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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문화의 향 원문보기 글쓴이: 오상지
란이 아지매와 시청 새아재 | ||||||
<연재>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 (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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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란이 아지매와 시청 새아재 외가 큰집할배 집을 나와 우리 둘은 ‘자유극장’이라는 데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도시에 나와서 처음 본 영화인지라 제목은 「자유만세」로 독립운동의 내용이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구체적인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둘이 돌아오니 복란이 아지매라고 부르는 이모 내외가 와 있다. 나는 잘 모르는데 아지매는 나를 알고 있다. 나를 보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반가와 한다. 나는 좀 어리둥절해서 이모를 쳐다보았다. 이모는 나에게 말했다. “이모다. 그리고 이모부다. 절해라.” 나는 이모부라고 하는 분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절이 끝나자 이모는 “네가 어릴 때 이 이모 등에 많이 업혀 자랐다. 외할아버지 딸이니 이모이다. 이 새아재는 얼마 전까지는 시청에 계셨는데 ‘시월폭동’ 후에 그만 두었다. 한동안 잡으려고 해서 고생이 심했다. 이제 수습이 되어 시청은 아니지만 수의사이기 때문에 도축장에 가실 것이다. 어제 네가 먹었던 곰국거리는 새아재가 갖다주신 것이다.” 이렇게 소개를 했다. 나는 새아재와 이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이모, 새아재 고맙습니다. 자알 먹었습니다.” 라고 했더니 형님까지 배를 잡고 웃는다. 내가 인사하는 모양이 익살스러웠던 것 같다. 두 내외분은 모두 키가 아주 작다. 160센티미터도 안될 듯 했다. 이모는 얼굴이 보얗고 동골하면서 아주 귀여운 소녀 같다. 이모부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 나의 아버지 나이뻘이 되어 보였다. 눈빛은 총명하고 예사롭지 않을 만큼 위엄이 있다. 말도 신중하고 믿음이 간다. 그 후에 나는 이 새아재와 아주 친해졌다. 새아재도 나를 아주 가까운 조카를 대하듯이 허물없이 대했다. 이들에게는 식민지 봉건조선의 비애가 서려 있다. 이모 복란이 아지매는 아버지가 머슴을 살거나 툇밭 땅이나 빌려서 살며 입에 풀칠도 안 되는 삶이었고, 어머니는 남의 집에 종과 같은 더부살이로 살았다. 일거리가 있으면 죽이라도 끓였지만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이런데 살림을 살다보니 아이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복란이 아지매다. 그 모진 가난 속에서 아이가 옳게 자랄 수 있겠는가. 복란이 아지매 여닐곱 살쯤 되었을까, 나의 어머니 결혼 때였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라서 사람을 구하던 중 마침 들어온 사람이 복란이 아지매의 부모였다.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는 옳게 먹지 못해 자랐으니 아주 작았다고 한다. 복란이 아지매의 부모는 열심히 일을 했다. 잔치가 끝나고 일이 없게 되자 그들은 나가야 할 판이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부지런한 그들 내외의 딱한 처지를 돕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형편도 어려운데 아이 때문에 고생이 많다. 우리 형편이 넉넉지 못해 식구 모두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고 아이는 내게 맡겨 주고 나가서 먹고 살 일을 찾도록 해라.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데려가도 되고 그것도 안 되면 내 딸로 해서 키우고 시집도 보내줄 수 있다. 나도 딸을 데리고 있다가 남의 집에 보내야 할 형편이라 딸 하나쯤 더 있는 것도 좋고.” 외할머니의 이런 제안을 그들은 받아들였다. 외할머니는 마음씨가 후덕해서 일손이 모자라 남의 손을 빌리면 아주 후하게 대접했다. 그래서 인근에 후덕한 중매마님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들은 외할머니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복란이 아지매는 나의 외갓집에서 자랐다. 내가 외갓집에서 나서 백날이 지나 어머니의 신행 때 우리 집 밀양으로 왔다. 그때까지 한 두어 달 나를 업어주었던 것이다. 복란이 아지매는 그때 나를 보내고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나는 이런 얘기를 그 후에 듣고 정말로 정이 더 갔고 이모로 깍듯이 대접했다. 복란이 아지매가 혼기가 되자 나의 외할머니는 백방으로 혼처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해서 복란이 아지매의 신랑감으로 얻은 사람이 시청 새아재이다. 시청 축정계에 근무했기 때문에 장가 든 후 외갓집에서는 시청 새아재로 통했다. 시청 새아재도 기구한 출생이었다. 아버지는 충청도 어느 곳에서 조그만 땅뙈기를 붙이고 살던 가난한 소작인이었다. 아버지는 일제 때 늘상 있는 부역으로 나갔다가 거기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가셨다. 남편이 없게 되자 여인 혼자 손으로 키울 수 없어 읍내의 조그만 가게에 잔신부름이나 하도록 맡겼다. 그런데 어머니마저 어느 한 여름에 퍼진 돌림병으로 죽고 말았다. 새아재는 이제 천애의 고아가 된 것이다. 어린 소년인 새아재는 주인에게 고향에는 의지할 곳도 없고 이왕 남에게 의지해서 살밖에야 대처에 나가서 고학을 하겠다고 하고 도와달라고 했다. 주인은 그 동안 성실하게 일한 댓가로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내어주고 학비에 보태어 쓰라면서 더 주었다. 그래서 무작정 부산으로 가서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면서 일본으로 갈 기회를 엿보았다. 부산에서 일하던 중 배에서 심부름을 하는 소년을 만났고 이 소년의 소개로 배를 타게 되었다. 물론 밀항이다. 배삯을 주고 나니 돈이 얼마 없었고, 일본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고생을 숫하게 했다고 한다. 이일저일 하다가 정착된 곳이 도축장이었다. 그러한 고생 중에 강의록을 받아 독학을 했다. 도축장의 기사가 새아재가 똑똑하고 성실함을 인정하고 도축기술을 가르쳤고 이론공부도 도왔다. 몇 년 동안 공부한 끝에 면허시험을 보았고 합격이 되어 정식 도축기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근면함이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고 대구시청 도축기사로 발령을 받아 축정계에 근무했다. 가족이 아무도 없는지라 당시의 관습으로 혼처를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장가를 아주 늦게 들었다. 그런데 그 혼처로 나온 곳이 우리 복란이 아지매이다. 중신애비는 거짓말을 예사로 한다. 중신애비는 복란이 아지매를 면장의 친딸이라고 했다. 당시 나의 외할아버지는 나의 외가동네가 있는 달성군 구지면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면장 딸이고 서출 소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영판 거짓말은 아니다. 새아재는 자기도 키가 작지만 키 작은 복란이 아지매를 보자 예쁘장한데다가 순진하고 티 없이 맑은 눈빛에 그만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장가들고서 복란이 아지매의 부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의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가 진짜 부모처럼 복란이 아지매에게 자정을 두고 있어서 전혀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모 없이 자란 한을 장인 장모인 나의 외조부모에게 효도로 풀었다. 이것은 나의 외갓집의 미담이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도축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백정이라고 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아재는 그냥 백정이 아니라 정식 도축기사이다. 백정이 도축을 해놓으면 검사만 하는 관리이다. 그래서 백정이라는 사회적 대접은 안 받는다. 새아재는 늘 백정들과 어울려 지낸다. 그래서 그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움을 낱낱이 잘 들어주고 과장이나 상부에게 말해서 해결해 주었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대구의 백정들은 새아재를 모두 형님이라고 불렀다. 새아재는 일본에서 독학을 할 때 그 지방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하층계급으로서의 백정과 사귀게 되자 더욱더 그 사상이 깊어졌다. 마침내 「남조선노동당」에 입당을 하게 되었고 대구시청 세포위원장까지 맡게 된 것이다. 결국 대구 10월인민항쟁으로 노출되어 체포령을 받게 되었다. 한 두어 달 피해 다니면서 고생은 했지만 처종백부가 누군가, 「한민당」 도당 위원장이 아닌가. 그 덕으로 수배에서 해제되고 시청 산하의 도축장장으로 발령을 받고 복직되었다. 그러나 한편 시청이라는 곳의 세포위원장을 한 경력은 정보경찰에서는 결코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오라 가라 애를 먹였다. 부패경찰이 쇠고기 생각나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 다음 날 나는 복란이 아지매의 초청을 받고 신암동에 사는 시청 새아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밤늦도록 당시 사회정세를 토론했고 전망도 이야기했다. 주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임시정부수립 그리고 이승만이 남조선 단독정권을 주장한 「정읍발언」에 관한 것이었다. 새아재는 그때부터 나를 신의로 대해주고 어려울 때는 도움도 주었다. 새아재는 내가 첫 징역살이를 하는 사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복란이 아지매도 남편이 죽은 다음 해에 남편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두 내외는 자식이 없이 살았다. 복란이 아지매가 근근히 아기를 한번 뱄지만 워낙 작은 몸이고 게다가 어릴 때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아기가 태중에서 자라지 못했다. 언제나 가면 두 내외가 오도카니 마주보고 의좋게 있는 모습을 본다. 그처럼 금슬이 좋으니 신랑이 죽자 그 다음해로 따라 갔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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