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김해자
까레이스키 봉선화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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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고랑마다 우북이 솟은 덤불 낫으로 베고
검붉게 말라가는 수염 달고 매달려 있는 옥수수 모가지
비틀어 따고 난 뒤 눈 맞췄다
데크 밑 컴컴한 데서 모가지 길게 뻗은 봉숭화
수돗가에서 장화와 장갑 씻다 뒤늦게 눈 마주쳤다
무릎마다 튀어나온 둥그런 관절
밖을 향해 뒤틀린 허리께에도 내 종아리 같은
황색 꽃물이 들었다
블라디보스톡 라즈돌노예 역에서 보았다 총구에 등 떠밀려 노예처럼 실려 가는 고려인들, 가축을 싣고 다니던 화물차에 실려서, 널빤지로 막은 문, 유리창 하나 없는 검은 상자 안에서 배신자를 처단하는 인민재판이 열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밤이면 꽁꽁 얼어붙은 철 상자 안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어매가 죽고 아이가 죽고 열차가 서면 밖으로 내던져진 주인 없는 시신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이름 모를 철길 근처에 묻힌 봉숭아 검붉은 꽃 무더기 떨어져서도 바닥에 딱 들러붙은
2
고려인 3세 김발레리야 씨가 교장으로 있는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학교에서 들었다 옛 고려 춤사위마다 겨드랑이에서 흘러나오는 봉선화 흰 꽃들, 1937년 시베리아 강제이주 열차가 지나가고 밤낮 40여 일 6천 킬로미터를 달려 얼어붙은 중앙아시아 벌판에 내팽개쳐지는 흰옷, 때 절은 흰 짐보따리 흙집 몇 채 무덤밖에 없는 곳 진창이 얼어붙는 갈대밭이 울고 뼛속까지 바람소리
서로 끌어안고 북풍한설 견디는 한 무더기 봉분, 쓰레기통 뒤져 버려진 감자껍질 씹어먹고 늪의 물을 마시고 피똥 싸다 하얗게 질린 봉숭화, 토굴 짓고 흙벽돌 구워 구들 놓고 갈대로 자리를 만들어 바닥 삼고, 괭이와 호미처럼 구부러진 어매아배들
손대면 베일 듯한 톱니를 두른 이파리 옆에
무더기로 피어났다 텃밭 한 켠 은목서 나무 아래
고개 숙인 꽃 속으로 들어갈수록 흰빛 선연한 꽃숭어리
어깨가 흐느끼고 등짝이 젖어 눈물처럼 번지는
봉선화鳳仙花 꽃멍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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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깊은 옥탑방
구름 속으로 들락거리는 태양은 하늘의 동공
당신 눈꺼풀 아래에서 색들이 처음인 듯 태어나네
연못 가장자리에 창포가 연두빛 촉을 내걸자
두꺼비의 황금빛 눈꺼풀이 창포 잎 간질이고
그 바람에 은사시나무가 흔들리네
구우우 구욱 산비둘기 울자 연못에 파문이 일고
은사시나무 꼭대기가 연못 속에 빠지네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물무늬 따라가다 나는 자꾸만 멀미를 하고
거꾸로 서 있는 나뭇가지에 까치 두 마리 마주보고 있네
데칼코마니처럼 주욱 짜면 물감이 흘러내릴 것 같은
물 속의 까치를 더듬어 내 목도 길어지네
가장 높은 곳이 아주 깊네
아주 깊은 데가 가장 고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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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니들의 시간』이 있으며 만해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