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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코바이트 반란과 영국 국가, 헨델의 유다스 마카베우스, 스코틀랜드 민요들>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국가인 ‘신이여 국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Queeen)’,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aeus)’ 그리고 스코틀랜드 민요 ‘우리 왕은 찰리밖에 없다네(Wha’ll Be King But Charlie)‘ 등은 모두 영국 ’자코바이트(Jacobite) 반란’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영국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축출되고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지만, 왕권신수설을 고수하고 제임스 2세와 그 후손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잔존하였다. 이들을 자코바이트(Jacobites)라고 한다. 자코바이트의 반란은 명예혁명 이후 50여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그 과정을 거치면서 영국 하노버 왕조와 입헌군주제가 정착되었다.
1. 역사적 배경
영국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는 축출되었지만, 제임스 2세와 그 후손들은 여전히 왕위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정통성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제임스의 라틴어 이름 자코부스(Jacobus)에 따라 자코바이트라 불렸다.
명예혁명으로 수립된 잉글랜드의 왕위는 윌리엄 3세-메리 2세(여왕) 그리고 이후 메리 2세의 동생 앤 여왕으로 이어지고 앤 여왕 시기 스코틀랜드를 공식 병합하였다. 이후 앤 여왕이 후사가 없어 독일 하노버 왕국의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하노버 왕조가 시작된다. 자코바이트들은 그러한 영국 왕조에 50여년 이상 저항을 지속하였다. 자코바이트 반란은 영국 하노버 왕조와 영국 왕국(Great Britain)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1688년 쫓겨난 제임스 2세는 이듬해 1689년 3월 프랑스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아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왕권 회복을 노렸다. 아일랜드인들은 북부 런던데리(Londonderry)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에서 제임스 2세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윌리엄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넘어 와서 반란을 진압하였다(이른바 ‘보인 전투 Battle of the Boyne’,1690)(나종일‧송규범, 영국의 역사 (하), 한울 아카데미, 2005, 480쪽).
마찬가지로 1689년 스코틀랜드에서도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북부 즉 브리튼 섬 최북단, 전통적으로 제임스의 스튜어트 왕조에 충성스러웠던 ‘하이랜드(Highland)’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도자 던디 Dundee 자작이 사망하면서 진용이 무너졌다.
제임스 2세는 1701년 사망하였지만, 자코바이트 운동은 계속되었다. 영국 의회 토리당에는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이른바 ‘노왕위 요구자 Old Pretender’)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영국 의회는 1701년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을 제정하여, 앤 여왕 사후 가톨릭 교도(왕비 포함)의 왕위계승을 금지하고 독일 하노버(Hanover) 공국의 소피아(Sophia; 제임스 1세의 외손녀)를 왕위계승권자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앤 여왕 직전 소피아가 먼저 사망하였고, 결국 1714년 소피아의 부군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했다(영국과 하노버 공국 공동 군주).
조지 1세는 토리 당 자코바이트들을 퇴출시키고 휘그 당 중심으로 정계를 재편하였다. 토리당 강경파들은 그에 저항하여 제임스 에드워드 ‘노왕위 요구자 Old Pretender’)의 복위를 기도하였다. 1715년 제임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가톨릭교도인 제임스 에드워드는 유럽에서 로마 교황령에 기거하면서 ‘망명 왕조(court-in-exile)’ 꾸렸으며, 그의 아들 찰스 에드워드(이른바 ‘소왕위 요구자 Young Pretender)’의 왕위 계승권을 승인하였다. 마침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로 다시 전쟁에 돌입하였다. 제임스 에드워드와 찰스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지원을 기대하며 영국 왕조에 반란을 시도한다.
1745년 찰스 에드워드(‘소왕위 요구자’)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스튜어트 왕가에 충성스런 하이랜드 지역 중심으로 군대를 규합하였다. 이들은 한 때 에딘버러까지 남진하고 프레스톤판스에서 정부군에 승리하며(이른바 ‘Battle of Prestonpans’) 기세를 올렸다. 영국 런던에서는 프레스톤판스 전투 소식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애국적 결의가 고조되었다. 영국 국가인 ‘신이시여 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 노래는 이때 만들어진 곡으로 알려져 있다(김웅진, 프레스토판스 전투, 영국의 국가와 의회민주주의, 비교민주주의연구(인제대학교), 2005년 12월, 7쪽).
영국은 당시 국왕 조지 2세의 아들 컴벌랜드 공의 지휘 하에 전열을 정비하였다. 컴벌랜드 공은 유럽에 프랑스에 대적하다 급히 귀국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그것만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프랑스의 영국 원정은 성사되지 않았고, 찰스 에드워드 반란군은 1746년 컬러돈 전투(Battle of Cullodon)에서 섬멸되었다.
소왕위 요구자 찰스 에드워드는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반란에 가담했던 스코틀랜드인들은 무자비하게 처형되었다. 이로써 자코바이트 저항은 종식되었고, 영국 하노버 왕조는 더욱 굳건해졌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Judas Maccabaeus)는 바로 이 컬러돈 전투에서 승리한 컴벌랜드 공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한 노래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자코바이트 반란의 근거지는 스코틀랜드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왕조의 본향이며, 제임스 2세 일가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자코바이트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에 관한 여러 민요들이 널리 불려지고 전해지고 있다.
2. 노래 설명
(1) 영국 국가 “신이여 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King(Queen)”
노래의 기원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최초로 발견된 출판은 1745년이며, 자코바이트 찰스 에드워드(‘소왕위요구자’)의 반란을 계기로 널리 불려졌다. 영국 작곡가 토마스 아른(Thomas Arne)이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영어 위키백과, “God Save the King”, https://en.wikipedia.org/wiki/God_Save_the_King). 소왕위요구자인 찰스 에드워드 반란군이 프레스톤판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은 영국 런던 시민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국왕 찬양의 애국 노래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노래는 잉글랜드 사람들만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불려 졌다고 한다. 즉 잉글랜드에서는 하노버 왕조의 국왕, 스코틀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조의 왕위 계승권자들을 위한 노래로 불렸다는 것이다(영어 위키백과, “God Save the King”, https://en.wikipedia.org/wiki/God_Save_the_King).
이 영국 국가 선율은 아름답고 장중하여 많은 나라들에서 국가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많이 연주되며 뉴질랜드는 아직도 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독일에서도 하노버 왕국은 물론이고 프로이센, 작센, 바이에른 왕국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최초의 독일 민족국가인 제2제국(1871-1919)에서도 이 선율을 국가로 채용하였다.
또한 이 선율은 많은 작곡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창작에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베토벤은 그 선율을 이용해서 피아노 변주곡(WoO. 78) 7곡을 작곡하였다. 이 변주곡은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아이들 피아노 교습에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베토벤은 또한 관현악 곡인 웰링턴의 승리(WoO. 157)에도 이 선율을 활용하였다(영어 위키백과, “God Save the King”, https://en.wikipedia.org/wiki/God_Save_the_King).
아래는 이 노래의 가사 그리고 영국에서의 연주 영상, 독일 제2제국의 국가, 그리고 베토벤 피아노 변주곡 어린이 연주 영상을 차례로 올린다.
“신사의 잡지(Gentleman's Magazine)” 1745년 10월호에 실린 원문 | 정태욱 번역 |
God save great George our king, Long live our noble king, God save the king. Send him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to reign over us, God save the king. O Lord our God arise, Scatter his enemies, And make them fall; Confound their politics, Frustrate their knavish tricks, On him our hope we fix, O save us all. Thy Choicest gift in store On George be pleas'd to pour, Long may he reign; May he defend our laws, And ever give us cause, To say with heart and voice God save the king. | 신이시여. 우리 위대한 국왕 조지를 지켜 주소서. 우리 고귀한 국왕 만세 신이시여 국왕을 지켜 주소서 그에게 승리를 행복을 영광을, 우리 백성을 오래 오래 통치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신이시여 국왕을 지켜 주소서. 오 주님 우리의 신이여 적들을 흩어지게 해 주소서 적들을 쓰러지게 해 주소서 적들을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소서 적들의 흉악한 간계를 좌절시켜 주소서 국왕은 우리의 굳은 희망이니 오 우리 모두를 지켜 주소서 주님의 가장 아끼는 은총을 조지 국왕에게 가득 내려 주소서 조지 국왕이 오래 오래 통치할 수 있게 하소서. 국왕이 우리의 법을 지켜주고 우리 가슴과 목소리로 함께 선언하는 대의를 베풀어 주시니 신이시여 국왕을 지켜 주소서. |
참고로 이 영국 국가에 대한 김웅진 교수의 번역도 소개한다.
김웅진 교수 논문에 실린 가사 | 김웅진 교수의 번역 |
God save our gracious King(Queen)! Long Live our noble King(Queen)! God save the King(Queen)! Send him(her)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reign over us, God save the King(Queen). Thy choicest gift in store On him(her) be pleased to pour, Long may he(she) reign. May he(she) defend our laws And give us ever cause, To sing with heart and voice, God save the King(Queen)! | 주여 우리의 자비로운 (여)왕을 보호하소서! 고귀한 (여)왕 천세 먼세! 주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승리하게 하시고, 행복하고도 영광스럽게 오랫동안 통치하게 하소서, 주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주의 극진한 은총을 (여)왕에게 기쁘게 부어 주셔서 오랫동안 통치하게 하소서 (여)왕이 우리의 법을 보호하게 하시고 우리가 목청껏 주여 (여)왕을 보호하소서 라고 늘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드소서! |
(김웅진, 프레스토판스 전투, 영국의 국가와 의회민주주의, 비교민주주의연구(인제대학교), 2005년 12월, 7쪽)
(2) 헨델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 Judas Maccabeus>
*이 노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는 이미 이 게시판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중복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참고하십시오. https://cafe.daum.net/epistle/IfQN/101?svc=cafeapi
영국 하노버 왕실의 위촉으로 토마스 모렐(Thomas Morell)이 대본을 썼고, 헨델이 작곡하였다(이남재, “라모와 헨델의 승전 축하 작품 비교”, 서양음악학, 제22권 제1호, 2019, 129쪽). 1747년 런던 로얄 오페라 하우스(코벤트 가든)에서 초연되었다.
오라토리오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대 이스라엘의 영웅 유다스 마카베우스의 이야기를담고 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70-160년에 희랍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알렉산더 제국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유대인들의 신을 부정하고 희랍의 신, 즉 제우스 숭배를 강요하였다. 마타티아스 Mattathias가 저항을 시작했고, 마침내 그 아들 유다스 마카베우스 Judas Maccabeus가 봉기를 지도하여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이 노래는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을 결정적으로 섬멸한 컴벌랜드 공(Duke of Cumberland)의 개선을 축하는 노래이다. 컴벌랜드 공은 당시 영국 왕 조지 2세(George II)의 셋째(막내) 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유럽에 파병된 영국군의 사령관이었다. 자코바이트 ‘소왕위요구자’ 찰스 에드워드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에서 승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컴벌랜드 공은 영국으로 귀환하여 그 반란을 최종 진압했으며 영국인들 사이에 매우 큰 칭송을 받았다.
자코바이트 반란 진압을 유다스 마카베우스의 독립 투쟁과 연결시킨 것이 의아할 수 있다. 자코바이트에 대한 승리는 당시 영국인들에게 유럽 대륙의 가톨릭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민족적 성취로 이해되는 것이었다. 영국 개신교 국교회는 추수감사절 행사에서 자코바이트 반군에 대한 승리의 기념 의식이 치러지기도 하였다(김성룡, “18세기 영국의 국민 정체성과 반가톨릭주의”, 신학과 목회(영남신학대학교), 제22집, 2004, 13쪽).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그리고 그 가톨릭 후손들 모두 외세(프랑스, 교황)와 결탁하여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고 하였던 것이고, 명예혁명 그리고 이어지는 자코바이트 반란의 진압은 그에 대한 영국 독립, 개신교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영국의 유럽 가톨릭 체제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그에 대한 유럽 대륙의 간섭은 헨리 8세의 수장령 선포, 엘리자베스 1세(여왕) 시대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그리고 스페인 무적함대의 출정 등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이후 유럽의 가톨릭 주축은 프랑스로 옮겨 갔으며, 프랑스 루이 14세는 프랑스에서 낭트 칙령을 철폐하여 유럽 전체를 종교 전쟁의 상황으로 몰고 갔으며, 실제로 잉글랜드 찰스 2세와 밀약을 맺어 잉글랜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하였다. 이런 프랑스의 간섭 그리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자코바이트는 영국인들에게는 긴장의 대상이었으며, 그에 대한 승리는 영국 민족주의와 개신교의 승리로 인식되었다. 조금 후이긴 하지만, 영국이 7년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를 제압하였을 때, 영국에서는 ‘교황주의자에 대한 개신교도의 승리,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로 경축되었다(김성룡, 앞의 글, 13쪽)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노래인 ‘보아라, 승리의 용사가 온다(See, the Conqu'ring Hero Comes’ 부분은 다음과 같다.
See, the Conqu'ring Hero Comes’ 작곡 헨델, 작사 모렐(Thomas Morell) | 번역 정태욱 |
(Youths) See, the conqu'ring hero comes! Sound the trumpets! Beat the drums! Sports prepare! The laurel bring! Songs of triumph to him sing! (Virgins) See the godlike youth advance! Breathe the flutes and lead the dance! Myrtle wreaths and roses twine to deck the hero's brow divine! (Israelites) See, the conqu'ring hero comes! Sound the trumpets! Beat the drums! Sports prepare! The laurel bring! Songs of triumph to him sing! See, the conqu'ring hero comes! Sound the trumpets! Beat the drums! | (어린이들) 보아라, 승리의 용사가 온다. 트럼펫을 불어라! 드럼을 울려라! 축제를 준비하라! 월계관을 대령하라!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처녀들) 보아라 신과 같은 젊은이가 행진한다. 플롯을 불어라, 춤을 시작하라! 머틀 화환과 장미 매듭으로 영웅의 이마를 신성하게 장식하라! (이스라엘 사람들) 보아라, 승리의 용사가 온다. 트럼펫을 불어라! 드럼을 울려라! 축제를 준비하라! 월계관을 대령하라!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보아라 승리의 용사가 온다! 트럼펫을 불어라! 드럼을 울려라! |
이 곡조는 많은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베토벤은 그 선율에 따라 변주곡을 작곡하였다.
또한 이 노래는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애창되었으며 1884년 스위스 찬송 작곡가인 에드몽 루이 뷔드리(Edmond Louis Budry)가 가사를 조금 바꾸어 부활절 찬양 노래로 불렀고, 이것이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승리의 아들 일어나니, 영광은 주님의 것(Thine Be the Glory, Risen Conquering Son)’으로 불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주님께 영광’이라는 찬송가로 불려지고 있다.
아래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스 마카베우스’ 중 ‘보아라, 승리의 용사가 온다’ 합창 부분, 베토벤의 변주곡 그리고 영국 부활절 찬송가 ‘영광은 주님의 것’ 영상을 차례로 올린다.
(3) 스코틀랜드 민요
‘소왕위요구자(Young Pretender)’ 찰스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인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비록 그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찰스 에드워드에 관한 무용담과 민요는 아직도 널리 불려지고 있다. 찰스 에드워드는 ‘젊은 기사(the Young Chevalier)’ 혹은 ‘멋쟁이 왕자 찰리(Bonnie Prince Charlie)’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아래에 지금도 널리 불리는 민요 두 곡을 소개한다. 모두 1745년 찰스 에드워드가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코바이트 반란을 시도하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찰스 에드워드를 옹위하고 그에 호응하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 사람들의 충성과 감격을 느낄 수 있다.
각 노래들의 영상과 가사를 차례로 올린다.
a) “우리 왕은 찰리밖에 없다네(Wha’ll Be King But Charlie)”
김웅진 교수가 소개한 원 가사 | 김웅진 교수의 번역 |
Wha'll Be King But Charlie? The news frae Moidart cam' yestreen, Will soon gar monie ferlie; For ships o' war hae just came in, And landit Royal Charlie. Chorus Come thro' the heather, around him gather, Ye're a' the welcomer early; Around him cling wi' a' your kin; For wha'll be King but Charlie? Come thro' the heather, around him gather, Come Ronald come Donald, come a' thegither, And crown your rightfu' lawfu' King! For wha'll be King but Charlie? The Hieland clans, wi' sword in hand, Frae John o' Groats to Airlie, Hae to a man declared to stand Or fa' wi' Royal Charlie. | 엊저녁 모이다트*로부터 온 소식은 정말 놀랍네 전함이 들어와 당당한 찰리 왕자가 내렸다네. 황야를 뚫고 달려오세, 그 분 곁에 모이세 모두 빨리 와 환영하세 족속들을 모두 데려와 그 분 곁에 모이세 우리 왕은 찰리밖에 없다네 황야를 뚫고 달려 오세, 그 분 곁에 모이세 로날드도 도날드도 모두 모여 진짜 왕에게 왕관을 씌워드리세! 우리 왕은 찰리밖에 없다네. 하일랜드 족속들아 손에 칼을 들고 존 오 그로츠**로부터 에를리***까지 모든 남자들이 일어나 찰리와 함께 싸우다 죽세. |
*모이다트 : 소왕위요구자 찰리 에드워드가 상륙한 후 반란의 거점으로 삼은 곳.
**존 오 그로츠 : 영국 브리튼 섬의 최북단 하이랜드 지역 소읍
***에를리 : 스코틀랜드 중동부 던디(Dundee) 시 북동쪽에 위치한 소읍
(이상 김웅진, 프레스토판스 전투, 영국의 국가와 의회민주주의, 비교민주주의연구(인제대학교), 2005년 12월, 19-20쪽)
b) “찰리 내 사랑(Charlie is My Darling)”
이 노래 가사는 여러 버전이 있다. 아래는 제임스 호그(James Hogg; 스코틀랜드 시인, 일명 the Ettrick Shepherd)의 가사를 소개한다.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의 상황이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 입장에서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임스 호그(James Hogg) 가사 | 정태욱 번역 |
Charlie is My Darling Twas on a Monday morning, Right early in the year, When Charlie came to our town The Young Chevalier. Chorus Charlie is my darling, my darling, my darling. Charlie is my darling, the young Chevalier. As he cam' marchin' up the street, The pipes played loud and clear. And a' the folk cam' rinnin' out To meet the Chevalier. Chorus Wi' highland bonnets on their heads And claymores bright and clear, They cam' to fight for Scotland's right And the young Chevalier. Chorus They've left their bonnie highland hills, Their wives and bairnies dear, To draw the sword for Scotland's lord, The young Chevalier. Chorus Oh, there were many beating hearts, And mony a hope and fear, And mony were the pray'rs put up, For the young Chevalier. | 찰리 내 사랑 그 해 일찍 월요일 아침 우리 마을로 왔지, 젊은 기사. 합창(후렴) 찰리는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찰리는 내 사랑, 내 사랑, 내 사랑. 그가 거리를 행진할 때, 파이프가 크게 맑게 울렸지 사람들이 몰려 나왔어 맞이하려고 젊은 기사. 합창(후렴) 하이랜드 사람들 머리에는 보넷을 쓰고 손에는 스코틀랜드 양 검 번쩍거리고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정의를 위해 싸우려 나왔지. 젊은 기사. 합창(후렴) 그들은 아름다운 하이랜드의 언덕을 떠나왔어 사랑하는 부인들과 아이들도 두고 왔어 스코틀랜드 왕을 위해서 칼을 들었어. 젊은 기사. 합창(후렴) 오, 가슴이 뛴다. 희망도 두려움도 크다 많은 이들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우리 젊은 기사를 위해. |
(가사 출처; 램펀트 스코틀랜드 사이트, http://www.rampantscotland.com/songs/blsongs_darling.htm)
3. 이후의 전개
프랑스로 도피한 찰스 에드워드는 스튜어트 왕조 복위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고, 1748년 엑스 라 샤펠 조약 Treaty of Aix-la-Chapelle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체결 조건으로 영국은 찰스 에드워드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였고, 프랑스는 하노버 왕조를 승인하였다.
(영어 위키백과 엑스 라 샤펠 조약,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Aix-la-Chapelle_(1748))
찰스 에드워드는 프랑스를 떠나 교황청에 의지하였다. 동생 헨리가 추기경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황청도 하노버 왕조를 실질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766년 부친 제임스가 사망하였을 때, 교황은 그를 제임스 3세로 추존하였지만, 찰스 에드워드에게 찰스 3세의 칭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찰스 에드워드는 음주와 비탄 속에서 사망하였고 자코바이트 운동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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