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은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이 조계종 중앙신도회 산하 인재개발원 초청으로 1년간 진행하는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강의 내용을 격주로 연재한다. 연재되는 내용은 매월 한차례 씩 이어지는 강의를 녹취해 요약한 것이며,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했다. 「법보신문」은 고우 스님이 직접 감수한 ‘육조단경 대강좌’ 지상중계를 통해 보다 많은 독자 여러분이 『육조단경』의 정수를 만나기 바란다. 편집자
요즘 세상이 바쁘다고 하는데, 이렇게 별로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의 강의를 들으려 오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실제 우리가 육조 혜능 스님의 단경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기에게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 「단경」 강의는 대부분 불자들이 듣겠지만, 혹 불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금강경」에도 나와 있지만, “불교가 불교 아니기 때문에 불교다.” “부처님이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라고 한다. 불교는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육조(638~713) 스님께서 존재 실상을 깨닫고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신 말씀이 「단경」이다. 여기에는 종교, 인종, 이데올로기, 민족도 초월하고, 다 초월한다. 그래서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육조 스님께서 이것을 몸으로 체험하시고 밝혀놓은 책이다. 또 우리 존재에 대해 체험한 내용이 우리를 무한히 행복하게 해준다. 여기에 「육조단경」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과학자들도 이 우주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우리 존재의 실상을 체험하고 알게 된 것이 굉장히 중요한 데, 그것이 우리를 평화롭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또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나 부처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에게는 없고 그냥 어떤 평범한 사실을 규명한 것이라면 오늘날 불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선(禪) 특히 「육조단경」 같은 책들이 1,300년이나 전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육조 스님이 발견한 그 세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안다면 이 지구상에 전쟁은 없어진다. 누구하고 다툼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여러 분야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 갈등도 이 내용을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하루아침에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이 「육조단경」 강의를 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물론 세상 어느 나라에나 대립 갈등하고 싸우는 일이 다 있다. 또 어느 사회에도 있고, 어느 가정에도 있다. 더 축소해보면 개인도 자기와 자기가 싸운다.
그런데 나 혼자 생각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좀 심한 것 같다. 조선조 500년 동안 자기와 뜻이 맞지 않다고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일도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목을 쳤다고 한다. 이런 것이 원인이 되어 일제 36년을 핍박받았다. 그만큼 했으면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해방 이후에 또, 남북이 갈렸다. 그리고 또, 남쪽에서는 어땠는가?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나면 오순도순 잘 살 것 같았는데 난데없이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갈등하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것을 만들어 갈등할 것인가!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불교에 있고, 이 「육조단경」에 있다. 공장을 몇 십 개, 몇 백 개 지어 생산하는 일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노사 관계를 예로 들면, 1년에 노-사 대립으로 몇 조원 손해가 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육조단경」에 담겨 있는 핵심사상만 배운다면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그런 노-사가 서로 존중하고 위하는 인간다운 관계로 변화할 수 있다. 그러면 파업과 같은 소모적인 갈등이 필요 없어진다. 손해 본 몇 조원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나는 이 선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시민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 우리 사회 전반의 갈등, 대립을 없애는데 앞장서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로 이 운동을 확산시켜 보고 싶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선 센터’를 세웠으면 하는데 아직 인연이 안되고 있다. 어쨌든 개인이나 가정, 사회, 국가, 국제적인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데 이 선이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다. 이 「단경」 강의를 통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부족한 사람이지만, 마음을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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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문화공연장에서 열린 이번 강좌에는 200여 명의 대중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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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육조단경」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갠지스강 모래수로 비유한다.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많은 보물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부처님 말씀 한 마디를 이해하고 남에게 전해주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또, 자기 몸을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 나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 한마디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한테 전해주는 그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셨듯이 이 「단경」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지금 우리 한국에는 12,000명의 스님들이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많은 수행자들이 전문가가 못 되고 엉거주춤하게 수행하는 이유가 뭐냐?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공부는 재가-출가가 없다. 나중에 나오지만, 육조 스님은 이 형상만 가지고 재가-출가를 나누지 않고 마음으로 나눴다. 부처님 법을 믿고 그 가치를 알고 생활하면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은 출가다. 하지만 형상은 머리를 깎고 가사도 입었지만 부처님 말씀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하게 되면 출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재가자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뜻도 있다.
그래서 이 「단경」 공부도 전문가가 하는 공부라 생각하지 말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 머리말(序言)
혜능(惠能) 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니 그때 그 법좌 아래에는 비구, 비구니, 도교인, 속인이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刺史)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생 등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할 때, 자사가 문인(門人) 법해(法海)로 하여금 기록을 모아 널리 유행케 하여 후대(後代)에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서로 전해주게 함이라. 의지하고 믿는 바가 있어 받들고 계승하기 위해서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이 「단경」을 설한 대범사는 중국 광동성 소관시에 있는 절로, 현재는 ‘대감사(大鑑寺)’라 한다. 대범사를 대감사로 고친 것은 당나라 황제가 육조 스님이 입적하자 ‘대감(大鑑)’이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서언(序言)이란 머리말인데, 「단경」을 설한 이유를 밝혔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뭐냐?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했다.”
이 뜻을 알면, 「단경」을 다 아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자. 여기에 ‘승니(僧尼)’는 비구, 비구니이고, 도속(道俗)은 도교를 배우는 사람, 또 재가자 1만여 인이 있었고, 유교 선비와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기를 청했다.”
당시 중국에는 기독교가 없었고, 유교, 도교, 불교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 한 자리에 모였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뜻이 있다.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육조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왔다는 것이다. 이 「육조단경」을 듣게 되면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하는 그 종지를 깨닫게 된다. 그 종지를 깨달으면 우리 마음이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 선은 모든 종교를 초월한다. 실제 신부, 수녀님들도 참선을 많이 한다.
「단경」을 설할 당시 소주 지방의 위거라는 관리가 법해 스님에게 내용을 기록해서 먼 후대 사람에게도 이것을 듣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자해서 기록하여 남겨 우리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좋은 뜻이 없었으면 우리도 이 「단경」 법문을 들을 수 없었다.
855호 [2006-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