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소통을 위한 한자교육 부상
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의 사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만나는 자리에서 양국정상은 공자의 명언과 최치원의 시구를 주고받으며 우호를 다졌다. 몇 년 전 미국을 방문했던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주석도 이백, 두보 시를 인용하고, 중국을 방문했던 미국 클린턴 국무장관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말을 빌려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자(逢山開道 遇水架橋)”란 한시나 중국 명언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우리에겐 ‘미국의 시대’와 ‘중국의 시대’가 동시에 전개되고 있다. 이 선택을 먼저 문자로 보여주는 것이 더 간단하고 편한 방법일 수도 있다. 중국은 우리의 과거문화의 뿌리이며 가장 많이 만나고 교류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이어가기 위해선 우린 한자를 되찾아 한글과 병용해야 한다. 한글을 중심으로 한자와 영어를 양대 바퀴로 함께 사용한다면 우리에겐 융합과 발전의 좋은 결과가 예견될 것이다.
한자는 세계인구의 3분의 1이 사용하는 국제어로서의 중요성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등 20억 명이 한자를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의사를 소통하고 상대의 문화를 이해한다. 사용언어의 인구수만 따지면 영어보다 많다. 한자구사 능력을 갖추면 한자문화권 내 기업거래나 여행, 인적교류에 도움이 된다. 그 나라 말을 할 줄 몰라도 필담(筆談)을 통해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중국에서 약자로 만든 간체자(簡體字)도 번체자(繁體字, 우리가 쓰는 정식한자)를 알고 나면 훨씬 배우기 쉬워진다.
혹자는 영어는 웃고 들어가 울고 나오고, 한자는 울고 들어갔다 웃고 나온다는 말도 한다. 이는 아마 한자는 하나를 알면 열 자까지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글과 한자의 두 수레바퀴처럼 균형이 유지돼야 한다.
Ⅱ 한글전용정책의 지양(止揚)
한글은 세계적으로 가장 창의적인 언어라는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며 한자는 문화유산을 축적하고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언어적 도구였다. 우리의 어문정책이 한글을 우선시하면서도 한자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을 유지해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들어 동북아지역 국가 간 인적, 경제적 교류가 깊어지고, 협력과 공존이 절실해지면서 한자의 중요성은 종전보다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근래 한․중․일 30인회가 공통의 상용한자 800자를 선정해 발표한 것도 이런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 3국 공통의 상용한자 선정은 3년 전 한국 측의 제안에 따라 추진돼 왔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중국의 인민 대, 일본의 교토(京都)대가 중심이 돼 일본의 교육용 기초한자 1006자와 중국의 상용한자 2500자 중 겹치는 한자 995개를 뽑아냈고 이를 한국의 기본한자 900자와 대조해 최종적으로 공통 상용한자 800자를 도출했다. “3국의 젊은이들이 800자의 한자를 익히게 되면 어느 정도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회고컨대 우리 한자교육은 정권차원이나 교육당국의 방침에 따라 몇 차례의 굴곡을 겪어왔다. 한자는 1970년부터 초․중고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가 1975년 중,고 교과서에 재등장(1800자)하되 한자 혼용이 아니라 괄호 안에 넣어 한자 병용(倂用)이 이루어졌다.
현행 교육과정을 보면 초등학교에서의 한자수업이 정규과목으로 편성돼 있지 않다. 연간 68시간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해 학교장 재량으로 한자공부를 하는 정도다. 중․고교에선 선택과목으로 한문을 이수하고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한 학년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한문’이라는 교과는 수능에서 ‘제2외국어’로 분류돼 17%정도만 선택함으로써 한자가 정말 ‘낯선 외국어’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익숙한 ‘온라인 세대’들에게 한자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까다로운 글자로만 인식되고 있다.
Ⅲ 초등한자교육의 필요성
그 동안 역대 교육부장관 13분이 ‘초등학교 한자교육의 실시를 촉구’하는 건의서를, 역대 국무총리 전원(23명)이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몇 차례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2009년 교육부 설문조사 결과에도 학부모 중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찬성의사를 밝힌 응답자는 무려 89.1%였다. 한글 전용화 정책으로 한자가 초등학교교과서에 빠진 지 43년, 한자가 젊은 층의 기피대상이 됐다는 의미다.
때맞춰 문용린 서울교육감이 올 가을학기부터 초․중학교에서 방과 후 한자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사교육시장에선 만화에서 학습지, 급수시험에 이르기까지 한자학습의 열풍이 거세다. 이에 비하면 공교육의 대응이 늦은 감이 있으나 환영할 일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말과 글의 70% 정도가 한자어를 빌린 것인데 말로는 같아도 뜻이 전연 다른 한자어가 수두룩하다. 한자로 쓰지 않으면 뜻을 알 수 없는 신판문맹이 되고 만다. 지금 10군데가 넘는 기관에서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르고 있다. 등급만 10개 이상이다. 1000자 정도 알면 3급 정도 되고 2000자를 알면 1급이다. 특 1급, 특 2급도 있다.
기업에 따라 신입사원 채용 시 한자능력검정시험 급수를 인정하는 곳도 많다. 수요가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기고 있다. 물론 그 수요는 소비자인 국민들이 한자를 배워야 우리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필요성을 느낀다는 데서 출발한다.
Ⅳ 어휘력 확장에 도움 되는 한자교육
표음(表音)문자는 음을 읽기에 좋고, 표의(表意)문자는 뜻을 알기에 쉽다. 표음문자로만 적혀 있는 현행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겪게 되는 1차적인 고통은 한자가 아니라 한자어(漢字語)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한자어를 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뜻을 몰라 심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국어부터 수학, 과학과 체육까지 거의 전 교과의 학습효율성을 위해 한자어의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자는 조어력(造語力)이 강해 함축적이고 다양한 어휘(語彙)를 생성하는데 매우 유리하기에 어휘력확장은 평생의 학습능력을 좌우한다. 따라서 교과학습에서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독서력을 높이는데 한자교육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한자지식은 인문학의 기본이며 역사, 철학, 자연과학 등의 전문용어 이해에도 필수적이다. 독일의 저명한 언어학자 훔볼트(Humboldt)는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정신구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유(思惟)하므로 개인이 표현할 수 있는 어휘 수는 그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Ⅴ 한자지도는 학력향상의 지름길
한자어를 많이 알면 고유어와 한자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 더 풍부한 국어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자교육에도 과도한 주입식 교육은 금물이다. 특히 저학년일수록 놀이형태의 학습방법이 필요하다. 천자문을 쓰고 또 쓰고 해서 우격다짐으로 외우기보다는 기존 서점에 판매되는 만화로 된 한자도서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한자의 모양을 외우게 한 후 신문에 나오는 한자나 건물 간판에 적혀 있는 한자를 읽도록 해 자연스럽게 한자를 외우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외우고 있는 한자를 직접 써보면서 정확히 이해하도록 한다면 부담감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자어 지도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다. 다만 교과서 한자어에 대한 어휘력을 높이겠다는 목적을 ‘방과 후 한자교육’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자교육은 특정교사에 의해 특정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하지만 한자어 지도는 과목마다 매시간 그때그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다. 과목마다 수업시간에 겪게 되는 괴로움과 고통을 참아 두었다가 방과 후에 몰아서 해결하겠다면 ‘식은 쇠’를 두들기는 만큼 무모한 일이다.
종합컨대 수학 능력, 즉 학력(學力)은 한자어 어휘력에 달려 있다. 전 과목 교과서에 석류 알처럼 송송 박혀 있는 한자어를 접할 때마다 국어사전을 통해 ‘단김에’ 이해하는 것이 한자학습의 첫걸음이자 학력향상의 지름길이다. 또한 시중에 한자어 속뜻을 풀이한 사전도 나와 있다. 이러한 어휘지도는 한자 선생님이 아니라 모든 과목, 모든 선생님의 기본적인 책무다. 특정 선생님에 의해 특정시간(방과 후)에 실시하는 한자교육에 대한 일부의 반감과 저항을 사전에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비행기 조종사의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은 목숨을 살리고, 학교 선생님의 한자어에 대한 열린 자세는 학생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 이종범 제13회 경북 회장(전 영천금호여중고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