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여자와 남자는 격렬하게 서로 몸을 섞는다. 여자는 프랑스 중위와 놀아나다가 버려졌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라였고, 남자는 귀족 삼촌의 상속자이자 어니스티나라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을 약혼녀로 두고 있던 찰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너무나 강렬하게 발생하고 만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과 고통이 따르는 사랑에 몸을 맡기는 두 남녀의 운명이 어떻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다.(…)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다.”(스피노자의 『에티카』중)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스피노자는 욕망에서 자신의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결국 이성의 윤리학은 사회의 윤리학이지 ‘살아 있는 나’의 윤리학일 수는 없다. 스피노자가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윤리학이었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는 존재다. 만일 욕망이 억압되어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인간은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있으니까.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피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찰스가 사라라는 여자에게 몰입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라는 자신만의 욕망을 회복하려고 발버둥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다음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가감이나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는 진솔하고 단순한 책과,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엉터리 책의 차이, 사라는 친절하게도 그 점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이 바로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모순이고 차이였다.”
사라가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유는,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을 찰스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간파했고, 자신도 그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과연 찰스는 자신과 사라 사이의 간극, 혹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라에게 집착할수록 찰스는 결코 사라 옆에 나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욕망을 되찾을 때에만 사라와 제대로 만나게 되리라는 것, 찰스는 이 사실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