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착취에 시달린 백성의 살림은 그야말로 도탄에 허덕이고 따라서 민심조차 흉흉하여 팔도강산 가는 곳마다 조용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 있는 양반들은 물론 그들과 결탁한 부유한 장사치들만은 금준미주(金樽美酒) 옥반가효(玉盤가肴) 로 홀로 태평성대의 별유천지를 구가하고 있었으니 이 댁 다방골 갑부 변승업의 집에서도 때아닌 풍악소리가 유량하구나.
((풍악소리 계속된다. 이윽고 상인갑과 을이 좌하수 일각문으로 등장. 무대 중앙에서 정면을 향하여 서서 수작을 주고 받는다.))
[갑] 귀신이 곡헐 노릇이지. 도시 이게 어떻게 돼먹은 심판이어 엉! 동갑 이 집 쥔 놈은 지금쯤은 포도청에 묶여서 죽지 않을 정도루 늑진 곤장이나 맞구 있서야 얘기의 앞뒤가 맞는 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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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누가 아니래?
[갑] 아니 동갑! 일을 누가 저질러 놓구설랑 아까부텀 「누가 아니래」만 되풀이 험. 어떡허지?
[을] 왜! 나만 잘못이야? 동갑두---
[갑] 쉬! 저기 상노놈들이 듣구있네. 우리끼리 왁자지껄 시비 가릴때가 아냐.
[을] 그렇지. 참! 억쇠야 너 안에 가서 술상이나 좀 정갈히 봐오련.
[억쇠] (퇴장을 기다렸다가) 예. (상노1과 함께 좌상수 안채로 퇴장)
[갑] 동갑 자초지종 다시 한번 찬찬히 얘길 좀 해 보시지? 그래 무슨 선관(仙官) 의 조화가 있어서 이 집 변가놈이 백방되어 나왔으며 더구나 옥에 갇힌 몸이 무슨 재주루 가봇쪽 같은 진사 감툴 떼냈느냐 말일세. 이젠 변가놈은 양반이야. 엉? 우리완 지체가 다르단 말이야. 「저놈들 잡아 대령해라」 험, 꼼짝 못허구 당허야 헐 우리 처지란 말야, 이 맹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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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누가 아니래! 모든게 뒷줄인걸 머.
[갑] 뒷줄이 있으리란 생각두 않구, 그래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을] 내야 뒷줄이래야 기껏 포도청에 인정이나 써서 곤장 몇 대 감헐정두루 생각했지. 누가 그 뒷줄이 저 은행나무 줄기처럼 우악스러울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어?
[변] 헛! 운종가에서 날 몰아내서 무슨 덕을 본다구? 철따구니 없는 것들이라니--- 그래 날 집어 넣음 모든게 제것이 될 줄 알구?
[갑, 을] (찔린다) 아무렴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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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관 쓴 불한당에게 좋은 일 해줄 뿐이지.
[갑, 을] (쩔쩔맨다) 하늘보구 침 뱉깁죠.
[변] 어서들 올라와 내 술 한잔 받게나.
[갑, 을] (캥긴다) 예?--- 녜---
((갑, 을 기생의 뒤를 따라 마루로 올라 저 만치 꿇어 앉는다))
[변] 양반이 주는 술이니--- 헛, 헛.
[을] (돌아 앉아 마신다)
[변] 몸은 왜 비비꼬나? 바루 앉지 못허구?
[을] 헤, 헤, 헤, 자넨 아니 영감은 이젠 양반이라---
[변] 뭐 말라 죽은게 양반인구? 빚 좋은 개살구라네.
[갑] (도포자락을 매만지며) 개살구두 이런걸 입나요?
[변] 노상 저보담 한 치라두 지체높은 놈의 눈칠 봐야 허는가 험. 때룬 우리네 장사치 앞에서도 아양을 떨어야 허는 따분헌 족속인걸. 그 뿐인감? 그래두 명색이 양반이니 사람 앞에선 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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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을 조심해야거든?
[갑, 을] 그렇겠읍죠.
[변] 기침의 가래침일랑 지근지근 씹어 넘겨야 허구---
[갑, 을] 지근지근?
[변] 양반님네 의례 준칙일세. 걸음걸인 느릿느릿 신축은 딸딸 끌어야 헌다나.
[갑, 을] 따알 딸?
[변] 손엔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의 오르내림두 물어두 안되구---
[갑] 둔이 싫어?
[을] 쌀값두 몰라?
[변] 날씨가 무더워두 버선을 벗지 말 것이며 또는 아무리 추워두 화롯전에 손을 쪼이지 말 것이며---
[갑, 을]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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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볼이 오목파이두룩 담밸 빨이 들여선 못쓴다네
[갑, 을] 허, 허, 허?
[변] 막걸릴 마신 뒤엔 수염을 쭈욱 빨지 말것이며--- .
[갑] 그 준칙. 어지간 허군요?
[변] 그러나 그건 걸치례구--- 얼빵인 따루 있지 양반보담 더 큰 이문 나는 장사두 또 없다던데? (홍패를 꺼낸다) 이 홍패라는게 기리루 침, 두 자두 못 되네만 이게 바루 돈 자루란 말일세 끌어내서 쓰구 쓰구 또 써두 무궁무진한 돈 자루야.
[을] 흥부네 박타기 조활 부리는군?
[변] 깊숙헌 안방에서 귀개루 기생이나 놀리다가 돈이 소용됨 동네 부잘 잡아다가 「이눔 네가 네 죄를--- !」 으, 흐, 흐, 흐.
[갑] 그런 신통력 있는 귀물을 어디서 구했우?
[변] 가던 날이 장날이었지. (일어서며)
[을] 장터에서두 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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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내가 들었던 감방에 쬐끄만 고을 원님 하나가 잡혀 들이 왔겠다--- .
[갑] 그야말루 관 쓴 도둑이었구먼?
[변] 온 천만에! 옥에 갇힌 벼슬아치야말루 벼슬아치 중에선 청렴결백헌 축이지.
[갑, 을] --- ?
[변] 먹지를 못했으니 상납헐 돈이 어디서나?
[갑] 하, 하? 그 양반 바보로군.
[변] 잡혀온 이 양반은 백성에게 꿔줬던 양곡조차 거둬들이지 못헌 무골호인이야.
[을] 거 미물이로군.
[변] 그럭저럭 해를 포개구 보니 나라에 바칠 환자(還子) 만두 천섬이 넘더라 이 말씸이야.
[갑] 개 팔아 두량만두 못허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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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그러던 어떤날 관찰사가 관곡의 출납을 검열허구 보니 천섬쌀이 축났더라 이 말씸이야 원님이지만 어쩌노? 밧줄을 칠 수밖에. 양반놈들의 체모가 상호간에 말씸이 아니지.
[갑] 공연히 벌집을 건드렸구먼?
[변] 그래 이 사연을 듣구 운종가의 의협남아 변승업이 손을 꽂구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갑, 을] 암!
[변] 「이는 원님 한 사람의 불명예가 아니오라 사대부 전체에 관한 것이로소이다. 소인은 비록 운종가 장사치에 불과하오나 반상의 질서가 문란해짐을 참아 좌시 할 수 없아오니 소인으로 하여금 양곡 천 섬을 대신 환납케 하옵시오.」 이랬것다.
[을] 이문은 얼마루 허구?
[변] 이문을 따질 경운가? 이 소릴 듣구나서 이 선량허구 착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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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님이 그냥 있을 수 있겠어? 「여보슈 그럼 내 진사 당신이 가지슈. 난 백방되니 좋구 당신은 양반되어 좋은 일 아뇨?」
[갑] 헤, 헤 누이 좋구 매부 좋구?
[변] 그래서--- 거간이나 구문 한푼 없이 옥중에서 거래가 성립된 걸세.
[을] (홍패를 매만지며) 그래두 요까짓껏 하나에 천섬은 좀 비싸다--- 어디 좀 싼걸루 하나 없을까? 천섬이나--- 기껏놔서 백--- 섬, 짜리--- 쯤?
[변] 여보게, 운종가에 그런 것 두 셋씩 있어 뭣에 쓰려나? 하남 충분허지.
[을] (갑에게 작은 소리로) 돌려가믄성 세 놓아 먹을려구--- 흥!
[변] 문제는 홍패로 끝난게 아닐세. 이 사연이 드디어 (엄숙히) 형조판서 대감으로 해서 사감마마에게 까지 알리게 되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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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을] 상감마마까지?
[변] 전교에 가로되--- 「군자로다 부자여.」
[갑, 을] 「군자로다 부자여?」
[변] 「양반답고나 부자요.」
[갑, 을] 「양반답고나 부자요?」
[변] 「곡식이 많되 아직까지 않음은 정의에 불탐이오. 남의 어려움에 용맹스럽게 돌봐줌은 어진 마음이오 낮은 것을 미워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함은 슬기있는 일일지니--- .」
[을] 「슬기 있는--- ?」
[변] 「일일지니--- 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갑, 을] 「일일지니--- 양반이로다」
[변] (호령하듯) 「빨리 입궐케 해라!」
[갑, 을] 이크!
[갑] (을에게) 헛소문이 아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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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여, 여, 영가암---
[변] 이런 사연으루 해서--- 내 앞길이 훤히 틔었단 말일세. 알겠나? 삼정승 부러워 말게. 벌써부터 서슬이 푸른 양반님네들이 우리 상놈을 뵙자구 집 문턱이 닳을 지경이 아닌가?
[을] 우린 사농공상 중에서두 맨 꼴진데?
[변] 꼴지가 꼭질 좀 부려먹음 어때? 헛, 헛--- .
((갑,을 완전히 안심. 사랑에서 풍악소리 높아지며 훤소.))
[변] 저 소릴 좀 들어보게. 한 패가 떠나더니만 또 다른 한패가 밀려드는가 부네.
((억쇠 좌하수에서 황급히 등장. 정자 앞에 와서 아뢴다))
[억쇠] 마님 왔어요. 왔--- 아니 오셨어요.
[변] 왔어? 헛, 헛, 왔겠지. 그리구 또 오겠지! 내가 온담 오는거야. 사랑에서 좀 기다리시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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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쇠] 기다리겝쇼?
[변] (갑, 을에게) 내 말 알겠지? 운종가에선 진사 하남 충분허다는 걸? 자네들일랑 아예 허탕스럽게 돈 쓸 생각 말게. 자네 돈이자 내 돈이구, 내 돈이자 운종가 돈 아닌가? 썩어내다 버릴지언정 북촌에 갔다가 바칠 순 없잖어? 헛, 헛--- 양반놈들이 돈을 쥐물락거리게 됨 이야말루 범에 날갤세.
[변] 뭐, 삼청동 대감께서. 헛, 서인 남인이 번갈아 들구 나는구나. 한땐 나는 새두 떨어뜨린다던 남인 출신 원임 대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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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원님대신이 다방골 행찰 하셨어?
((갑, 을 요지경 속이다.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변승업 점잖게 억쇠 뒤를 따라 좌하수로 퇴장. 갑, 을 뜰에서 맴돌다가 풍악소리 커지니 엎치락 뒷치락 은행나무에 올라 새둥지를 틀고 아래를 굽어본다. 변승업 삼청동 대감을 옹위하듯 다시 등장 정자로 안내한다. 억쇠 봉물짐을 걸머진 상노들을 인도하여 등장. 풍악소리 차츰 잦는다.))
[변] 누옥을 찾아 은밀헌 말씀이 있으시다 하오니 어찌 된 소관사이온지 황미하옵기 그지 없아옵니다. 여기 후원이 그래두 좀 조용 하옵지요.
[대감] 내가 어찌 영감이 백방됐단 소식을 듣구 그냥 집에 박혀 있을 수가 있으리오? (상노들에게) 얘들아, 그거 어서 안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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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다가 실내마님께 보여 드려라. 어서 이 댁에서야 깊은 바다에서 산호를 따온들 눈에 차리오만 헛, 헛.
[변] 이것들이 뭡니까?
[대감] 뭐 대수롭지 않은거요. 변진사 기특허지 않소? 내가 서인에게 몰려 낙척불우의 신세루 두문불출 집거하는 몸이로되 그래두 옛 은의를 잊지 않음인지 가끔 고을 토산물이나마 꿰어차구 찾아오는 수령 방백두 없지 않구려. 서인 천하에서 벼슬아치가 남인의 지붕밑을 드나들다니--- .
[변] 대감마님의 인덕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대감] 암! 다방골 변진사 영감이 그저 요즘에 와선 날 원두쟁이 쓴 오이 보듯 해서 좀 섭섭할 따름이지. 허, 허, 허--- . 웃구 받아 주시오.
[변] 온 별 당찮은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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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업 지긋이 눈칫. 억쇠 알아 채리고 상노들을 좌상수 일각문으로 인도 안채로 퇴장. 대감, 은행나무의 갑, 을 본다))
[대감] 역시 부잣집이라 다르군. 영감댁엔 사람 열리는 나무두 있구려?
[변] (나무로 눈을 흘긴다)
[을] 저, 은행을 따려구--- 아니 마악 따가지구 물러가려던 참이 올시다.
[대감] 헛! 내가 축객을 헐 수야 있겠나? 이리들 올라오우.
[갑] 아, 아니올시다. 소인네들은 하찮은 장사치 올시다.
[대감] (위선적으로) 장사치가 어쨌단 말씀이오?
[을] (갑에게) 「말심이오.」란다?
[대감] 오늘 같은 국가 존망지추에 상하 귀천이 어딨으며 반상의 구별이 무슨 쓸데가 있오. 엉? 다 함께 걱정해두 이 난국을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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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기 힘들겠거든--- .
[갑] (을과 「마임」으로 한창 의논한 끝에) 그러나 상인은 상인이 올시다.
[을] 맨 꼴지 올시다.
[대감] 허! 모르는 말씀!
[갑, 을] (서로 보며) 또 「말씸」 이란다?
[대감] 왕후장상이 어디 씨가 따루 있으며--- ?
[갑, 을] (울상이 되어) 소인넨 맨 밑바닥 올시다. 대감마님.
[대감] 맨 꼭짐 제일인가? 빚 좋은 개살구지.
[갑] (을에게) 변가놈 말과 같다!
[을] 초탈했어
[갑, 을] 그러나 소인넨 쌍놈이 올시다.
[대감] 그럴수록 우린 손을 잡아야지.
[갑] 손을 잡는다닙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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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인네 손인갑쇼?
[대감] 임진왜란 이후 백성은--- .
[갑, 을] 예. 그쯤은 알구 있읍죠.
[대감] 초근목피로 근근 연명허는데 우린 어째서 삼백예쉰날을 주지육림속에서--- .
[변] 죄송합니다.
[대감] 아, 아니 때로는 그럴수두 있지만서두--- 어, 어험! 그보다두 궁중에서는 간신배들이 우으로는 상감을 둘러싸서 총명을 가피우구. 아래로는 오직 백성의 입을 막기에 힘을 쓰니 이러구서두 나라의 앞날이 평온헐까?
[을] (갑에게) 어디서 듣던 말 같다.
[갑] (을에게) 남산골 샌님 닮았는데?
[대감] 어! 그런 불칙스런 실학파 놈과는 다르지! 자, 어서들 내려와서 이리 올라 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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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을] (못 믿겠다는 눈치)
[변] 대감마님 분부시니 어서들 내려 오게나.
((갑, 을 내려와서 네발걸음으로 대청에 올라 머리를 조아린다.))
[대감] 남산골 샌님들 때문에 자네들 입장두 난처해 졌지 뭔가?
[갑, 을] 지당하옵신 말씸.
[대감] 생각해 보오. 그래 청국에서 약제나 비단 좀 들여 왔기로서니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래 장사허는 사람이 돈 좀 벌자는 것이 그토록 못마땅한 것일까? 공연히 배가 아파서---
[갑, 을] 심술이 나서 그러는 겁죠!
[대감] 암! 그저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요놈만!
((일동 깜짝 대감을 보니 손가락으로 둥그레미를 그렸다. 안심.))
[대감] 있으며언--- ! 어서 가까이들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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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갑에게) 이번엔 「오게나」다?
((갑, 을 대감 앞까지 기어간다. 대감 기생을 시켜 술을 권한다. 갑, 을 한숨에 들이키고 당돌하게도 대감에게 잔을 돌린다))
[변] 여보게 자네들 환장했나?
[갑, 을] 어?
[변] 어느 안전이라구. 예의범절두 모르구 이렇듯 호탕헌가?
[대감] 변진사아. 마시구 노는 자리에선 상하를 가릴 것이 아니라구.
[변] 황공하옵니다. 그러나 대감 마님께서 항상 소인네 상인배에게 너무 과분한 염려를 해주셔서 가끔 이렇듯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답니다.
[대감] 흐, 흐. 변진사두! 내가 당신네들께 좀 기대려는 마당에 예의범절이 다 무슨 소용이오?
[변] 기대라닙쇼?
[대감] 헤, 헤--- 다 들었어. 다 들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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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예?
[대감] 엥이, 공연히 시침일 떼누라누? 어젯밤에 입궐 했었다지오. 영감?
[변] 아, 예--- .
[갑] (신이 나서) 틀림없습니다.
[을] 예! 우리 변진사 나으리가 입궐 했읍죠.
[대감] 삼청동 골목까지 소문이 자자허단 말요 (수연히) 우리 남인들이 묘당에서 물러난지 이미 여러 해를 거듭했지만 한번 상감 눈 밖에 난 뒤에야, 어디 용안을 뵈올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변] 음지가 양지 될 날두 있지 않겠습니까--- ?
[대감] 휴우! 그 소릴 믿구 이렇게 허송 세월을 하구 있지않소? 내나이 머지않아 칠순이오. 영감 사람 좀 살리우. 영감 은혜는 내 결초보은 하리다 예? 영감, 신라 경혜왕 후손님 어떻구 문성 최씸 뭣허구 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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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은 어디다 써먹소? 그저 이눔 (둥그레미를 그리며) 이눔이 있어야지! 변진사. 이눔만 있음 권력이 생기구 권력이 생김 이눔이 저절루 뒤따르기 마련이니 이건 만고 불변의 법칙 아뇨? 여보, 변진사, 돈 없는 양반이란 이빨없는 호랑이요, 핏줄 없는 상인이란 짝 없는 기러기라요 영가암! 영감과 내 문벌 관록이 합치는 날엔 무서울게 무엇이며 못 헐짓이 뭣이겠오? 범에 날개 아니오?
[을] (갑에게) 그게 우환이랬어!
[대감] 그래 상감마마께선 나랏일에 관해서 뭐 어떤 분부라두 게시옵디까요?
[변] 소인 같은 상인배를 상대로 정사를 의논하실 리가 있습니까?
[대감] 어, 참 그렇겠군. 그래 옥체는 무양허시구?
[변] 안개에 싸인 깊은 성려야 소인이 감히 헤아릴 바 못되옵니다만---
[대감] 바루 정통이야! 문제는 그 안개야. 안개! 하루바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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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갤 헤치시구 다시 우리 남인을 등용 허셔야만 도탄에서 헤매는 억조창생두 건저 낼 수 있단말야 안 그렇소, 변진사?
[변] --- 그렇겠읍죠.
[대감] 물으나마나지만 그래 내가 이렇듯 오랜 세월을 삼청동 막다른 골목에서 푸욱 썩구 있다는 사실을 보구 느낀대루 자상히 말씀 드렸겠지?
[변] 아, 온 어찌 소인이---
[대감] 허어? 모처럼의 기횐데?
[변] 감히 얼굴을 들어 용안두 뵈옵지 못했습니다.
[대감] 어허! 태조대왕 성업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구나!
[변] 상감께서는 삼청동 골목보다는 오히려 남산골이 퍽으나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십니다.
[대감] 남산골? 아니 저 실학파 샌님들?
[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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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분연히) 그러실테지! 나라 망하기를 한천에 비 기다리듯 허는 녀석들!
[갑] (을에게) 비단을 마다하는 친구들 아냐?
[을] (갑에게) 약재두 싫어하지.
[대감] 맞았어. 바루 그 놈들이어. 상감께 헤괴한 참소와 악담을 제멋대루 허는 방자스런 놈들이지. 변진사두 그 덕에--- .
[갑, 을] (목을 움츠린다)
[변] 그러나 상감께선 어느 모를 보구 허시는 말씀이시온지 모르오나 남산골 샌님들의 주장엔 도리에 맞는 것두 없지 않다 하시옵니다.
[대감] 아니, 도리에 맞다니? 그 놈들이 서인패 보다두 더 악질이구 버릇없는 불한당인걸 모르시구? 그래 그 소릴 듣구두 변진산 아뭇소리 없이 어전을 물러 나왔오?
[변] 소인이 어찌 감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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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어엇! 이거 태조대왕의 성엄은 차치허구, 우리 남인은 앞문에 호랑이 뒷문에 이리를 한꺼번에 만난 셈이로구나, 여보, 변진사! 당신은 일찌기 우리 남인 편이었오.
[변] 예--- 소인네야 그저 장사나---
[대감] 지나친 공손은 비례라 했오이다. 변진사가 양반이 됐다구 갑자기 서인편에 설순 없지 않소? 그 작자들이 뭐 쬐꼬만 고을 원님 하나라두 떼 줄상 싶소?
[변] 소인은 본래 그런거 원치 않습네다.
[대감] 그럼 구구루 돈 자랑이나 허다가 가는 장사치루 일생을 마치겠단 말요? 변진사, 당신은 이제 떳떳이 반렬에 참여했오. 그렇담 모든 행동거지를 양반답게 가져야 헐게 아뇨?
[을] 가래침일랑 지근지근?
[대감] 암! 진퇴 거치에 매듭이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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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신축을 딸딸 끌며?
[갑] (을에게) 쌀값두 묻지 말것이며?
((갑, 을 사이에 문답식 대화가 계속된다))
[을] 돈을 지녀서두 아니되구.
[갑] 추워두?
[을] 곁불을 쪼이지 말 것이며.
[갑] 날씨가 무더워두?
[을] 버선을 벗지 말 것이며.
[갑] 담밸 필 땐?
[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지 말 것이며.
[갑] 막걸린?
[을] (대감에게) 수염을 쭈욱 빨지 말아얍죠?
[대감] (변에게) 아니 이 사람들 의례준칙의 강의를 받는 거요?
[변] 이 친구들두 어떻게 좀 반열에 끼어 보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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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아, 그래요? 그야 누어서 떡 먹기지. 남인의 문은 항상 널리 개방되어 있으니까.
[변] 그런데 이 친구들은 좀 싼 걸루 고루구 있답니다.
[대감] 얼마 짜릴?
[을] (대감의 눈치를 보며) 그저 쉰 섬이나 예순--- 하여튼 젤 싼걸루---
[갑] 최고루 놓아서 백섬?
[대감] 에끼, 고오연 사람들 같으니라구!
[갑, 을] (쥐구멍을 찾는다)
[대감] 남인의 시세가 제 아무리 땅에 떨어졌기로소니!
[갑] (다급해서) 좋아요. 그럼, 올립시다. 올려요. 올림되잖어요?
((갑과 을 손짓을 해가며 경매 부르듯))
[갑] 백에 열!
[을] 백에 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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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설흔!
[을] 마--- 흔!
[대감] (동하지 않는다)
[갑, 을] 올렸다! 쉰?
[대감] --- 그럼 합쳐서 삼백이 되나?
[갑, 을] (마주보며) 삼백?
[대감] 원님 감툰 책임 안진다는 조건이람--- ? 그건 내 소관사가 아니니까.
[갑] (을과 구수회의) 그대신 홍팬 두개?
[대감] 두 개애?--- 그거야 너무싸지.
[갑] 헤, 헤. 그럼, 얼마? 싸움을 팔리구 흥정을 붙이랬으니.
[기생1, 2] 예
[대감] 이런 흥정은 쥐두 새두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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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 을] 암! 은밀한 가운데서--- .
((기생1과 2 안채로 나가자 사랑채에서 훤소.))
[대감] 아니 벌써 밖으로 샜나?
[억쇠] (밖에서) 글쎄, 이러실게 아니라니깝쇼.
[상노1의 소리] 이런 양반 첨 봤단 말이란 말입쇼!
[억쇠의 소리] 사랑방에서 기다려요! 안돼요, 안돼!
[변] 허! 또 양반 한 분이 찾아 오신게로군?
((혼성, 커지며 이윽고 5척 단구(短軀) 의 명태같이 빼빼마른 젊은이가 등장. 상노1과 억쇠 뒤따라 등장. 젊은이를 끌어내려고 한다.))
[억쇠] 글쎄, 쥔 마님은 지금 바쁘시다니 깝쇼.
[상노1] 나가란 말이란 말입쇼!
[변] 얘들아, 시끄럽다. 그 뉘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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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업 으젓이 굽어본다. 망가진 갓에 낡아 떨어진 두루마기에 나막신은 젊은이, 허생원이다. 대감, 허의 꼴을 보고 피식 웃고 돌아앉는다.))
[허] (억쇠에게) 저 분이 바루 쥔 영감이냐?
[변] (굳어진다) 내가 긔요. 댁은 뉘시요?
[억쇠] 남산골에서 오셨다는뎁쇼. 마님.
[갑, 을] (펄쩍뛰며) 남산골?
[허] 그렇소. 목적동 사는 이름없는 생원으로 성은 허가라 하오.
[대감] (경멸하듯) 성은 허가라 하오?
[갑, 을] 드디어 나타났다!
[변] (이상한 감정)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억쇠, 상노1과 함께 사랑채로 나간다. 대감, 슬며시 돌아보다가 허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홱 돌아 앉는다.))
[페이지] 1-39
((허, 성큼 마루에 올라 변과 대좌. 무언의 침묵.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어리벙벙한 변진사.))
((허, 콩나물을 젓가락에 똘똘말아 변진사 입에 넣어준다. 말없이 입을 딱 벌리고 받아 먹는 변진사.))
[허] 맛이 괜찮죠?
[변] 예? 예--- .
[페이지] 1-40
((허생원, 술을 따라 마신다.))
[을] (갑에게) 얘기책 그대루야.
[허] 사흘을 굶구나니---
[대감] (무릎을 치고 바로 앉으며) 그럴테지! 남산골 샌님인들 별수 있겠나? 사흘 굶어, 도둑---
((그 순간 콩나물 젓가락이 대감의 입으로. 대감 얼빠진양 받아 먹는다.))
[허] (대감에게) --- ?
[대감] (끄덕)
(사이)
[변] 휴우--- 결국 두운?
[허] (끄덕) 아, 고사리 나물!
[변] 그런 일이람, 김서방을 만나볼 것이지--- 얘, 억쇠야.
[억쇠] (등장) 얘. 마님.
[을] (갑에게) 끝장이 싱겁군?
[페이지] 1-41
[변] 너, 이 어른 사랑으루 모시구 나가서--- .
[억쇠] 김서방은 안 만난다는 걸입쇼.
[허] (연성 먹으며 끄덕)
[갑] (대신 나선다) 그래 얼맛 돈이 필요허단 말요?
[허] (나물 먹고 술 마시고)
[을] 한량?
[허] (술 마시고 나물 먹고)
[갑] 두량?
[허] (마시고)
[을] 닷량?
[허] (먹는다)
[갑] 뚝배기 봐선 된장 맛이 좋다더니만--- 흥! 몸둥아리 치군, 담이 크구먼? 열량?
[페이지] 1-42
[허] (변진사를 응시)
[변] 왜, 왜, 날봐?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침묵))
[변] 배, 백량?
[허] ---
[변] 이백량?
[허] 그런 푼 돈이 아니외다.
[변] 오백량?--- 천, 천량?
[허] 만량.
((갑, 을 뒤로 나가 자빠진다.))
[갑, 을] 미쳤다!
[대감] (동감이다)
[허] 너무 작은 돈이오니이까?
[변] 만량이람, 운종가 돈궤를 몽땅 털어두 모자랄 거금이오.
[페이지] 1-43
[허] 당장이 아니외다.
[변] --- ?
[허] 이달 그믐까지 안성 과일 도가 강선달 앞으루 환을 놓아 주시오.
[변] 강선달 앞으루요?
[허] 그렇소. 그리알구 나는 가오. 고맙소이다.
((허생원 나막신을 딸딸끌며 좌하수로 퇴장. 변진사도 몽유병자처럼 뒤따라 퇴장.))
[갑, 을] 여보게! 어딜가나?
[대감] 벼, 변진사!
[을] 자네가 미쳤지---
[갑] 이름 석자두 모르는 실성헌 놈을 언제 봤다구--- (머리를 깨우둥, 을에게) 어떤 편이 미쳤지?
[을] 저 궁끼가 쬐르르 낀 샌님이지.
[페이지] 1-44
아, 아냐. 우리 변진사가? 아, 아냐. 역시 샌님이야.
[갑] 아냐. 미친 놈을 상대허는 놈이 미친 놈이야.
[을] 거지 샌님이 먼저 미쳤어.
[갑] 변진사가 먼저야.
[을] 거지가 먼저라니까!
((갑론을박(甲論乙駁) 하며 은행나무까지 와서 쭈구리고 앉아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 대감 역시 혼란에 빠져 마루 위를 거닌다))
[대감] (정면을 향하여) 도대체 이 어찌된 셈이냐? 천하의 노랭이루 자타가 공인허는 변진사가 여우에 홀린 듯 넋을 잃었으니 말이다. 그리구 저 도도하기 짝이 없는 오척단구의 허가 성을 가진 놈은 과연 누구란 말이지?--- 사람이란 돈을 취하거나 뭔가 요구할 땐 부끄럼이 있구, 같은 말을 거듭허구 얼굴엔 상냥
[페이지] 1-45
스런 웃음을 띄우구 정성이 서리구 아첨허구 비굴해지는 것이 상례이거늘, 도대체 저 놈은 무엇이기에 저렇듯 안하무인이란 말이냐? 아니 저 누더기 옷에 망가진 갓을 쓴 저 화상이 무엇이기에 천하의 변승업이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오금을 못쓰구 평신저두헌단 말이지?
((변진사 깊은 생각에 잠기며 다시 등장.))
[대감] 변진사!
[변] --- 예?
[대감] 어떻게 된 셈판이오?
[변] 요구대루 환을 놓기루 했습니다.
[대감] 환을 놔? 만량 돈을?
[변] (신비감으로) 예. 그 선비는 물질을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만족을 가진 사람이 틀림 없오이다.
[대감] 스스로 만족을 가지다니?
[페이지] 1-46
[변] 얘--- 스스로 만족을--- 아마 그 선비가 시도하려는 것두 범상치 않을 것으루 생각됩니다.
[대감] 그 자가 시도허려는게 뭐란 말인구?
[변] 소인네 따위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오이까?--- 얘, 억쇠야.
[억쇠] (등장) 얘.
[변] 널 속량헐 것이니 이 길루 강선달 도가루 가거라.
[억쇠] 안성엘입쇼?
[변] 강선달 댁에 묵으믄성 이제 그 생원님의 시중을 드는거다.
[억쇠] 속량해 주시는건 고맙지만서두, 제가 저 비렁뱅이 샌님의 시중을 든다닙쇼?
[변] 이르는대루 해라. 널 마다해서 돌려 보낼 때까지---
[억쇠] --- 얘, 마님. (씨무룩해서 퇴장)
[대감] 변진사!
[변] 어, 아직두 계셨습니다그려. 대감 마님.
[페이지] 1-47
[대감] 변진사, 정신은 똑똑헌가?
[변] 예. 아주 상쾌헙니다. 죄송헌 말씀이오나 대감 마님 뒷바라지 허기 보담, 이편이 훨씬 현명한 처사 같습니다.
[대감] 뭐, 뭐라구? 이 편이 훨씬 현명해? 아니, 저 비렁뱅이 샌님과 날 견준단 말인가? 아니 내가 저 거지만 못허단 소린가?
[변] 잘 알구있습니다 그려.
[대감] 변진사!--- 내 지금 이렇듯 낙척 불우의 몸이라 해서 사람을 눈 앞에 놓구 괄시 허긴가? 아뿔사! 변진사가 그런 위인인 줄은 미처 몰랐구먼!
((대감, 대로하여 도포자락을 너풀거리며 좌하수로 퇴장. 나무 아래에서 좌초지종을 보고 있던 갑과 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중앙으로 나온다.))
((강선달의 사랑채 겸 가게, 마루를 가운데 두고 정면과 우수에 방. 앞마당 우하수에는 해묵은 은행나무. 그 옆으로 대문. 좌하수에는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 후경은 돌담. 돌담이 끝나는 곳에 창고가 있으나,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돌담 뒤로 무성한 숲. 막이 오르면 강선 달이 대청마루에 책상을 놓고 장책에 일일이 기엄하며 과일을 사들이고 있다.
[페이지] 2-3
무대 안팎이 마치 장거리처럼 떠들석하다 밖에서「잣이에요.」「감이예유, 감.」「밤이 섬으로 나왔어요.」「배 사시소, 배요」「은행이 있어요.」 등등의 혼성. 대문을 들어오는 사람들은 제각기 과일짐을 졌다. 감을 지고 오는 젊은이. 호도섬을 맞들고 낑낑거리는 아버지와 아들. 광우리에 배를 이고 오는 아낙네. 대초와 은행자루를 질머진 꼬마, 등등. 과일짐을 고깐에 부리고는 강선달에게 와서 돈을 받고 굽실거리며 나간다. 이렇게 거래가 진행되는 동안에--- ))
[해설]
안성은 기호(畿湖) 의 어우룸이요 삼남의 어귀렸다. 이 안성 장은 과일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근래 두석달을 두고 괴상한 일이 생겼으니 산처럼 쌓여야 할 장판에 과일짐을 씻은 듯 없어지고 시골 각지에서 모여든 과일장
[페이지] 2-4
사들은 장터를 휘이 돌아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과일 도가 강선달네 가게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래서 번번이 과일장은 파장이 되어 서울서 과일을 사러왔던 도가는 물론 이 고장 장사치들도 파리만 날리고 있는 형편이로다. 이렇듯 석달이 지나는 사이에 장에 났던 과일은 밤한톨 남기지 않고 몽땅 강선달네 고깐으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도 그럴것이. 「자아 과일삽시다 과일, 값은 달라는대로 주고 과일은 있는대로 다 사오. 누구든지 값 잘 받고 과일 쉽게 펼려거든 물산도가하는 강선달네 집으로 과일짐을 지고 오시오. 한 톨도 사고 한 접도 사고 말로도 사고 섬으로도 사오. 부르는 게 값이오. 있는대루 몰아 사오. 자아, 강선달네 도가로 오시오」--- 」
[페이지] 2-5
((무대에서는 마지막 과일장사가 강선달에게서 돈을 받아 가지고 우수 대문으로 나간다. 혼성과 훤소 스러진다. 억쇠 고깐 있는 쪽에서 나오며 옷을 털고 크게 허리를 편다))
[억쇠] 이걸루 안성 장안의 과일은 싹 쓸었다! 글쎄 선달님, 세상에 이런 장사가 어딨읍니까요? 전 이날 여태 서울 운종가 한복판에 살믄성두 이런 장산 첨 해봤다니깝쇼.
[강] 헐 수 있느냐, 화주 영감의 방침이 그러시니 우리야 그저 분부대루 만량어치 과일만 사들임 그만 아니냐?
[억쇠] 헛! 그 만량 돈이 누구 건뎁쇼? 우리 다방골 쥔 마님 돈인걸입죠.
[강] 돈 임자가 누근든간에 깨끗이 다 털었다 엽전 한 푼 안 남었어 헛! 제아무리 글 밖에 모르는 골샌님이기로소니 온,
[페이지] 2-6
내참!
[억쇠] 누가 아니래요. 선달님, 어린애가 아니구서야 미친 지랄이지 물건 거래에 달래는 값 다 주구 사는 법이 어딨아오며, 그것두 당장 쓸데나 있음 모르되 몇 달씩이나 광속에 처넣어둔채 한 편에선 상허구 썩어 내다버리는가 한 편에선 감 한 접에 열급이나 주구? 틀림 없어요, 미친 지랄입죠. 글쎄 쇤넨 무슨 낯을 들구 서울 쥔 마님 댁엘 돌아간답니까? 헛, 내 팔자두 기구허지--- 선달님은 구문이나 두둑이 잡수세요. 이런 판에 안 자시구 언제 잡솨요?
[강] 어디 구문 먹기두 꺼림찍허다. 천둥 벌거숭이 어린앳걸 속여 먹는 것 같아서 온 난 구문보담두 앞일이 더 걱정이로구나.
[억쇠] 앞일이라닙쇼?
[강] 과일 값을 천장만큼 올려놨으니 내년일이 걱정이 되지 뭐
[페이지] 2-7
냐? 앞으룬 오는 손님이란 열곱이나 더 받구 팔려는 날도둑놈들일 게구 과일을 사려는 사람은 그림자두 못볼 것이니 내 평생 장살 올 한 여름으루 결단을 낸 게 아니냐? 이런 병신 것이 어딨겠니?
[억쇠] 헷! 그러니까 대대손손이 두구두구 자실 걸 두둑히 떼내심 되잖어요 선달님?
[강] 글쎄--- 온.
((밖에서 시골 젊은이1이 씨근덕거리며 뛰어든다))
[젊은이1] 쥔 마님, 이댁이 강선달네 과일 도간가유?
[억쇠] (끄덕) 아직두 안성장에 과일이 남았던가? 난 우리가 싹 쓴줄 알았는데?
[젊은이1] (뒤를 돌아다보며) 장에서 온게 아녜유.
[억쇠] 장에서 안왔음, 그럼?
[젊은이1] 관가에서 나왔이유 서울 관가에서 나오신 높으신 어른이
[페이지] 2-8
나졸들을 앞세우구 우리 동네루 쳐들어 왔단 말씸이예유.
[억쇠] 무슨일루?
[젊은이1] 무슨 일은 무슨 일이예유? 과일 거둬 드린다구 왔지 우리 동네서두 밤 한톨 안 남기구 댁에다 팔았으니 남은 과일이 어딨이유? 그런데두 관가 손님들은 우리 동네 집집마다 골방 다락꺼정 벌컥 뒤엎다시피 하구 과일 내놓라 호령호령하믄설랑 닥치는대루 잡아다가 달구치니, 이를 어떡해유? 때린다구 없는 과일이 나올리 만무허구, 동넨 온통 초상집처럼 울음바다가 되구 집안 어른들은 죄나 진 사람처럼 숨어다니구---
[강] 헛! 관가의 토색질이 또 시작됐구나?
((밖에서 사람들의 혼성.「이 집입니다.」「바루 여깁니다!」「틀림없지?」「제 목을 따세요」등등 우는 소리도 섞인 휜소.))
[페이지] 2-9
[젊은이1] 아, 왔이유! 이렇게 빨리 들어닥칠 줄이야---
((젊은이1 뒷문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나졸1이 우수 대문으로 급히 등장 젊은이1을 잡아 꿇어 앉힌다. 뒤따라 나졸2가 시골 젊은이2를 앞세우고 등장))
[허] 전수라는 정5품 직함은 대궐에서 쓰이는 물건 일체 조달허라는 벼슬자리 아니오? 일템, 영감이 받아자시는 녹은 영감이 물건 조달해 들이는데 대한 구분이외다. 그런데 이완 별도루 또 구문을 자시겠다니 이건 이중 소득이며 불법소득이 아니오이까?--- 난 못하오.
[박] 헛! 요 골샌님이 구문을 받음 나혼자 먹는 줄 아나베?
[허] 이 흥정 파이헙시다.
[박] 뭐 파이?
[강] 아, 아니 생원님!
((허생원 사랑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강선달 허의 두라마기자락을 부여잡고 박에게 눈짓))
[강] 헛 산통 깨치네! 왜들 이러십니까? 양반님들 흥정이란 닭
[페이지] 2-23
싸우듯 한번 톡톡 쪼아보군 그만 집어치우는 겁니까? 이러시지들 마시구 생원님 여기 좀 앉으세요. 그리구 영감 마님두 너무 고지식허시지--- 아 구문이라야만 꼭 맛입니까? 온 내참!
((강 무엇인가 전수 귀에 속삭인다.))
[박] 그것 쯤 선혜청에서두 항용 허는 일이지만---
[강] 모루 가두 서울만 감 아닙니까요? 온---
[박] (작게) 그렇지만 저 꽁생원이?
[강] 제게 맡기십쇼. (허에게) 자 생원님 어서 이리루 이리루 (억지로 앉히며) 헛! 이렇게 고달파서야 객주집 쥔 노릇인들 해먹겠나 (연상을 앞으로 당기며) 생원님 자 증서 한줄 쓰십쇼. 십이만량이라구---
[허] 십이만량?
[강] 눈딱 감구! 열 갑절이나 열두 갑절이나--- 오십보 백본데 뭐
[페이지] 2-24
[허] --- ?
[강] 항용 허는 일인데?
[허] 오십본 오십보구 백본 백보아뇨?
[박] 엥이! 글쎄 통허지 않는다니까!
[강] 헛! 이렇게 숨구멍이 막혀서야---
((억쇠 매화와 함께 좌우수에서 등장 과연 미인이다.))
[억쇠] 버드나무집 술에미 매화 대령했습니다.
[매화] (큰절) 매화라 불러 주십시오.
[강] 옳지 너 마침 잘 왔다. 서울서 온 색시라 역시 다르구나. (눈으로 허를 가리며) 귀허신 손님이니 그리 알구---
((종년이 술상을 들고 나와 마루에 올리고 퇴장. 매화 마루에 올라 허생원 옆에 앉는다. 허는 좌불안석))
[강] (박에게 귓속) 영감 최후 수단입네다.
[페이지] 2-25
[박] (끄덕)
[강] 이걸루 넘어가지 않는 다문 없읍죠.
[박] (작게) 골샌님에겐 아깝다.
[강] 엥이, 욕심두--- 자 우린 잠시 꺼집시다.
((억쇠 매화에게 눈짓 무대 허와 매화만을 남기고 어두워진다. 매화 술잔을 권하며 교태))
[매화] 영감마님---
[허] 나 난 영감이 아니구 새 생원이란다.
[매화] 생원임 어떻구 영감임 어때요? 쇤네 영감님--- 영감이지 뭐
[허] 어쩌구 어째?
[매화] 에구머니 이를 어쩌나? (허의 무릎에 몸을 던진다)
[허] 아, 오 오냐---
[페이지] 2-26
[매화] 영가암--- 여기--- 여길 좀--- (허의 손을 목덜미로 가져간다)
[허] 너 왜 이러느냐?--- 갑자기 경풍이라두 일었느냐?
[매화] 벌레가---
[허] 벌레?
[매화] 등골루 해서 겨드랑이루---
[허] (쩔쩔맨다)
[매화] 쇤네 가슴에 손을 넣어 끄집어 내 주시와요--- 아이구 매정두 하셔라--- 영가암, 에구머니 아 아 아이구머니.
[허] 아서라 너 이러는게 아닐다.
[매화] 영가암--- 사람 좀 살리사와요.
((매화 적극적인 공세, 허의 목을 끼어 안고 느러진다))
[허] 아 아닐다! 얘야--- 내 몸이 왜 이리 비비꼬이느냐?
[매화] 쇤넬 죽여 주사와요!
[페이지] 2-27
[허] (비명) 날 좀 살려다오.
((허생원 가까스로 포옹을 벗어나서 장지문을 열어 젖히고 방안으로 도망친다. 매화 「영감」하고 부르며 뒤따라 들어가 장지문을 닫는다.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박] 뭐가 이따위야?
[강] 가 가만--- 하훨 좀 기다려 봅시다. 아직 초입인걸입쇼.
((강과 박 마루로 올라가 방안 동정을 엿듣는다. 강선달 손가락에 침을 발라 장지에 구멍을 뚫는다. 사이. 갑자기 장지문이 열리며 매화 두 손으로 얼굴을 싸고 총알 같이 튀어 나온다. 강과 박 어안이 벙벙))
[매화] 아이구 쥔 마님! 난 이런 망신 첨이야!
[페이지] 2-28
[강]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열번 찍어두 안넘어 가던가?
[매화] 나무가 아녜요! 돌이예요. 돌! 아니 바우예요!
[박] 바우?
[매화] 아유! 난 못살아!
((매화 도망치듯 우수로 퇴장. 억쇠 좌우수에서 급히 튀어나온다))
[억쇠] 매화가 다라났어요?
[박] 하회가 없잖어?
[억쇠] 그럴리가 없는데쇼?
[박] 속수무책인가?
[강] --- 죄송햅니다.
[억쇠] 아 고게 누구 안전이라구 다라무?
[박] 오냐, 좋다!
[강] 예
[페이지] 2-29
[박] 구문두 증서두 필요 없다!
[강] 그래두 괜찮겠습니까?
[박] 자네가 구구루 생각했다는게 이꼴이 됐으니 이번엔 내 생각대루 해 볼 수밖에! 고 생쥐 같은 화주놈이란 놈 이리 좀 끌구 나오게.
[강] 묘안이 있으십니까?
[박] 이 목을 걸었다! (밖을 향하여) 계 누구 없느냐?
[하인들] (밖에서) 예--- 이
[박] 돈바릴 이리 들여다 부려라!
[하인들] (밖에서) 예--- 이
[강] (불안) 영감 마님?
((?종 하인배들 제각기 돈심을 지고 비척거리며 대문으로 등장. 열을지어 고깐 있는 편으로 사라진다. 무대 어두워지며 한동안 스폿트만이 느릿느릿한 이 행
[페이지] 2-30
짐을 비추다가---
<F·O>
[장] 하장
곳 - 전 장과 같음
때 - 같은 날 동틀 무렵에서 새벽까지
사람 - (등장순)
늙은 졸개1
졸개2
졸개3
졸개들
최씨 - 강선달의 아내
도적 두목
강선달
[페이지] 2-31
억쇠
허생원
박몽인
매화
무대
스폿트 돈짐을 밀방 걸어 짊어진 사람들의 행렬 전 장과는 반대 방향. 고깐에서 대문으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어떤 도적은 꿰대를 진 위에다가 허리띠의 돈꿰미를 여럿씩 찾기 때문에 돈짐에 치어 휘청거리고 어떤 도적의 전대는 중둥이 갈라져서 돈이 쫘르르 쏟아진다. 이 소리에 선잠이 깬 강선달의 아내 최씨가 좌하수 안채에서 등피를 들고 나오다가 놀라 뒤로 자빠진다.
[페이지] 2-32
[최] 으악 도둑이야 도둑!
((도적들 혼비백산하여 앞선 놈부터 돈짐에 눌려 비처거리다가 넘어지고 뒷 놈들도 「도미노」식으로 차례로 쓰러진다. 밀방만 어깨에 걸고는 땅 위에 주저앉아 낑낑거리는 슬로오 모오션의 군상(群像) . 최씨 네발걸음으로 안방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우수 대문으로 두목이 장검을 빼어들고 뛰어든다.))
[박] 누구나 원님들은 이 섬에 도임허기가 무섭게 다른데루 자릴 옮겨 볼려구 서울루 올리는 봉물짐만은 어마어마헙니다만, 따른--- 가난한 고을 원님 신셀 면헐려니 그럴 수밖에
((어느듯 훤히 밝는 아침. 밖에서 군중들이 훤소))
[억쇠] 이크! 이번엔 또 무슨 난리야!
[박] 나 잡으러 온 나졸 아닐까?
[페이지] 2-44
[억쇠] 도둑놈들이 다른 도둑놈들과 합세 해가지구 처들어 오나?
[허] 그럴 리가 있겠냐?--- 너 좀 나가서 동정을 살펴봐라
[억쇠] 쇠 쇤네 갑쇼?
[허] 그럼 내가 나가보련?
[억쇠] 아 아니올시다 나 나가봅죠! 쥔 마님 말씸임 도둑놈에게 맞아 죽어두 나가압죠 허 허--- 죽어도 좋단 말까이야--- 죽어두!
((대문 밖으로 나가는 억쇠의 걸음이 몹시 휘청거린다. 불안한 사이. 억쇠 나가자 마자 거품을 물고 되집어 뛰어든다.))
[억쇠] 아이구! 이거 큰일 났습니다요 쥔 마님.
[박] 역시 나 나졸이냐?
[강] 도둑이냐?
[억쇠] 도둑이 문제가 아니예요 마님
[페이지] 2-45
[강] 그럼 민요냐?
[억쇠] 민요람 약괴겝쇼? (허에게) 큰 골치덩어리가 생겼아와요.
[허] --- ?
[억쇠] 고을사람들이 쥔 마님 뵙겠다구 벌떼처럼 몰려오니 이를 어떡 험 좋습죠?
[허] 날 만난다구?
[억쇠] 방금 밖으루 나간 도둑들이 선봉을 서구 어린애는 등에 업구 늙은인 손을 잡구 절룸발인 외다리 앉은뱅인 두손걸음--- 마님!
[강] 그럼 역시 도둑떼가 도둑뗄 몰구오는구나?
[억쇠] 안성 고을은 물론 변두리서들꺼정 몰려올 기세라는뎁쇼?
[허] 가난한 사람이 그리 많았던가?
[강] 흥! 나랏님 탓입죠 머!
[박] 어 헛
[페이지] 2-46
[허] (억쇠에게) 이리루 인도해라.
[억쇠] 아니 저 비렁뱅이에게구두 또 돈을 주실려굽쇼?
[허] 우선 만나보구서 생각헐 일이다.
[억쇠] 어이구머니! 말총 살 돈 몽땅 날리겠넵쇼! (강을 보며) 온 내--- ?
((소음 더욱 커진다))
[허] 전수 영감 내가 한꺼번에 저 사람들을 다 만날 순 없는 노릇이니 영감이 나가서 열 식구씩 모아서 반을 짜구 그중 하나를 뽑아서 십사장(十司掌) 이라 허구 다음으룬 열명의 십사장에서 하나를 뽑아 백사장(百司掌) 이라 험 어떻소? 난 백사장만 면접 험 일이 퍽 간멸허겠는데?
[박]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억쇠] 열 식구에서 백 식굴 뽑다닙쇼? 혜 혜--- 생원님은 열갑절 장사만 하려구드시넵쇼?
[페이지] 2-47
[허] 억쇠야 넌 사람 정리나 해라.
[억쇠] 혜 혜--- 쇤네가 헐 일두 있었구먼 입쇼? (나무에 반쯤 올라 정면을 향해서) 여러분들! 생원님 말씀대루 열 식구씩 모아 앉어시오!
[허] 오 참 과부 총각 호래빈 금물이다 이런 비생산적인 족속들은 짝을 무어가지구 끼이게 해라.
[억쇠] 또 짝이야?--- 과부 호래비 처녀 총각은 저만큼 밖으로 비껴 앉으시오!
[허] 그리구나선 골고루 자유롭구 비밀리에 십사장을 뽑는 거다.
[억쇠] 아니 자유롭구 비밀리라닙쇼? 헤 헤--- 그건 무슨 조환 갑쇼? 자윤데 어째서 자유로울 수 있을 수 있아옴?
[허] 전수 영감이 좀 거들어줘야겠군.
[박] 예
[허] (억쇠에게) 넌 공정허게 뽑나 각심해서 감찰이나 해라.
[페이지] 2-48
[억쇠] 감찰입쇼? 헤 헤--- 그건 쇤네두 헐수 있읍죠. 헤 헤--- 감찰! ((억쇠 나무에서 내려와 엉덩춤을 추면서 박몽인과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간다))
[허] 휴우! 일이 이토록 거창해지리라군 생각 못했는데?
[강] 가난은 나라에서두 구제 못헌다는데?
[허] 어디 두구봅시다.
((밖에서 왁자지껄))
[억쇠의소리] 안돼! 홀몸은 안된다니까!
[매화의소리] 저리 비켜, 억쇠야 난 생원님을 만나야 헌단 말야!
[억쇠의소리] 아, 요 요게--- 비생산적인 인간은 저- 기 금 밖으로 나가 있어야 헌다니까!
[매화의소리] 이거 놔라 이 자식아!
[허] 아 저 저거 전번에 왔던 술에미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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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예 매환가봅니다.
[허] 고게, 왜 또 와? 얘 억쇠야! 홀몸은 절대루 들이지 말아야 헌다!
[억쇠의소리] 아 예--- 이크 요게 쌨어? 매화 매화.
((매화 살짝 대문 안에 들어선다. 허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고 한다))
[매화] 생원님---
[허] 오, 오냐. 꼭두새벽부터 웬일이냐?
[매화] (정숙하게) 쇤네두 생원님 따라가요.
[허] 아닐다. 네 아무리 인물이 절색인들 백석도엔 술집이 없단다.
[매화] (추파) 술에미루서가 아니오라 생원님 소첩으루---
[허] 소첩?
[매화] 언감생심 본실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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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헛! 그런게 아닐다.
[매화] 소첩이 과분하옴 몸종으루라두---
[허] 매화야 난 그런 거 아예 필요가 없단 말이다.
[매화] 생원님 동정에 때가 묻구 저고리 고름이 떨어짐 어느 침모가 꿰매드리오며 하루 세끼 진지상을 어느 식모가 챙기오며 아침 저녁 잠자리는 어떤 계집이 있어 보살피오며 혹시 몹쓸 감기나 염병 학질루 고생허심 어느 마나님이 약탕관을 공대하오며 안팎으루 잦은 출입허실 때 굽이 이즈러진 나막신이나마 가즈런히 놓아 줄 년이 누구오이까?
[허] 오냐 고맙다 그건--- 내가 헌다.
[매화] 쇤넨 비록 천한 술에미오나 몸은 더럽히지 않은 처녀이옵니다.
[허] 그럼 너두 짝을 무어가지구 오려무나.
[매화] 쇤네의 짝은 천생연분 생원님 밖엔 없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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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돌연 정숙한 태도를 버리고 마루를 뛰어올라 허생원에게 육박. 수세(守勢) 를 취하는 허. 빙그레 웃는 강선달. 매화 허생원의 갓을 벗기고 망건 곤을 푼다))
[허] 네가 왜 이러느냐? 날 어쩔려구--- ?
[매화] 어마나 이 구레나루!--- 오래 빗질두 못하셨나봐? 이가 끊었을지두 모르겠네? ((매화 빗으로 머리를 다스리려고 한다. 달아날 구멍만 찾는 허))
[매화] 에그머니나--- 이 목에 때 목욕두 안하시나베 ((매화 허의 목덜미에 손을 넣어 겨드랑이를 더듬는다.))
[허] 얘야 이러지 말아라--- 아 아이구! 아이구 간지럽다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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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생원 마님---
[허] 아 하 하--- 여보슈 강선달! 으흐흐 아하하--- 어이구 얘야---
[강] (몸체 뒤로 몸을 피한다)
[허] 으흐흐 아하하--- (밖을 향하여) 여보슈 전수 영감! 얘 억쇠야 이 눔 억쇠야!
((그러나 매화의 공격은 원병의 도래를 기다리지 않는다. 허 사랑방안으로 도망친다. 매화 뒤따라 방안으로 장지문을 닫는다. 억쇠와 박몽인 무슨 일인가 하고 대문으로 급히 등장. 강 그들을 손으로 제지한다.))
[박] 쉬---
((방안에서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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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 만족할 듯 빙그레))
[매화의 소리] 두손으로 비억비억 긁어드릴게요 어깨--- 앞가슴두?
[허의 소리] 오 오냐--- 시원은 허다만
[매화의 소리] 왜 자꾸만 몸을 비트세요?
[허의 소리] 제발 이러질랑 말아다우
[매화의 소리] 이제 몸이 풀리세요
[허의소리] 오 오냐--- 허벅다리? 아서라 거긴--- 인제 그만 해둬라 이래선 안 안--- 아하하 어 어이구 으하 아하아 하하하---
((일동 장지문 앞으로 다가선다. 정적. 억쇠 장지문을 구멍을 뚫으려는 것을 강이 제지한다))
[강] 휴우! 초부득삼이라더니--- (안심이라는 듯) 십만량짜립니다요 전수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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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와락 장지문이 열리며 상투바람의 허생원이, 웃티를 홀딱 벗고 허리띠도 매지않은채 맨발로 뛰어나온다. 일동 뻥했으나 곧 이 돌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박은 우측 대문에 억쇠는 좌측 안방 강은 은행나무 밑에 진을 친다. 허 도망칠 구멍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쏜살 같이 무대 뒤 고깐 있는 곳으로 달아난다. 세사람 닭을 몰다가 놓친 것처럼 멍청))
[강] 또 놓쳤다!
[억쇠] 흥! 독안에 쥔 걸입죠! ((억쇠 엉덩춤을 추며 무대 뒤로 사라진다. 긴장속에 짧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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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어깨를 축 느러뜨리고 다시 등장하는 억쇠 강과 박 눈으로 묻는다))
[억쇠] (울쌍) 우리 새 쥔 마님--- 돈 거 아닌갑쇼?
[강] --- ?
[박] --- ?
[억쇠] 쥐가 들어가더니만 고깐문을 안으로 잠겄아와요---
[강, 박] 온내 참! ((강과 박 바람이 빠지는 고무풍선처럼 땅에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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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화
백석도에서
[장] 상장
곳 - 백석도 남해의 낙도
때 - 제2화에서 약 한달
사람 (등장순)
사또
그 부인
이방(吏房)
형방(刑房)
공방(工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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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방자
군관들
통인
통인
그 밖에 관속들
백사장1 (졸개 출신의 노인)
백사장2 (두목 출신)
박몽인
허생원
억쇠
매화
섬아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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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동헌(東軒) . 좌우로 방 좌측에는 협실이 하나 붙어 있다. 대청마루에는 사방탁자에서 백자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마루방 가구가 적당히 놓여있다. 뒤로는 내아로 통하는 뒷마루. 별로 특징이 없는 평범한 동헌구조. 우하수에는 여전한 은행나무 우수에는 삼문으로 통한다. 배경에 흰 돌산과 멀리 바다 수평선이 보이니, 이것으로 가히 동헌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잠시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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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백설도는 제주도만큼이나 큰 섬이지만 이름 그대로 흰 돌섬으로 멀리 남쪽 바다에 외로히 떨어져 있으니, 여기가 조선의 땅임을 아는 조선사람조차 극히 드문 망각의 섬이다. 섬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땅을 일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나락을 거두면 다행이고 바다의 고기잡이도 배와 어망이 없으니 겨우 해초나 뜯어 죽이나 쑤어서 이럭저럭 끼니를 이어간다. 일언이폐지해서 섬사람들의 살림이란 가랭이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이 가난한 섬고을에도 어찌된 일인지, 송사만은 쌓이고 싸 사또안전께서는 일던 삼백 예순 날을 크고 작은 송사로 하루같이 바쁘시다. 그러나 원체 가난한 고을이라 환자조차 제대루 거둬들이지 못하는 형편이니 항차 서울 대감댁에 상납할 봉물짐을 꾸리기가 그리 수월할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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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백성을 두들겨 「이놈, 네가 네죄를」식의 호령인들 무슨 무슨 효력이 있으랴? 그러던 중 허가 성을 가진 놈이 개나릿개 선창에 닻을 내렸다는 소문이 쫘악 퍼진지 며칠이 안된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동네가 조용했다. 첫새벽부터 술렁이거려야 동헌이 송사는커녕 육방관속을 필두로, 사령노비까지 자취를 감추어 인적이 괴괴허니, 이 어찌된 영문이냐? 사또안전께서 내아로 해서 대청마루로 나와, 거드럭거리며 두루 관속 노비를 찾는 모양이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 않는다. 사또 초초히 뜰로 내려와서 휘이 한바퀴 돌아보고 그래도 미심찍어 이구석 저구석 찾아보고 뒤저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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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무도 없음을 알자 매우 굇심하다는 표정. 사또는 다시 대청마루로 올라가서 크게 기침을 한다. 연거푸 기침을 하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또는 드디어 화가 난다.))
[사또] 거기 아무두 없는냐? 아니 이놈 육방관속들이란 놈들이 자기 소임을 잊구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그림자 조차 얼씬 않더라? 어허! 고이헌지고--- 얘 똥방자야! (사이) 이 놈은 또 어딜을 갔노? 네놈이 뒤지를 들구 대령해야만 내가 뒷간엘 가지 않겠느냐! 허! 이거 아침에 일어나 뒷간에도 못가게 생겼구나--- (마루에 주저 앉아 긴 담배대를 입에 문다) 얘, 거기 통인놈, 누구 없느냐?--- 헛! 부시를 처서 불을 대어 줘야 담배라두 한 대 피울게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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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놈마저 자췰 감췄으니?--- 올치! 여, 형방! 딸련 수청들기루 말해놓구, 밤새, 살짝 빼돌린 박첨지놈 송산 어떡허지? 그리구 또 여태 인두세를 바치지 않은 김가놈 곤장은 누가 치지?
((밖에서 멀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사또] 이게 무슨 소린고? 해조와 바람소리, 그리군 물새소리 밖에 안들리던 귀양살이 같은 낙도 살림 몇 해 처음 듣는 숱한 사람들의 인성이로구나. (불안) 이방! 현방! 공방--- 예방!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또] 아니 비장 통인놈들까지 깜깜 무소식이어? 얘 방자야!
((우상수 뒷마루로 속고읫 바람의 실내마께서 황망희 등장.))
[사또] 이크! 첫새벽에 이게 웬 속옥 차림의 귀신인가?
[부인] 여보 영감 나예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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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아니 여기가 어디라구 고읫바람으로 나타나는 거야? 실내 마마 체신머리두 생각하지 않구?
[부인] (마루바닥을 치며) 여보 영감 실내 마만 뒷다 뭣에 쓰구, 사또안전은 무슨 소용이우? 아이고 원통허구 분해라, 이 일을 어쩜 좋단 말인구.
[사또] 간밤에 무슨 꿈을 꾸구설랑 이러누? 담배불이나 좀 대 주우. (담배를 입에 문다)
((사또 내외가 겁을 집어먹고 서로 끼어 안고 안절부절 헐 때 우수에서 영기(令奭) 청룡기를 들고 울긋불긋한 각색 기치(旗幟) 를 들고 형방을 선두로 관속 군관 통인 방자들이 취타(吹打) 소리도 유량하게 등장하여 무대 가득히 늘어선다. 공포에 사로 잡혔던 사또 내외, 일동 중에 낯익은 얼굴들을 알아보고 안도와 동시에 분노와 모욕을 느낀다.))
[사또] 형방! 어이쿠 저기 공방 예방 호방에 다가 비장통인 방자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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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끼었구나? 아니 너희들이 이러기냐, 응? 여태까지 상전으로 모시던 사또 안전 앞에서 이게 무슨 당찮은 소행이냐?
[형방] 어서 물러 앉으시오. 곧 우리 사또께서 도임 허십니다.
[사또] 우리 사또? 자네 눈엔 내가 누군지 안 보이나?
[형방] (통인에게) 옳아--- 구관 사또께 마지막으루 담배라두 한 대 피어 올려야겠구나?
((부인 수치와 홧김에 까무라친다. 사또 부인 옆에 쭈구리고 안절부절. 밖에서 훤소 더욱 커진다. 박(밖에서) 신관 사또 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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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방] (군관들에게 사또를 가리키며) 어서 묶어 치워라!
((군관들 마루로 뛰어오른다. 사또 쥐구멍을 찾아 맴돌다가 겨우 좌하수로 도망친다. 똥방자 급히 휴지를 들고 대령. 이윽고 나막신과 파립(破笠) 의 허생원 박몽인과 늙은 졸개 출신의 백인장 거느리고 우수 삼문으로 등장. 일동 그를 사또에 대한 예의로 맞는다. 예방(禮房) 이 허를 안내하며 대청에 오르자 이 소란통에 사또 부인 의식이 돌아와 「애개개」 소리를 지르며 속옷을 감싸 쥐고 내 아래로 내뺀다. 허생원 홀랑 마루 위로 뛰어 오른다. 군관들 도임상(到任床) 을 고이고 정중히 집례. 계속하여 관속들 현신(現身) . 당황하는 허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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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들] 사령들 헌신이오.
[허] 아, 아닐다!
[이방] 이방 헌신이오.
[허] 난 사또가 아닐다.
[일동] 아니라닙쇼?
[허] 백석도 목사(牧使) 는 어딜 갔느냐?
[형방] 저희들은 생원님을 사또로 모시기루 결정허구 있습니다.
[허] 그거 안될 말이다. 사또를 모셔 오너라.
((일동 불만의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형방 마지못해 좌수 무대 밖을 가리킨다))
[방자] 히. 히. 히--- 마지막 시중입죠.
[형방] (좌수를 향해) 오서 그만 나오슈! 언제까지 쭈구리구 들어 앉아 있을 생각이오?
[사또의 소리] 그저 목숨만 살려줍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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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엉거주춤하고 조심조심 허생원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린다))
[사또] 지체 높구 귀허신 분을 몰라 뵙구 이렇듯 경망했으니 그저 죽어 마땅하옵니다.
[허] 이러지 마오.
[사또] 고깐에 쌓인 나락과 필육은 쌀한톨 무명 한 자투리 축내지 않았아왔고---
[허] 그거 참 기특허구려. 수청 들기루 헌 딸을 살짝 빼돌린 박첨진 어떡헐 셈이요?
[사또] (머리를 조아리며) 박첨지 뿐 아니오라, 최좌수, 김영좌, 농부와 뱃놈에 이르기까지 분부대로 당장 백방하겠아옵니다.
[허] 그거 또한 기특헌 생각이구려. 여 형방---
[형방] 예이.
[허] 사또 분부대루 지체없이 거행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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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방] 예이, (우수로 퇴장)
[사또] 그저 이놈의 목숨 하나만 살리시오.
[허] 그런거 걱정할 것두 없구, 겁낼 일두 아니외다.
[사또] 예?
[허] 내가 이 섬에 온 연유는 뭐 당신 감투나 제물을 탐내서가 아니오.
[사또] 그러시담 역시 대감께선 아 아 암행어사--- ?
[허] 어사두 아니구 특사두 아니외다. 식구들 거느리구 살려고 왔을 뿐이오.
[사또] 살다니? 이 돌섬에서요?
[허] (끄덕)
[사또] 휴우! 그러시담 이 길을 잘 못드셨습니다. 이 섬에서 나는 나락이라군 섬사람들이 먹기에두 모자랄 지경이구 그렇다구 새루 논 밭을 일굴래야 보시다시피 온통 돌산 뿐이오니 아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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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두 뱃길을 잘못 잡으셨나 싶소이다.
[허] 사또 내가 노린 것이 바루 그 돌산이오.
[사또] 아, 돌산? 헤. 헤--- 그까짓 돌산이람 몽땅 떠가지구라두 가십쇼. 아니 섬 하나쯤 그대로 서울로 떠옮겨 가신들 누가 뭐랍니까?
[허] 허! 그거 참 인심좋구 고마운 말씀이로군. 여, 백사장들, 사또 분부가 그러시니 지체말구 십사장에게 일러 사람들을 독려하여 돌 캐길 시작하오.
[백사장] 예. 분부만 기다리구 있었습니다.
((백사장들 퇴장))
[사또] 소인은 장차 어떡 험 좋습니까?
[허] 오가는건 사또 의사에 달렸오. 저 전수영감처럼 여기서 우리와 함께 돌을 캐시든지 서울가서 실속있는 감툴 떼 내시든지---
((허생원 가까스로 매화의 포옹을 벗어나서 내아로 뛰어 들다가 마침 묏산짜 보따리를 허리에 띠고 나오던 사또 내외와 박치기. 사또 내외 혼비백산하여 다시 벌렁벌렁 기어 내아로. 허 삼문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나 일찍암치 박몽인 억쇠 관속 통인들로 난공 불락의 진을 쳤다. 좌수에는 아까부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똥방자. 허, 궁여지책으로 은행나무에 기어올라 새둥지를 튼다. 일동 닭 쫓던 개))
[박] 사또께서 이게 무슨 망녕이십니까? 어서 내려오셔서 도임상을 받으시오.
((허 나무 위에서 머리를 도리도리. 박을 비롯하여 육방관속 비장 아낙네들 일제히 땅에 꿇어앉아 허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축원))
[아낙네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또안전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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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도리도리)
[사내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사또안전 비나이다.
[허] (도리도리)
[박] 도임상을 받으시오.
[일동] 어서 어서 받으시오.
((허 나무 위에서 완강히 도리도리. 남녀들의 축원이 되풀이하여 계속될 때 돌연 난데없는 굉음. 일동 혼비백산하여 일제히 뒤로 나자빠진다))
[허] (멀리 뒷산을 바래며) 어! 벌써들 돌을 캐기 시작했구나. (굽어보며) 여봐라. 이제 우리 섬은 천지간에 가장 부유한 고을이 될 것이로다.
((돌을 캐는 폭파음. 계속되는 가운데--- ))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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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하장
무대
무대가 밝아지면서 멀리 가까이 은은하게 들리는 노동요(勞動謠) 동턴, 대청에는 허생원과 변진사가 마주앉아 있으나, 해설이 끝나기까지 깍아놓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지극히 공손한 변진사와 여전히 형색의 허생원.
[해설] 일년이 못되어 백석도는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고을이 됐다. 돌맹이라구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이섬의 흰돌이, 알구보니 바루 대리석이란거란다. 일해년 섬 전체가 대리석이니 섬전체가 곧 돈덩어리랄 수밖에--- . 섬사람들은 돌을 캐어 허생원이 거느리고 온, 오십여척 큰 배에 실어 밖으로 내다가 팔게되니,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는 가끔 쓰고 남는 돈일랑 바다에 던져야 하니 이는 통화정책상, 불가피한 현상이라는거다. 그러던 어떤 날 서울 운종가의 변진사가 아무 연통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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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찾아왔으니 어느새 돈 냄새가 서울까지 풍긴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억쇠란 놈이--- ?
((억쇠가 주안상을 들고 나와 두 사람 사이에 놓고, 변진사에게 지긋이 눈짓을 하고, 좌상수로 퇴장. 허생원과 변진사 비로소 몸을 움직여 술잔을 주고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