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68-
(새로운 수출품의 개발 -3-)
담양에서는 5일마다 장이 섰다. 장날에 수매한 대나무 바구니는 회사 창고
에 보관했다가 다음날부터 한 개씩 다시 손을 보고 MADE IN KOREA 의
라벨을 붙이고 수출 상자에 포장을 하였다.
이 창고 담당자는 50이 넘은 풍채 좋은 김선생님이셨는데 부인이 두명 이
였다. 두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제일 위가 17세였고 그 밑에 여러
명이 있었는데 창고에서 일하는 것은 모두 그집 식구 몫이었다.
그런데 이 두부인의 사이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항상 둘이 붙어서
일을 하였으며 잠도 셋이서 한방에 같이 잔다 하였다. 김선생에게 그 비결
을 물었으나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김 선생님은 바둑을 아주 잘 두셨다. 조남철씨가 자기 친구인데 전에는
자기보다 못 두었다며 자랑하였다. 지금도 내 바둑 실력이 별로이나 그때
는 12급도 않되였을꺼다. 9점을 두고 두어도 번번히 졌다. 가끔 일부러
져주며 소주 한잔을 사라 하였다. 그때 나의 바둑 실력이 아마 좀 늘었을
꺼다.
그때의 담양의 술값은 아주 쌌다. 장날이 아닌 날에는 동내유지들과 나일
론 뻥을 하였다(그때는 고스돕이 없었다). 1.2.3등을 정하고 여러번쳐서
최후에 점수의 합계로 등수를 정했다. 꼴찌가 300환 2등이 200환 1등은
공짜. 500환이면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수가 있었다.
장날에 생산업자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며 입주 한잔 합시다 면서 길옆
선술집서 막소주 한컵(유리컵)에 안주는 꼬막이나 깍뚜기 한쪽을 집어먹
고 악수하며 혜여진다. 소위 우리가 서울서 친구 만나면 다방에가서 커피
한잔 합시다와 같은것이다. 장날 만나는 생산업자가 한둘이 아니였으니
저녁때가 되면 거이 만취상태가 되여 버리곤 하였다. 그때 나의 술실력이
늘었다.
담양읍 동쪽에는 담양천이 흐르고 있다. 5일마다 서는 장날이면 담양천 변
에 다양한 대나무 제품의 장이 섰고 사람으로 붐볐다. 그 제품은 전국 각지
의 도매상들이 와서 사가지고 갔다. 담양은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참
으로 살기 좋은 잊지 못할 고장이다.
만 10개월 주재하며 완전히 회사직영으로 만든 후 회사직원 한사람을 현
지에 파견 시켜 인수인계 시키고 그해 가을 본사로 돌아왔다. 담양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도 받았으나 현지인에게 많은 미움도 받았다. 지금
나의 체중은 65kg 이나 그때 나의 체중은 57kg 정도 였으니 보기에 약
한 편이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뒤에서 나를 두고 서울의 쬐고마한놈이 와서 자기네들
의 삶의 터전을 흔들어놓고 있다고 손을 좀 봐줘야겠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리고 본사로 나에 대한 중상모략의 투서도 하였다. 소위 텃세가 심하였
다. 그해가 1966년이었다. 1966년 6월6일 오후6시 동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담양에 있었던 해를 잊지 않고 있다.
그후 플라스틱의 재료가 개발되어 플라스틱으로 등나무 줄기와 똑 같이 뽑
아 바구니를 만들기 시작 한 후 대나무 바구니의 수출량이 줄기 시작하였다.
풀라스틱으로 엮은 바구니보다 천연대나무로 엮은 바구니가 더 고급이기는
하나 오래 쓰면 더러워지고 잘못하면 곰팡이가 생기는 단점이 있기에 플라
스틱으로 엮은 것이 훨신 위생적이였기에 푸라스틱 제품이 점점 많이 수출
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담양이 아닌 서울의 판잣집이 많은 산동내서도 생산할수 있으니 자
연히 담양에서의 대나무 바구니는 수출량이 많이 줄수밖에 없었다. 플라스
틱으로 엮은 바구니는 주로 서울의 미아리쪽에서 많이 생산되였다.
어느날 부산세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분이 수출을 하고 싶은데 좋은 아이
디어가 없느냐고 나를 찾아왔다. 자기 친구가 나를 찾아가보라 하였단다.
우리 회사는 명동에 있었고 그분은 충무로 입구의 기뿐소리사 옆 태평양빌
딩 10층에 10평정도의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 공무원 생활하다 그만두
고 그냥 놀수없어 사무실은 차렸으나 마땅한 것이 없어 나에게 상담을 요청
하였던 것이었다.
그 무렵 한국은 공산품 수출은 별로 없었을 때이니 나는 우선 손쉬운 플라스
틱 바구니를 권하였다. 자본도 별로 안들이고 기술자는 담양에서 초빙 하면
되고 성남쪽에가면 판자촌에서 살던 피난민이 그리로 많이 이사를 갔으니
인력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조언을 하였다.
그 사장님은 즉시 자기회사 전무를 시장 조사차 미국에 파견하였다. 뉴욕의
백화점마다 일층부터 꼭대기 까지 걸어서 다리가 퉁퉁 부을 때까지 살피고
다녔다 한다.
그분이 마국가서 가지고 온 견본은 내가 이야기한 데로 플라스틱의 원료로
뽑은 것으로 엮어 만든 바구니 종류가 많았다. 그중에서 자전거앞에 다는
시장바구니의 주문을 많이 받아왔었다. 이 바구니는 미국의 자전거 회사에
서 자전거를 하나사면 하나씩 끼어주는 경품이었다. 그 양이 많아 성남 일
대가 이 바구니 로 아주머니들이 짭짭한 수입원이 되여 인기가 대단 하였다.
그리고 양이 늘면서 바구니 만드는 재료인 PP원료 수입량이 늘어갔다. 그
때는 한국에서는 전혀 풀라스틱 원료가 생산 되질 않던 때라 수입용 원자
재로 수입하는 PP원료 전량이 일본으로 부터 수입 되고 있었고 시장에서
구입하면 그값이 상상외로 비쌌다.
바구니 만드는 재료를 푸라스틱으로 뽑을 때 속에 철사를 넣어야 한다. 그
래야 바구니를 만들기도 좋고 튼튼하다. 그런데 PP원료를 일본에서 수입
하려면 소요량증명을 공업 연구소에서 받아야 원료를 수입 할 수 있었다.
바구니 10만개가 주문이 오면 바구니 한 개를 달고 10만을 곱하고 로스
5%를 가산한다.
그런데 철사중량까지 합하여 계산했기에 실제로 들어가는 량은 1/4 정도
면 되니 3/4의 원료는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팔았다. 값차가 업청났기에 갑
자기 돈이 불어나기 시작 하였다.
이회사의 원자재가 부산에 도착하면 남대문시장 PP값이 떨어지고 시간이
가면 PP값이 올랐다. 수출용 원자재를 시장에다 팔았던거다. 들키면 발금
물고 감옥가는데도 말이다. 혹시 원자재건으로 뒤탈이 날가 싶어 부인은
그 무렵 육영수 여사가 주동하였던 양지회에 가입하여 봉사 활동을 하였다
한다.
그후 그 자전거 회사에서 자전거 부품까지 주문을 받기 시작 하였다. 처음
은 패달을 다음은 채인 등을, 점점 종류와 량이 늘어나기 시작하니 아예
성남에 대영자전거라는 자전거 생산공장을 크게 세웠다.
이렇게 회사가 갑자기 커지게 되였으니 그 사장님을 만나기도 힘들정도였
다. 가끔 만나면 돈이 얼마가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잘 모른다 하였다. 그
렇게 방만하게 늘리더니 어느 날 문을 닫고 말았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
간다 하였던가 그분은 지금 무었을 하고 계실까? 살아 있다면 거이 90 이
훨신 넘었을텐데....
청주에서 생산되는 인조진주도 많이 수출 하였다. 유리구슬에 칼치 비늘
의 원료로 인조 진주를 만들어 실에 뀌어서 목걸이를 만들어 많은 량을 수
출하였다. 조치원과 청주 중간의 마을에서 제일 많이 생산 되였다. 새벽
이면 날이 새기가 무섭게 안개가 자옥한 신작로따라 수많은 어린 여자애들
이 공장으로 출근하였다. 그 애들 때문에도 수출을 중단할 수가 없다는 생
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청주에서 작으마한 종이우산 (아이스크림위에니 칵테일잔에 꼽
아주는 조그마한 미니 종이 우산)을 만들어 수출 하였다. 처음에 일본에
서 수출하는 견본을 입수하여 청주의 한 업자에게 시켰는데 일본제품은 우
산대를 대나무로 만들어져 중간에 칼집을 내고 우산을 핀후 그곳을 꺾어
서 우산핀것을 정지 시켰다.
그러나 우산 대의 대나무는 가끔 대나무에 묻은 때가 있어 위생상 보기에
깨끗칠 못해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칵테일잔에 이용하기는 좀 꺼림직 하였
다. 그래서 나는 미루나무로 만든 100mm 짜리 하얗고 깨끗한 긴 이쑤
시개로 우산대를 하였다.
우산을 핀후 정지 시키는 장치는 대나무 같이 칼집을 내서 꺽으면 미루나무
였기에 완전히 부러짐으로 나는 가느다란 풀라스티 쥬부를 3mm정도식
잘게 썰어서 이것을 우산대에 끼웠다. 우산을 핀후 푸라스틱 쥬부를 올리
면 우산 핀 것이 정지 되게 하였다. 그랬더니 바이어로부터 대환영을 얻어
많은 량을 수출 할수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실용신안특허품이 되었다.
우산대에 빨간 쥬부가 보인다
이것으로 나는 실용신안 특허를 얻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