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의 창립일은 최초의 주교인 코프(C.J. Corfe) 주교가 선교목적지인 인천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딛은 1890년 9월29일이다. 그렇다고 그 날이 한국성공회의 선교 첫 발은 아니다.
한국 선교를 처음 계획하고 실천한 사람은 일본 성공회의 개척자인 카나다 선교사 쇼(A. C. Shaw) 총사제다. 그는 1880년 일본인 전도사 1인을 부산에 파송하여 한국어 공부와 전도를 시작케 했는데, 그 비용은 동경교회 교인들이 부담했다. 아울러 영국 SPG 본부에 한국선교를 담당할 주교와 성직자 파송을 요청하였다.
1974년 최윌리암 주교 승좌식 (앞줄 왼쪽에서 네번째)
또다른 선교단체인 영국 CMS 선교사인 울프는 개신교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과 우연히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남중국선교회 총회에서 한국선교를 역설했으며, 1885년 11월 중국인 전도사를 대동하고 부산에 와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주로 경남지역에서 주로 유생들과 담론하며,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했으며, 1887년 2월 두 번째 부산 선교여행을 감행하였다.
특히 영국주교 버든(Burdon), 스코트(Scott), 모울(Moule)은 한영조약체결 직후인 1883년 선교사 파송을 선교본부에 요청하였으며, 1887년 9월에는 북중국의 스코트(Scott) 주교와 일본성공회 비커스테드(Bickersteth) 주교는 부산에서 만나 부산 근방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후 캔터베리 벤슨 대주교에게 지체하지 말고 한국에 선교할 것을 직접 요청하였으며, 부산을 방문한 두 주교의 요청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한국성공회 설립은 1888년 세계성공회 모든 주교들이 모인 영국 람베스회의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성공회의 부산선교는 한국 개신교의 1884년 감리교의 스크랜튼 박사와 아펜셀러 목사 등의 최초의 선교보다 4년이나 앞선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초기 부산지역 선교
대한성공회 초대주교 코프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부산과 원산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대지를 물색하였다. 1890년대 당시 일본인은 인천에 2,700명, 원산과 서울에 700명, 그리고 부산에 4천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부산지역의 일본인 선교는 일본인 사제 이마이(今井)가 1899년 11월 내한 스마트(Smart) 사제와 함께 선교지를 물색하면서 시작된다. 마침내 1900년 1월에 부산에 하나의 집을 세를 내어 교회의 형태를 꾸렸다. 코프 주교는 일본인 선교의 확장을 위해 1900년 9월23일 서울에서 부제성직을 받은 스틴버치(C. Steencuch)를 1년간 예정으로 일본 고베교구에 파송하여 일본어 교육을 받게 하였으며, 그는 1901년 11월 초에 귀국하여 1902년 제물포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최초의 일본인 선교를 위한 전담사제가 되었다.
1903년에는 부산의 신자수가 37명이나 되어 교회설립과 함께 일본인 전도사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 전도사 하야시(林)가 1904년부터는 부산의 임시교회를 맡아 시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스틴버치가 일본으로 전출되고, 카나다 출신의 일본선교사 카트라이트(S. H. Carwright), 목커리지(W. Mockridge), 전도사 이키구지(Iki Kyujro), 여전도사 이나바(稻葉), 전도사 이키, 대영국인 전도사 그로스진(Grosjean)과 엘링턴(Elrington) 등이 짧은 기간 시무하면서 정상적인 교회발전에 어려움을 겪에 되었다.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를 마치고 (년도미상)
이런 가운데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던 해 1910년 5월 부제서품을 받은 시오자키(監崎)가 후임오면서 선교의 활력을 띄게 된다. 부산의 옛 가옥을 팔고, 카나다 선교사였던 카트라이트가 죽으면서 받게 된 생명보험금을 보내와서 그 기금으로 새로운 교회대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선교영역은 대구지역으로 넓혀졌고, 1914년 8월에 교회가 신축축성되었으며, 세계 제 1차 대전이후 교토교구에서 파견된 전도사 니시다(西田)가 맡게 되었다. 1913년의 통계로 부산에 78명(영성체자 44명)이었으며,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면서 1917년 말에는 일본인 신자가 435명(영성체자 247명)으로 증가하였다.
지금의 부산 대청동성당은 1923년에 완성되어 ‘성구주성당’(St. Saviour's Church)로 축성되었다. 대구교회는 1923년 영국인 사제 몰리(G.H. Morley)가 시무하면서 성당건축을 계획하였고, 1929년 10월20일에 ‘성후란시스성당’으로 트롤로프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한국에서의 일본인 교회는 사실상 일본성공회로부터는 적극적인 지원이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다만 남동경교구와 고베교구만이 전도사의 파송 등을 협조했을 뿐이다. 1930년대 말까지 한국성공회가 급성장한 반면 일본인 교회는 점진적인 성장을 했으며 독립된 일본인 전도구로 유지되었다. 1935년의 일본인 신자는 505명, 1938년에 512명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며, 새로운 영세신자나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도 1년 10여명 안팎으로 미미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조합교회와 같이 침략 정책으로 한국성공회를 지배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부산지역 선교의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인 보다는 일본인 선교에 집중됐다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이후 선교의 기반 확립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동란 당시의 부산지역 선교 해방과 함께 부산과 대구, 상주교회가 ‘일본인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6.25동란은 그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25로 부산은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 들었고, 이 때 바로우(박바우로) 신부가 성니콜라구호소(St. Nicholas Shelter)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53년 3월 그가 새 임지인 청주로 떠날 때까지 계속하다가 1954년 12월18일에 YMCA에 구호소를 인계하였으며, 수용 중이던 아동들은 안중고아원으로 인계되었다. 이 무렵 1954년 3월25일에는 코서(P. Corser ; 고피득)와 테넌트(C.R. Tennant ; 천갈로)가 부산에 도착하여 전쟁 직후 교회재건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1954년 제 4대 주교인 쿠퍼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부산교구 지역에 시무했던 한국인 사제는 부산의 임인제 신부, 대구의 김경득 신부, 상주의 이천환 신부 등이었다. 빈민선교의 효시, 부산 반송동의 기아해방운동 존 데일리(J. Daly) 주교는 세계적인 기아해방운동에 관심을 갖고 맥클라렌(맥부인)이 1963년 내한한 것에 맞춰 안중고아원 정착사업과 함께 부산 반송동 지역의 기아해방을 위해 사업을 추진하였다. 호주선교사인 코베트(경대위) 신부의 추진으로 반송동의 ‘산동네’에 거주하는 빈민 가족들을 위한 지원사업이었는데, 맥부인의 참여로 1965년에 마을회관을 건립하였고, 자립과 협동형태의 삶을 추구하였다. 반송동의 난민정착사업은 성공회가 시도했던 초창기 빈민선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뒤를 이어 광혜원지역의 성베드로농장, 서울의 성미가엘신학원 근처의 항동에 대천덕 신부 주관으로 가나안마을운동 등이 뒤를 이어 실시되었다. 무리한 부산교구 분할 1965년 5월 27일, 대한성공회는 창립 75년 만에 한국인 이천환 주교가 서품되면서 서울과 대전교구로 분할하는 대변혁을 맞이하였다. 1956년 한국성공회 5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존 데일리 주교가 3자 정책(자전, 자정, 자립)을 내세우면서 시작된 분할논의는 거의 10년 만에 교구분할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서울과 대전교구 공히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구분할 6년 만인 1971년 12월 대전교구 상임위원회는 대전교구를 분할하여 ‘부산교구’를 설립 결의와 1972년 2월 전국의회에 제안되어 94명의 대의원(서울 37명, 대전 57명) 중 90명이 참석한 가운데 과반수를 넘긴 52표로 가결되었다. 이 교구분할은 표수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는 제안은 아니었고, 관구설립이라는 구상 자체도 상당한 논의과정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체적인 발전계획도 없이 부산교구 신설 계획이 추진된 것이었다. 후에 이야기지만 대한성공회의 관구설립은 1992년 9월이 돼서야 오랜 진통 끝에 이루어졌다.
주일학교 교사 체육대회 (1989년 1월)
결국 캔터베리대주교의 인준을 거쳐 1974년 2월 1일 부산교구의 설립이 공포되었으며, 관할지역은 경상남북도와 부산, 그리고 제주도를 포함하게 됐다. 초대주교는 1974년 4월2일에 열린 임시전국의회에서 최철희와 김성수 신부, 그리고 평신도인 김진만이었는데 최철희(윌리암) 신부가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선출되었다. 최철희 주교는 1974년 6월1일 서울대성당에서 이천환 주교가 집전한 가운데 주교로 서품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산교구의 시작은 안타깝게도 6개 교회(부산, 북부산, 동래, 대구, 서대구, 상주교회)와 8명의 성직자로 출발하는 영세한 교구일 수 밖에 없었다. 관구승격을 전제로 한 교구분할은 새롭게 출발하는 부산교구 입장에서는 무리수였다.
멀고 먼 자립의 길 1974년 출범한 부산교구는 불과 6개의 교회로 시작하여 최철희 초대주교가 1987년 퇴임할 때까지 13년 재임 기간 동안 10개 교회를 개척했고, 부산 수영로의 교구회관을 신축했으며, 세계 선원선교회를 유치하여 자립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2대 교구장으로 김재헌(분도) 주교가 1988년 5월에 승좌하여 10년 동안 재임 후 1998년 5월 퇴임하였고, 3대 교구장으로 이대용(요셉) 주교가 1999년 3월 1일 승좌하여 6년간 재임하였고, 4대 교구장으로 윤종모(솔로몬) 주교가 2005년 12월 3일 승좌하여 2011년까지, 그리고 지금은 2012년 2월 18일 승좌한 5대 교구장 박동신(오네시모) 주교가 재임하고 있다. 현재 부산교구는 17개 교회(본교회 9, 선교교회 8)에 20여 사제가 속해 있다. 한 때는 외국성공회의 원조와 교구회관, 유치원 운영 등을 기반으로 자립의 기반을 닦는 듯 하였으나, 주변 상황의 변화와 몇 차례에 걸친 선거의 후유증, 그로 인한 교회기반의 약화는 부산교구의 자립을 멀게 만 느끼게 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