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18-23
복된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가정과 가족 그리고 경영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일 들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은 참 즐거운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주의 나심을 축하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작년 성탄절에 한 가지 불행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인 수정교회(Crystal Church)라는 큰 교회가 있는데, 매년 이맘때 한 달 동안을 저녁마다 “크리스마스의 영광”(The Glory of Christmas)이라는 축제를 엽니다.
양과 낙타가 직접 무대로 올라오고 로마 기병들이 말 타고 오가는 등 최고의 기술과 예술을 총동원하는 뮤지컬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인이 그 축제를 보면서 성탄절을 축하하고 싶어 한답니다.
그 축제의 음악 감독은 자니 칼(Johnnie Carl, 57세)이라는 분인데, 지난 29년 동안 수많은 성탄음악과 찬송을 작곡, 편곡하여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축제를 두 시간 앞두고 교회 화장실에서 권총자살을 해버린 것입니다. 기쁜 성탄의 계절에 비극적 인생을 마친 것입니다. 이유는 개인적인 압박감을 감당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수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및 싱어들과의 관계도 힘들고, 작곡과 편곡 작업도 너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면서 내년 성탄절에는 성탄의 의미를 확고히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기쁜 성탄절 설교 서두에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성탄을 통해 분주한 성탄 행사들 보다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배경을 간단하게 말씀해주고 있는데 세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이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이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21절을 보시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 분은 죄에서 당신의 국민을 건질자 이십니다. 또 하나의 이름은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 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나님 이라고 선언 합니다.
성탄의 메시지 , 성탄의 중심은 바로 이 세가지를 믿는 것입니다. 동정녀에게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죄에서 건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이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굳 뉴스입니다.
있지도 않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만들고 , 크리스마스 트리와 조명으로 예배를 대신하고 , 술잔을 기울이며 나이트 클럽에서 메리 크리스 마스라고 외치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크리스마스 기쁨이 아닌 인간 존재 , 내 심연에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감싸않고 해결해 주신 구세주의 나타나심을 인하여 기뻐하는 날입니다. 진리를 앎으로 ,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기쁨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찾아오신 방법은 수천년 전부터 인류가 타락 할 때부터 예언되어 있었는데 오늘 본문 23절 말씀도 예언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800 년 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구약 성경 이사야 7: 14에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쪽은 유다왕조로 북쪽은 에브라임 왕조로 다른 말로 북 이스라엘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나뉜 남북 왕조는 우리나라 만큼이나 사이가 않좋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조는 아람이나 모압 , 암몬 ,에돔 등 주변 국가와 동맹을 맺어 남쪽 유다를 괴롭히고 남쪽 유다 왕국은 애굽의 손을 빌려 이스라엘을 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왕인 베가가 아람왕 르신과 연합 전선을 펴서 유다 왕국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때 남쪽의 유다왕 아하스와 백성은 싸울 힘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바위에 계란 치기 밖에 안되는 군사력의 열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지켜 줄것이고 두 연합 세력을 다 타다 남은 부지갱이 같고 베어진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선포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지켜 줄것이다. 내가 약속한다. 내가 구해줄 것이다. ” 그 약속으로 징조를 주는데 그것이 “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입니다.
지금 쳐들어 오고 있는 아람왕 르시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연합군이 아하스를 치지 못하고 유다 백성을 괴롭히지 못할 것으로 주신 표로 주신 약속 동정녀 탄생은 800 년 후에 발생할 사건입니다. 이 예언이 갖는 의미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입장에서는 눈앞에 닥친 싸움에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없습니다. 이길 능력도 없고 달리 방도를 취할 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 니가 이긴다. ”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아하스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길 방법도 , 근거도 없습니다. 그런데 쳐녀가 아들을 낳는 것을 징조로 주십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려봅시다. 처녀가 아아이를 낳는 것과 힘든 싸움이지만 싸워서 이기는 것 중에서 어느쪽이 더 어려워 보입니까 ? 어느쪽이 불가능해 보입니까 ?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이 훨씬 어렵고 , 훨씬 불가능합니다.
12척의 군선을 가지고 150 척의 적선을 섬멸한 불멸의 이순신도 있습니다. 5000의 군사를 가지고 10배가 넘는 5만의 군사를 물리친 행주대첩의 권율도 있습니다. 역사에는 게임이 안되는 싸움을 이긴 싸움이 수없이 많습니다. 20만의 군사로 세계를 평정한 징기스칸 , 알렉산더 , 하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 나폴레옹 이들은 숫자적으로 열세인 도저히 안되는 싸움을 되게 한 사람들입니다.
왜냐면 전쟁은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 할찌라도 나도 내 힘을 갖고 내 방법을 갖고 때와 시간과 천기와 지형지물을 이용만 잘하면 이길수 있는 싸움이지만 처녀가 아이을 낳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겁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는 절대 아이를 갖을 수 없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로 국민적 수준이 많이 올라갔지 않습니까 ? 우리가 요즘 방송으로 배우는 것은 여자의 난자없이는 줄기세포 연구 자체가 안된다는 것 아닙니까 ? 하물며 남자의 정자없이 난자만 가지고 임신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가능한 일 “ 처녀가 아이를 낳는 일도 내가 하는데 이 싸움을 내가 이기게 해 주겠다는 것 ”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쉽다.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제일 큰 위로와 확신을 얻어야 하는 부분이 우리는 모두 아하스와 같은 존재로서 있고 우리 주변은 모두 이스라엘과 아람왕의 군사들로 둘러싸인 곳에 산다는 사실입니다. 성탄을 맞이 할때 마다 우리는 동정녀 탄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하스에게 약속의 표로 주신 그 징조의 뜻을 생각하며 성탄절을 맞이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오늘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당하고 있는 문제 신앙적으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 되십니까 ?
우리를 향하여 , 우리를 삼키려고 ,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성난 파도 앞에 , 금방이라도 삼켜 버릴 것 같은 거대한 기세 앞에 우리는 나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는 올 것인가 ? 정말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 ? 내가 싸우고 있는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 잘하는 것일까 ? 이 고민을 갖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 이 말씀은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왔음에도 환경은 더욱 나빠져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 기도할 힘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 건강을 잃어버리고 재물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계십니까 ? 이제 나는 끝장 났다고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집념, 하나님의 고집 , 하나님의 열심을 바라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처녀로 잉태케 하여 아들을 낳게 하시는 그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되게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그분께서 하시겠다 하시면 이루어 집니다. 이것을 믿읍시다.
더 힘이되고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생애에 간섭하시사 이스라엘과 아람의 군대들에 둘러싸인 무력하고 두려운 아하스와 같이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나를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처참하고 아무리 처절한 좌절 가운데 있다 할 찌라도 성탄절을 맞이하는 그 순간 ,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의심과 , 회의와 , 절망이 사라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성탄절에 확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함께 하는 곳 그곳은 감옥이라도 ,아골 골짝이며 빈들이라 할찌라도 그곳은 찬송하는 예배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그 인생이 끝났다 할지라도 결코 마침표를 찍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을 모신 곳은 천국이 되고 교회가 되는 겁니다.
요즘은 교회가 담임 목사님을 모실 때 보면 그 이력이 화려하지 않으면 이력서도 못 내밀게 되어 있습니다. 신학박사에 유학은 기본이고 자녀는 둘 이상 있으면 안 되고 사모님도 대학원은 나와야 하고 나이는 40 대 초반에 건강 검진에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설교 테잎에 유명한 목사님의 추천서도 있어야 합니다.
요즘 목사도 목회하려면 바늘귀로 약대가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을 뽑는데 그 경쟁률이 평균 300대 1 정도 될 겁니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려고 이력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력서가 들어 왔습니다. “나이 50인데 아직 미혼임, 다른 직업도 가지고 있음, 감옥에 여러 번 갔다 왔음, 외모는 키가 작고 신체 왜소함, 간질병 있고 시력 나쁨, 말은 어눌하고 설교 잘 못하는 편임(그 설교 듣고 졸다가 2층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음). 설교 시 오직 예수만 말함, 교회 여러 번 옮겼음“. 이 이력서를 보고 나서 모든 교인들이 어떻게 그런 목사님을 우리교회에서 모실 수 있느냐고 모두 반대를 했습니다. 그때 그 분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말을 하니 아무도 더 이상 말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 분은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에 예수가 함께 하는 흔적을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교회의 내노라 하는 목사님들 가운데 박사 학위 안 갖은 분 없을 겁니다. 대학교수 만큼이나 공부를 많이 하신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는 쟁쟁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고 목사님들 가운데 인물이 나오지 않고 존경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습니까 ?
20년 30년 전에 우리 목사님들은 신학교도 제대로 못나오신 분들이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빛낸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 최봉석 , 주기철 , 손양원 , 한상동 목사님 같은 분들 보세요 그들은 신학교 바듯이 졸업한 분들이지만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 스티그마를 가졌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존경은 커녕 욕만 얻어 먹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일까요 ? 예수님과 함께 하는 흔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폼은 잡는데 흔적이 없습니다. 예수믿는 냄새도 없고 향기도 없습니다. 예수님 연구해서 박사 가운은 입었지만 예수님처럼 살다가 찢겨진 옷이 없는 겁니다. 성경공부는 해서 똑똑해졌는데 마음의 뜨거움과 사랑은 없어 졌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성탄절에 와인한잔 들고 기분내고 예수님께 돌아가야 할 선물 자식들에게 돌립니다. 예배로 빛을 내야하고 헌신과 봉사를 찾아야 할 시간에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고 조명 밝히는 것으로 대처하고 맙니다. 그리고도 예수 믿는다 그럽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 가운데 첫 번째가 “ 교회가 뭐 그래 , 목사가 뭐 그래 ,뭐 장로가 저래 , 권사가 뭐 이래 , 뭐 집사가 이래 ” 이 말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 우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흔적이 없으면 듣게 되는 소리입니다.
돈이 있었도 배움이 높아도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 겸손의 자리에서 , 희생의 자리에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믿는 사람이 뭐 저래 ” 이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말을 우리는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혹시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 회개하시고 삶을 다시한번 돌아 보십시오
토마스 모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가 최초로 '유토피아'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지상 낙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리스어의 '아무 데도 없다'는 뜻의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리스말로 없다는 말은 '우', 장소라는 말은 '토퍼스'인데 이것을 합하면 없는 장소가 바로 '유토퍼스'입니다.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이 땅에 유토피아가 있는 줄 알고 과학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지상 낙원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낙원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이 왔습니다. 전쟁과 배고픔으로 생지옥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이산의 아픔으로 고향을 잃고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어 버린 실향민들이 북한에 돈주고 구걸해서 화상으로 56년만에 만나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입니다. 결코 하나님 없이 만들려고 하는 지상 낙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 주님과 함께 가는 곳은 모두 천국이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가정도 천국이 되고 나라도 천국과 같은 나라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행복한 천국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21절입니다. 자기 백성의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 명백하게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 죄는 도덕과 윤리와 대한민국의 법과 국제법을 어긴 것을 죄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 이것을 헬라어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죄는 하말티야인데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궁수가 과녁을 향해서 활을 쏩니다. 그 과녁에 꼿힌 화살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녁을 벗어난 것은 다 죄가 됩니다. 못미쳤거나 넘어가 버린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과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좀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사는 것 이것이 죕니다. 마음속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마음,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마음이 죕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알아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그와 동시에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세상과의 관계도 나빠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기 전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을 때 아담과 하와의 관계와 사이는 최고였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말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아담이 하와에 대하여 한 말은 ‘저 여자 때문’였습니다. 죄는 가정을 깨뜨렸버렸습니다.
사탄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잘 살려면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가르치고 유혹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나빠지면 세상과도 점점 나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이 없이 나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상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면 세상과 사람들과의 사이와 관계도 나쁩니다.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가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럼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가족과도 가까워집니다. 행복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팀 스피리트 훈련 때에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자리에 모여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연합사에 속한 미군도 , 야전부 사령부에 속한 미군도 자기를 소개하고 공수 특전단에 있는 군인도 , 육군도 ,
해병대원도 , 공군도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이제 방위병 차례가 되었습니다. 방위병이 뭔 줄 아시지요
이 방위병이 고민이 됩니다. 영어로 방위병이라는 명사가 없거든요 이렇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
“아이엠언 아르바이트 솔저” --- 죽고 사는 군대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것으로 자기를 소개 했답니다.
아르바이트 하듯 예수 믿지 말고 내 중심과 삶을 다해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성탄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적당히, 대충대충, 인색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살았던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오늘부터 한번 마음을 다져 잡고 하나님께 대하여 최선을 다하여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에서 오는 능력을 통하여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정말 메리크리스마스 될 것입니다.
한신대 교수로 계신 정태기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국 땅을 밟자마자 짐풀어 놓고 소록도로 달려 갔습니다.
예배당에 달려가 마침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가 끝나고 인도하는 목사님께서 통성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투막한 충청도 사투리로 큰소리로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데 어찌 다 갚는데유~” 울면서 통곡하며 기도하더랍니다.
이 분은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길래 이렇게 울며 기도하노.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더니 한쪽 눈은 골아서 달아나고 없습니다. 귀와 코는 문들어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입은 돌아가고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손가락은 다 없어졌고 뭉뚝하게 생긴 두 팔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팔뚝으로 예배당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크고 놀라운데 어찌 다 갚는데유~” 외치는 기도가 고압선에 감전된 것처럼 정목사님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습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울음과 통곡이 쏟아졌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려서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헉~ 헉~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제가 이렇게 큰 은혜를 체험하고 있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유학까지 같다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체험치 못하고 감사도 없고 열정도 없이 목회하겠다고 돌아온 나는 뭡니까 ?
이 형제가 울면서 어찌 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데유~ 운다고 한다면 나는 사지 멀쩡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한단 말입니까? 유학생활에 지쳤던 목사님께서 온 마음의 상처가 녹아내리는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지요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몇 분이 지났는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큰 몽둥이 같은 것이 옆구리를 내려 치더랍니다. 깜짝 놀라 보니 그 형제가 손으로 목사님의 옆구리를 뚝 치는데 무슨 막대기로 치는 것처럼 옆구리를 치는 겁니다. 눈을 들어보니 교인들은 예배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서 아무도 없고 그 형제와 목사님 둘 밖에 없었습니다.
예배 끝났시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형제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은혜를 주었길래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어서 울며 통곡했더란 말이오.” 묻자 이분이 대답하기를 “내가 병들었더니 제일 먼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은 내 아내였습니다.
우리는 17년동안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몹쓸 병들어 누워있었더니 아내가 나를 버리고 도망갑니다.
형님도 날 버렸고 동생도 날 버렸고 떠나갔습니다. 마지막에 나를 보고 눈물 짖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를 버렸습니다.
죽을 곳을 찾아 이 골짝 저 골짝 찾아 헤메는데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찬송을 펼칠 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반겨 주셨고, 말씀을 펼칠 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게 용기를 주었고 희망을 주었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말씀하셨고, 추한 몸 더럽다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귀하다 귀하다 말씀하셨으니 내가 은혜를 받은 사람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은혜를 어찌 갚는데유~ 이 은혜를 어찌 갚는데유~.”
이 화려하고 고급하게 문화적으로 치장된 21 세기의 성탄절에 우리에게 필요한 감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아닐까요 ?
눈으로 만족하는 성탄절이 아닙니다. 귀로 만족하는 성탄절이 아닙니다. 쾌락으로 만족하는 성탄절이 아닙니다.
재미로 불러보는 캐롤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가 찾아야 하는 성탄절은 이 가슴속에 있습니다.
각본으로 짜여진 오페라를 준비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의 눈물이 아기 예수님께 바칠 선물이 아닐까요 ?
주님은 눈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눈물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은 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은 과학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은 쾌락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헌신할 때 만 만날 있는 분입니다.
주님은 크리스마스트리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로만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은 산타크로스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서 피흘리시는 분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의 주님이 지금 우리들 인생 앞에 와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이 성탄절에 우리 예수님 말 구유 위에 모시지 말고 우리 마음속에 모십시다.
그리고 험란한 인생이지만 살처럼 빨리 흘러가 버리는 아쉬운 인생 , 시간 낭비하지 말고 믿음으로 삽시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복입니다.
이 성탄절에 변질된 성탄의 의미를 회복하시고 잃어버렸던 주님 마음에 모셔 들이시고 가정에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 충만하시길 동정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