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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이순신에게 배우는 승리비결 십계명
10 계명
■ 전투력 집중-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서 싸운다■ 주도권 확보-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승리 준비의 첫 단계는 정보수집 ■ 우수한 무기가 승리를 담보한다■ 정신전력은 승리의 출발점 ■ 준비하고 또 준비하라 -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 군수를 빼고, 승리를 논하지 마라 ■ 지휘관은 실력을 갖춰라■ 부하들과 通해야 이긴다 ■ 엄격한 군기로 승리를 이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자 구국의 영웅이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은 17회의 해상 출동과 세부적으로 나눠 45회의 각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2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 469주년 탄신일을 맞아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소장과 제장명 해사 해양연구소 연구위원 등 이순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순신 장군의 승리 비결을 열 가지 주제로 요약해 본다.
아산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그림출처=현충사 도록. |
● 전투력 집중-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서 싸운다
전쟁원칙(Principle of War)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표적인 항목이 바로 집중(Concentration)이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아군 전력을 동원해 열세한 적을 공격하는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지름길이다.
이순신 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소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이순신은 열세한 상황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는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긴 무모한 리더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10 대 1, 100 대 1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 탁월한 병법의 소유자였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순신 장군도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 등 아군 전력이 적보다 적은 열세한 상황에서도 싸워 이겼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싸운 대부분의 해전은 병력면이나 함정 보유량 측면에서 아군이 우위인 상태에서 이긴 경우가 더 많았다.
집중을 하려면 단순히 병력의 많고 적은 수준을 넘어서서, 정보를 파악해 적이 집결하기 전에 아군의 전력을 모아 공격하는 기민한 대응이 요구된다. 이순신 장군은 그 같은 집중에 능했고, 그 결과는 불패의 역사였다.
● 주도권 확보-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하라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승리 비결은 항상 싸울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이 우발적인 상황에서, 원하지 않는 곳에서 싸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은 거의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해전 장소를 주도적으로 선택해서 승리했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려면 지형을 보는 안목, 다시 말해 어떤 지형 요소가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군에게 불리한지에 대한 판단 능력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적의 움직임을 꿰뚫는 판단력과 정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 준비가 돼 있는 자만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기에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산대첩도 그랬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7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자유롭게 작전할 수 있는 해역으로 적을 유인한 다음, 압도적인 전투력을 앞세워 일본군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겼다.
명량해전도 마찬가지다. 아군이 열세한 상황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적과 상대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좁은 물목을 전투 장소로 선택했다. 싸우기 이전부터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전장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대승리였다. 임 소장은 “집중, 주도권 확보, 철저한 준비 등 이순신 장군의 승리 요인을 분석하면 결국 이겨 놓고 싸운다(先勝求戰)는 동양 고전병법의 정수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먼저 이겨 놓고 싸우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원리에 충실했다. 사진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묘사한 기록화다. 그림출처=호국의 맥, 국방홍보원 2000년 발간. |
● 승리 준비의 첫 단계는 정보 수집
예나 지금이나 군사작전에서 정보는 알파요, 오메가다. 전평시를 막론하고 승리 준비의 첫 단계는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제장명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위원은 “이순신 장군의 일기인 난중일기나 전시 보고서를 담은 임진장초에는 충무공이 얼마나 정보를 중시했는지 너무나도 잘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항상 적의 움직임을 먼저 확인하고 대비한 상태에서 적을 맞이했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이일 장군이나 신립 장군이 이끄는 조선 육군은 번번이 일본군의 기습을 허용해 무너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 7일 일본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치르던 그날에도 척후장사도 첨사 김완의 보고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1592년 당포해전에도 이순신 장군은 척후선을 보내 적의 움직임부터 파악했다. 1597년 명량해전 때도 이순신 장군은 휘하 군관과 망군(望軍)들을 통해 일본 수군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고받고 있었고, 그 같은 정보 우위는 승리로 향해 가는 첫걸음이 됐다.
제장명 연구위원은 “충무공은 정보수집 활동에 철저한 군인이었다”며 “그러했기에 명량해전 같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제 위원은 “충무공은 어떤 해전이든지 출전하기 전에는 반드시 정보활동을 통해 적정을 탐지하고 출동했으니, 적을 알고 싸우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다는 병법은 그를 두고 한 말”이라고 말했다.
● 우수한 무기가 승리를 담보한다
군인으로서의 전문성과 실력, 장병들의 정신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기 성능의 우열은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다. 임진왜란 당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좀 더 크고, 전투를 치르기에도 적합한 구조를 지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투지휘 능력을 뒷받침한 핵심 하부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제 위원은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인 판옥선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갈라놓고 비전투원인 노군(軍)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며 “판옥선은 전투원들이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구조이고, 적이 접근해서 배 안에 뛰어들기 어렵게 돼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조선 수군의 화약무기 운용 능력이 더해진다. 제 위원은 “당시 일본 수군의 배들이 한선보다 속도는 빨랐지만, 재질과 두께가 약하고 대구경의 화포를 장착하지 못했다”며 “당시 일본군이 총통을 전선에 탑재하지 못한 반면, 조선 수군은 대형 총통을 전선에 탑재함으로써 다양한 수군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 정신전력은 승리의 출발점
반드시 싸워 이기겠다는 장병들의 각오와 의지, 그리고 높은 사기는 승리하는 군대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1800년대 초반 유럽 대륙 전체를 뒤흔든 군사천재 나폴레옹(1769~1821)은 “전쟁에 있어서 정신력과 물질의 비율은 3:1이다”라고 말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지력이며 전쟁은 정신력의 영역이다”는 군사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 또한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장병들의 전투의지와 사기를 높이는 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순신 장군은 정신전력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군인이었고, 정신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세심하게 관리했다.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진영에 도체찰사 이원익(1547~1634)이 방문했을 때, 이 장군은 병사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권했다.
즐길 때는 즐겨야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절체절명의 위기국면에서는 장병들에게 필사의 각오를 주문했다. 1597년 명량해전이 있기 직전 이순신 장군이 병법을 인용해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일화는 유명하다.
● 준비하고 또 준비하라-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
승리는 결코 요행에 의해 쟁취할 수 없다. 어쩌다 한 번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같은 행운이 반복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의 전쟁준비 과정을 보면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1년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이순신 장군의 전쟁 직전 난중일기에는 예하 소관 진영을 순시하면서 훈련 수준과 장비 보유 실태를 감독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훈련을 시키는 과정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기록돼 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개전 2개월 전 열흘여 동안 150여 ㎞를 이동하면서 예하 진영의 전쟁 준비 상태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이순신 장군 전쟁 준비의 백미는 거북선 건조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전쟁 직전에 신예 돌격선을 만들어 돛을 달고, 천자 지자 총통을 싣고 나가 사격훈련을 마친 날이 소설 같게도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이었다”고 말했다. 전쟁 시작 하루 전에 사격훈련까지 마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선봉 돌격선으로 승리에 기여할 수 있었다.
● 군수를 빼고, 승리를 논하지 마라
군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은 군수(軍需)에서 나온다. 식량이 끊기고, 탄환이 끊긴 군대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명장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군수가 끊긴 군대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은 군수의 중요성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잘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고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알아서 부대를 이끌어 갈 정도로 군수 분야의 임기응변 능력도 탁월했다.
칠천량해전의 참패로 조선수군 전력이 모두 파괴된 상태에서 명량해전의 승리로 급한 불을 끈 후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군수 기반의 확보였다. 이순신 장군은 위기의 순간 해로통행첩을 발행해 불과 열흘여 만에 만석의 군량미를 확보했다. 그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은 피란민들을 모아 안전하게 보호해 주면서 농사를 짓게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농민도 살고 군대의 식량도 확보해 나갔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군수 분야 사안에 대해서는 국왕에 보내는 보고서인 장계를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1593년 1월 조정에 유황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계본을 올린 일 등이 대표적이다.
● 지휘관은 실력을 갖춰라
이순신 장군은 한마디로 전문성을 갖춘 실력 있는 군인이었다. 이순신은 가장 실무적인 병법 지식인 진법(陣法)에도 능통했다. 이순신 장군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580년 감사 손식이 부하 장수인 발포만호 이순신을 호출했을 때의 일이다. 참소하는 말을 믿은 손식은 이순신에게 느닷없이 진법 서적을 강독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진 치는 방법인 진형을 그려 보라고도 했다. 그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능숙하게 진형을 그려냈다. 요즘으로 치자면 이순신 장군은 교범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전투대형과 부대배치까지 완벽하게 그려낼 능력을 갖춘 군인이었던 셈이다.
거북선 건조 과정을 지휘할 정도로 함선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고, 일본의 조총을 모방한 정철 조총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무기체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군수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이해했다. 임 소장은 “리더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질은 실력”이라며 “실력을 갖춘 군인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부하들과 通해야 이긴다
이순신 장군은 위기의 상황에서 언제나 앞장서 싸웠다. 절대 열세의 해전인 명량해전에서는 대부분의 장수들이 회피하려 할 때 사령관 격인 삼도수군통제사가 탄 배가 제일 앞장서서 싸워 적의 예기를 차단했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사부들과 뱃전에 나란히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그런 지휘관의 모습은 부하들의 신뢰와 용기를 끌어냈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은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현실에서 실천한 군인이었고, 그것이 그의 승리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또한 소통의 중요성도 잘 이해한 군인이었다. 임진왜란 최초 출동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하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다. 부하들의 갑론을박을 듣고서야 결론을 내렸고, 부하들의 의견을 과감히 수용할 때도 많았다. 그런 그였기에 그의 주변에는 유능한 부하들이 모여들 수 있었고, 이는 승리의 또 다른 요인이 됐다.
● 엄격한 군기로 승리를 이끌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했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부드러운 지휘관은 아니었다. 신상필벌의 원칙이 확실한 지휘관이었고, 때로는 엄격하게 군기를 세워야 한다는 사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민병돈(예 중장) 전 육사교장은 2009년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분석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독전(督戰)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현장에서 무섭게 독전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평시에도 예하 부대 순시 때 준비가 부족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같은 독전과 처벌을 통해 군기를 유지했고 그것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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