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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조선일보 춘천국제마라톤대회를 달리면서
■. 2012. 10. 28. 이른 새벽
달리는변호사들(서울지방변호사회 마라톤동호회, 회장 박성원) 회원 변호사들 14명이 2012년 10월 28일 춘천시 의암호, 춘천호반에서 개최되는 2012 조선일보 춘천 국제마라톤 (조선일보사· 춘천시· 스포츠조선· 대한육상경기연맹 공동 주최) 겸 손기정 세계 제패 기념 제66회 전국마라톤선수권대회에 단체 참가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중학교 입학시험부터 사법시험까지 시험으로 단련된 인생이고, 지금 회갑을 1년 앞둔 이 나이까지 100km 울트라마라톤 1회, 42.195km 마라톤 Full Course 34회 완주한 마라토너이지만, 매번 대회때마다 긴장된 탓에 전날부터 새벽까지 잠을 설친다.
새벽 5시가 될 무렵 알람시계보다 먼저 잠이 깨어 마라톤 준비물을 챙겨 집을 나섰다. 대치동 떡집에서 찹쌀떡 1박스, 서초동 민속반찬에 들러 15인분 김밥을 사들고, 6:30분 무렵 박성원 회장, 황의채 전회장, 이명현 간사변호사 등이 기다리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회관 앞에 대기하는 대절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도시의 불빛에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김밥과 찹쌀떡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북한강변을 잠결에 달렸다.
8시경에 춘천 의암호반 공지천에 도착하니, 25,000 달림이들과 그 가족들, 행사진행요원들의 함성과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물품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출발시간 9시까지 몸을 풀었다.
그런데, 전날 저녁 준비물을 챙기면서 몇 번이나 점검을 하였건만, 가장 중요한 물품인 마라톤시계를 빠뜨리고 말았다.
智者千慮必有一失(지자천려필유일실), 愚者千慮必有一得(우자천려필유일득)이라 했던가
나는 지자도 우자도 아닌 범인이지만, 그래도 마라톤 분야에서는 전문가로 자부하고 있는데, 그만 마라톤시계를 챙기지 못한 것이다. 우자(愚者)로서는 42.195km를 나침반 없는 선장처럼 다리시계로 시간짐작을 하면서 내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 Start Line에서
Start Line에는 25,000 참가자들의 각양각색 마라톤 복장이 인간단풍(人間丹楓)을 이루어, 사방이 온통 울긋불긋하기만 하다.
그 중에는 굴렁쇠를 굴리면서 달리는 사나이, 줄넘기를 하면서 달리는 사나이, 시각장애인과 그 도우미, 스스로 길잡이가 되겠다고 나선 Pace Maker, 주로(走路) 순찰을 자원한 Race Patroller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人山人海를 이루고 있다.
Start Line 선두에는 마라톤대회 상위권 입상을 휩쓸면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케냐 선수들을 비롯한 각국의 프로선수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랍권 국가 선수들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BC 490년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와 페르시아 다리우스왕과의 Marathon평원에서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승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아테네까지 달려와 '우리가 이겼다' 라고 소리치고 쓰러졌다는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전설에서 마라톤대회는 비롯되었다. 하지만 Marathon평원에서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예들인 아랍권 국가들은 마라톤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문(寡聞) 탓인지는 몰라도 작금의 국제마라톤대회에 아랍권 선수들이 참가하였다는 소식을 필자는 듣지 못하였다.
나에게는 이번 대회는 남다르다. 2011년 가을까지 조선 춘천마라톤대회를 10회 완주하여 ‘조선일보 춘천국제마라톤대회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 후 처음 달리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대회 안내책자에도 이름과 사진이 인쇄되어 나오고, 출발선 대형 화면에도 나온다.
마라토너들의 등용문(登龍門)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하여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황하강의 용문폭포(龍門瀑布)를 뛰어 올라 용이 되려는 잉어처럼' 부산, 광주, 제주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불나비 같이 춘천으로 춘천으로 달려오는지도 모른다
9:00 정각 프로선수들이 출발하고 난 다음의 의암호반 주로(走路)는 25,000여 아마추어 마라토너들로 형성된 인간단풍의 띠가 되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 의암호반의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인간단풍의 띠
춘천마라톤코스는 시작 지점부터 오르막길이다. 연이어 이어지는 오르막길로 훈련부족인 마라토너들의 기운과 힘을 쑥 빼어 버린다. 5km 지점부터 20km 지점까지 삼악산의 절정에 이른 가을단풍들이 의암호반의 호수물에 어리는가운데 길게 이어지는 주로(走路)의 인간단풍들과 어우러져 한편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프로선수들과 25,000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깊어 가는 계절의 정취를 호흡하며 두 다리로 한편의 '가을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다.
강원도 춘천의 의암호, 춘천댐 순환 코스의 단풍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광은 마라톤만 하고 가기엔 아까운 절경이다.
왼쪽으로는 삼악산의 가을단풍, 오른쪽으로는 호숫물에 비친 단풍, 주로(走路))에는 인간단풍, 온통 단풍 속에서 나의 머릿결도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검은 머리로 마라톤을 시작한지 올해가 12년째되는 해이다. 나이로는 반백(半百)을 넘어선지 오래이고, 머릿결도 반백(斑白)을 넘어섰다. 인간으로 말한다면, 백발은 가을 단풍에 해당된다. 왜 사람들은 가을단풍은 대자연의 모습 그대로 즐기면서, 머릿결에 깃든 단풍은 그냥 두지 못하는가.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젊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언제까지 백발로 단풍든 머릿결 그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Half를 넘어선 지점에서 춘천댐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훈련부족인 탓으로 다리가 점차 무거워진다.
교통경찰의 도로통제에도 불구하고 '할리 데이비슨' 7대 정도가 매연을 내뿜으면서 지나간다. 경찰 사이드카보다도 더 비싸다는 1대에 수천만원 한다는 ‘할리 데이비슨’ 행렬에 사방에서 욕설과 고성이 난무한다.
“비켜주지 마라” “이런 몰상식한 놈들이 어디 있느냐” 등의 거친 욕설을 들으면서도 ‘할리 데이비슨’ 행렬은 마라톤 대열을 헤치고 춘천댐 쪽으로 올라간다
휴일 단풍놀이 나온 ‘할리 데이비슨’ 행렬이 춘천댐(춘천호), 화천댐(파로호) 쪽으로 가자면 이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두들 알았더라면, 그렇게 거친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으리라. 세상사 모든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인데 말이다.
춘천댐 위에 올라서니, 주로(走路) 왼쪽은 단풍으로 물든 춘천호, 아래쪽은 저멀리까지 의암호가 펼쳐져 있다. 여기서부터 의암호 동쪽 호반을 거쳐 Finish Line까지 한바퀴 돌아가는 코스이다.
20km도 채 남지 않았지만, 힘들기만 하다. 한발 한발 옮기기가 힘겹기만 하다.
진시황, 빌게이츠,,... 富와 權力과 名聲을 두루 갖고 있는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마라톤에서는 평등하다. 우리네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마라톤도 대신 뛰어 줄 수는 없다. 천하의 미녀들과 천하의 부(富)를 품안에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달릴 수 없다. 이 자리에서 퍼지고 싶다. 다리가 너무 무거워서 잠시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Pace Maker가 대열을 이끌고 지나간다. ‘손목에 끈을 묶은 2인 1조’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와 도우미가 앞질러 달린다. 계속 걷는다는 것이 미안하기만 하다. 오르막길을 지나서 다시 마라톤 대열에 합류하여 달렸다.
■. 거시적인 환영분위기
Finish Line으로 돌아오는 의암호반 동쪽은 춘천시가지와 연접하여 있다. 휴일 교통통제에도 불구하고,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환영일색이다. “얼마 안남았습니다. 힘내세요” 라고 곳곳에서 손을 흔들어 격려하여 준다.
서울시내에서 개최되는 마라톤대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언론사의 압력(?)으로 서울시내에는 잠실 종합운동장 등에서 개최되는 언론사 주최 마라톤대회가 1년에 10여개가 넘는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서울시내 마라톤대회에서는 뉴욕마라톤대회, 춘천마라톤대회 처럼 거시적인 환영분위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제는 뜻있는 마라토너들이 중심이 되어 ‘군소대회 대회불참 운동’ 등의 방법으로 마라톤대회를 정비하여야 할 시점이 되었는지 모른다.
■. Finish Line을 넘어서면서
이윽고 저 멀리 Finish Line 아취가 보인다. 전광판 시계를 보니 5시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다.
2005년까지 3시간대를 달리다가 4시간대로 주저 앉았는데, 명예의 전당에 오른지 첫해만에 5시간대를 넘어선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울면서 젖먹던 힘까지 다내어 치달렸다.
Finish Line을 넘어서면서 스치는 생각은 “이제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된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하니 실전에서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내년에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조금 있으니, 전자칩 측정회사인 ‘챔피온칩’에서 “양경석님의 풀코스 기록은 5:00:40입니다” 라는 문자가 전송되어 온다. 이러니 대한민국을 IT강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미리 마라톤 시계를 준비하지 않아 시간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으로 ‘5시간을 00분40초 넘어선 오명(汚名)’을 주홍글씨처럼 다음 대회까지 간직한 채 살아야만 한다.
■. 인간수명 100세 시대 장수시대의 산삼 같은 보약, 마라톤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Eleanor Roosevelt는 “He, who loses money, loses much.
He, who loses friends, loses much more.
He, who loses faith, loses all.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its called the present” 라고 연설했다.
우리 마라토너들은 Eleanor Roosevelt의 연설문을 “돈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으면 더 많은 것을 잃는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라고 의역하여 말하곤 한다.
그렇다. 그 동안 마라톤 Full Course를 달리면서 얻은 것은 강인한 의지력 시험도 되지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건강을 얻었다’는 것이다.
인간수명 100세 시대 장수시대를 노당익장(老當益壯)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더 없이 좋은 산삼 같은 보약이 바로 마라톤이다.
이렇게 좋은 산삼보다 더 좋은 보약은 한강변, 탄천변, 양재천변, 중랑천변, 안양천변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척에 이런 보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는 이들도 애써 이를 캐려고 하지 않는다. 아쉽기만 하다.
첫댓글 양 변호사!
내 동생이고 당신 동기동창인 유섭이도 마라톤을 했었는데...
울 엄마 죽고, 학업까지 팽개칠 때쯤 해서,
내가 시킨 것이었지.
돈 안들이고 출세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면서...
오늘 양 변호사의 이 글,
또 내 가슴을 눈물로 축축하게 적시게 하는구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