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령 산맥의 줄기가 지나가는 서해안에서는 보기 드물게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는 오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청양 다락골은 굽이굽이 산비탈 중턱에 40여 호의 인가가 모여 있는 두메 산골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청양에서 대천으로 국도를 따라 8킬로미터쯤 가면 화성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면소재지 조금 못 미쳐 국도변에 최경환, 최양업 부자상(父子像)이 보인다. 묵주와 성지(聖枝)를 들고 앉아 있는 최경환 성인, 그 옆에 십자가와 성서를 펴든 최양업 신부의 부자상은 지난 1986년 8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곳이 이들 부자의 탄생지임을 나타낸다.
다락골은 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다시 2.5킬로미터 가량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국도에서 갈라지는 초입에 '양업로(良業路)-성지 줄무덤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가쁜 호흡을 고르며 마을 뒤 산길을 마저 오르면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14처를 만난다. 그 옆을 지나면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한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서 '다랫골'로 불렸다고도 한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된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최인주가 슬하에 둔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는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한다.
그 후 다시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 보낸다. 1839년 최경환은 가족 및 교우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솔뫼와 다락골 -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첫 한국인 사제로, 서로 동갑내기인데다가 인척이었으며,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이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훗날 피의 순교자며 성인이 된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모범이 될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집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증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고, 그 때 솔뫼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증조부 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 택현과 종조부 종한(안드레아), 희현(루수)이 입교하였으며, 이러한 신앙 전통이 부친 제준(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대건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1년 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증조부인 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종조부인 종한은 경상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한 뒤였다.
김제준 성인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 솔뫼를 떠난 것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인 182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묵리)을 거쳐 이웃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바로 이 곳에서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 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양업은 1921년에 이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신앙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이 곳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였고, 양업의 나이 만 11살이 되던 1832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을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업은 1836년 초 바로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으며, 경환은 훗날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이주한 뒤 교우촌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반면에 다락골과 새터 교우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여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솔뫼 생가 터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에게 매입되었고, 같은 해 6월 4일에는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대전교구의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에서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이듬해 동상과 기념탑을, 1983년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반면에 병인박해 때의 무명 순교자들이 안치되어 있던 다락골 줄무덤은 1982년에야 비로소 청양 본당 교우들이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7-119]
새터 -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 터
김대건 신부와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1805-1839년) 성인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또 성직자 아들을 두었다는 이유로 한없는 영광과 함께 온갖 곤욕을 치어야만 했다.
오늘날 신학생 아들을 둔 부모들이 밤낮을 기도와 희생으로 살아가며 부디 아들이 성인 사제 되기를 염원하듯이 최경환 성인은 아들 양업을 위한 끝없는 기도의 삶을 살았고 마침내는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차령 산맥의 줄기가 지나는 청양군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대가 높은편이다. 청양읍에서 대천에 이르는 서쪽으로 포장 도로를 가다 보면 화성면이 나오고, 면 소재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곡을 따라 오르면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이 탄생한 당시 홍주(洪州) 다락골이 나온다.
36번 국도에서 다락골 줄무덤 입구까지는 순례자들이 찾기 쉽도록 잘 포장되어 있는 양업로가 뻗어 있다. 이 양업로를 따라가다 보면 최경환 성인의 생가 터가 눈에 띄는데 마치 수줍은 새색시 모양 숨어 있다.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 주었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한 최경환 성인의 생가는 그 땅이 확보돼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잡초만이 무성해 찾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한 뒤 가족들과 상의해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주한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에 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로 풀려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