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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극 사로메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 쌔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
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
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
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
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
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
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
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
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하니라]
이상은 신약성서 마가복음 제 6장 21절 ~29절에 나와 있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4장에도 이와 거의 같은 기록이 있다.
기독교를 나라의 종교로 신봉하는 국가에서 사로메 만큼 유명한 이야기
도 그리 많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 예술가나 설교
자들에 의해서 많이 다루어져 왔다. 성서 중의 작은 그리고 소름끼치는
한 토막이지만 그림으로는 수없이, 연극이나 발레, 오페라 등으로도 많이
재연되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프랑스어로 쓴 희곡 "사로메"(1894)는 물
론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고 영역 판은 비어스리(A.V.Beardsley) 가
삽화를 그려 유명하다. 와일드의 희곡을 라하만(H.Lachmann 1865-1918)
이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리히얄트.슈트라우스가 "가극 사로메"(작품 54
번)작곡을 하여 초연은 1905년 12월 9일 드레스덴 왕립 오페라 극장.그후
슈트라우스의 대표작의 하나로서 각국의 대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었는
데 대 관현악을 필요로 하고 성악 부문에서도 연주 기교가 복잡하여 중
소 규모의 극장에서는 상연할 수 없어 동양 권에서는 아직 상연하지를
못하고 있다. 언젠가 뉴-욕의 메트로포리탄 극장에서 상연되었을 때 사로
메의 악명이 오히려 인기를 불러 극장이 터지게 관객이 밀려들어 관객
정리를 위해 경찰 예비 대가 출동할 정도였고 표는 몇 일치가 미리 매진
되어 암표 값이 정가의 몇 배로 뛰는 등 난리를 겪었다. 그때의 가극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무대장치도 엉성하였고 사로메로 분장한
스칸지나비아 출생의 소프라노 가수는 노래 솜씨는 훌륭하였으나 대형
가수로서 춤을 출 때에는 매력보다는 징글맞은 인상을 주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름끼치는 이야기는 음악의 파도에 힘입어 으스
스한 크라이막스를 훌륭하게 장식하였다 한다.
때는 서기 29년. 장소는 파레스치나의 북부 가리야라의 수도 데베리아의
왕궁. 국왕 헤롯은 예언자 요한(세례 요한)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국왕의 두 번째 아내 헤로디아의 (데려온)딸 사로메는 세례요한에게 이상
(異常)한 애착을 갖고 친위 대장 나라보드의 사랑을 물리쳤는데 국왕의
생일 축하 연회에서 "무지개 천의 춤"을 추어 그 상으로 요한의 목을 요
구한다. 검은 옷의 거한 이 날이 둥글게 휘어진 큰칼과 은 쟁반을 들고
요한이 갇혀 있는 지하로 모습을 감춘다. 순간 극적인 서스펜스. 그사이
오-케스트라는 톱질을 하는 것같은 음향을 연주한다.
이윽고 사로메가 요구한 끔찍한 상품을 올려놓은 은 쟁반이 사형 집행인
의 검고 큼직한 한 팔에 받혀져서 무대 위로 서서히 올라온다. 흥분한 사
로메는 요한 의 목을 받아 들고 열렬한 입을 맞춘다. 국왕은 그녀의 요기
에 공포를 느끼고 사로메를 죽인다는 것이 이 가극의 줄거리다.
엘 마슈나가 (달아맨 궁전)
슈트라우스의 가극 사로메는 성서에 나와 있는 사실(史實)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로서의 줄거리는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가 펼쳐진 장소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도 그곳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요한 이 유폐되었던 감옥은?. 사로메가
헤롯 왕 앞에서 춤을 추었던 궁전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충격적인 에피
소드가 일어난 장소는 성지 파레스티나에서도 가장 높은 산꼭대기로 사
해(死海)의 해수면에서 1300미터 높이의 마게라스로서 그곳에는 헤롯 2세
(헤로디아의 두 번째 남편)가 축조한 성채의 폐허가 있고 여러 가지 정황
으로 보아 세례요한을 처형한 감옥의 흔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H.V.몰
톤의 "주님의 족적을따라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Morton.H.V. Steps of
the Master, 1953). 이와 같이 세례요한에 대해서 동시에 사로메에 대해
서 명백한 유적이 있는데도 해마다 몇 십만 몇 백만에 달하는 성지 팔레
스티나 순례자들 중에 이곳 마게라스까지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은 무슨 까닭일까?. 예루살렘에서 마게라스 까지는 사해(Dead Sea)를 격
해서 직선거리로 40킬로에 불과하지만 마게라스는 팔레스티나의 전 사적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로메가 춤을 춘 연회장이
나 요한이 참수된 감옥에 도달하려면 며칠이라는 시간과 군부의 특별 허
가와 무장한 호위병과 상당한 체력에 등산 기술까지 갖추어야 하기 때문
이다.
유데 歷史家 후라비우스.죠세퓨스(Flavius Josephus 37-96?)가 전하는 바
에 의하면 헤롯 대왕 (헤롯왕의 아버지,기원전 4년 사망)은 3인의 아들
중 헤롯.안디바스(헤롯 2세)에게 유산으로 "모아브"땅을 주었다. 모아브는 사해의 동쪽 연안의 거의 황무지 땅이다. 헤롯은 모아브 땅에서 가장 높
은 산꼭대기에 난공불락의 성채를 세우고 궁전과 마을을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나중에 "엘 마슈나가"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아랍어로 "달아 멘 궁
전"이란 뜻이다. 해롯은 성채에 높이 70미터의 탑을 몇 개나 세웠는데 그
는 그곳에서 아래에 펼쳐지는 사해와 멀리 팔레스티나의 산들과 그곳으
로부터 40킬로 거리인 예루살렘의 둥근 건물 지붕들을 한눈에 바라보았
을 것이다. 동시에 예루살렘의 오리브 산에서도 이곳의 망루가 보였을 것
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탑들은 남아 있지 않다.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성채
의 유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동차로 쥬리고를 빠져 요단강을 건너서 트
랜스.요르단 깊숙이 들어가 에스. 사돌을 넘어 그날 밤은 요르단 수도 암
만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모아브의 황량한 언덕과 계곡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사해의 기슭으로 진출해야 한다. 예루살램에서 직선 갭? 40킬
로의 지점으로 도달하기 위해서 그 여섯 배인 240킬로를 여행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15킬로는 사해의 기슭에서 거의 절벽에 가까운 단애를 기
어올라가야 하는 대 좁은 협로와 벼랑길은 길이라고도 할 수 없다. 한발
한발마다 거칠고 위험한 곳이다. 부녀자는 갈곳이 못되고 건장한 사나이
들도 신발은 해지고 가시 덩굴에 손발은 상처를 입어야 한다. 헤롯왕은
왜 이렇게 험난하고 인적도 드문 산 꼭대기에 궁전을 세웠을까?. 우선 안
전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예루살렘에 있는 적들과 라이벌들을 내려다
보면서 만족하였으리라. 궁전의 발코니에서 눈 아래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사해까지의 벼랑을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가지 헤롯이 이곳을
궁성 터로 고른데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방탕한 생활을 한
업보로서 얻은 병으로 인해 이 산 계곡에서 내뿜는 유황 온천을 이용하
기 위함일 수도 있다. 지금도 온천은 작은 개울만큼이나 수량이 많아 70
미터 절벽에서 유황의 증기를 내 뿜으면서 펄펄 끓는 온천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있어 아랍인들의 애용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간신히 산정
에 다다르면 헤롯왕의 성채 터가 나타난다. 아랍어로 엘.마슈나가(El
Mashnaka)라 하는 곳이다. 그 곳으로부터 성지(그리스도가 생활하던 곳)
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해를 사이에 두고 40킬로 되는 곳에 예
장사치들의 것으로 보이는 집터 등도 남아 있다. 궁전은 완전히 폐허화하
여 어느 곳이 왕의 거처였는지 사로메의 방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헤
롯왕이 연회를 베푼 방을 추측할 수는 있다.
헤롯왕
세례요한의 순교는 헤로디아 등의 일시적 충동적인 착상이었을까?. 아니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유대의 역사가 후라비우스.죠세퓨스의 의하면 요
한 살해 계획은 수개월 전부터 착착 준비되어 왔다고 한다. 헤롯왕의 아
버지 헤롯 대왕(전 74-4)은 역사상 가장 포학한 인물 중 하나 이다. 그는
전 47년이래 가리라야의 태수였는데 로-마의 지원으로 유대의 태수가 되
어 발디아를 물리치고 유대 왕이 되었다.(재위 전 37-4) 헬레니즘의 지지
자로서 유대인의 반항을 진압하는데 그 잔인성을 발휘하여 갖가지 압제
와 학정을 서슴지 않았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 2장에 나오는 베들레헴
의 유아 학살 사건의 장본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유대 왕으로 있을
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의 하나가 장차는 자신을 대신해서 유대의
왕이 되리라는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박사의 예언을 듣고 자신의 지위
가 위험하다고 느껴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새싹을 제거하기로 하여 베들
레헴과 그 주변의 두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예
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집트로 피신토록 하여 참변을 면
했다.
죠세퓨스는 헤롯 대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왕도 아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한 가장 악독한 폭군일 뿐이다"라고.
그는 예루살렘에 신전을 조영하는데 국가의 재산을 소진하였다. 그로 인
해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헤롯 대왕이 36년간의
치세 중 하루도 누군가를 사형에 처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희생된 사람은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고관대작,군인,승려,친구,
그의 처첩,형제,자식들도 그의 명령으로 죽었다. 그의 명령으로 사형된 자
중에는 누이 사로메(요한을 죽인 사로메와는 동명이인)의 두 사람의 남
편, 처 마리안느와 두 아들 알렉산다와 아리스토블이 있다. 그리고 이복
형제의 한사람을 요르단 강 빠져 죽게 하고 계모 알랙산드라를 노상에서
찔러 죽였다. 또한 두 사람의 학자가 신전 문에 붙인 황금으로 된 로-마
의 독수리 조각에 흠집을 냈다는 이유로 본인들은 화형에 처하고 가족을
몰살시켰다. 그가 늙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황태자인 안대바델이 벌써 왕
과이며 동시에 계수가 되는 헤루디아의 미모에 끌리게 되었다. 해루
디아도 남편의 형이며 큰아버지도 되는 헤롯의 정열에 기우러 져 두 사
람이 다 이미 결혼한 몸인 것을 돌보지 않고 헤로디아는 헤롯과 결혼하
기 위해서 자기의 남편이자 숙부도 되는 빌립을 살해하고 빌립과의 사이
에서 난 딸 사로메를 데리고 헤롯을 따라 로-마를 떠나 모아브로 향했다.
그들이 마게루스에 가온는 셍을 들은 헤롯의 정처는 생명의 위
험을 느끼고 친정 아버지 베도라왕에게로 도망을 하였다. 이렇게 되니 그
들의 결혼을 방해하는 자는 없다. 거리낌없이 결혼하여 엘.마수나가의 성
채로 돌아왔다. 사로메는 어미를 따라 종조부이며 백부이며 어붓 아비인
동시에 팬 이기도한 헤롯의 궁전에서 살아 있는 아름다운 꽃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헤롯 에게는 두 사람의 강적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처의
아버지인 베도라왕이요 또 한 사람은 세례요한이었다.
세례 요한
세례요한은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출생
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제일장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의 아
버지는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으로 사가랴 라하고 어머니는 아론 가의 딸
에리사벳이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라고 누가복음에 나
와 있다.
에리사벳은 잉태를 못하여 자식이 없었다. 어느 날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
를 행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네 아내 엘이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 이라 하라" 라고 하였다.
사가랴는 놀라서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라고 아뢰었다. 천
사 가브리엘은 "나는 하나님 앞에 섯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
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 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
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고 하였다.
그후 천사 가브리엘은 "가릴리의 나사렛이란 동내에가서 다윗의 자손 요
셉이라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네가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
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였다. 에리사벳과 마리아는 친척이었는데 두 사람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에리사벳이 낳은 아기가 세례요한이요. 마리아가 낳은 아기가 예
수. 그리스도이다. 요한에 대해서 누가복음에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좡構 물으니 요한이 답하기를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
며 사취하지 말고 받는 급여로 만족하라"하였다.
민중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고 헤롯의 포학에 짓눌리어 은근히 구세주
의 왕림을 갈망하던 중이었으므로 혹 이 사람이 그가 아닌가 하고 생각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군중에게 말하기를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하였다. 이것은 예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요한은 그리
스도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은 초기 교회의 사람들은 오늘날 기독교
국임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가장 기피하는 순전한 공산주의자였다. 그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고행전 제 2장 44~45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
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사도행전 제 4장 32~35절) 라고 있다.
어딘가 유행하는 신흥 종교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신흥 종교와 같이 일
반 신도가 "집 팔고 땅 팔고"해서 바치고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것에 반
해 유독 교주만은 억만 재벌이 되고 간부들은 백만장자가 되여 사치와
호사에 빠져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리스도가 죽은 후 사도 베드로와 함
께 초대 교회의 지주가 되어 온 바울은 "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결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 제 4장 12절)하고 또 "누구에게서든
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
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데살로니가 후서 제 3장 8절)라
고 말하고 있다.
사도행전 제 18장 3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직업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그는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와 그의 처 브리스길라의 灸捉 얼마간의 두
좆遲 갖으리라는 것
은 분명하다. 세례요한이 모아브의 대중에게 끼친 영향력이 컸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대중에게 "머지않
아 구세주(메시아)가 임하시어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리라고 외쳤다.이젠
헤롯과 같은 자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특권계급의 사복을 채우는 세금은
낼 필요가 없다. 자본가를 타도하라. 유한계급을 추방하라. 부패를 멀리하
고 회개하며 주님께 기도하는 의인이 되며 가난한 자의 기쁨을 알라"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열변을 황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고대광실에서 행해지
는 특권계급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였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모세의 율법에는 근친 결혼을 엄하게 금하고 있다. 헤롯은 그 율법을 어
겼다. 그는 법률상 정식으로 혼인한 아내를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조
카딸을 앉히고 그것도 아우에게서 강탈해 온 것이다. 그것은 요한이 볼
때에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다.
당시 로-마의 지배계급에서는 근친 결혼은 빈번히 행해져 거의 일반화
되다시피 한 풍습이지만 그런 것은 요한으로서는 아랑곳 할 바가 아니었
다. 요한은 헤롯에게 "계수를 처로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대
중들 앞에서도 그 일을 비난했다.
헤롯은 이 교란자의 말을 얼마 동안은 못들은 척했다. 그는 요한이 머지
않아서 유대에 구세주가 임하시어 새로운 왕국을 세우리라 하는 말에 적
잖이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헤롯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
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
도 달게 들음이러라" (마가복음 제 6장 20절)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누가복음 제 3장 19~20절)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요한에 대한 헤롯의 증오는 다분히 정치적인 면이 있
고 이와는 달리 헤로디아의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요한은 헤로디아
의 죄과를 불을 토하는 열변으로 비난하였다. 그때마다 헤로디아는 큰아
버지이고 시숙인 헤롯과 맺어지기 위해서 숙부이며 동시에 남편인 빌립
을 살해한 사건이 머리에서 되살아나 양심을 괴롭혔을 것이다.그래서 "요
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그런데린 왔다. 헤롯의일 잔칫날 사로메가 춤을 추어 왕을 기쁘
게
하니 헤롯왕이 "무엇이던지 내게 구하라"하였다지 않는가 헤로디아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메가 홀 중앙으로 나타
난다. 빈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사로메 공주가 왜 귀빈들 앞에서 이와 같이 춤을 추게 되었는지
는 알지를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이러한 방법으로 국왕이며 할아버지며
큰아버지며 동시에 의붓아비인 헤롯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또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헤로디아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딸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뜻하는 대로되었으니까.
발레리나로서의 사로메의 춤은 실로 훌륭한 것이었다. 처음은 천천히 우
아하게 시작해서 음악의 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동작이 민첩해지며 이윽
고 모든 악기가 한가지 음으로 융합되는 듯하게 울려오자 그녀의 춤도
뛰고 돌고 넓은 공간을 무아의 경지로 꽉 채워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였
다. 음악이 그치자 그녀는 빙글빙글 돌며 헤롯왕의 발아래 엎드린다. 사
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떠나 갈듯 박수를 친다.
헤롯왕은 그녀의 정열적인 춤사위와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의붓아비인 것
도 잊고 사로메를 가까이 오게 하여 한 팔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안으며
여럿이 보는 앞에서 "무엇이던지 내게서 구하라 나라의 반이라도 줄 것
이니라"하고 맹세한다.
사로메는 무엇을 달랠까 몰라서 어미에게 묻기 위해 연회장을 빠져나간
다. 헤로디아에게는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오랫동안 이를 갈아 온
미운 원수 그녀에게 무엄하게도 감히 서슴없이 비난을 퍼부어 스트레스
를 싸이게 한 황야의 거렁뱅이를 없에버릴 기회가 아니던가. 헤로디아는
교활한 눈을 굴리며 딸에게 요한의 목을 구하라 가르친다.
사로메는 연회장으로 돌아와 왕앞에 엎드려 "지금 곧 세례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 내게 주기를 원 하옵나이다"라고 하였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요한의 목을 가져오라 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은 헤롯이 "심히 근심하나"라는 견해에는 찬성을 하
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일의 본질상으로 보아 겉으로 표시한 표정은 여
하간 적어도 내심으로는 기뻐하였을 것이 틀림없고 다만 여러 사람들 앞
에서의 체면상 곤란한 듯한 제스처를 썼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왕의 속마
음이야 어떻든 이미 명령은 떨어졌고 위병은 밖으로 나갔다.
위병은 횃불을 들고 엘.마슈나가 즉 달아맨 궁전으로 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간다. 옥지기의 안내 기다린다. 사로메 역시 어딘가 불길한 예감에 떨
면서 말없이 왕의
옆에서 불안하게 서 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위병은 조용히 연회장으로 되돌아와 끔찍한 물건이 얹혀 있는 쟁반을 사
로메에게 내민다. 빈객들은 이 쇽킹한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어 또한 백성
들이 말하는 바로는 죽은 자라도 일으킬 능력이 있다는 이 사나이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되기를 꺼려하여 하나 둘씩 슬금슬금 자리를 뜬다.
사로메는 피투성이 선물에 질렸으나 자기가 요구한 것이니 할 수 없이
받아 들고 헤롯왕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어미의 방으로 간다. 헤로디아
는 공포도 후회도 없다. 그녀는 두 손으로 쟁반을 받아 들고 머리의 입에
서 내 밀어진 혀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비웃는다.
요한은 이미 그 혀로 헤로디아를 욕하지 못하는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