다. 대화편 '변명'은 이러한 죄명에 맞서서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행한 변론이다.
변론에도 불구하고, 500인의 법정은 소크라테스에게 360:240 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은 아테네 민주정치에 우민 통치라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오늘날 누구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의 원인은 아테네의 우매한 민중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등에'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민중의 어리석음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고받은 그 순간에서도, '등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눈물로 자비를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는 재판관들이 '옳고 그른 것을 음미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게 하도록'노력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의 그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지 못해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임박해서도 자신의 이로움보다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순간의
이익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준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옳음'을 위해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광신적인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였다.
판결전 변론은 이러하다.
"편견에 대한 변론:고발자는 나를 다음과 같은 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비의를 탐구하고 설득력이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보다 더 그럴 듯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신론적인 행동을 공공연히 행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모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함은 사실, 나를 고발한 멜레투스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이 것은 오래 전부터 나에게 가해져 온 풍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고발인은 멜레투스가 아니라, 이전부터 나돌던
'풍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풍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군중'일 뿐
고발할 수 있는 한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풍문이라는 '오래된 고발자'에게 먼저 변론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친구 카에레폰이 델피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신탁의 결과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신탁의 겨로가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신탁이 옳은지를 알기 위해서 세상에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나보다 현명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를 검토할 때마다 나느 그들이 진정 현명한 것이 아니라,
'현명해 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무지할
뿐이었다. 내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반면,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지혜를 검증하려고 했던 나의 행위는 진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에게는 무척 불쾌했을 것이다. 내가 모함을 받은 이유는 바로 이 것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그들의 지혜가 허세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서 그들을 불쾌하게 한 것 말이다. 나를 추종하던 젊은이들이 나의 행동을 모방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질문을 할 때, 그들은 올바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화나게 했고, 그들은 나에게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비난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철학자들에게 가하는 상투적인 비판을 던졌다. '자연(NATURE)'의 비의를
캐고 있다.''무신론자다', '약한 논변을 강하게 한다'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 변론을 할 때 소크라테스의 맘은 어떠했을까? 내가 저 글을 읽고
받은 느낌처럼 처연하게 당당했을까? 왠지 소크라테스의 표정은 미세하나마 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랬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랬을것만 같다.
억울하게 죽어야만 하는 그 상황 앞에서 냉철하고 정확하게 문제점을
꼬집어 내면서 변론하는 그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른다.
"고발자들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멜레투스와 고발자들은
그들이 고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았다. 멜레투스는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나
외의 모든 아테네 시민들은 젊은이들을 옳게 인도한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조련시킬 때 말을 훌륭하게 길들이는 사람은 숙달된 조련사일 뿐이다. 일반 대중은 말의 버릇을 망쳐 놀 뿐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을 옳게 교육시키는 것은,
옳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멜레투스의 말에 따르면 나는 나쁜 시민이다. 어떤 사람도
나쁜 사람 곁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멜레투스는 내가
무신론자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모순된 것이다. 그는
내가 철저한 무신론자이면서 초현상적인 현상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초자연적 존재는 믿지 않으면서
초자연적 현상은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자기를 죽이려는 소위 힘 있는 자들 앞에서 그는 그들의 우매함을 짚어낸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재검토함:당신들은 재판을 받는 나의 태도가 건방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러나 사람은 무릇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나에게 사람들의 삶이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지혜가 과연 진정한 지혜인지를 검토하게끔 하였다. (이것은 신탁, 꿈 등을 통하여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면, 그것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당신들으리 삶을 검토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등에를 잃게되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왜 내가 의회에서 이러한 작업을 행하지
않고 개인적으로만 했는가 하고 비판할 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의회에서 이런 일을 행하였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이로운 것을 주기 전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공적으로 당신들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죽음이 두려워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레온의 체포를 반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고발자들은 내가 당신들을 타락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때문에 타락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면 왜 멜레투스는 그들을 부르지
않는가? 오히려 나와 함께 삶과 지혜를 검증했던 사람들은 나를
옹호하려고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신념이 강하게 드러나있는 대목이다. 어찌보면 자신에
대한 자만감 역시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만감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확고한 한
사람이 가지는 당연한 태도로 보이는 것은 귀 얇은 나의 선입견일까?
"결론: 재판관들의 자비에 호소하지 않음:나는 당신들에게
가족이나 눈물로 호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들과 국가에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재판을 함에 있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공정히 가릴 것을 선서하였다. 눈물이나 가족에
의한 호소로 당신들의 판단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이롭게 되는 방향으로
판결 내리는 것을 신과 당신들에게 맡기려 한다."
예전부터 익히 들어오던 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재판관들 앞에서 눈물로서 자비를 호소하지 않고 조목조목 논리에 맞춰서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는 얘기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하나의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 이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국가에 해롭다고 얘기하는 부분은 그의
신념을 드러내는 또 한 부분이다.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한 연설: 나는 판결의 결과가 나
자신의 논변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는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다신들 앞에서 울며 용서를 호소하지 않은 것이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병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도망가 버리면 된다. 그러나 사악함을 피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빠르다. 나는 죽음에 따라잡혔지만, 당신들은 사악함에 따라잡힐 것이다."
사악해지느니 죽기를 원하는 소크라테스. 그는 분명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다. 사형을 선고 당하고도 그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똑똑히 밝히고 있는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필요한 용기있는 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죄방면을 선고한 사람들에 대한 연설: 당신들은 나의 운명이 좋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가 악한 일을
할 때마다 나에게 충고를 보냈던 나의 '다이몬'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신화에서처럼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어느 것이더라도 죽음은 좋은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죽음이란 깊은 휴식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 다른 세계에서는 신들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것이며, 또한 삶에 대한 검토를 현명한 사람들과 계속할 수 있기게 좋은 것이다.
당신들도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옳은 사람을 신이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나의 적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은
부탁하고 싶다. 만약 나의 아들이 성장하여 선함 자체보다 돈이나
명예에 더 신경 쓴다면, 그리고 그 자신을 이유 없이 더 높게 보고 있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한 방식으로 나의 아들을 설득해 달라.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 모두는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가야 한다. 나는 죽음으로, 당신들은 삶으로.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 "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이 이 연설을 듣고 과연 무슨 느낌을 받았을까.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그는 그만큰 그 자신에
대한 확신에 가득차 있었을까? 모든 일이 이렇게 확신을 가지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일까? 아니 소크라테스도 죽음이 두렵긴 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죽음을 밀어내고 그가 받아야 할 양심적 가책이나 신념에의 흠집이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저번에 교수님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의 글을 많이 읽어 보는게 좋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들이 글은 딱딱한 느낌으로 다가오기가 쉽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남긴 말들이라 그런가..
가슴 깊이 벅찬 것이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리만큼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가지고 그대로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가 새삼 다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