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쿠데타로 권좌에 올라, 카리스마적인 언행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동정 받을 만한 최후를 맞이한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평가하기란 세계 어디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나세르는 20세기 중동 정계의 거물이자 범아랍주의, 일명 ‘나세르주의’의 제창자로 명성이 높다. 이집트인들은 생전의 그를 영웅시하며 ‘대통령’ 대신 ‘라이스’(Rais, 두목)라고 불렀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비록 외양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지만, 사실은 독재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범아랍주의조차도 사실은 실현 불가능한 몽상에 가까웠고, 어디까지나 본인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를 도모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58년 2월 21일, 이른바 ‘통일 아랍공화국(UAR)’을 결성하고 나세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지만 갈등 끝에 3년 반 뒤에는 다시 해체된다.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는 그의 행보는 아랍 국가 지도자들에게도 눈엣가시였다. “아랍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평가도 일리는 있지만, 이집트가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외교에서는 승승장구한 나세르도 국정 운영에서 만큼은 연이어 쓴맛을 보아야 했다. 혁명 정부가 서둘러 단행한 토지 개혁은 만만찮은 부작용을 낳았으며, 사회 개혁은 사실상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부 재정 마련을 위해 나세르 정권은 대부분의 기간산업체와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외국인 및 반동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은행과 신문사까지 장악했다. 1962년에는 이집트를 ‘사회주의 국가’로 공식 선포했지만, 농업과 이슬람교를 여전히 중요한 축으로 삼는 나세르 식의 ‘아랍 사회주의’는 사실상 허울뿐이었다.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랍 사회주의’라는 꼬리표를 단 새로운 법률이 날마다 공포되고 있지만, 너무나도 얄궂게도, 놀라운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이집트에서 자란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묘사한 나세르 정권 당시의 풍경이다. 미국에서의 대학 졸업과 대학원 진학 사이에 그는 1년 동안 카이로에 돌아와 부친의 사업을 도운 바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 그는 향후 15년 넘게 이집트로 돌아가지 못한다. 부친이 아들의 명의를 빌려 편법적인 외환 거래를 하다 적발되는 바람에, 미국에 머물던 사이드도 졸지에 ‘외환거래법 위반사범’이 된 까닭이다.
나세르 정부의 ‘아랍 사회주의’ 치하에서 외화 유출 방지라는 미명 하에 수입 및 외환 거래가 전격 금지되지만 않았더라면,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향 팔레스타인에 이어 제2의 고향 이집트까지 연이어 상실한 그는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 의문을 훗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제목의 책에 담아낸다. 어쩌면 사이드의 업적이야말로 “서구에 대항한 아랍인의 자존심 세우기”라는 나세르의 업적과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한 사람은 칼로, 또 한 사람은 펜으로 했다는 것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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